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05:01-18 내려오신 하나님, 내려간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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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손 강의 승리가 끝난 그 날, 드보라와 바락이 노래를 부릅니다(1절). 노래는 왕들과 통치자들을 청중으로 불러 세운 뒤, 세일과 에돔 들에서 진행하실 때 땅이 진동하고 하늘이 물을 내리던 하나님의 강림을 그립니다(2-5절). 이어 대로가 비고 행인이 오솔길로 다니던 날들, 마을 사람들이 그치고 사만 명 중에 방패와 창이 보이지 않던 시절을 회상합니다(6-8절). 그러나 즐거이 헌신한 방백들이 있었기에, 흰 나귀 탄 자부터 길 걷는 자까지 여호와의 공의로우신 일을 전하라는 초청이 울립니다(9-11절). 깰지어다 부름을 받은 드보라와 바락이 일어서고 하나님도 친히 내려오시자, 골짜기로 달려 내려간 지파와 양의 우리에 앉아 있던 지파가 선명하게 갈립니다(12-1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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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본문은 야엘의 말뚝으로 끝났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사건을 노래로 다시 부릅니다. 사사기는 드보라 이야기를 두 번 들려주는데, 4장은 산문이고 5장은 시입니다. 같은 사건을 두 번 적은 것은 낭비가 아닙니다. 산문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말한다면, 시는 그 일을 누가 하셨는지를 말합니다. 4장이 남긴 빈칸을 5장이 채웁니다. 4장은 전투를 한 절로 지나쳤지만, 5장은 별들과 기손 강과 말굽 소리를 불러와 그 한 절의 속을 열어 보입니다.
# 노래의 짜임새는 이렇습니다. 서언(1-3절), 출애굽 전사의 기세로 오시는 하나님의 강림(4-5절), 가나안의 압제 아래 보낸 비참한 회상(6-8절), 다시 찬양으로의 초청(9-11절), 참전한 지파와 불참한 지파의 대조(12-18절), 그리고 오늘 본문 다음에 이어질 기손 강의 승리(19-22절)와 전쟁 후의 상벌(23-30절), 마지막 송영(31절)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는 대목은 이 노래의 앞 절반, 곧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리와 사람을 저울에 다는 자리입니다.
# 4-5절의 강림 묘사는 이스라엘의 오랜 신앙 전승 위에 서 있습니다. 세일과 에돔은 출애굽 백성이 광야를 지나며 통과한 지역이고, 시내 산은 언약이 맺어진 산입니다. 곧 드보라는 가나안 한복판의 이 전쟁을 출애굽 사건의 연장선 위에 올려놓습니다. 같은 노래의 결이 하박국 3장 3-4절과 시편 68편 7-8절에도 흐릅니다. 애굽을 치신 그 하나님이 시스라를 치셨다는 고백입니다. 또한 이 노래는 형식과 내용 모두에서 출애굽기 15장 미리암의 노래와 짝을 이룹니다. 홍해에서 한 여인이 소고를 잡고 불렀던 노래를, 기손 강에서 또 한 여인이 이어 부릅니다.
# 노래가 그려 내는 이스라엘의 현실은 참담합니다. 사사 시대의 이스라엘은 강력한 중앙 지도자 없이 지파 연합체로 굴러가고 있었습니다. 여호수아가 사라진 뒤 열두 지파를 하나로 묶을 구심점이 없었고, 각 지파는 자기 땅의 사정에 따라 움직였습니다. 오늘 본문의 명단이 그것을 그대로 보여 줍니다. 참전한 지파는 에브라임, 베냐민, 마길(므낫세), 스불론, 잇사갈, 납달리이고, 불참한 지파는 르우벤, 길르앗(갓), 단, 아셀입니다. 그리고 남쪽의 유다와 시므온은 아예 이름조차 오르지 않습니다. 부름을 받았으나 응답하지 않은 자와, 부름의 자리에서 너무 멀리 있어 이름조차 불리지 못한 자가 함께 있는 것입니다.
