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01:22-36 벧엘이라 부르고 루스를 남기다

by 평화의길벗 posted Sep 02,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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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 01:22-36 벧엘이라 부르고 루스를 남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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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 가문이 벧엘로 올라가고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하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성읍에서 나오는 한 사람에게 선대를 약속하는 거래를 먼저 제안해 입구를 알아내고, 그와 그의 가족을 놓아 보냅니다. 살아 나간 그는 헷 사람들의 땅에 또 하나의 루스를 세웁니다(22-26절). 이어 므낫세와 에브라임은 벧스안과 므깃도와 게셀의 주민을 쫓아내지 않고 강성해진 뒤에야 노역을 시켰고(27-29절), 스불론과 아셀과 납달리는 도리어 가나안 족속 가운데 끼어 사는 처지가 됩니다(30-33절). 마지막으로 단 지파는 아모리 족속에게 산지로 몰려 골짜기에 내려오지 못합니다(34-36절). 여호와께서 함께하신다는 선언으로 열린 장이, 밀려난 지파의 경계선으로 닫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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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사기 1장은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로 시작해 "아모리 족속의 경계는 아그랍빔 비탈의 바위부터 위쪽이었더라"로 끝납니다. 시작은 하나님께 묻는 입이었고 끝은 밀려난 발자국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 내리막의 후반부입니다. 화자는 지파들을 남쪽에서 북쪽으로 차례로 세우는데, 북으로 올라갈수록 실패가 더 짙어집니다. 므낫세와 에브라임은 "쫓아내지 못하매"라 하고, 스불론은 노역을 시키고, 아셀과 납달리는 아예 가나안 족속 "가운데" 끼어 살며, 단은 산지로 쫓겨납니다. 박유미 교수는 이 배열을 두고 "공교롭게도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점점 더 처참한 실패의 모습이 드러난다"고 정리합니다. 사사기는 논문이 아니라 이야기입니다. 화자는 설명하지 않고 배열합니다. 그 배열 자체가 신학입니다.

# 벧엘은 원래 루스였습니다. 야곱이 하란으로 가던 밤 돌베개를 베고 누웠다가 하늘 사다리를 보고 "이곳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그 성읍의 이름을 벧엘이라 불렀습니다(창 28:17-19). 옥스퍼드 원어성경대전은 '루스'가 '편도나무'를 뜻하며 그 나무가 많아 붙은 이름일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곧 루스는 땅이 스스로 붙인 이름이고 벧엘은 하나님을 만난 사람이 붙인 이름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정복이 끝난 뒤에도 '루스'가 사라지지 않았다고 보도합니다. 살아 나간 한 사람이 헷 사람들의 땅에 가서 또 하나의 루스를 세웠고, 그 이름이 "오늘까지" 남았습니다. 이름은 벧엘이 되었는데 루스는 여전히 어딘가에서 자라고 있는 것입니다.

# 이 단락을 읽는 열쇠는 히브리어 동사 하나입니다. 27절의 "쫓아내지 못하매"와 28절의 "다 쫓아내지 아니하였더라"는 우리말로는 능력의 문제와 의지의 문제로 갈라지지만, 원문은 둘 다 '로 호리쉬'라는 같은 표현입니다. 곧 "쫓아내지 않았다"로 읽어야 합니다. 뒤이어 나오는 모든 지파의 문장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에게 없었던 것은 힘이 아니라 뜻이었습니다. 실제로 28절은 "이스라엘이 강성한 후에야 가나안 족속에게 노역을 시켰고"라고 말합니다. 쫓아낼 만큼 강해진 다음에도 쫓아내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너희는 이 땅의 주민과 언약을 맺지 말며 그들의 제단들을 헐라"고 명하셨습니다(삿 2:2; 출 34:12,15; 신 7:2). 오늘 본문은 그 명령이 어디서 어떻게 미뤄졌는지를 지파별로 기록한 조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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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26절 벧엘을 얻고 루스를 남기다

