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4:11-24 말뚝 하나를 쥔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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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신앙이란 남들이 세어 주는 무기를 갖추는 일이 아니라, 지금 내 손에 쥐어진 것을 하나님 앞에 펴 드리는 생명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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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월의 아침 공기가 하루가 다르게 맑아집니다. 광양 들녘의 벼가 고개를 숙이고, 백운산 자락에서 내려오는 바람에는 이제 서늘한 결이 또렷합니다. 여름내 소리 높던 것들이 조용해지는 계절입니다. 그 고요 앞에 앉으신 모든 분의 심령 위에 주님의 다사로운 평화가 깃들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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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어제 들은 한 문장이 어떻게 그대로 이루어지는지를 보여 줍니다. 여호와께서 시스라를 여인의 손에 파실 것이라던 그 예언 말입니다. 성경은 예고하고, 늦추고, 마침내 보여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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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야기가 시작되기 전에 엉뚱한 한 줄이 끼어듭니다. "모세의 장인 호밥의 자손 중 겐 사람 헤벨이 자기 족속을 떠나"(삿 4:11) 게데스 가까이 장막을 쳤다는 기록입니다. 전쟁과 아무 상관이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이 한 줄이 없으면 이야기의 결말이 성립하지 않습니다. 겐 족속은 본래 언약 백성과 가장 가까운 이들이었는데, 헤벨은 그 자리를 떠나 압제자 곁에 장막을 쳤습니다. 안전을 따라 장막을 조금씩 옮긴 것입니다. 신앙은 대개 그렇게 흐려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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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라는 철 병거 구백 대를 기손 강에 모읍니다. 기손 강은 건기에는 마른 바닥을 드러내는 계절 하천입니다. 병거를 펼치기에 그보다 좋은 자리가 없었습니다. 그는 지형을 정확히 계산했습니다. 다만 하늘을 계산에 넣지 않았습니다. 사람의 계산이 틀리는 자리는 대개 셈이 서툴러서가 아니라, 셈에 넣지 않은 분이 계셔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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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보라가 외칩니다. "일어나라 이는 여호와께서 시스라를 네 손에 넘겨 주신 날이라"(삿 4:14). 아직 칼도 뽑지 않았는데 이미 끝난 일로 말합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여호와께서 너에 앞서 나가지 아니하시느냐. 하나님이 앞서 가시는 것이 먼저이고 사람이 내려가는 것은 나중입니다. 이 순서가 바뀌면 신앙은 모험이 되고, 이 순서가 바르면 순종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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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는 한 절로 지나갑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온 군대를 혼란에 빠지게 하시매 시스라가 병거에서 내려 걸어서 도망합니다. 다음 장의 노래가 그 빈칸을 채워 줍니다. 별들이 하늘에서부터 싸웠고 기손 강이 그 무리를 표류시켰다고 합니다. 마른 강에 비가 쏟아졌고, 기동성으로 살던 병거는 제 무게에 갇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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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강한 것이 가장 무거운 짐이 되는 자리, 저는 그 자리를 오래 들여다보게 됩니다. 우리도 저마다 병거를 세며 삽니다. 통장의 숫자, 진단서의 소견, 풀리지 않는 관계 같은 것들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오래 세어도 세는 일 자체에는 힘이 없습니다. 묵상은 세던 눈을 앞서 가시는 분께로 옮겨 놓는 일입니다. 세어야 할 것은 병거의 수가 아니라, 하나님이 이미 놓아두신 다볼 산과 기손 강과 계절의 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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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이야기는 전쟁터를 떠나 한 장막으로 옮겨 갑니다. 걸어서 도망친 시스라가 겐 사람 헤벨의 아내 야엘의 장막에 이릅니다. 야엘은 나가서 그를 맞고, 이불로 덮어 주고, 물을 청하는 그에게 우유를 줍니다. 시종 주어는 야엘입니다. 군대 장관은 여섯 절 내내 끌려다니기만 합니다. 전투는 한 절로 지나갔는데 장막 안의 몇 분은 여섯 절에 걸쳐 펼쳐집니다. 이야기가 느려지는 자리가 성경이 가장 하고 싶은 말이 있는 자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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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유 한 그릇에 기운을 되찾은 시스라의 말투가 바뀝니다. 처음엔 "청하노니" 하고 정중히 물을 청하더니, 이제는 장막 문에 서 있으라고 명령합니다. 그리고 덧붙입니다. 누가 여기 사람이 있느냐 묻거든 없다 하라. 그 말이 그대로 자기 운명이 됩니다. 조금 뒤 그는 정말로 없는 사람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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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깊이 잠드니 헤벨의 아내 야엘이 장막 말뚝을 가지고 손에 방망이를 들고"(삿 4:21) 다가갑니다. 칼이 아니었습니다. 장막을 치고 걷을 때 늘 쓰던 살림살이였습니다. 수많은 군사와 칼이 잡지 못한 사람을, 한 여인이 부엌 세간 같은 물건으로 눕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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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 대목에서 마음이 오래 머뭅니다. 야엘은 없는 무기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늘 쥐던 것을 들었을 뿐입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손은 특별한 손이 아니라, 오늘 무언가를 쥐고 있는 손이었습니다. 야엘은 사사도 선지자도 군인도 아니었고 이스라엘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조건을 보지 않으시고 결정적인 순간에 어느 편에 서는지를 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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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도 그렇습니다. 묵상은 대단한 사람이 되기 위한 준비가 아니라, 오늘 내 손에 쥐어진 것을 주님의 것으로 다시 받아 드는 일입니다. 밥을 짓는 손, 운전대를 잡는 손, 아픈 이를 씻기는 손 위에 말씀 한 절을 얹어 보십시오. 그 순간 살림살이가 병기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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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이렇게 닫힙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손이 가나안 왕 야빈을 점점 더 눌러서 마침내 가나안 왕 야빈을 진멸하였더라"(삿 4:24). 앞서 2절에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야빈의 손에 파셨다고 했습니다. 손이 바뀌었습니다. 이야기의 처음과 끝에 같은 낱말을 놓아 역전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23절은 그 역전의 주어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굳이 한 번 더 밝힙니다. 사사기는 인물 무용담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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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더'라는 말이 눈에 걸립니다. 그날 모든 것이 한 번에 끝나지 않았습니다. 결정적인 전환은 한순간에 오지만, 그 전환이 삶의 구석구석까지 스미는 데는 걸음이 필요합니다. 오늘의 더딤이 하나님의 더딤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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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 아침의 십 분이 헛되지 않습니다. 표도 나지 않고 성과도 없어 보이는 그 십 분이 '마침내'로 이어지는 한 걸음입니다. 묵상의 힘은 한 번에 무엇을 이루는 데 있지 않고, 어제와 같은 자리에 오늘도 앉는 데 있습니다. 같은 구절이 어제와 다르게 읽히는 아침, 그 작은 놀라움이 우리를 조금씩 옮겨 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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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가 고개를 숙이는 이 아침에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오늘 하루 이 한 문장만 들고 걸어가 보십시오. 하나님이 시작하신 일은 마침내에 이른다는 문장입니다. 손에 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펴 드리는, 그런 평화의 순례자가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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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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