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02:01-10 울고도 헐지 않은 제단, 물려주고도 잊힌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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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사자가 길갈에서부터 보김으로 올라와 이스라엘을 책망합니다. 애굽에서 올라오게 하시고 언약을 영원히 어기지 않겠다 하신 하나님께서, 이 땅의 주민과 언약을 맺지 말고 그 제단들을 헐라 하셨는데 그들이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1-2절). 그래서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않으시겠다고, 그들이 옆구리의 가시가 되고 그들의 신들이 올무가 되리라고 선언하십니다(3절). 백성은 소리를 높여 울었고 그곳 이름이 보김이 되었으나, 제단은 하나도 헐리지 않았습니다(4-5절). 이어 화자는 시간을 되돌려 여호수아와 그 세대가 여호와를 섬기던 날들을 회상하고(6-7절), 여호수아의 죽음과 장사를 지나(8-9절)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다른 세대의 등장으로 단락을 닫습니다(1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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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사기 1장이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로 열려 밀려난 지파의 경계선으로 닫혔다면, 오늘 본문은 그 실패의 원인을 하나님 편에서 진단하는 자리입니다. 1장이 이스라엘의 눈으로 본 실패의 목록이었다면, 2장 1-5절은 그 목록의 뿌리를 한마디로 밝힙니다. 문제는 철 병거가 아니라 불순종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2장 6-10절은 그 불순종이 어떻게 대를 이어 굳어졌는지를 세대의 언어로 설명합니다. 곧 오늘 본문은 사사기 서론의 접합부이며, 앞의 진단과 뒤의 순환을 이어 붙이는 경첩입니다.
# 길갈과 보김은 지명 이상의 무게를 가집니다. 길갈은 요단을 건넌 이스라엘이 처음 장막을 치고 할례를 행하고 유월절을 지킨 곳이며(수 5:9-10), 제비를 뽑아 땅을 나누던 진지였습니다. 언약 백성의 삶이 가나안에서 공식적으로 시작된 자리입니다. 반면 보김은 이 사건 이후에 붙여진 이름이어서 원래 지명을 알 수 없습니다. 칠십인역은 보김을 '울음의 장소'로 옮기며 벧엘과 연결 짓습니다. 근원의 자리에서 출발한 목소리가, 이름조차 눈물로 바뀌어 버린 자리에 가 닿는 것입니다. 화자는 1절과 5절에 '보김'을 두어 이 단락을 여닫습니다.
# 6-10절은 시간 순서대로 이어지는 기록이 아니라 회상입니다. 여호수아 24장 28-31절과 거의 같은 내용인데 순서가 다릅니다. 여호수아서는 백성이 땅을 차지한 일(28절)에 이어 여호수아의 죽음(29-30절)을 적고 그 세대의 신실함(31절)으로 마무리합니다. 그러나 사사기는 땅을 차지한 일(6절) 다음에 곧바로 그 세대의 신실함(7절)을 놓고, 여호수아와 장로들의 죽음(8-9절)을 지나 새 세대의 부정적 진술(10절)로 닫습니다. 전성민 교수는 이 배열을 도표로 정리하며, 사사기에서 여호수아의 죽음은 "암울한 역사로 바뀌는 전환점"으로 제시된다고 말합니다. 같은 재료로 다른 이야기를 만드는 것, 그것이 화자의 신학입니다.
