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4:1-10 종려나무 아래 앉아 있던 사람

by 평화의길벗 posted Sep 07,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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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 4:1-10 종려나무 아래 앉아 있던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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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신앙이란 눈앞의 병거를 세어 보는 일이 아니라,
앉아 있어야 할 자리에 오래 앉아 있다가 부르실 때 일어서는 생명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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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월 첫 주가 지나갑니다. 광양의 논빛이 하루가 다르게 노래지고, 이른 아침 백운산 쪽에서 내려오는 바람에는 서늘한 결이 섞였습니다. 여름내 무성하던 것들이 이제 고개를 숙입니다. 그 조용한 숙임 앞에서 이 아침을 맞으신 모든 분의 심령 위에 주님의 다사로운 평화가 깃들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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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에는 이름이 서로 어긋난 두 사람이 나옵니다. 한 사람의 이름 곁에는 '횃불'이라는 말이 붙어 있고, 다른 한 사람의 이름은 아예 '번개'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정작 번개처럼 움직이는 쪽은 번개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아닙니다. 성경은 이 어긋남을 조용히 보여 주고 지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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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익숙한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에홋이 죽으니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매"(삿 4:1). '또'라는 한 글자가 무겁습니다. 에훗이 열어 준 팔십 년의 평온이 그의 죽음과 함께 끝나고, 백성은 다시 그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은혜가 끝나서가 아니라 은혜를 기억하지 않아서 돌아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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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압제자는 하솔의 야빈이고, 실제로 채찍을 든 사람은 그의 군대 장관 시스라입니다. 무기는 철 병거 구백 대였습니다. 평지 기동전에서 철 병거는 사실상 무적이었습니다. 철제 칼조차 변변히 만들지 못하던 이스라엘에게 이것은 탱크 앞에 권총 한 자루 들고 서는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스무 해가 흘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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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에글론의 압제는 열여덟 해였고 그 전 구산 리사다임은 여덟 해였습니다. 되풀이될수록 밤이 길어집니다. 그런데 더 아픈 것은 그 스무 해 동안 이스라엘이 그 상태를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고통은 진작 있었는데 각성이 늦었습니다. 압제보다 무서운 것은 압제를 정상으로 받아들이는 둔감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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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백성이 부르짖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은 뜻밖에도 장수가 아니라 여선지자였습니다. "그 때에 랍비돗의 아내 여선지자 드보라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는데"(삿 4:4). 원문에서 이 구절의 앞 일곱 낱말은 모두 여성형입니다. 화자는 이 사람이 여성이라는 사실을 감추기는커녕 일곱 번 되풀이해 못 박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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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성경은 곧바로 전쟁 이야기로 넘어가지 않습니다. 병거 구백 대를 말한 다음 문장이 재판 이야기입니다. 그는 라마와 벧엘 사이 종려나무 아래에 '거주하였고' 백성이 그에게 나아와 재판을 받았습니다(삿 4:5). '거주하였다'로 옮겨진 말은 사실 '앉아 있었다'에 가깝고, 잠깐 앉은 것이 아니라 붙박이로 계속 앉아 있었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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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 대목이 오래 마음에 남았습니다. 온 나라가 병거에 짓눌려 있던 스무 해 동안, 하나님의 말씀과 공의가 흐르는 자리 하나가 그 땅에 남아 있었습니다. 화려하지 않았습니다. 나무 한 그루 그늘이었습니다. 그러나 구원은 병거를 세는 자리에서 시작되지 않고, 앉아 있던 그 그늘에서 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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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이 그렇습니다. 묵상은 무엇을 이루는 일이 아니라 앉아 있는 일입니다. 성과가 나지 않고 표도 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래 앉아 있던 사람만이 제때 일어설 수 있습니다. 드보라가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은 오래 앉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아침 이 한 절 앞에 십 분만 더 머물러 보십시오. 말씀은 읽을 때가 아니라 되씹을 때 우리를 바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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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드보라가 바락을 부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령하지 아니하셨느냐"(삿 4:6). 답을 구하는 물음이 아니라 '분명히 명령하셨다'는 강한 확인입니다. 그리고 그 명령은 놀랄 만큼 구체적입니다. 어느 지파에서, 몇 명을, 어디로. 납달리와 스불론 만 명, 목적지는 다볼 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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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놀라운 것은 7절입니다. 하나님이 시스라의 병거를 기손 강으로 '이끌어' 오시겠다고 하십니다. 바락이 만 명을 산 위로 끌어올리는 동안 하나님은 구백 대를 평지로 끌어내리십니다. 기손 강은 평소에는 마른 골짜기지만 비가 오면 온 들이 진창이 되는 곳입니다. 병거의 무게가 그대로 병거의 무덤이 됩니다. 부르심은 언제나 준비된 부르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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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바락이 조건을 답니다. "만일 당신이 나와 함께 가면 내가 가려니와"(삿 4:8). 인간적으로는 이해가 됩니다. 만 명으로 구백 대와 맞서야 했으니까요. 그러나 그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눈에 보이는 사람을 붙들었습니다. 약속보다 현실이 크게 보이는 순간, 믿음은 두려움이 되고 순종은 망설임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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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보라의 대답이 서늘합니다. 반드시 함께 가겠다, 그러나 이번 길에서는 영광을 얻지 못한다, 여호와께서 시스라를 여인의 손에 파실 것이기 때문이다. 승리와 영광이 여기서 갈라집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망설임 때문에 구원을 접지 않으십니다. 다만 망설인 손에 영광을 얹지 않으실 뿐입니다. 우리가 잃는 것은 구원이 아니라 참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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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신다'는 말은 앞에서 한 번 나왔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야빈의 손에 파셨다고 했습니다. 그 손이 이제 시스라를 여인의 손에 파십니다. 파는 분은 같은 분이고 바뀐 것은 사는 쪽뿐입니다. 역사의 처분권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이보다 짧게 말할 길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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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드보라는 곧바로 일어나 바락과 함께 게데스로 갑니다. 꾸짖고 물러앉는 대신 꾸짖고 동행합니다. 바락도 결국 만 명을 불러 다볼 산을 오릅니다. 늦은 순종도 순종입니다. 조건을 달았던 그 사람이 그래도 걸음을 뗐다는 사실이 저에게는 위로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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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철 병거는 무엇입니까. 줄어드는 숫자일 수도 있고, 갚아야 할 빚일 수도 있고, 오래된 병일 수도 있고, 풀리지 않는 관계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을 세는 일에는 아무 힘이 없습니다. 세어야 할 것은 병거의 수가 아니라, 하나님이 이미 놓아두신 다볼 산과 기손 강과 계절의 비입니다. 그 두 가지를 나란히 놓고 보는 일이 곧 묵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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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이 바뀌는 이 아침에, 무성하던 것들이 고개를 숙이는 이 아침에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오늘 하루 이 한 문장만 들고 걸어가 보십시오. 승리는 하나님의 것이고, 영광은 순종한 자리에 놓인다는 문장입니다. 종려나무 아래에 오래 앉아 있다가 부르실 때 지체 없이 일어서는, 그런 평화의 순례자가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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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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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에서 보기

https://youtu.be/iGv90qpvq2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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