하나님은 함께하겠다 약속하신 그 자리에서 우리가 고른 지름길까지 끝내 지켜보시는 신실하신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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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 가문도 벧엘을 치러 올라갑니다. 화자는 곧바로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시니라"(삿 1:22)고 덧붙입니다. 앞서 유다 지파에게 붙였던 것과 똑같은 보증입니다. 그런데 그 보증 뒤에 이어지는 것은 승리의 함성이 아니라 정탐 이야기입니다. 요셉 가문은 벧엘을 정탐하게 하였고, 정탐꾼들은 성읍에서 나오는 한 사람을 만나 "청하노니 이 성읍의 입구를 우리에게 보이라 그리하면 우리가 네게 선대하리라"(삿 1:24)고 제안합니다. 그 사람은 입구를 가리켰고, 그들은 칼날로 성읍을 쳤으되 오직 그 사람과 그의 가족은 놓아 보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헷 사람들의 땅에 가서 성읍을 건축하고 그 이름을 루스라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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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눈여겨볼 것은 화자가 "요셉 가문"이라는 말을 문장 맨 앞에 따로 세워 두었다는 점입니다. 히브리어는 '베트 요세프'를 앞에 두고, 다시 '감 헴' 곧 '그들도 또한'을 동사의 주어로 반복합니다. 유다도, 베냐민도 자기 몫의 전쟁을 치렀고 이제 요셉 가문 '그들도 또한' 나섰다는 뜻입니다. '지파'를 뜻하는 '맛테'나 '자손'을 뜻하는 '베네'가 아니라 '집'을 뜻하는 '베트'가 쓰인 것은, 이 이름이 므낫세와 에브라임 두 지파를 함께 묶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북쪽의 가장 강한 두 지파가 손을 잡고 나선 연합 작전입니다. 게다가 벧엘은 해발 천 미터에 가까운 고지대 요새였습니다. 22절의 "올라가니"는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오르는 동사 '알라'입니다. 강한 두 지파가 힘을 합쳐 험한 고지로 올라갔고, 무엇보다 여호와께서 그들과 함께하셨습니다. 이보다 더 좋은 조건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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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화자는 승리 대신 방법을 자세히 적습니다. 유다 지파의 베섹 전투를 보도할 때는 전략을 한 마디도 소개하지 않고 승리만 말했는데(4-7절), 여기서는 정탐과 거래가 먼저 나옵니다. 옥스퍼드 원어성경대전은 바로 이 대비를 지적하며 "요셉 족속은 하나님을 의뢰함으로 전쟁을 치르기보다는 자신의 지혜를 활용해 전쟁을 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정탐하기 전에 어떻게 싸울지를 하나님께 먼저 여쭈었어야 했습니다. 사사기 1장이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여쭈어 이르되 우리 가운데 누가 먼저 올라가서"(1:1)로 열렸던 것을 기억한다면, 22절에서 사라진 것이 무엇인지 분명해집니다. 함께하시겠다는 약속은 그대로인데, 여쭙는 입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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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무거운 것은 24절의 약속입니다. "선대하리라"로 옮긴 말은 히브리어 '헤세드'입니다. 하나님의 그치지 않는 인애를 가리킬 때 쓰이고, 사람 사이에서는 언약에 근거한 신의를 가리킬 때 쓰이는 낱말입니다. 문자 그대로 옮기면 "우리가 너와 함께 헤세드를 만들겠다"가 됩니다. 