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2:11-23 말이 되지 못한 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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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이르는 길은 잘 다듬어진 기도문에서만 열리지 않습니다. 문장이 되지 못한 앓는 소리, 그 낮은 신음 한 자락에서도 하나님의 구원은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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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월 첫 주가 지나가고 있습니다. 새벽에 창을 열면 서늘한 공기가 먼저 들어오고, 한낮에는 아직 여름이 물러가지 않았다는 듯 볕이 따갑습니다. 이맘때 광양의 들녘에는 벼가 고개를 숙이기 시작합니다. 농부는 그 논둑을 하루에도 몇 번씩 돌아봅니다. 물꼬를 트고 막고, 쓰러진 포기를 세우고,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한 해의 수고가 마지막 한 달에 달려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무언가를 지키고 계신 모든 분의 심령 위에, 주님의 다사로운 평화가 깃들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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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에는 소리가 하나 나옵니다. 그런데 그 소리는 노래도 아니고 기도도 아닙니다. 성경은 그것을 "슬피 부르짖으므로"라고 적었지만, 히브리 원문의 '느아카'는 크게 외치는 행위라기보다 고통 속에서 저절로 새어 나오는 신음에 가깝습니다. 회개의 문장이 아니라 그저 아파서 나는 소리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놀랍게도 그 소리 때문에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셨다고 말합니다. 오늘 우리는 이 한 소리를 오래 들여다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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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사사기 서론의 마지막 자리에 놓여 있습니다. 앞의 1장이 지파별 정복의 성적표였다면, 오늘 본문은 그 성적표의 원인을 캐는 진단서입니다. 여호수아와 그 세대가 세상을 떠난 뒤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다른 세대가 일어났고, 그 세대가 살아 낸 시간이 어떤 모양이었는지를 화자는 여기서 한자리에 모아 보여 줍니다. 그리고 그 모양에는 이름이 있습니다. 배교와 심판과 부르짖음과 구원, 그리고 다시 배교로 이어지는 순환입니다. 이 다섯 마디가 사사기 안에서 여섯 번 되풀이되는데, 되풀이될 때마다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아래로 기웁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이것을 원이 아니라 나선이라고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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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환의 첫 마디는 배교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을 섬기며"(삿 2:11). 여기서 조심스레 짚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께 드리는 제사를 그만둔 적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없애지 않았습니다. 다만 하나님 곁에 바알을 세웠을 뿐입니다. 구원은 하나님께 받고 풍요는 바알에게서 얻으려 했습니다. 광야에서는 만나를 내리시던 그분이 밀밭과 포도원에서는 어쩐지 서툴러 보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화자는 그것을 두고 "여호와를 버리고"라고 적었습니다. 하나님과 맺은 언약은 부부의 언약이어서, 곁에 한 사람을 더 두는 순간 그것은 사랑의 확장이 아니라 사랑의 파기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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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마디는 심판입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노략하는 자의 손에 넘겨 주사"(삿 2:14). 이 문장에서 가장 아픈 대목은 낱말의 방향이 뒤집힌 자리입니다. '손에 넘겨주다'는 원래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약속하실 때 쓰시던 표현이었습니다. 사사기 1장에서 "내가 이 땅을 그의 손에 넘겨 주었노라" 하시던 그 말이, 이제 이스라엘을 대적의 손에 넘기는 말이 됩니다. 같은 손입니다. 방향만 바뀌었습니다. 풍요를 얻으려고 우상에게 갔는데 돌아온 것은 노략이었습니다. 더 안전해지려고 붙든 것이 도리어 우리를 위태롭게 만드는 일은, 그때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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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세 번째 마디에서 이야기가 뜻밖의 방향으로 꺾입니다. "여호와께서 사사들을 세우사 노략자의 손에서 그들을 구원하게 하셨으나"(삿 2:16). 왜 그러셨을까요. 본문은 그 이유를 이렇게 밝힙니다. 그들이 대적에게 압박과 괴롭게 함을 받아 슬피 부르짖으므로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 신음이 등장합니다. 이스라엘이 회개해서가 아닙니다. 무릎을 꿇고 죄를 자복해서가 아닙니다. 그저 아파서 앓는 소리를 냈을 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소리를 들으셨습니다. 구원의 근거는 사람의 자격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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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마디는 다시 배교입니다. 그것도 더 깊은 배교입니다. "그 사사가 죽은 후에는 그들이 돌이켜 그들의 조상들보다 더욱 타락하여"(삿 2:19). 여기 쓰인 '돌이키다'라는 낱말이 마음을 서늘하게 합니다. 