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04:01-10 철 병거 스무 해, 종려나무 아래에서 일어선 사람

by 평화의길벗 posted Sep 07, 2026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사사기 04:01-10 철 병거 스무 해, 종려나무 아래에서 일어선 사람

*

에훗이 죽자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합니다. 하나님은 하솔에서 통치하는 가나안 왕 야빈의 손에 그들을 파셨고, 철 병거 구백 대를 앞세운 군대 장관 시스라가 스무 해 동안 이스라엘을 심히 학대하므로 백성이 여호와께 부르짖습니다(1-3절). 그때에 랍비돗의 아내 여선지자 드보라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어, 에브라임 산지 라마와 벧엘 사이 종려나무 아래에 거주하며 백성의 재판을 맡습니다(4-5절). 드보라는 게데스에서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을 불러, 만 명을 거느리고 다볼 산으로 가라는 여호와의 명령과 시스라를 그의 손에 넘겨 주시겠다는 약속을 전합니다(6-7절). 그러나 바락은 드보라가 함께 가야만 가겠다고 답하고, 드보라는 동행을 약속하면서도 이 길에서는 영광을 얻지 못하리라 선언합니다(8-10절).

*

# 오늘 본문은 사사기 본론부의 네 번째 사사 이야기를 여는 대목이자, 사사기에서 가장 길게 펼쳐지는 하나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자리입니다. 옷니엘은 다섯 절, 에훗은 열아홉 절, 삼갈은 한 절이었습니다. 그런데 드보라 이야기는 4장과 5장 두 장을 통째로 차지합니다. 산문으로 한 번 들려주고 노래로 다시 한 번 들려줍니다. 사사기의 화자가 이렇게까지 시간을 늦춘 자리는 여기가 처음입니다. 늘어난 분량만큼 하고 싶은 말이 많다는 뜻입니다.

# 무대는 이스라엘 북부입니다. 하솔, 게데스, 다볼 산, 기손 강, 납달리와 스불론이 잇달아 나옵니다. 여호수아 11장은 여호수아가 이미 하솔을 정복하고 그 왕을 쳤다고 기록합니다. 그런데 사사기 4장에서 하솔의 야빈이 다시 이스라엘을 스무 해나 압제합니다. 야빈이 하솔 왕조의 칭호였다고 보는 견해, 여호수아 시대의 정복이 완전하지 않았다고 보는 견해, 같은 사건에 대한 이중 기록으로 보는 견해가 나뉩니다. 연대기의 매듭이 어떻게 풀리든 본문의 신학적 메시지는 흐려지지 않습니다. 한 번 정복했다고 끝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오히려 또렷해집니다.

# 압제의 기간을 나란히 놓아 보면 사사기의 하강선이 보입니다. 구산 리사다임은 여덟 해, 에글론은 열여덟 해, 야빈은 스무 해입니다. 죄가 되풀이될수록 밤이 길어집니다. 사사기의 순환은 제자리를 도는 원이 아니라 갈수록 아래로 내려가는 나선입니다.

# 이 시대의 공포는 이름이 있습니다. 철 병거 구백 대입니다. 철기 문명은 히타이트를 통해 가나안에 들어왔고, 야외 평지 기동전에서 철 병거는 사실상 무적이었습니다. 사사기 1장 19절은 가장 용맹했던 유다 지파마저 철 병거 때문에 골짜기 주민을 쫓아내지 못했다고 적습니다. 철제 칼조차 변변히 만들지 못하던 이스라엘에게 이것은 탱크 앞에 권총 한 자루를 들고 서는 일이었습니다. '병거'라는 낱말이 사사기에 나오는 자리의 거의 전부가 드보라 이야기에 몰려 있습니다. 화자가 병거를 되풀이해 부르는 이유는 하나입니다. 승패를 가르는 것은 군사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사실을 병거 앞에서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 그리고 하나님은 뜻밖의 사람을 세우십니다. 여선지자 드보라입니다. 사사기에 등장하는 열두 사사 가운데 재판관의 역할이 기록된 사사는 드보라뿐이고, 예언자이면서 동시에 백성을 다스린 사람은 이스라엘 역사를 통틀어 모세와 드보라와 사무엘 셋뿐입니다. 4절의 히브리어 원문은 '드보라, 여자, 여선지자, ~의 여자, 랍비돗, 그녀가, 사사가 되었다'로 이어지는데 일곱 낱말이 모두 여성형입니다. 화자는 이 사람이 여성이라는 사실을 감추기는커녕 일곱 번 되풀이해 못 박습니다.