# 사사기는 예언서가 아니라 이야기책입니다. 화자는 논평을 아끼는 대신 배열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 배열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1절)과 이스라엘의 불순종(2절)이 나란히 놓이고, 눈물(4절)과 변하지 않은 삶(11절 이하)이 나란히 놓이고, 섬기던 세대(7절)와 알지 못하는 세대(10절)가 나란히 놓입니다. 이 대조들이 곧 사사기 전체를 여는 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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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절 길갈에서 올라온 목소리
하나님은 먼저 자신의 신실하심을 기억하게 하신 뒤에야 우리를 꾸짖으시는, 은혜로 책망하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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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사자가 길갈에서부터 보김으로 올라와 말합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처음부터 끝까지 일인칭입니다.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올라오게 하여 내가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으로 들어가게 하였으며 또 내가 이르기를 내가 너희와 함께 한 언약을 영원히 어기지 아니하리니"(삿 2:1). 은혜의 회상이 먼저입니다. 그다음에 명령이 나옵니다. "너희는 이 땅의 주민과 언약을 맺지 말며 그들의 제단들을 헐라"(삿 2:2). 그리고 지적이 옵니다. "너희가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으니 어찌하여 그리하였느냐." 마지막으로 선언이 옵니다. 그들을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옆구리에 가시가 되고 그들의 신들이 올무가 되리라는 세 겹의 심판입니다(3절). 은혜, 명령, 책망, 심판의 네 걸음이 세 절 안에 다 들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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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출발지가 중요합니다. 길갈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에서 언약 백성으로 살기 시작한 첫 자리입니다. 김회권 교수는 이 점을 이렇게 짚습니다. "길갈로부터 온 하나님의 사자라는 말은 이스라엘의 출애굽 구원 감격과 하나님과 맺은 시내산 계약 의무를 생생하게 상기시키는 예언자임을 의미한다." 곧 사자의 출신지 자체가 메시지입니다. 잊고 있던 근원이 지금 자리로 찾아온 것입니다. 옥스퍼드 원어성경대전은 '이르러'로 번역된 '와야알'이 본디 '올라가다'라는 뜻임에 주목합니다. 해수면보다 낮은 요단 하류의 길갈에서 산지의 보김으로 가는 길은 실제로 오르막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오름은 지리이면서 동시에 신학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두고 온 자리에서 이스라엘이 지금 서 있는 자리로 올라오십니다.
이 '여호와의 사자'가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읽기가 갈립니다. 박유미 교수는 그를 신적 존재, 곧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전달하는 천사로 보면서, 사사기에 여호와의 사자가 자주 등장하는 것은 "하나님이 왕으로서 이스라엘을 직접 통치하신다는 표시"라고 설명합니다. 왕이 없던 시대에 실은 왕이 계셨다는 뜻입니다. 반면 김회권 교수는 대부분의 영어 성경이 천사(angel)로 옮김에도 불구하고 이 사자는 "인간 사자(human messenger)인 것처럼 보인다"고 보며, 전성민 교수 역시 "이 본문에서 여호와의 사자가 굳이 천사일 필요는 없어 보인다"고 말합니다. 어느 쪽으로 읽든 무게중심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전성민 교수의 표현대로 "비록 누군가를 통해 전달되고 있지만, 이스라엘은 분명히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전달자가 누구든 말씀하시는 분은 한 분이십니다.
말씀의 순서에도 복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책망을 앞세우지 않으시고 은혜를 앞세우십니다. 여기 쓰인 '언약'은 히브리어로 '베리티', 곧 '나의 언약'입니다. 언약을 세우시고 소유하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하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어기지 아니하리니'로 옮긴 '로 아페르'에는 절대 부정 '로'가 붙어 있고, 문장 끝에는 '레올람', 곧 '영원히'가 놓입니다. 하나님 편에서는 파기가 없습니다. 그러니 이 책망은 언약이 깨졌다는 통고가 아니라, 깨지지 않는 언약 안에서 백성이 어디에 서 있는지를 묻는 물음입니다. 2절 마지막의 "어찌하여 그리하였느냐"는 문자적으로 "네가 행한 이것이 무엇이냐"입니다. 전성민 교수는 이것을 이유를 궁금해하는 질문이 아니라 잘못을 책망하는 수사적 질문으로 읽고, 박유미 교수는 여기에 하나님의 섭섭한 마음이 배어 있다고 봅니다. 사랑하는 이만이 이렇게 묻습니다.