곧 이것은 단순한 흥정이 아니라 언약의 언어입니다. 가나안 주민과 언약을 맺지 말라고 하신 그 명령을, 요셉 가문은 언약의 낱말을 입에 올리며 어긴 것입니다. 여리고에서는 라합이 먼저 정탐꾼을 숨겨 주고 "여호와께서 위로 하늘에서도 아래로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수 2:11)고 신앙을 고백한 다음에 언약을 청했습니다. 여기서는 아무런 위험도 없는데 이스라엘 쪽이 먼저 제안합니다. 박유미 교수는 두 장면을 나란히 놓고, 라합이 이스라엘의 구성원이 되어 다윗의 족보에까지 오른 것과 달리 "루스에서 나온 한 사람이 요셉 가문의 정탐꾼들과 맺은 언약은 일종의 거래일 뿐이다"라고 못 박습니다. 그 사람은 이름조차 기록되지 않고, 끝내 가나안 사람으로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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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회권 교수는 이 대목을 "요셉 지파는 여리고성 정복 작전에서처럼 내부 정탐꾼을 활용하여 루스성(벧엘)을 손쉽게 정복한다"고 요약합니다. '손쉽게'라는 말이 이 단락의 성격을 정확히 짚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손쉬움으로 확장되지 않습니다. 벧엘은 함락되었지만 루스는 살아남았습니다. 살아 나간 그 사람이 헷 사람들의 땅에 세운 새 루스는 "오늘까지 그 곳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화자가 굳이 "오늘까지"를 붙인 이유가 있습니다. 그날의 작은 편의가 오늘까지 지도 위에 남아 있다는 뜻입니다. 요셉 가문은 성읍 하나를 얻었지만, 그 성읍의 옛 이름은 다른 땅에서 다시 세워졌습니다. 우리가 서둘러 치운 것들은 사라지지 않고 대개 이사를 갑니다. 그리고 훗날 여로보암이 금송아지를 세운 곳이 바로 이 벧엘이었습니다(왕상 12:29). 이름은 하나님의 집인데 내용은 우상의 집이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를 지켜 주는 것은 우리가 붙인 이름이 아니라, 매일 새로 드리는 순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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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는 지난 백여 년 동안 수많은 벧엘을 세웠습니다. 예배당을 짓고 학교를 세우고 병원을 열었습니다. 그 이름들은 대부분 아직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이름이 남아 있다는 것과 그 자리가 여전히 하나님의 집이라는 것은 다른 이야기입니다. 어제의 순종은 감사의 기억이 될 수는 있어도 오늘의 순종을 대신하지 못합니다. 거룩한 과거가 거룩한 현재를 보장하지 않습니다. 은혜의 장소도 방치되면 다시 세속의 공간이 됩니다. 그래서 벧엘은 날마다 다시 정복되어야 합니다. 신앙에는 '이미 끝난 정복'이 없습니다. 우리 개인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회심의 날에 하나님께 드린 영역이 지금도 그분의 통치 아래 있는지, 이름만 남고 실제로는 루스로 되돌아간 자리가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광양사랑의교회는 오늘 이 물음 앞에 함께 섭니다. 우리가 사역을 계획할 때 먼저 여쭙습니까, 아니면 먼저 방법을 고릅니까. 효율이 나쁘지는 않습니다. 다만 효율이 순종보다 앞에 서는 순간, 우리는 언약의 낱말로 언약을 어기는 자리에 서게 됩니다. 오늘 하루, 어떤 일을 시작하기 전에 "주님, 어떻게 할까요"를 먼저 여쭙는 한 번의 멈춤이 우리 안의 루스를 자라지 못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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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29절 쫓아내지 않고 노역을 시키다