# 그 옆에 바락이 섭니다. '바락'은 '번개'라는 뜻이고, 드보라의 소개에 붙은 '랍비돗'은 '횃불들'이라는 뜻의 복수형입니다. 번개라는 이름을 가진 남자와 횃불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가 한 이야기 안에 마주 섭니다. 그런데 정작 번개처럼 움직이는 쪽은 남자가 아닙니다. 사사기는 여기서 은근한 비틀기를 합니다. 인물의 행동과 화자의 배치가 곧 신학입니다.

*

# 1-3절 스무 해로 길어진 밤

하나님은 죄를 그냥 두지 않으시되 부르짖음은 결코 흘려 듣지 않으시는, 징계 속에서도 언약을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

"에홋이 죽으니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매"(삿 4:1). 그리하여 여호와께서 하솔에서 통치하는 가나안 왕 야빈의 손에 그들을 파셨고, 그의 군대 장관은 하로셋 학고임에 거주하는 시스라였습니다(2절). 야빈 왕은 철 병거 구백 대가 있어 이십 년 동안 이스라엘 자손을 심히 학대했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었습니다(3절).

.

'또'라는 한 글자가 문장 전체를 무겁게 누릅니다. 여기 쓰인 히브리어 낱말은 어떤 행동이 되풀이되고 굳어졌음을 나타냅니다. 처음 저지르는 악이 아니라 이미 몸에 밴 악이라는 뜻입니다. 팔십 년의 평온을 누린 세대가 그 평온이 어디서 왔는지 잊었습니다. 사사기의 비극은 언제나 은혜를 받은 다음에 시작됩니다. 은혜가 끝나서가 아니라 은혜를 기억하지 않아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화자는 1절에서 '에훗이 죽으니'라는 말을 앞에 세웁니다. 한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지켜지던 것이 그 사람이 죽자 무너졌다는 뜻입니다. 신앙이 개인의 인격에만 얹혀 있고 공동체의 기억으로 내려앉지 못하면, 그 신앙은 한 세대를 넘기지 못합니다. 이스라엘의 문제는 지도자가 없어진 것이 아니라, 지도자가 있는 동안에도 하나님을 자기 것으로 삼지 않았다는 데 있었습니다.

2절의 '파셨으니'라는 말이 무섭습니다. 물건을 팔면 처분권이 산 사람에게 넘어갑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이방 왕의 손에 넘기셨다는 것은 출애굽을 거꾸로 되돌리는 행위입니다. 노예에서 건져 내신 분이 다시 노예의 자리로 넘기신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낱말이 9절에서 한 번 더 나옵니다. 이번에는 시스라를 여인의 손에 파신다고 하십니다. 파는 손이 같은 손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도 가나안의 역사도 한 분의 손안에 있습니다. 압제자의 등장과 압제자의 몰락이 모두 같은 문장의 주어를 가집니다.

학대의 실제 주역은 야빈이 아니라 시스라였습니다. 원문에서 3절의 '그에게 철 병거가 있어'와 '그가 학대하였다'의 '그'는 문맥상 바로 앞에 나온 시스라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3절의 접속사는 부르짖음의 이유를 둘로 벌려 놓습니다. 스무 해의 학대 때문이기도 하고, 도무지 이길 수 없는 철 병거 구백 대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은 압제로부터의 해방만이 아니라 그 병거와 맞설 힘까지 구하고 있었습니다. 부르짖음은 언제나 이렇게 구체적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구체적인 절망을 정확히 들으시고, 훗날 흠 없으신 독생자를 통해 영원한 해방을 이루실 그 길을 여기서부터 준비해 가십니다.