세 겹의 심판은 서로 맞물려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이제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않으시겠다고 하십니다. 이미 쫓아내지 않고 있던 이스라엘에게 이 말은 당장 아프게 들리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전성민 교수는 이 역설을 정확히 짚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는 것, 특히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 아님에도 할 수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이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사람을 "내버려 두심"이 곧 심판이라고 말하는 로마서 1장을 떠올립니다(롬 1:24, 26, 28). 막지 않으시는 것이 가장 무서운 응답일 수 있습니다. 둘째, 남겨 둔 자들이 "옆구리에 가시"가 됩니다. 처음에는 값싼 노동력이고 이익처럼 보이던 것이 결국 살을 찌르는 존재가 됩니다. 셋째, 그들의 신들이 "올무"가 됩니다. 새가 덫에 걸려 죽듯 이스라엘은 결국 그 신들 때문에 무너질 것입니다. 곧 이 심판 선언은 사사기 전체의 줄거리를 미리 적어 놓은 예고편입니다.
한 가지 더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문제 삼으신 것은 인종이 아니라 예배였습니다. 여호수아서에서 라합과 기브온 주민은 언약 안으로 들어왔고, 룻기에서 모압 여인 룻은 베들레헴 공동체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전성민 교수의 지적대로, 이방인이라도 여호와를 알고 믿을 때에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일원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들의 제단들을 헐라" 하십니다. 문제는 혈통이 아니라 제단입니다. 우리가 누구와 함께 사느냐가 아니라 무엇에 무릎을 꿇느냐가 신앙의 경계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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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한국교회는 무너지겠다고 선언한 적이 없습니다. 다만 헐지 않은 제단들이 오래 남아 있을 뿐입니다. 성공을 예배하는 제단, 규모를 예배하는 제단, 안전을 예배하는 제단은 어느 날 갑자기 세워지지 않았습니다. 쫓아내야 할 것을 쓸모 있다는 이유로 남겨 둔 자리마다 하나씩 세워졌습니다. 하나님의 책망이 아프게 다가오는 지점은 "너희가 나를 버렸다"가 아니라 "너희가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다"입니다. 우리는 대개 하나님을 부인해서가 아니라, 들었으면서도 실행하지 않아서 여기까지 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 각자에게 주어지는 물음은 이것입니다. 내 삶에 아직 헐리지 않은 제단은 무엇입니까. 남겨 두면 편하기 때문에, 당장은 이익이 되기 때문에, 아무도 문제 삼지 않기 때문에 그대로 둔 것이 있습니까. 지금은 순한 얼굴을 하고 있어도 성경은 그것이 결국 옆구리의 가시가 되고 발목의 올무가 된다고 말합니다. 광양사랑의교회는 큰 죄와 싸우기 전에 작은 타협과 먼저 싸우는 공동체가 되기를 원합니다. 예배의 자리에서 결심하는 데서 그치지 말고, 이번 한 주 안에 실제로 헐어 낼 제단 하나를 정해 보십시오. 늦춰 온 화해 한 건, 끊지 못한 습관 하나, 미뤄 온 정직한 고백 하나면 충분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정죄하시려고 길갈에서 올라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잊고 있던 첫 자리를 다시 보여 주시려고 올라오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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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5절 우는 자들이라 불린 곳
하나님은 우리의 눈물보다 우리의 돌이킴을 기다리시는, 진실을 원하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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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사자가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이 말씀을 이르매 백성이 소리를 높여 웁니다(4절). 그래서 그곳 이름이 보김이 되었고, 그들은 거기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렸습니다(5절). 통곡이 있었고 예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 눈물을 하나님이 받으셨다고도, 그들을 용서하셨다고도 적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제단이 하나도 헐렸다는 말이 없습니다. 화자는 여기서 아무 판단도 내리지 않고 다음 장면으로 넘어갑니다. 그리고 그다음 장면은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을 섬기며"(삿 2:11)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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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김'은 '울다', '통곡하다'를 뜻하는 히브리어 동사 '바카'에서 온 복수 능동태 분사형으로 '우는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옥스퍼드 원어성경대전은 이 어원이 본문 4절 자체에 밝혀져 있음을 지적합니다. 곧 이 지명은 사건이 있고 난 뒤에 붙은 이름입니다. 사람들은 그날 자기들이 무엇을 했는지를 이름으로 남겼습니다. 제단을 헐었더라면 그곳은 다른 이름을 얻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남긴 것은 울었다는 사실뿐이었고, 그래서 그 자리는 영원히 '우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신앙의 자리에 우리가 남기는 이름은 우리가 실제로 한 일에서 나옵니다.