하나님은 애굽의 노역에서 당신의 백성을 건져 내신 분이시기에, 그 백성이 다시 남에게 노역을 지우는 자리에 서는 것을 견디지 못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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므낫세는 벧스안과 다아낙과 돌과 이블르암과 므깃도, 그리고 거기 딸린 마을들의 주민을 쫓아내지 못했고, 가나안 족속은 "결심하고 그 땅에 거주하였더니"라고 기록됩니다. 28절은 그 뒤를 이렇게 잇습니다. "이스라엘이 강성한 후에야 가나안 족속에게 노역을 시켰고 다 쫓아내지 아니하였더라." 에브라임도 같습니다. 게셀에 거주하는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못했고, 그들은 게셀에서 "그들 중에" 거주하게 되었습니다. 남쪽을 대표하는 유다와 북쪽을 대표하는 에브라임이 나란히 미완의 정복으로 기록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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므낫세가 손대지 못한 성읍들의 이름을 지도 위에 놓아 보면 이 실패의 크기가 보입니다. 벧스안은 요단 계곡과 이스르엘 평야가 만나는 길목에 선 가나안 통치의 핵심 거점이자 무역의 중심지였습니다. 다아낙과 므깃도는 해안 대로가 산지를 넘어가는 관문으로, 고대 근동에서 가장 여러 번 전투가 벌어진 자리입니다. 게셀은 유다 산지와 지중해 평야가 만나는 지점이며 동서남북을 잇는 교통의 요충지였습니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이 남겨 둔 곳은 변두리가 아니라 목입니다. 길과 시장과 곳간이 있는 자리를 그대로 두고, 살 만한 언덕만 차지한 것입니다. 게셀이 온전히 이스라엘의 영토가 된 것은 한참 뒤 솔로몬 시대에 이르러서였습니다(왕상 9:15-17). 한 세대가 미룬 순종의 값을 여러 세대가 나누어 치른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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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본문의 중심은 지리가 아니라 동기입니다. 앞의 배경에서 살핀 대로 27절의 "쫓아내지 못하매"와 28절의 "다 쫓아내지 아니하였더라"는 원문에서 같은 표현입니다. 그러니 이 문장들은 능력의 고백이 아니라 의지의 고백으로 읽어야 합니다. 결정적인 증거가 28절에 있습니다. 강성해진 다음에도 쫓아내지 않았습니다. 강해진 힘으로 그들이 한 일은 진멸이 아니라 노역이었습니다. 히브리어 '마스'는 부역 노동, 곧 강제로 매긴 노동을 뜻합니다. 처음에는 두려움 때문에 못 했는데 나중에는 유익 때문에 안 한 것입니다. 처음에는 철 병거가 무서웠고 나중에는 가나안의 노동력이 아까웠습니다. 실패의 성격이 바뀐 이 지점이 사사기 1장의 가장 어두운 대목입니다. 신앙은 효율의 문제가 아니라 순종의 문제인데, 이스라엘은 계산기를 먼저 두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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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견딜 수 없는 아이러니가 겹칩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벽돌을 굽던 백성입니다. 감독관의 채찍 아래서 부르짖었고, 그 부르짖음을 들으신 하나님이 그들을 건져 내셨습니다. "내가 애굽에서 내 백성이 받는 고난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출 3:7). 그런데 그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와 처음으로 손에 쥔 권력을 쓴 방식이 노역이었습니다. 압제에서 건짐받은 자가 압제하는 자가 된 것입니다. 김회권 교수는 므낫세 지파가 "이스라엘이 강성한 후에야 그들에게 노역을 시킴으로써 실제로 그 땅을 지배할 수 있었다"고 정리하면서, 이 지배가 하나님이 명하신 정복과는 다른 성격의 것임을 분명히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신 것은 땅의 지배가 아니라 땅의 성별이었습니다. 사람을 이익의 도구로 삼아도 된다는 발상은, 세상의 착취 구조를 그대로 옮겨 온 것일 뿐입니다. 애굽에서 나온 백성이 애굽을 닮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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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의 문맥에서 보면 이 선택의 값은 곧바로 청구됩니다. 사사기 2장에서 여호와의 사자는 길갈에서 보김으로 올라와 "그들이 너희 옆구리에 가시가 될 것이며 그들의 신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리라"(삿 2:3)고 선언합니다. 지금은 값싼 노동력으로 보이는 이들이 뒷날 옆구리를 찌르는 가시가 됩니다. 이익으로 남겨 둔 것이 고통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이 미완의 정복은 마침내 참된 여호수아, 곧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게 합니다. 그분은 사람을 노역시켜 나라를 세우지 않으시고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하시며 자기를 내어 주셨습니다. 종의 형체를 입으신 왕만이 사람을 수단으로 삼지 않는 나라를 세우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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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는 성장의 시대에 많은 것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사람을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 대한 자리가 없었는지 정직하게 물어야 합니다. 사역의 성과를 위해 사람을 소모하고, 헌신이라는 이름으로 누군가의 시간과 몸을 값없이 가져다 쓰고, 숫자가 오르는 동안 지쳐 나가떨어진 이들을 못 본 척한 일은 없었습니까. 노역은 채찍이 있어야만 노역이 아닙니다. 거절할 수 없게 만드는 분위기도 노역입니다. 개인의 삶에서도 같은 물음이 필요합니다. 나에게 이익이 되기 때문에 정리하지 못하고 남겨 둔 관계나 습관이 있지 않습니까. 끊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직 쓸모가 있어서 두고 있는 것, 그것이 오늘 본문의 노역입니다. 광양사랑의교회는 사역을 계획할 때마다 "이 일이 누구의 어깨 위에 얹히는가"를 함께 묻는 공동체가 되기를 원합니다. 