.

한국 교회가 이 세 절 앞에서 먼저 물어야 할 것은 시대의 험함이 아니라 우리 안의 '또'입니다. 우리는 무너짐의 원인을 밖에서 찾는 데 익숙합니다. 인구가 줄어서, 정서가 험해져서, 제도가 불리해져서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본문은 압제의 원인을 하솔에서 찾지 않고 이스라엘에서 찾습니다. 더 뼈아픈 것은 이스라엘이 스무 해나 그 상태를 견디고서야 부르짖었다는 사실입니다. 고통은 진작 있었는데 각성은 늦었습니다. 교회의 위기는 어려움이 닥친 날이 아니라, 어려움을 정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날에 시작됩니다.

개인의 자리에서는 이렇게 물어보십시오. 내 삶에서 스무 해째 이어지는 밤은 무엇입니까. 끊겠다고 했다가 끊지 못한 습관, 회복하겠다고 했다가 회복하지 못한 관계, 다시 붙들겠다고 했다가 놓아 버린 기도의 자리가 있을 것입니다.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오늘 아침 한 가지만 정직하게 이름 붙여 봅시다. 무엇이 나를 스무 해째 학대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께 소리 내어 아뢰십시오. 사사기의 모든 구원은 부르짖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부르짖음은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실 분이 계심을 인정하는 고백입니다. 그 고백이 나오는 아침에 밤은 이미 기울기 시작합니다.

*

# 4-5절 종려나무 아래 앉은 사람

하나님은 세상이 세지 않는 자리에서 구원의 지도자를 일으키시며, 칼보다 먼저 공의로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

"그 때에 랍비돗의 아내 여선지자 드보라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는데"(삿 4:4). 그는 에브라임 산지 라마와 벧엘 사이 드보라의 종려나무 아래에 거주하였고, 이스라엘 자손은 그에게 나아가 재판을 받았습니다(5절). 철 병거 구백 대의 소식 바로 다음에 오는 문장이 전쟁 준비가 아니라 재판 이야기라는 사실이 눈에 걸립니다.

.

4절의 원문은 이례적으로 길게 드보라를 소개합니다. 앞선 사사들은 이름, 아버지, 지파, 특징 순으로 짧게 소개되었는데 드보라의 자리에는 가족 관계가 놓일 자리에 '여자'가 들어가고 특징이 놓일 자리에 '랍비돗'이 들어갑니다. 그래서 이 구절을 '랍비돗의 아내'가 아니라 '횃불의 여인'으로 읽는 견해도 오래전부터 있어 왔습니다. 어느 쪽으로 읽든 화자의 의도는 분명합니다. 이어지는 일곱 낱말이 모두 여성형이어서, 원문을 그대로 옮기면 '드보라는 여자인 여선지자였다'는 어색한 문장이 나올 정도입니다. 화자는 이 사람이 여성이라는 사실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강조합니다.

'거주하였고'로 옮겨진 낱말은 '앉아 있었다'에 더 가깝고, 여성 분사형이라 계속 앉아 있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잠깐 들른 자리가 아니라 붙박이로 앉아 있던 자리라는 뜻입니다. 종려나무 아래는 사람들이 모여 시비를 가리던 성문 광장 같은 곳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예언자이면서 동시에 백성을 다스린 사람은 모세와 드보라와 사무엘뿐입니다. 판례가 없는 사건 앞에서 하나님께 직접 물어야 했던 모세처럼, 드보라도 수시로 하나님의 뜻을 물으며 분쟁을 심리했을 것입니다. 그 재판정에서 그는 백성이 실제로 무엇 때문에 우는지를 가장 먼저 들었습니다.