이 울음은 홀로 있지 않습니다. 사사기에서 '이스라엘 모든 자손'이라는 표현은 네 번 나오는데(2:4; 10:8; 20:1; 20:26), 처음과 마지막이 모두 우는 장면입니다. 전성민 교수는 칠십인역이 보김을 벧엘의 별명처럼 제시한다는 점을 들어, 사사기가 "벧엘에서 우는 것으로 시작하고 벧엘에서 우는 것으로 끝나는 제자리걸음"을 한다고 말합니다. 시작도 눈물이고 끝도 눈물인데 그사이에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은 책, 그것이 사사기입니다. 그리고 그 두 울음의 이유는 늘 같았습니다.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울음의 반복은 회개의 증거가 아니라 오히려 변하지 않았다는 증거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눈물과 예배는 왜 부족했습니까. 전성민 교수는 사사기 20장 26절과 21장 2-3절의 울음을 나란히 놓고 살핍니다. 그곳에서 백성은 저녁까지 큰 소리로 울며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지만, 곧이어 야베스 길르앗을 향해 똑같은 폭력을 되풀이했습니다. 그는 신현우 교수의 말을 빌려 회개를 이렇게 정의합니다. 회개는 "생각 바꾸기"로서 세계관의 변화 내지 사고방식의 변화이며, "'메타노이아', 즉 사고방식의 변화는 행함의 변화를 내포한다"는 것입니다. 감정만 흔들리고 판단의 틀이 그대로면, 사람은 같은 자리에서 같은 방식으로 다시 넘어집니다. 김회권 교수도 야웨의 사자의 신학적 분석에 "마음이 찔린" 이스라엘이 소리를 높여 울었다고만 적고, 그 이상을 말하지 않습니다. 찔림은 시작일 뿐 결말이 아닙니다.
박유미 교수는 조금 더 너그럽게 읽습니다. "보김의 회개와 눈물이 거짓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다만 이스라엘의 마음이 쉽게 변해버리는 데 그 한계가 있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 말이 우리를 더 아프게 합니다. 그날의 눈물은 연기가 아니었습니다. 진심이었습니다. 진심이었는데도 삶이 바뀌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문제도 대개 거짓 회개가 아니라 짧은 회개입니다. 세례 요한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마 3:8)라고 한 것은 눈물을 의심해서가 아니라, 눈물이 열매까지 가지 못하는 인간의 한계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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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는 우는 데 익숙합니다. 부흥회의 뜨거운 눈물, 새벽제단의 통성기도, 수련회의 결단은 우리 신앙의 소중한 유산입니다. 그러나 보김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그 울음 뒤에 헐린 제단이 있었느냐고 말입니다. 죄를 아파해서 우는 것과 죄의 결과가 두려워서 우는 것은 겉으로 구별되지 않습니다. 구별은 다음 날의 삶에서 드러납니다. 예배당에서 흘린 눈물이 월요일 아침의 결재 한 건, 저녁 식탁의 말투 한마디, 다음 주의 지출 한 줄을 바꾸지 못한다면, 그 예배는 자신을 속이는 경건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는 눈물을 의심하지 말고 눈물 다음을 준비합시다. 기도의 자리에서 마음이 뜨거워지거든 일어나기 전에 한 가지를 적어 두십시오. 오늘 안에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순종 하나면 됩니다. 광양사랑의교회는 은혜받은 다음 무엇을 했는지를 서로 물어 주는 공동체가 되기를 원합니다. "은혜받으셨습니까"라는 인사도 좋지만, 한 주 뒤에 "그때 정하신 그 한 가지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고 물어 주는 형제가 있는 교회가 더 건강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눈물을 귀하게 여기시는 분이지만, 그 눈물이 우리를 데려가려던 자리가 따로 있음을 잊지 않으시는 분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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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7절 여호수아가 사는 날 동안