히브리어 '슈브'는 흔히 회개를 뜻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에서는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등을 돌리는 뜻으로 쓰였습니다. 18절에서는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시는 은혜가 되고, 19절에서는 백성이 등을 돌리는 배신이 됩니다. 같은 말이 정반대로 달립니다. 우리 안에도 이 두 방향이 함께 있습니다. 사사가 살아 있는 동안만 바르게 사는 마음, 좋은 목사가 있을 때만 뜨거운 마음, 수련회 직후에만 정직해지는 마음이 그것입니다. 빌려 온 신앙은 반드시 돌려주어야 할 때가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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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의 사상가 쇠렌 키르케고르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이런 뜻의 말을 남겼습니다. 죄의 반대말은 미덕이 아니라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개 죄의 반대편에 착한 행실을 놓습니다. 그러나 사사기의 이스라엘은 사사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제법 착했습니다. 문제는 그 착함이 하나님과의 인격적 결속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눈앞의 지도자에게 기대어 나온 것이었다는 점입니다. 뿌리 없는 미덕은 그늘이 걷히면 함께 걷힙니다. 그래서 사사가 죽으면 그들은 곧바로 이전으로, 아니 이전보다 더 아래로 내려갔습니다.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은 더 나은 행실이 아니라 더 깊은 신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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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본문은 마지막 마디에서 뜻밖의 문을 열어 둡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가 남겨 둔 이방 민족들을 하나도 쫓아내지 않겠다고 선언하시면서 그 이유를 이렇게 밝히십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그들의 조상들이 지킨 것 같이 나 여호와의 도를 지켜 행하나 아니하나 그들을 시험하려 함이라"(삿 2:22). 앞에서는 남겨 두심이 심판이었는데 여기서는 시험이 됩니다. 심판은 문을 닫는 일이고 시험은 문을 열어 두는 일입니다. 시험이 진행 중이라는 것은 아직 판결이 내려지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포기하시는 대신 시험하시기로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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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오늘 우리 삶에 끝내 사라지지 않는 것들을 다시 보게 됩니다. 오래된 습관, 낫지 않는 몸, 풀리지 않는 관계, 반복되는 재정의 압박 같은 것들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두고 하나님이 기도를 듣지 않으신다고 결론 내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다른 가능성을 열어 놓습니다. 남겨진 문제는 하나님이 손을 놓으신 증거가 아니라, 우리가 아직 시험 가운데 있다는 증거일 수 있습니다. 남겨진 가나안은 적이기 전에 거울이었습니다. 그 거울 앞에서 두려움도 드러나고 욕망도 드러나고 순종도 드러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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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한국 교회 앞에 놓인 시험도 무신론이 아니라 혼합주의입니다. 우리는 예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삶의 실제 안정을 어디에서 구하는지를 물으면 대답이 흔들립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무엇을 믿느냐가 아니라 무엇이 전부냐입니다. 회개는 더하기가 아니라 빼기입니다. 하나님을 더 많이 섬기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 섬기자는 것입니다. 곁에 세워 둔 작은 제단 하나를 이번 주에 헐어 내는 일, 거기서 신앙은 다시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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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지금 기도할 힘조차 없다고 느끼시는 분들께 이 말씀을 전해 드리고 싶습니다. 하나님이 사사를 보내신 것은 이스라엘이 회개를 잘해서가 아니라 그저 아파했기 때문입니다. 문장이 되지 못한 한숨, 기도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짧은 탄식을 하나님은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니 그 신음을 그대로 하나님 앞에 두십시오. 로마서는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신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앓는 소리를 성령께서 기도로 바꾸어 하나님께 올려 드리십니다. 그리고 사사들은 살아 있는 동안만 구원할 수 있었지만, 우리에게는 영원히 살아 계셔서 항상 간구하시는 대제사장이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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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둑을 도는 농부의 마음처럼 우리도 이 계절을 지나갑니다. 무언가를 지키느라 조마조마한 나날일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그 논에 물을 대시는 분은 따로 계십니다. 오늘 여러분의 신음까지 들으시는 주님 앞에서, 말이 되지 못한 그 소리까지 기도로 받아 주시는 은혜 안에서, 같은 자리로 돌아가는 발이 아니라 주께로 돌이키는 발을 가진 평화의 순례자가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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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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