그래서 4절과 5절은 6절의 출정 명령과 동떨어진 곁가지가 아닙니다. 앉아 있던 시간이 일어설 사람을 길렀습니다. 하나님은 구원을 칼에서 시작하지 않으시고 공의에서 시작하십니다. 이스라엘에게 정말 없었던 것은 강한 장수가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를 회복할 지도자였습니다. 압제가 스무 해나 이어지는 동안에도 하나님의 말씀이 흐르는 자리 하나가 그 땅에 남아 있었고, 그 자리에 앉아 있던 한 사람을 통해 구원이 시작됩니다. 세상이 크고 강한 것에 눈길을 줄 때, 하나님은 아무도 세지 않은 종려나무 그늘에서 일하고 계셨습니다.

.

한국 교회는 위기 앞에서 자주 전략과 규모를 먼저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본문은 병거 이야기 다음에 재판 이야기를 놓습니다. 교회가 세상 앞에서 잃은 것은 힘이 아니라 공의와 정의였고, 회복해야 할 것도 영향력이 아니라 공의와 정의입니다. 재판하는 교회, 곧 안에서 시비를 바르게 가리고(정의) 약한 이의 억울함을 먼저 듣는(공의) 교회가 결국 시대를 일으킵니다. 아울러 이 본문은 하나님이 사람을 세우실 때 세상의 통념을 조금도 어려워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배움이 짧다는 이유로, 직분이 없다는 이유로 우리가 미리 지워 버린 이름들이 없는지 살펴야 합니다.

개인의 자리에서 오늘 붙들 말은 '앉아 있음'입니다. 드보라가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은 오래 앉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자리가 필요합니다. 펼쳐 놓은 성경 앞, 아무도 보지 않는 새벽, 아무 성과도 나지 않는 십 분이 그것입니다.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오늘 아침 이 한 절 앞에 십 분만 더 머물러 보십시오. 말씀은 읽을 때가 아니라 되새길 때 우리를 바꿉니다. 세상이 아무리 요란해도 우리가 찾아가 앉을 나만의 종려나무 아래를 잃지 마십시다. 그 그늘에서 자란 사람만이, 부르실 때 놀라지 않고 일어설 수 있습니다.

*

# 6-7절 이미 명령하지 아니하셨느냐

하나님은 부르시는 그 순간에 이미 길과 때와 승리를 다 준비해 두시는, 신실하고 구체적인 언약의 하나님이십니다.

.

드보라가 사람을 보내어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을 납달리 게데스에서 불러다가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령하지 아니하셨느냐 너는 납달리 자손과 스불론 자손 만 명을 거느리고 다볼 산으로 가라"(삿 4:6) 합니다. 이어 "내가 야빈의 군대 장관 시스라와 그의 병거들과 그의 무리를 기손 강으로 이끌어 네게 이르게 하고 그를 네 손에 넘겨 주리라"(7절)는 약속을 전합니다.

.

"명령하지 아니하셨느냐"는 물음은 답을 구하는 물음이 아닙니다. 히브리어에서 부정어에 의문사가 붙은 이 형태는 강한 긍정을 이끌어 내는 반어적 의문문입니다. '분명히 명령하셨다'는 말입니다. 동시에 이 표현은 이 명령이 처음이 아닐 수 있음을 넌지시 비칩니다. 이미 한 차례 들었으면서 응답하지 않은 사람에게 다시 확인시키는 어조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화자가 이 명령의 출처를 분명히 못 박는다는 점입니다. 드보라의 소견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입니다. 예언자의 임무는 자기 판단을 보태는 것이 아니라 들은 말씀을 그대로 전하는 것입니다.

명령은 놀랄 만큼 구체적입니다. 어느 지파에서, 몇 명을, 어디로. 납달리와 스불론 만 명, 목적지는 다볼 산입니다. 6절에서 '거느리고'로 옮겨진 낱말은 '데리고 가다'보다 '뽑아 세우다'에 가깝고, 개역개정이 옮기지 않은 또 하나의 동사가 그 앞에 있습니다. '끌어내라'는 뜻입니다. 흩어진 사람들을 골라 뽑아 산 위로 끌어올리라는 말입니다. 다볼 산은 이스르엘 평야를 내려다보는 자리이고, 기손 강 유역은 병거를 펼치기 좋은 넓은 평지입니다. 산 위의 보병과 평지의 병거, 누가 보아도 미끼를 던지는 쪽이 불리한 배치입니다.