# 이 노래를 꿰는 낱말은 '내려오다'입니다. 백성이 성문에 내려갔고(11절), 남은 귀인과 백성이 내려왔고, 마침내 여호와께서 내려오셨습니다(13절). 마길에게서도 스불론에게서도 사람들이 내려왔고(14절), 바락은 골짜기로 달려 내려갔습니다(15절). 반면 불참한 지파들에게 붙은 동사는 '앉다'와 '거주하다'입니다. 앉아 있는 자와 내려가는 자, 이 노래는 그 두 무리를 나란히 세워 놓고 부릅니다. 그리고 그 모든 내려감의 맨 앞에, 하늘에서 먼저 내려오신 분이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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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절 노래로 여는 하나님의 강림
하나님은 승리의 첫 자리에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당신의 이름이 불리게 하시며, 친히 싸움터로 강림하시는 왕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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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날에 드보라와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이 노래하여 이르되"(삿 5:1) 하고 노래가 시작됩니다. 영솔자들이 영솔하였고 백성이 즐거이 헌신하였으니 여호와를 찬송하라 합니다(2절). 왕들과 통치자들을 향해 들으라 명한 뒤, 나 곧 내가 여호와를 노래하겠다고 선언합니다(3절). 그리고 주께서 세일에서부터 나오시고 에돔 들에서부터 진행하실 때에 땅이 진동하고 하늘이 물을 내리고 구름도 물을 내렸으며, 산들이 여호와 앞에서 진동하였다고 노래합니다(4-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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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에서 '노래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동사는 삼인칭 여성 단수형입니다. 두 사람의 이름이 나란히 불리지만, 이 노래를 이끄는 목소리는 드보라의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그 목소리가 맨 처음 하는 일은 자기 공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청중을 불러 모으는 일입니다. 2절에서 '찬송하라'로 옮긴 낱말은 본래 '복을 빌다'라는 뜻으로, 사람이 하나님을 향해 이 말을 쓸 때는 모든 복의 근원이 그분께 있음을 인정하고 기뻐한다는 뜻이 됩니다. 승리한 그 날 아침에 가장 먼저 정리해야 할 것은 전리품이 아니라 문장의 주어였습니다.
3절에서 드보라는 '내가'라는 일인칭 대명사를 두 번이나 겹쳐 씁니다. 직역하면 '내가 여호와를, 내가 노래하리라'가 됩니다. 게다가 동사도 의지형입니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스스로 부르겠다는 다짐입니다. 그러면서 그 노래의 청중으로 왕들과 통치자들을 세웁니다. 골짜기에서 벌어진 작은 전투 이야기가 아니라, 세상의 권력자들이 반드시 들어야 할 선언이라는 뜻입니다. 이어지는 4-5절의 강림 묘사가 그 이유를 밝힙니다. 세일과 에돔은 출애굽 백성이 지나온 땅이고, 5절의 '저 시내 산도'는 직역하면 '시내 산의 그분'이 되어 앞의 여호와를 다시 설명하는 표현이 됩니다. 시내 산에서 언약을 맺으신 바로 그분이 지금 비구름을 몰고 달려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전쟁은 이스라엘과 가나안의 전쟁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와 그 통치를 거스르는 땅의 세력 사이의 전쟁입니다. 철 병거는 단순한 무기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세워지는 것을 시기하는 힘의 상징이었습니다. 그 힘 앞에 하나님이 몸소 나서셨고, 땅과 산이 진동했습니다. 훗날 골고다의 언덕에서도 같은 일이 있었습니다. 땅이 진동하고 바위가 터졌으며, 그 자리에서도 승리의 주어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우리의 모든 찬송이 결국 어린양의 노래로 흘러가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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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는 은혜를 받은 뒤에 문장의 주어를 자주 놓칩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이 하셨다고 고백하다가, 시간이 지나면 우리가 어떻게 했는지를 말하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되면 찬양은 보고서가 되고 예배는 성과 발표가 됩니다. 드보라는 승리한 바로 그 날에 노래를 지었습니다. 기억이 굳기 전에 해석을 붙인 것입니다. 은혜는 늦게 해석할수록 사람의 공로로 옮겨 갑니다.
