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6:1-10 먼저 오신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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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신앙이란 고통이 빨리 걷히기를 재촉하는 일이 아니라, 고통보다 먼저 찾아오신 목소리를 알아듣는 생명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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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월 중순으로 들어서는 광양의 들녘은 지금 하루가 다르게 노랗습니다. 벼는 고개를 숙였고 밭에는 거둘 것이 익어 갑니다. 씨를 뿌린 사람이 거두는 계절, 일 년의 수고가 손에 잡히는 아침입니다. 그 아침에 오늘도 말씀 앞에 앉으신 모든 분의 심령 위에 주님의 다사로운 평화가 깃들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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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오늘 본문은 뿌린 사람이 거두지 못하는 밭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씨를 뿌려 놓으면 어김없이 누군가 올라와 다 쓸어 가는 밭입니다. 추수를 앞둔 이 계절에 읽기에는 참 얄궂은 본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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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칠 년 동안 그들을 미디안의 손에 넘겨 주시니"(삿 6:1). 이야기의 서두는 이 한 절이 전부입니다. 무슨 악이었는지는 적지 않습니다. 다만 '또'라는 한 글자가 앞의 모든 이야기를 등에 업고 서 있습니다. 드보라가 남긴 사십 년의 평온이 감사의 토양이 되지 못하고 망각의 온상이 되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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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제의 방식이 지독합니다. 사람을 죽이러 온 것이 아니라 살아갈 근거를 앗으러 왔습니다. 미디안은 이스라엘 땅에 눌러앉아 다스리지 않았습니다. 파종기에 맞추어 올라와 거두기 직전에 쓸어 가고 물러갔습니다. 그래서 백성은 산으로 올라가 "웅덩이와 굴과 산성"(삿 6:2)을 팠습니다. 하나님이 기업으로 주신 땅에서 나그네처럼 숨어 사는 것입니다. 땅은 그대로 있는데 그 땅에 마음 놓고 설 자리가 없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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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짐승과 장막을 가지고 올라와 메뚜기 떼 같이 많이 들어오니"(삿 6:5). 메뚜기라는 말이 서늘합니다. 메뚜기는 본래 애굽 위에 내렸던 재앙이었습니다. 애굽을 치던 재앙이 이제 이스라엘 위에 쏟아집니다. 구원받아 나온 백성이 언약을 저버릴 때, 자기가 빠져나왔던 그 자리로 되돌아가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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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궁핍함이 심하여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었습니다(삿 6:6). 여기 '궁핍하다'로 옮긴 히브리어는 낮아지다, 미천해지다, 참혹해지다라는 뜻입니다. 배가 고팠다는 말이 아니라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할 지경으로 무너졌다는 말입니다. 그 밑바닥에서 터져 나온 소리가 회개였는지 그저 비명이었는지 본문은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 불분명한 신음을 들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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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응답이 옵니다. 그런데 뜻밖입니다. 사사가 아니라 선지자였습니다. 앞선 이야기들에서는 백성이 부르짖으면 곧바로 구원자가 일어났습니다. 이번에는 아닙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것은 군대도 영웅도 아니고, 한 사람의 입에 담긴 말씀이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원하던 응답은 아니었지만, 그들에게 정작 필요한 응답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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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선지자에게는 이름이 없습니다. 출신 지역도 소속 지파도 나오지 않습니다. 바로 앞 장의 드보라는 이름과 지파와 거처하던 종려나무까지 알려졌는데 말입니다. 전하는 사람의 자취가 이렇게 지워진 자리에 남는 것은 오직 말씀 그 자체입니다. 전하는 이가 커지면 말씀이 가려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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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전한 내용은 새로운 계시가 아니라 이미 다 아는 옛이야기, 곧 출애굽이었습니다. 애굽 사람의 손에서, 학대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건져 내셨다고 합니다. 1절에서 그들을 짓누르던 것도 미디안의 '손'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미디안의 손에서 건지시기 전에, 애굽의 손에서 건져 내셨던 그 손을 먼저 기억하라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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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말씀이 먼저일까요. 고통을 그대로 두신 것이 아니라, 고통의 원인 앞에 우리를 세우시려는 것입니다. 원인을 남겨 둔 채 결과만 치워 주면 우리는 같은 자리로 또 돌아갑니다. 그래서 기도는 빨리 끝나게 해 달라는 데서 멈추면 안 됩니다. 무엇을 깨달아야 하느냐로 깊어져야 합니다. 오늘 아침 이 한 절 앞에 십 분만 더 머물러 보십시오. 묵상은 새로운 소식을 얻는 시간이 아니라, 이미 오신 목소리를 뒤늦게 알아듣는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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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지자의 말은 이렇게 맺힙니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 너희가 거주하는 아모리 사람의 땅의 신들을 두려워하지 말라"(삿 6:10). 여기 '두려워하다'는 무서워하다이면서 동시에 경외하다입니다. 그러니 이 말씀은 겁먹지 말라는 격려가 아니라,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는 선포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 앞에 결국 무릎을 꿇게 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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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책망은 거기서 뚝 끊깁니다. 회개하라는 명령도, 그리하면 구원하리라는 약속도 붙지 않습니다. 선지자는 진단만 남기고 사라집니다. 열린 채로 남은 이 결말이 우리를 불편하게 합니다. 그러나 바로 다음 절에서 여호와의 사자가 오브라의 상수리나무 아래로 찾아가십니다. 책망이 끝인 줄 알았는데 은혜가 그 뒤를 따라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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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구절이 어제와 다르게 읽히는 아침이 있습니다. 어제는 그저 옛 이스라엘의 이야기였는데, 오늘은 내 이야기로 읽히는 아침입니다. 그 작은 놀라움이 묵상의 기쁨입니다. 그리고 그 기쁨이 우리를 하루 더 걷게 하는 힘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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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성경 여백에 한 줄만 적어 보십시오. 지금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 답이 곧 내가 실제로 섬기는 것의 이름입니다. 그리고 그 옆에 오늘의 이 한마디를 적으십시오.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 두 줄을 나란히 놓고 바라보는 일, 그것이 묵상입니다. 말씀은 읽을 때가 아니라 되씹을 때 우리를 바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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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두는 계절에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뿌린 것을 다 빼앗기는 것 같은 해에도, 우리보다 먼저 오신 그 목소리는 여전히 우리 곁에 있습니다. 오늘 이 문장 하나만 들고 하루를 걸어가시기 바랍니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 그 한마디 위에 서서 걸어가는 평화의 순례자가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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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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