그런데 7절에서 주어가 바뀝니다. "내가 이끌어." 여기 쓰인 동사는 6절의 그 낱말과 같은 뿌리로, '잡아당기다'라는 뜻입니다. 바락이 만 명을 끌어올리는 동안 하나님은 시스라의 구백 대를 끌어내리십니다. 사람이 하는 일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같은 낱말로 맞물립니다. 그리고 기손 강은 평소에는 마른 골짜기이지만 비가 오면 온 들이 진창이 되는 곳입니다. 병거의 무게가 그대로 병거의 무덤이 됩니다. 하나님은 부르시기 전에 이미 지형과 계절과 물길을 다 준비해 두셨습니다. 부르심은 언제나 준비된 부르심입니다. 그래서 "그를 네 손에 넘겨 주리라"는 말씀은 예측이 아니라 이미 확정된 사실의 통보입니다.

.

한국 교회는 '기도하고 결정한다'는 말을 즐겨 하면서도, 정작 말씀이 이미 분명히 말한 자리에서 다시 표를 세고 여론을 살피는 일이 많습니다. 본문은 순서를 뒤집습니다. 하나님이 이미 명령하셨느냐가 첫 질문이고, 상황이 유리하냐는 그다음 질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명령은 언제나 구체적이었습니다. 막연한 감동이 아니라 지파와 인원과 장소가 있었습니다. 우리의 사명감도 막연한 열심에 머물지 말고, 누구를, 어디서, 언제라는 구체성까지 내려와야 합니다.

개인의 자리에서 오늘 붙들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부르신 자리에 이미 준비해 두신 것이 무엇인지 세어 보는 일입니다. 우리는 부르심 앞에서 없는 것부터 셉니다. 시간이 없고 돈이 없고 사람이 없다고 셉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볼 산과 기손 강과 계절의 비까지 미리 놓아두신 분입니다.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이번 주에는 기도 노트 한쪽에 두 칸을 그어 보십시오. 한쪽에는 내가 두려워하는 병거의 수를 적고, 다른 쪽에는 지금까지 하나님이 미리 놓아두신 것들을 적어 보십시오. 그 두 칸을 나란히 놓고 보는 일 자체가 묵상입니다. 그리고 대개는 오른쪽 칸이 훨씬 길다는 사실에 놀라게 되실 것입니다.

*

# 8-10절 함께 가면 가겠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망설임에도 불구하고 구원을 이루시되, 영광은 오직 믿음으로 순종한 자리에 두시는 분이십니다.

.

"바락이 그에게 이르되 만일 당신이 나와 함께 가면 내가 가려니와 만일 당신이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나도 가지 아니하겠노라"(삿 4:8). 드보라가 이르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가리라 그러나 네가 이번에 가는 길에서는 영광을 얻지 못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시스라를 여인의 손에 파실 것임이니라"(9절) 하고 함께 게데스로 갑니다. 바락이 부르니 만 명이 그를 따라 올라갔고, 드보라도 함께 올라갔습니다(10절).

.

바락의 말을 좋게 읽는 길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대리자인 예언자의 동행을 구한 것은 자기 부족함을 아는 겸손이고, 히브리서 11장이 그를 믿음의 사람 목록에 올린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본문 자체의 흐름은 다른 쪽을 가리킵니다. 6절과 7절에서 이미 명령과 약속이 다 주어졌는데도 바락은 조건을 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눈에 보이는 사람을 붙든 것입니다. 인간적으로는 충분히 이해됩니다. 만 명을 데리고 구백 대와 맞서야 했으니까요. 그러나 여호와의 전쟁은 사람의 수와 무기의 좋고 나쁨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바락은 그 사실을 아직 몰랐습니다.