개인의 자리에서도 그렇습니다. 오늘 아침 지난 한 주를 돌아보며 감사한 일 한 가지를 떠올려 보십시오. 그리고 그 문장의 주어를 하나님으로 바꾸어 다시 적어 보십시오. 내가 버텼다는 문장이 주께서 붙드셨다는 문장으로 바뀌는 순간, 같은 한 주가 전혀 다른 한 주가 됩니다.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그것이 바로 묵상이 하는 일입니다. 묵상은 새로운 정보를 얻는 시간이 아니라, 이미 지나간 일의 주어를 바로잡는 시간입니다. 그 한 번의 고쳐 쓰기가 우리를 자랑에서 찬양으로 옮겨 놓습니다. 오늘 이 다섯 절 앞에 십 분만 더 머물러 보십시오. 노래는 그 십 분에서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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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8절 대로가 비어 있던 날들
하나님은 백성이 무너진 밑바닥까지 정확히 아시고, 그 자리에서 일으켜 세울 한 사람을 미리 준비해 두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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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는 갑자기 시제를 돌려 압제의 시절을 회상합니다. "아낫의 아들 삼갈의 날에 또는 야엘의 날에는 대로가 비었고 길의 행인들은 오솔길로 다녔도다"(삿 5:6). 이스라엘에는 마을 사람들이 그쳤고, 드보라가 일어나 이스라엘의 어머니가 되기까지 그러하였습니다(7절). 무리가 새 신들을 택하였으므로 전쟁이 성문에까지 이르렀는데, 사만 명 중에 방패와 창이 보였느냐고 묻습니다(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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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절은 그 시대를 부르는 이름을 두 사람에게서 따옵니다. 소 모는 막대기로 블레셋 사람을 물리친 삼갈과, 장막 말뚝으로 시스라를 눕힌 야엘입니다. 그런데 두 사람 모두 이스라엘의 정식 지도자가 아니었습니다. 한 시대를 이방인 두 사람의 이름으로 부른다는 것 자체가, 그 시대에 이스라엘의 지도력이 얼마나 비어 있었는지를 한탄하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그 시절의 풍경이 한 문장으로 그려집니다. 대로가 비었습니다. 남북을 잇는 큰길이 가나안의 손에 들어가면서 상인의 왕래가 끊기고 마을과 마을이 갈라졌습니다. 사람들은 큰길 대신 꼬불꼬불한 산길로 숨어 다녔습니다. 이것은 불편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기반이 통째로 무너졌다는 뜻입니다.
7절은 히브리어 어순대로 읽으면 두 행이 마주 보는 구조입니다. '그쳤도다, 마을 사람들이, 이스라엘에서 그쳤도다. 일어나기까지, 드보라가 일어났도다, 이스라엘의 어머니가.' 절망의 반복 위에 한 사람의 일어섬이 포개어지는 형식입니다. 여기서 드보라는 자기를 '이스라엘의 어머니'라 부릅니다. 구약에서 이 호칭은 오직 여기에만 나옵니다. 반면 '이스라엘의 아버지'라는 표현은 엘리야와 엘리사에게 쓰였고, 그때 그 말은 언제나 보호자를 뜻했습니다. 그러니 어머니라는 호칭도 정서적인 비유가 아니라 직무의 이름입니다. 자녀가 위험에 빠졌을 때 몸으로 막아서는 자리, 드보라는 그 자리에 섰습니다.