열매를 세기 전에 사람을 세고, 성과를 말하기 전에 쉼을 말하는 교회가 애굽에서 나온 백성답습니다. 오늘 우리가 부리는 힘이 있다면, 그 힘으로 누군가를 세우는 데 쓰기로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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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33절 그들 가운데 끼어 살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이 세상 한복판에서도 끝내 구별된 자로 살기를 원하시는 거룩하신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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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불론은 기드론 주민과 나할롤 주민을 쫓아내지 못했고, 가나안 족속이 "그들 중에 거주하면서" 노역을 하였습니다. 아셀은 악고와 시돈과 알랍과 악십과 헬바와 아빅과 르홉 주민을 쫓아내지 못했고, 결과는 뒤집힙니다. "아셀 족속이 그 땅의 주민 가나안 족속 가운데 거주하였으니 이는 그들을 쫓아내지 못함이었더라"(삿 1:32). 납달리도 벧세메스와 벧아낫 주민을 쫓아내지 못하고 "그 땅의 주민 가나안 족속 가운데 거주하였으나" 그들에게 노역을 시켰습니다. 세 지파의 문장이 조금씩 다른데, 그 차이가 이 단락의 전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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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는 전치사 하나에 있습니다. 므낫세와 에브라임과 스불론에게는 가나안 족속이 "그들 중에" 거주했습니다. 주어는 이스라엘이고 손님은 가나안입니다. 그런데 아셀과 납달리에 이르면 문장이 뒤집혀 이스라엘이 "가나안 족속 가운데" 거주합니다. 주인과 손님이 바뀐 것입니다. 박유미 교수는 이 역전을 두고 "이들은 자신의 기업에서 가나안 족속들을 쫓아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들 가운데 끼어 사는 처지가 되었다"고 표현합니다. 매일성경도 같은 지점을 "주객전도"라 부릅니다. 아셀이 받은 땅은 악고와 시돈을 포함한 해안 지역으로 토지가 몹시 비옥했습니다. 살 만했다는 뜻입니다. 살 만하니까 더 싸우지 않았고, 싸우지 않으니까 어느새 자기 땅에서 세입자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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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달리가 남겨 둔 성읍의 이름은 더 아픕니다. 벧아낫은 '아낫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아낫은 가나안 신화에서 바알의 배우자로 등장하는 전쟁과 다산의 여신입니다. 벧세메스는 '태양의 집'입니다. 곧 납달리가 손대지 못한 곳은 가나안 종교의 심장부였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집'(벧엘)을 얻고 '아낫의 집'과 '태양의 집'은 그대로 둔 셈입니다. 예배의 자리를 하나 얻었다고 해서 나머지 제단이 저절로 무너지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제단들을 헐라"(삿 2:2)고 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제단은 건축물이 아니라 세계관입니다. 어떤 신에게 절하느냐가 무엇을 두려워하고 무엇을 갈망하며 무엇을 위해 자녀를 기르는지를 결정합니다. 제단을 남겨 두면 언젠가 그 제단이 나를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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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회권 교수는 이 대목을 지파별 형세의 차이로 읽어 냅니다. 스불론은 "그들에게 노역을 강요할 만큼은 우세했다"는 점에서 다수파였지만, 아셀 지파는 "가나안 원주민 가운데서 소수파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은 단순한 신앙 실패담이 아니라 문화적 소수자가 되어 가는 과정에 대한 보고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은 언제나 조용합니다. 어느 날 갑자기 배교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먼저 함께 살고, 다음에 함께 일하고, 그다음에 통혼하고, 마침내 "그들의 신들을 섬겼더라"(삿 3:6)에 이릅니다. 사사기 3장이 그 결말을 미리 적어 두었습니다. 구별을 잃는 일에는 큰 사건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어그러진 가치관에 삶의 가장자리를 조금씩 내주면, 그것이 어느새 중심으로 들어와 주도권을 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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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성경은 세상에서 빠져나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요 17:15)라고 기도하셨습니다. 문제는 가나안 가운데 사는 것 자체가 아니라 가나안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오늘 한국교회는 세상 한복판에 있습니다. 그 자리에서 우리가 세상의 언어를 빌려 자기 존재를 설명하기 시작하면, 복음이 문화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가 복음을 해석하게 됩니다. 교회가 성공과 효율과 소비의 문법으로 자기를 소개하는 순간, 이미 우리는 가나안 족속 가운데 거주하는 아셀입니다. 개인의 삶도 다르지 않습니다. 신앙이 삶의 중심에서 조금씩 밀려나 주일 오전 두 시간의 취미로 축소되고 있지 않은지 살펴야 합니다. 광양사랑의교회는 세상을 등지는 교회가 아니라 세상 한복판에서 다르게 사는 교회이기를 소망합니다. 이웃과 함께 일하고 함께 밥을 먹되, 무엇을 두려워하고 무엇을 소망하는지에서는 분명히 다른 사람들. 그 다름이 우리의 선교입니다. 오늘 하루, 내가 사는 자리에서 남들과 똑같이 하지 않기로 한 한 가지를 정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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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4-36절 산지로 몰린 단, 전갈 비탈의 경계