하나님은 한 사람의 그늘에 기대는 신앙이 아니라 각 사람의 만남으로 알려지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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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절에서 화자는 갑자기 시간을 되돌립니다. "전에 여호수아가 백성을 보내매 이스라엘 자손이 각기 그들의 기업으로 가서 땅을 차지하였고"(삿 2:6). 보김 사건보다 앞선 장면입니다. 그리고 7절이 이어집니다. "백성이 여호수아가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큰 일을 본 자들이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를 섬겼더라." 좋은 문장입니다. 그런데 이 좋은 문장 안에 이미 그늘이 들어 있습니다. '사는 날 동안'이라는 조건절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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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회상은 여호수아 24장 28-31절과 거의 같은 재료로 되어 있습니다. 다른 것은 순서뿐입니다. 전성민 교수는 두 본문을 표로 나란히 놓고 이렇게 정리합니다. 여호수아서는 백성이 땅을 차지함(28절) 다음에 여호수아의 죽음과 장사(29-30절)를 적고 이전 세대의 신실함(31절)으로 마칩니다. 그러나 사사기는 백성이 땅을 차지함(6절) 다음에 곧바로 이전 세대의 신실함(7절)을 놓고, 죽음과 장사(8-9절)를 지나 새 세대에 대한 부정적 진술(10절)로 닫습니다. 결론이 긍정에서 부정으로 바뀐 것입니다. 같은 사실을 어디에 놓느냐가 이야기의 뜻을 바꿉니다. 사사기의 화자는 여호수아의 죽음을 "암울한 역사로 바뀌는 전환점"으로 세웠습니다.
'섬겼더라'로 옮긴 히브리어 '아바드'는 예배하다, 종노릇하다, 일하다를 함께 뜻합니다. 신앙은 감정이 아니라 복무입니다. 그렇다면 여호수아 세대는 왜 복무할 수 있었습니까. 화자는 그 이유를 분명히 적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큰 일을 본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박유미 교수는 이 세대를 두고 "치열한 전쟁의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는 신앙을 갖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홍해를 보았고 요단을 건넜고 여리고가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들의 순종은 관념이 아니라 목격에서 나왔습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 위태로움이 있습니다. 백성의 신실함이 '여호수아가 사는 날 동안'과 '장로들이 사는 날 동안'이라는 시간 안에 갇혀 있다는 것입니다. 성서유니온 매일성경의 표현을 빌리면, 그것은 그들의 신앙이 지도자의 영성에 편승해 있었다는 뜻입니다. 기둥 같은 인물이 서 있는 동안에는 지붕이 버팁니다. 그러나 기둥이 빠지면 지붕이 함께 내려앉습니다. 사람에게 기대어 선 신앙은 그 사람이 사라지는 순간 무너집니다. 김회권 교수가 지적하듯 이 시대의 근본 문제는 "모세나 여호수아같이 하나님의 권위를 대변하여 하나님의 뜻을 선포할 만한 사람이 이스라엘 내에 없었다"는 데 있었는데, 더 깊은 문제는 그런 사람이 없으면 아무도 서지 못했다는 데 있습니다.