8절은 그 비참함의 뿌리를 짚습니다. 무리가 새 신들을 택하였기 때문입니다. 대로가 막힌 것도, 마을이 그친 것도, 무기가 없는 것도 결국은 예배가 옮겨 간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사만 명 중에 방패와 창이 보였느냐는 물음은 단순한 군사력 부족의 토로가 아닙니다. 한 나라로 설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는 자백입니다. 사사기는 이 순환을 지치지도 않고 되풀이해 보여 줍니다. 배교하고, 압제를 받고, 부르짖고, 구원자를 얻고, 안식을 누리다가 다시 배교합니다. 그런데 그 순환의 어느 자리에서도 하나님은 손을 놓지 않으셨습니다. 백성이 다른 신을 택하는 동안에도 그분은 일으켜 세울 한 사람을 기르고 계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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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의 대로도 예전 같지 않습니다. 사회 앞에서 신뢰라는 큰길이 좁아졌고, 우리는 자주 오솔길로 다니는 사람처럼 조심스러워졌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대로가 막힌 원인을 바깥에서 찾지 않고 예배의 자리에서 찾습니다. 새 신들을 택하였으므로 전쟁이 성문에 이르렀다는 진단입니다. 성장의 신, 성공의 신, 안전의 신을 나란히 모셔 놓고 여호와도 함께 섬기려 할 때 우리의 방패와 창은 이미 사라집니다. 회복은 방법을 바꾸는 데서 오지 않고 택한 신을 바꾸는 데서 옵니다.
개인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의 대로가 비어 버린 때가 있습니다. 기도가 끊기고 성경이 덮이고, 하나님께 가는 큰길 대신 익숙한 샛길로만 다니게 되는 계절 말입니다.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그럴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큰 결심이 아니라 오늘 아침 다시 한 절 앞에 앉는 일입니다. 말씀은 읽을 때가 아니라 되씹을 때 우리를 바꿉니다. 하나님은 무너진 자리를 정확히 아시고, 바로 그 자리에서 일어설 사람을 부르십니다. 오늘 그 부르심의 자리에 여러분의 이름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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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13절 즐거이 헌신한 자들, 그리고 내려오신 하나님
하나님은 자원하는 마음을 기뻐하시며, 백성이 다 내려온 뒤 맨 마지막에 친히 싸움터로 내려오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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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보라는 다시 현재로 돌아와 백성 중에서 즐거이 헌신한 방백들을 사모하며 여호와를 찬송하라 합니다(9절). 흰 나귀를 탄 자들과 양탄자에 앉은 자들과 길에 행하는 자들에게 전파하라 하고(10절), 물 걷는 곳에서도 여호와의 공의로우신 일을 노래하라 합니다(11절). 이어 "깰지어다 깰지어다 드보라여"(삿 5:12) 하는 부름이 네 번 울리고, 그때에 남은 귀인과 백성이 내려왔고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용사를 치시려고 내려오셨다고 노래합니다(1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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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절에서 노래가 칭찬하는 것은 능력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그들이 백성 중에서 즐거이 헌신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에서 언제나 먼저 세어지는 것은 실력이 아니라 자원하는 마음이었습니다. 10절은 그 찬양의 입을 사회 전체로 넓힙니다. 흰 나귀를 탄 자는 이동하는 귀족을, 양탄자에 앉은 자는 넉넉한 집에 사는 이를, 길에 행하는 자는 별다른 탈것 없이 걸어 다니는 보통 사람을 가리킵니다. 계층을 가리지 않고 모두가 증언자로 부름받았습니다. 구원의 이야기는 성직자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11절은 더 놀랍습니다. '활 쏘는 자들의 소리로부터 멀리 떨어진 물 걷는 곳'이라고 어렵게 번역된 히브리어는 본래 '나누어진 소리', 곧 여럿이 주고받는 떠들썩한 목소리를 뜻합니다. 우물가에서 물을 길으며 사람들이 왁자하게 주고받는 그 수다 속에서 여호와의 의로우신 일을 계속 노래하라는 것입니다. 왜 하필 우물가일까요. 6절에서 대로가 비었다고 했던 그 시절에는 그런 떠들썩함 자체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가장 확실한 증거는 특별한 체험이 아니라, 일상이 다시 시끄러워지는 것이었습니다.