하나님은 밀려난 자리에서도 당신의 백성을 잊지 않으시고 다시 구원자를 일으키시는 신실한 왕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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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은 단 지파입니다. "아모리 족속이 단 자손을 산지로 몰아넣고 골짜기에 내려오기를 용납하지 아니하였으며"(삿 1:34). 아모리 족속은 헤레스 산과 아얄론과 사알빔에 자리를 굳혔고, 뒷날 요셉 가문의 힘이 강성해진 뒤에야 노역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1장은 이렇게 닫힙니다. "아모리 족속의 경계는 아그랍빔 비탈의 바위부터 위쪽이었더라"(삿 1:36). 지파의 승전보가 아니라 이방 족속의 국경선이 이 장의 마지막 문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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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의 주어를 보십시오. 앞의 모든 단락에서는 이스라엘 지파가 주어였습니다. 므낫세가, 에브라임이, 스불론이, 아셀이, 납달리가 무엇을 하지 않았다고 기록됩니다. 그런데 34절에서는 처음으로 아모리 족속이 주어로 나섭니다. 이스라엘은 목적어로 밀려납니다. 박유미 교수는 "사사기 1:34은 아예 아모리 족속을 주어로 삼아 이야기를 전한다"고 지적하며 이것이 단순한 서술 변화가 아님을 짚습니다. 문법이 바뀌면 형세가 바뀐 것입니다. 주도권을 잃은 사람은 자기 이야기의 주어 자리에서도 밀려납니다. 게다가 단 지파가 원래 받은 기업은 유다와 인접한 해안 평야의 비옥한 땅이었습니다. 가장 좋은 땅을 받고 가장 좁은 자리로 몰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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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유다 지파는 골짜기 주민에게 철 병거가 있어 쫓아내지 못했다고 했습니다(1:19). 그런데 단 지파는 철 병거가 필요 없는 산지에서조차 쫓겨납니다. 문제가 병거가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김회권 교수는 "아모리 족속의 굳은 결심에 밀려 단 지파가 산으로 쫓겨 간 것"이라고 정리합니다. 여기서 '결심'이라는 말이 뼈아프게 들립니다. 27절에서도 가나안 족속이 "결심하고 그 땅에 거주하였더니"라고 했고, 35절에서도 아모리 족속이 "결심하고" 헤레스 산과 아얄론과 사알빔에 거주했습니다. 가나안 쪽에는 결심이 있었고 이스라엘 쪽에는 계산이 있었습니다. 그 차이가 국경선을 그었습니다. 단 지파가 땅을 잃기 전에 먼저 잃은 것은 거룩한 상상력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기업을 차지할 수 있다는 상상력, 말씀을 눈앞의 현실보다 크게 믿는 상상력, 산지에 안주하지 않고 골짜기까지 내려가는 순종의 상상력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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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절의 지명도 예사롭지 않습니다. '아그랍빔'은 '전갈들'이라는 뜻이고, 이 비탈은 영어 성경에서 '전갈 고개'(Scorpion Pass)로 옮겨집니다. 더 아픈 것은 위치입니다. 여호수아 15:3에 따르면 아그랍빔 비탈은 원래 유다 지파에게 분배된 남쪽 경계 안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비탈 위쪽이 아모리 족속의 경계로 기록됩니다. 유다의 땅이 줄어든 것입니다. 사사기 1장은 유다의 승리로 화려하게 열렸다가 유다의 지경이 잘려 나간 자리에서 닫힙니다. 시작과 끝을 나란히 놓으면 화자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분명해집니다. 순종하면 지경이 넓어지고, 미루면 지경이 줄어듭니다. 그리고 훗날 단 지파는 이 좁은 자리를 견디지 못하고 북쪽 라이스로 이주해 미가의 신상과 레위인을 훔쳐 가는 부끄러운 이야기의 주인공이 됩니다(삿 18장). 한 번 밀려난 자리는 다음 세대의 출발선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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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여기서 멈추면 사사기를 절반만 읽은 것입니다. 화자는 단 지파를 마지막에 놓았지만, 사사기는 단 지파 출신 삼손의 이야기로 끝을 향해 갑니다. 유다 지파 갈렙의 승리로 시작한 1장이 단의 패배로 닫히듯, 사사들의 이야기도 유다 지파 옷니엘로 시작해 단 지파 삼손으로 닫힙니다. 곧 화자는 가장 밀려난 지파를 잊지 않았습니다. 하나님도 그러하셨습니다. 산지로 쫓긴 그 지파에서도 하나님은 사사를 일으키셨습니다. 배교와 부르짖음과 구원자와 안식이 돌고 도는 그 어두운 순환 속에서도, 매번 먼저 움직이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이는 그들이 대적에게 압박과 괴롭게 함을 받아 슬피 부르짖으므로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셨음이거늘"(삿 2:18). 그리고 그 반복되는 구원자들 끝에, 다시는 죽지 않는 한 분 구원자가 오십니다. 스불론과 납달리 땅, 곧 이스라엘이 가장 먼저 이방의 그늘에 내준 그 갈릴리에서 큰 빛이 비쳤습니다(사 9:1-2; 마 4:15-16). 하나님은 우리가 가장 크게 실패한 자리를 골라 구원을 시작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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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한국교회는 여러 영역에서 밀려나 있습니다. 공적 언어의 자리, 문화의 자리, 다음 세대의 자리에서 우리는 점점 산지로 올라갑니다. 그러나 밀려난 것보다 무서운 것은 밀려난 자리를 정상으로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산지에 오래 살면 골짜기가 원래 남의 땅인 줄 압니다. 우리가 회복해야 할 첫 번째는 전략이 아니라 상상력입니다. 하나님이 이 도시를, 이 학교를, 이 일터를 여전히 사랑하신다는 상상력 말입니다. 개인의 삶에서도 그렇습니다. 오래 실패한 영역, 이미 포기해 버린 관계와 습관 앞에서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라고 말하기 시작하면 그것이 아그랍빔 비탈입니다. 광양사랑의교회는 밀려난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는 교회이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잃은 골짜기를 하나님께 다시 여쭙고, 작은 한 걸음이라도 내려가 봅시다. 산지에 갇힌 채로도 하나님은 사사를 일으키셨고, 마침내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크지 않아도 좋습니다. 오래 미뤄 둔 전화 한 통, 다시 열어 보는 성경 한 장, 포기했던 이름 하나를 위한 짧은 기도면 충분합니다. 그 작은 걸음이 우리의 지경을 다시 넓히는 첫 뼘이 됩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의 좁은 자리도 결코 마지막 자리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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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주님,