성경은 좋은 지도자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여호수아를 '여호와의 종'이라 부르며 최고의 예우로 기립니다. 문제는 지도자가 있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백성이 지도자를 통해 하나님과 만나는 데까지 나아가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사도 바울이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고전 3:6)라고 말한 것은 이 위험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참된 목회자는 사람들을 자기에게 붙들어 매지 않고 그리스도께 이어 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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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한국교회의 아픔 가운데 하나가 여기 있습니다. 한 목회자의 은사와 헌신 위에 세워진 공동체가 그분이 떠난 뒤 급격히 흔들리는 일을 우리는 여러 번 보았습니다. 사람이 나빠서가 아니라 구조가 그렇게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담임목사가 기도하니 교회가 기도하는 것으로 보였고, 부흥사가 외치니 회개가 일어나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가 죽은 다음 날에도 남아 있는 것이 그 공동체의 실제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각 사람이 자기 발로 서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매일성경을 스스로 펴서 읽는 습관, 목회자의 해설이 아니라 자기 삶에서 하나님을 만나 본 경험, 남의 간증이 아니라 자기 입으로 하는 고백이 그 훈련입니다. 광양사랑의교회는 목사가 앞에서 이끄는 교회를 넘어,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 자리에서 하나님을 아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이번 주 소그룹에서 서로에게 물어봅시다. 최근 한 달 안에 하나님이 나에게 하신 일 한 가지를 말할 수 있습니까. 대답할 수 있다면 그 신앙은 누군가 떠나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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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10절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다른 세대
하나님은 대를 이어 알려지기를 원하시는, 언약으로 우리를 아시고 우리에게 알려지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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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백십 세에 죽으매 무리가 그의 기업의 경내 에브라임 산지 가아스 산 북쪽 딤낫 헤레스에 장사하였고"(삿 2:8-9). 그리고 10절이 이 단락 전체의 무게를 떠받칩니다. "그 세대의 사람도 다 그 조상들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한 세대가 다 돌아갔고, 다른 세대가 일어났고, 그 세대는 알지 못했습니다. 화자는 이 세 문장으로 사사기의 문을 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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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여호와의 종'이라는 칭호가 눈에 띕니다. 박유미 교수는 이 호칭이 "이전에 오직 모세에게만 붙여진 것으로서 최고의 명예를 나타낸다"고 설명하며, 여호수아가 사후에 모세와 같은 반열에 오르게 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모세의 시종으로 시작한 사람이 죽은 뒤에 모세와 나란히 불립니다. 이보다 좋은 묘비명은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영예로운 묘비 바로 옆에 10절을 붙여 놓았습니다. 가장 신실했던 사람의 무덤과 가장 어두운 세대의 등장이 한 문단 안에 있습니다. 화자는 아무 설명도 덧붙이지 않습니다. 다만 나란히 놓을 뿐입니다.
10절의 히브리어 문장은 강조로 시작합니다. '감 콜 하도르 하후', 곧 '그 세대의 사람도 모두'가 문장 서두에 놓입니다. 여호수아뿐 아니라 출애굽을 경험한 사람들까지 하나도 남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뒤이어 접속사 '베감', 곧 '또한'이 쓰여 새 세대가 여호와를 알지 못했을 뿐 아니라 여호와께서 행하신 일도 '또한' 알지 못했음을 강조합니다. 모름이 겹으로 쌓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의 이야기도 모릅니다.
여기서 '알다'가 무슨 뜻인지가 결정적입니다. 김회권 교수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알다'라는 말은 객관적인 앎이 아니라 실존적·계약적 친밀감과 결속감을 말한다. 야웨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얼마나 큰 은혜와 구원의 대사를 베풀어 주셨는지를 알고 야웨 하나님께 의존하고 그의 명령을 준행하는 것이 '야웨를 아는' 것이다." 그는 나아가 고대 근동의 종주-봉신 조약 문서에서 '알다'가 봉신이 종주의 요구를 인정하고 받든다는 뜻으로 쓰였음을 지적하며, 여호수아 사후 세대가 '야웨와 그의 위대한 구원사를 알지 못했다'는 것은 곧 "종주-봉신 조약을 깨뜨렸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10절은 지식의 부족을 지적하는 문장이 아닙니다. 관계의 단절을 선고하는 문장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두 가지 이유가 함께 제시됩니다. 첫째는 전달의 실패입니다. 박유미 교수는 "선조들이 다음 세대에게 야웨에 관한 교육을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여호수아는 죽기 전에 다음 세대를 모아 언약을 갱신하고 정체성을 새겼지만(수 24장), 그 일을 이어받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둘째는 체험의 부재입니다. 같은 학자가 이렇게 덧붙입니다. "제 아무리 신학적 지식이 많아도 삶 속에서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능력을 실제로 체험하지 못하면 소용이 없다. 신앙은 단지 지식적으로 가르친다고 생겨나거나 전수되는 것이 아니다." 정복 2세대는 치열한 전쟁 없이 부모가 물려준 기업 안에 머물면 되었습니다. 편안했고, 그래서 하나님을 만날 자리가 없었습니다.