12절의 '깰지어다'는 네 번 반복됩니다. 이 낱말은 잠에서 깨어난다는 뜻인데, 성경에서는 대개 다급하게 도움을 청할 때 쓰입니다. 위험에 처한 아이가 잠든 어머니를 흔들어 깨우는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백성이 그렇게 드보라를 깨웠고, 드보라는 노래로 일어섰으며 바락은 전장으로 일어섰습니다. 그리고 13절이 이 단락의 심장입니다. 귀인이 내려왔고 백성이 내려왔는데, 맨 마지막에 여호와께서 내려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다 내려온 뒤에야 내려오십니다. 앞서 가시는 분이 왜 마지막에 내려오시는가 하면, 사람의 걸음을 기다려 그 걸음을 당신의 전쟁으로 삼으시기 때문입니다. 이 내려오심의 가장 깊은 자리가 베들레헴의 구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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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는 헌신을 자주 동원으로 바꿔 놓았습니다. 사람이 모자라니 채워야 한다는 논리로 자리를 메우다 보면, 즐거이 헌신하는 마음은 뒤로 밀리고 의무감만 남습니다. 그러나 드보라의 노래가 기억한 것은 몇 명이 왔느냐가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왔느냐였습니다. 교회가 먼저 회복할 것은 봉사자 명단이 아니라, 자원하여 나서는 기쁨입니다. 그리고 그 기쁨은 강요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을 들려주는 데서 자랍니다.
개인의 자리에서는 우물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에게 우물가는 식탁이고 카톡방이고 일터의 휴게실입니다.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오늘 그 떠들썩한 자리에서 한 문장만 얹어 보시겠습니까. 하나님이 내 삶에서 하신 일 한 가지를 그저 담담히 말하는 것입니다. 대단한 간증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그것이 11절이 말하는 노래이고, 우리의 평범한 하루를 예배의 자리로 바꾸어 놓는 힘입니다. 그리고 오늘 아침 여러분을 깨우는 부름 앞에 이렇게 응답해 보십시오. 나도 내려가겠습니다. 마음이 먼저 일어서면 몸은 반드시 따라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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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18절 골짜기로 내려간 자, 우리에 앉아 있던 자
하나님은 형제의 고난 앞에서 우리가 어디에 서 있었는지를 기억하시고, 그 기억을 노래로 남겨 두시는 공의로운 심판자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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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브라임에게서 나온 자들과 베냐민과 마길과 스불론에게서 사람들이 내려왔습니다(삿 5:14). 잇사갈의 방백들은 드보라와 함께하였고 바락도 그 뒤를 따라 골짜기로 달려 내려갔는데, 르우벤 시냇가에서는 큰 결심이 있었을 뿐입니다(15절). 양의 우리에 앉아 목자의 피리 부는 소리를 들음은 어찌 됨이냐 묻고(16절), 길르앗은 요단 강 저쪽에, 단은 배에, 아셀은 해변 항만에 거주하였다고 지적합니다(17절). 그러나 스불론은 죽음을 무릅쓰고 목숨을 아끼지 아니하였고 납달리도 들의 높은 곳에서 그러하였습니다(1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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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단락은 참여한 지파와 불참한 지파를 교차로 배열합니다. 앞에 참여 지파가 오고(13-15절 상반), 가운데 불참 지파가 놓이고(15절 하반-17절), 다시 참여 지파로 닫습니다(18절). 칭찬으로 앞뒤를 감싸고 비난을 가운데 두는 이 구조 자체가 문학적 장치입니다. 참여한 이들의 헌신이 밝을수록 가운데 앉아 있는 이들의 자리가 더 어둡게 보이도록 만든 것입니다. 노래는 명단을 남깁니다. 그리고 명단은 오래갑니다.
15절과 16절에 두 번 되풀이되는 '큰 결심이 있었도다'는 개역개정의 번역만 보면 르우벤이 대단한 각오를 한 것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히브리어는 마음의 살핌, 곧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이리저리 재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공동번역이 '끝도 없이 토론이나 벌이는구나'로 옮긴 것이 본뜻에 가깝습니다. 르우벤은 악을 행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회의를 오래 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스불론과 납달리는 이미 골짜기로 내려가 있었습니다. 불참한 지파들에게 붙은 동사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앉았고, 머물렀고, 거주하였습니다. 게다가 그들은 하나같이 물가에 있었습니다. 시냇가, 요단 강 저쪽, 배 위, 해변입니다. 안전하고 넉넉한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은 것입니다.