벧엘로 올라가는 길에도

함께하겠다 말씀하신 분은 주님이셨습니다.

그 약속 앞에서 우리는

여쭙는 대신 방법을 골랐습니다.

손쉬운 길을 택한 그날의 걸음이

오늘까지 이름으로 남아 있음을 봅니다.

우리 안에 아직 자라는 루스를

주의 빛 앞에 내어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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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굽에서 우리를 건지신 하나님,

채찍 아래 부르짖던 우리를

기억해 주신 분이 주님이신데

힘이 생기자 우리는

사람을 이익으로 헤아렸습니다.

쫓아내야 할 것을 두고

쓸모를 셈한 마음을 용서하소서.

우리 손에 주신 힘이

누군가를 세우는 데 쓰이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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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하신 하나님,

세상 한복판에 우리를 두시고

그 가운데서 다르게 살라 하셨습니다.

살 만한 자리에 주저앉아

경계가 흐려지는 줄도 몰랐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말로

우리를 설명하지 않게 하시고

복음이 삶을 해석하는

분명한 자리에 서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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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자를 일으키시는 하나님,

산지로 밀려난 단 지파를

주께서는 잊지 않으셨습니다.

좁아진 지경 앞에서

포기를 성품으로 삼지 않게 하시고

잃어버린 골짜기를 향해

다시 여쭙는 마음을 주옵소서.

어두운 순환의 한복판에도

먼저 움직이시는 주님을 신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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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님,

오늘 광양사랑의교회가

이름만 남은 벧엘이 아니라

날마다 다시 정복되는 하나님의 집이 되게 하소서.

우리의 작은 순종 하나가

경계를 넓히는 첫걸음이 되게 하시고

밀려난 자리에서도

주의 나라를 상상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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