그 결과를 김회권 교수는 한 문장으로 요약합니다. "어느 시대이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대는 사사 시대를 경험한다." 사사 시대는 지나간 연대가 아니라 되풀이되는 조건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대가 등장하면 그 시대는 반드시 배교와 심판과 부르짖음과 구원의 순환에 빠집니다. 그리고 그 순환은 나선형이어서 돌 때마다 조금씩 더 아래로 내려갑니다. 사사기 마지막의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 21:25)는 이 10절에서 이미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주님은 대제사장의 기도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아는 것이 곧 생명입니다. 그리고 그 앎은 우리 노력의 결실이기 전에 하나님이 자신을 알리신 결과입니다. 여호수아가 죽은 뒤 대가 끊긴 자리에서, 하나님은 마침내 죽지 않는 여호수아를 보내셨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여호수아와 같은 이름입니다. 그분은 사는 날이 끝나지 않는 지도자이시고, 그래서 그분께 붙은 신앙은 한 세대에서 끊기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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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한국교회의 가장 아픈 지점이 바로 여기입니다. 우리는 자녀에게 많은 것을 물려주었습니다. 예배당을 물려주었고 제도를 물려주었고 신앙의 형식을 물려주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건지셨는지, 어느 밤에 어떻게 기도를 들으셨는지, 무너진 자리에서 어떻게 붙드셨는지 그 이야기는 물려주지 못했습니다. 기업은 물려주었으나 기억은 물려주지 못한 것입니다. 땅은 잃어도 다시 찾을 수 있지만 신앙을 잃으면 현재와 미래를 함께 잃습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가 할 일은 분명합니다. 자녀와 다음 세대에게 교리보다 먼저 이야기를 들려주는 일입니다. 밥상에서, 차 안에서, 잠들기 전에 "아빠는 그때 이렇게 기도했고 하나님이 이렇게 하셨다"고 말해 주는 일입니다. 그 이야기가 있는 아이는 훗날 자기 광야에서 그 이야기를 꺼내 볼 것입니다. 광양사랑의교회는 다음 세대를 프로그램으로 지키려 하기 전에 이야기로 지키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노년의 성도가 젊은 부모에게, 젊은 부모가 아이에게, 교사가 학생에게 자기가 만난 하나님을 말하는 교회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 각자는 오늘 이렇게 물읍시다. 내가 물려줄 이야기가 지금 만들어지고 있습니까. 물려줄 기억이 없다면 오늘부터 만들면 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 삶에서 일하고 계시고, 그 일을 알아보고 말로 옮기는 사람에게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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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주님,
길갈에서부터 보김까지
우리를 찾아 올라오신 분은 주님이셨습니다.
애굽에서 건지시고
맹세하신 땅으로 들이시고
언약을 영원히 어기지 않겠다 하신
그 신실하심을 잊고 살았습니다.
헐어야 할 제단을 남겨 둔 채
쓸모를 셈하던 마음을 용서하소서.
주의 목소리를 듣고도
실행하지 않은 날들을 고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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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을 원하시는 하나님,
우리는 울 줄은 알았으나
헐 줄은 몰랐습니다.
눈물이 흘러간 자리에
제단이 그대로 서 있었습니다.
감정만 뜨거워지고
생각은 바뀌지 않는 회개에서
우리를 건져 주옵소서.
오늘 흘린 눈물이
내일의 걸음이 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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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분이신 주님,
여호수아가 사는 날 동안만
주를 섬기던 백성처럼
우리도 누군가의 그늘에 기대어
믿는 척하지 않게 하옵소서.
사람이 떠나도 남아 있는 믿음을
우리 각 사람에게 주시고
내 입으로 하는 고백과
내 몸으로 하는 순종을 배우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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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려지기 원하시는 하나님,
땅은 물려주었으나
이야기를 물려주지 못한 세대가 되지 않게 하소서.
주께서 우리를 어떻게 건지셨는지
어떻게 기도를 들으셨는지
자녀에게 말해 줄 입을 열어 주시고
다음 세대가 주를 아는 세대로
자라가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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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님,
오늘 광양사랑의교회가
울고 끝나는 보김이 아니라
제단이 헐리는 자리가 되게 하시고
기업과 함께 기억을 물려주는
믿음의 가정과 공동체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의 작은 순종 하나가
한 세대를 지키는 이야기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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