지리를 보면 사정이 더 분명해집니다. 참전한 지파들은 대체로 가나안의 압제를 몸으로 겪던 북부 지파들이었고, 불참한 지파들은 요단 동편과 해안에 있어 시스라의 병거가 닿지 않는 곳에 살았습니다. 아픔의 체감만큼 헌신도 갈렸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전쟁에서 중립은 없습니다. 형제의 고통이 내 고통이 아닐 때 믿음은 조용히 사적인 안위로 줄어듭니다. 훗날 주님께서 양과 염소를 가르실 때 물으신 것도 무엇을 저질렀느냐가 아니라 지극히 작은 자에게 무엇을 하지 않았느냐였습니다. 한 몸의 지체는 다른 지체가 아플 때 함께 아파야 한다는 사도의 말도 같은 자리에서 나옵니다. 반면 스불론과 납달리에게 붙은 표현은 목숨을 아끼지 아니하였다는 것입니다. 헌신은 남는 것을 드리는 일이 아니라 아까운 것을 내려놓는 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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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는 지금 저마다의 항만에 앉아 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 교회의 사정, 우리 교단의 형편, 우리 세대의 관심만으로도 하루가 벅찹니다. 그러는 사이 이웃 교회의 신음과 작은 교회의 고단함과 이 땅 약자들의 울음은 요단 강 저쪽 일이 됩니다. 그러나 방관은 중립이 아니라 회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을 반대했는지가 아니라, 형제가 골짜기로 내려갈 때 어디에 서 있었는지를 기억하십니다. 교회가 다시 배워야 할 것은 남의 아픔을 우리 기도 제목으로 옮겨 적는 일입니다.
개인의 자리에서도 물어야 합니다. 나에게 시냇가는 어디입니까. 마음은 있으나 몸이 움직이지 않는 자리, 기도는 하지만 손은 넣지 않는 자리 말입니다.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 곁에 골짜기로 내려가고 있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병상에 있는 성도, 홀로 아이를 키우는 이웃, 말없이 무너져 가는 가정입니다. 그 한 사람의 이름을 오늘 묵상 노트 여백에 적어 두십시오. 그리고 이번 주 안에 전화 한 통, 밥 한 끼로 그 골짜기에 함께 내려가 보십시오. 오늘 이 문장 하나만 들고 하루를 걸어가 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앉아 있는 사람인가, 내려가는 사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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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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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터로 친히 내려오신 주님,
저희 승리의 첫 자리에
저희 이름을 놓지 않게 하시고
주의 이름이 먼저 불리게 하옵소서.
땅을 진동시키신 그 손이
오늘도 저희 앞서 가심을 믿습니다.
찬양으로 하루를 열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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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진 자리를 아시는 하나님,
대로가 비어 버린 날들에도
주께서는 저희를 잊지 않으셨습니다.
저희 마음의 큰길이 막힐 때
샛길로만 다니지 않게 하시고
오늘 아침 다시 말씀 앞에 앉게 하옵소서.
새 신들을 택하였던 손을 내려놓고
주님만 택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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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원하는 마음을 기뻐하시는 주님,
저희를 흔들어 깨워 주옵소서.
잠든 마음이 일어나
즐거이 헌신하는 자리에 서게 하시고
우물가의 떠들썩한 이야기 속에서도
주께서 하신 일을 노래하게 하옵소서.
저희가 다 내려간 뒤
맨 마지막에 내려오시는 주님을
오늘도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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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로 기억하시는 성령님,
저희가 어디에 앉아 있었는지
정직하게 보게 하옵소서.
형제가 골짜기로 내려갈 때
시냇가에서 재기만 하지 않게 하시고
광양사랑의교회가
아픈 이의 곁으로 함께 내려가게 하옵소서.
저희 아침의 작은 묵상이
그 걸음의 시작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