드보라의 대답은 두 겹입니다. 앞부분에서 그는 부정사 절대형을 앞세워 '반드시 가겠다'고 강조합니다. 요청을 물리치지 않고 끝까지 함께 서겠다는 분명한 의지입니다. 그러나 뒤이어 '에페스 키'라는 접속사가 나옵니다. 단순한 역접이 아니라, 앞의 상황에서 당연히 예상되는 결과가 아닌 전혀 뜻밖의 결과를 이끄는 말입니다. 승리는 온다, 그러나 네가 당연히 얻으리라 생각한 영광은 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승리와 영광이 갈라집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망설임 때문에 구원을 접으시지 않습니다. 다만 망설인 손에 영광을 얹지 않으실 뿐입니다.

"여인의 손에 파실 것임이니라." 2절에서 이스라엘을 야빈의 손에 파셨던 그분이, 이제 시스라를 한 여인의 손에 파신다고 하십니다. 파는 분은 같은 분이고 바뀐 것은 사는 쪽입니다. 역사의 처분권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이보다 짧게 말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여인이 누구인지는 아직 말하지 않습니다. 이름이 감추어져 있으므로 '여인'이라는 사실만 도드라집니다. 4절에서 여성형 낱말을 일곱 번 겹쳐 놓았던 화자가 여기서 다시 같은 못을 박습니다. 그러고도 드보라는 곧바로 일어나 함께 갑니다. 질책하고 물러앉는 대신 질책하고 동행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람다움입니다.

.

교회 안에는 조건이 갖추어지면 순종하겠다는 말이 너무 많습니다. 사람이 모이면, 재정이 채워지면,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하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조건을 붙이는 순간 순종은 거래가 됩니다. 하나님은 그 미룸 속에서도 일하시고 결국 구원을 이루시겠지만, 그 일에 쓰임받는 기쁨은 다른 이의 몫이 되고 맙니다. 우리가 잃는 것은 구원이 아니라 참여입니다. 교회사 안에서 가장 아까운 손실은 실패가 아니라, 이미 주어진 약속 앞에서 머뭇거리다 놓친 자리들이었습니다.

개인의 자리에서도 그렇습니다. 나는 지금 누구의 동행을 조건으로 걸고 있습니까. 배우자가 함께 믿어 주면, 자녀가 따라와 주면, 저 사람이 먼저 사과하면 하겠다고 미루어 둔 순종이 있지 않습니까.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오늘 이 한 문장만 들고 하루를 걸어가 보십시오. 승리는 하나님의 것이고, 영광은 순종한 자리에 놓인다는 문장입니다. 그리고 바락의 이야기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도 기억하십시다. 그는 결국 만 명을 불러 모아 다볼 산을 올랐습니다. 늦은 순종도 순종입니다. 지금 이 아침이 그 늦은 순종을 시작하기에 가장 이른 시간입니다.

*

# 거둠의 기도

*

역사를 주관하시는 주님,

스무 해가 지나도록

익숙해진 어둠 속에서

아프면서도 부르짖지 않았습니다.

고통은 있었으나

각성은 늦었습니다.

저희의 '또'를 멈추어 주시고

오늘 아침 정직하게

주님을 부르게 하옵소서.

.

종려나무 아래 계신 주님,

크고 강한 것만 세는 저희 눈을

주님의 셈법으로 고쳐 주옵소서.

아무도 세지 않는 자리에서

주님이 일하고 계심을 믿게 하시고,

저희에게도 오래 앉아 있을

말씀의 그늘을 주옵소서.

그 그늘에서 자란 사람만이

부르실 때 일어설 수 있습니다.

.

먼저 준비하시는 주님,

저희는 없는 것부터 세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다볼 산과

기손 강과 계절의 비까지

미리 놓아두신 분이십니다.

병거의 수보다

약속의 무게를 더 크게 보게 하시고

부르심 앞에서 조건을 달지 않게 하옵소서.

.

성령님,

오늘 광양사랑의교회가

망설임을 내려놓는 교회가 되게 하시고,

늦은 순종이라도 시작하는

저희 걸음을 받아 주옵소서.

승리는 주님의 것이오니

저희는 다만 순종의 자리에 서겠습니다.

철 병거의 시대에도

자기 백성을 건지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Articles

1 2 3 4 5 6 7 8 9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