사사기 6:11-24 포도주 틀에 오신 평화

by 평화의길벗 posted Sep 12,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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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 6:11-24 포도주 틀에 오신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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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신앙이란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증명해 내는 일이 아니라, 나를 부르시는 분이 붙여 주신 이름으로 살아가는 생명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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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월 중순의 광양은 들녘이 하루가 다르게 익어 갑니다. 벼는 고개를 숙이고 감나무는 붉어지기 시작합니다. 타작을 앞둔 계절, 한 해의 수고가 손에 잡히는 아침입니다. 오늘도 성경을 펴 놓고 앉으신 모든 분의 심령 위에 주님의 다사로운 평화가 깃들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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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타작을 하면서도 마음 놓고 하지 못하는 사람이 나옵니다. 그는 넓은 마당이 아니라 포도주 틀에 들어가 밀을 떨고 있습니다. 포도주 틀은 바위를 파서 만든 움푹한 구덩이입니다. 바람이 들지 않으니 겨가 날아가지 않고, 한 번에 얼마 되지도 않는 양만 다룰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가 거기 들어간 이유는 하나입니다. 들키면 다 빼앗기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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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미디안 사람에게 알리지 아니하려 하여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더니"(삿 6:11). 본문이 쓴 낱말은 도리깨로 크게 내려치는 몸짓이 아니라 작은 막대기로 알갱이를 톡톡 떨어내는 손짓입니다. 그 한 단어 안에 한 사람이 얼마나 웅크리고 있었는지가 다 들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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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그에게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 말합니다.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삿 6:12). 숨어서 밀을 떨던 사람이 들은 첫마디가 용사라는 호칭이었습니다. 조롱이 아닙니다. 원문의 어순은 우리말과 반대여서,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는 말이 먼저 나오고 큰 용사여가 뒤따릅니다. 순서가 곧 논리입니다. 그가 용사인 근거는 그의 팔뚝이 아니라 함께 계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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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두 개의 시선이 한 자리에서 어긋납니다. 기드온이 자기를 보는 눈에는 겁먹은 생존자가 있고, 하나님이 그를 보시는 눈에는 이스라엘을 구할 용사가 있습니다. 소명은 내가 준비되었기 때문에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새롭게 정의하시기 때문에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현재보다 그분 손에 붙들린 우리의 내일을 먼저 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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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드온의 첫 대답은 그러나 감격이 아니라 항변이었습니다. 함께 계시면 어찌하여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일어났느냐, 조상들이 말하던 그 모든 이적이 어디 있느냐고 따집니다. 그는 출애굽을 압니다. 들어서 알고 외워서 압니다. 그런데 같은 사건을 딛고서 어제의 이름 없는 선지자와는 정반대의 결론에 이릅니다. 선지자는 백성의 불순종을 짚었는데, 기드온은 그 책임을 하나님께 돌립니다. 아는 것이 곧 깨달음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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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말에는 나라는 인칭이 없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입니다. 공동체의 불행은 정확히 보면서도, 그 안에 자기 몫이 있다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합니다. 무엇보다 그는 자기 자신이 그 부르짖음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라는 사실을 모릅니다. 이적이 어디 있느냐고 묻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마침 그를 이적으로 세우시려고 찾아오신 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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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가서 이 너의 힘으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삿 6:14). 이 너의 힘으로라는 구절은 번역이 까다로운 대목입니다. 원문에는 지시어에 정관사가 없어서 이것이 네 힘이다로 읽을 여지가 열립니다. 그렇게 읽으면 뜻이 선명해집니다.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하심, 그것이 네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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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기드온은 물러섭니다. 내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아버지 집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합니다. 얼핏 겸손해 보이지만 사실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오브라는 그의 아버지의 땅이었고 그에게는 부릴 종이 열 명이나 있었습니다. 부족함을 이유로 물러서는 것이 언제나 겸손인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 변명에 능력의 목록이 아니라 동행의 약속으로 답하십니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삿 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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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마지막으로 구한 것은 표징이었습니다. 염소 새끼와 무교병과 국을 차려 상수리나무 아래로 가져갑니다. 본래 제물이 아니라 대접할 음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자가 그것을 바위 위에 올리게 하고 지팡이 끝을 대니 바위에서 불이 솟아 다 살라 버립니다. 기드온이 차린 저녁상이 그 자리에서 제단이 되었습니다. 믿음이 약한 사람에게 징표를 아끼지 않으시는 자비가 여기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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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기드온의 첫 반응은 또 비명이었습니다. 여호와의 사자를 보았으니 죽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약속보다 자기가 본 것이 더 크게 다가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응답은 꾸짖음이 아니라 평화였습니다. 안심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죽지 아니하리라. 오늘 아침 이 세 마디 앞에 십 분만 더 머물러 보십시오. 묵상은 새로운 소식을 얻는 시간이 아니라, 이미 들려온 말씀이 내 두려움보다 크다는 것을 확인하는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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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씀을 듣고 기드온은 제단을 쌓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여호와 살롬, 여호와는 평화라는 뜻입니다. 눈여겨볼 것은 그가 아직 아무것도 이기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미디안은 그대로 있고 전쟁은 시작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평화의 제단이 먼저 섭니다. 성경의 평화는 싸움이 끝난 뒤에 오는 결과가 아니라, 함께 계신 분에게서 흘러나와 싸움보다 앞서 오는 선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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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본문은 그 제단이 오늘까지 오브라에 있더라고 적습니다(삿 6:24). 한 사람이 하나님을 만난 자리는 그렇게 오래 서서 다음 세대에게 말을 겁니다. 우리가 오늘 아침 성경 여백에 적어 두는 한 줄도 그런 제단일지 모릅니다. 묵상이란 거창한 결심이 아니라, 말씀 한 구절 옆에 내 하루를 나란히 놓아 보는 일입니다. 말씀은 읽을 때가 아니라 되씹을 때 우리를 바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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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하루 아직 끝나지 않은 문제 하나를 떠올려 보시고, 그 위에 미리 이름을 붙여 보십시오. 여호와 살롬. 같은 구절이 어제와 다르게 읽히는 아침이 있습니다. 그 작은 놀라움이 묵상의 기쁨이고, 그 기쁨이 우리를 하루 더 걷게 하는 힘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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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두는 계절에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포도주 틀에 웅크린 것 같은 날에도, 우리를 부르시는 그 목소리는 여전히 우리 곁에 있습니다. 오늘 이 한마디만 들고 하루를 걸어가시기 바랍니다.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그 이름 위에 서서 걸어가는 평화의 순례자가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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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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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에서 보기

https://youtu.be/14-y3bPg3X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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