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1:11-21 윗샘과 아랫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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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이란 이미 받은 것을 세는 일이 아니라, 아직 구하지 않은 것을 구할 줄 아는 목마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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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월의 세째 날입니다. 밤사이 창밖이 조금 조용해졌습니다. 여름내 온 동네를 흔들던 매미 소리가 하루아침에 잦아들고, 그 자리를 풀벌레의 가는 울음이 대신 채웁니다. 한낮의 볕은 아직 등을 데우지만 그늘의 온도가 달라졌고, 새벽에 문을 열면 서늘한 기운이 먼저 방으로 들어섭니다. 들녘은 짙은 초록의 옷을 천천히 벗으며 누런빛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여름을 온몸으로 통과해 오신 분들이 있습니다. 폭염 속에서 일하고, 병상을 지키고, 마르는 마음을 어찌하지 못한 채 하루하루를 버텨 오신 분들입니다. 그 모든 분의 심령 위에, 주님의 다사로운 평화가 깃들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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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에는 나귀에서 내리는 한 여인이 나옵니다. 시집가는 날,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남편의 땅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여인이 가던 길에서 갑자기 내려섭니다. 아버지 갈렙이 놀라 묻습니다.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삿 1:14). 히브리어로는 단 두 낱말, "무엇을 너에게"입니다. 무슨 일이냐, 하는 뜻입니다. 딸이 대답합니다. "내게 복을 주소서 아버지께서 나를 남방으로 보내시니 샘물도 내게 주소서"(삿 1:15). 그 여인의 이름은 악사입니다. 사사기에서 이름을 가지고, 스스로 말하고, 구한 것을 받아 낸 거의 유일한 여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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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여호수아가 죽고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자리를 잡아 가던 시절, 유다 지파는 남쪽 산지를 정복하고 있었습니다. 드빌이라는 성읍이 있었는데 옛 이름은 기랏 세벨, '책의 성읍'이라는 뜻입니다. 노장 갈렙이 군사들에게 걸었습니다. 이 성을 점령하는 자에게 내 딸 악사를 아내로 주겠다고 말입니다. 그의 조카 옷니엘이 그 성을 점령했고, 갈렙은 약속을 지켰습니다(삿 1:12-13). 훗날 이스라엘의 첫 사사가 될 사람이 바로 이 옷니엘입니다. 여기까지는 용사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대목에서 카메라를 돌려, 상급으로 주어졌던 한 여인의 얼굴을 클로즈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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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사가 시집가는 남방 땅은 네게브였습니다. 이스라엘 최남단, 물이 없으면 아무것도 자라지 않는 반건조 지대입니다. 아버지는 딸에게 땅을 주었지만, 그 땅에는 물이 없었습니다. 악사는 그 사실을 알았습니다. 남자들이 승패를 셈하고 성읍의 이름을 새로 붙이는 동안, 이 여인은 자기가 살아갈 땅의 형편을 미리 살폈습니다. 그리고 남편의 등을 떠밀어 아버지께 나아가게 했습니다. 개역개정이 "청하여"라고 부드럽게 옮긴 그 히브리어 낱말은 본래 '부추기다', '충동하다'라는 뜻입니다. 이 여인은 조용히 부탁한 것이 아니라, 구하지 않으면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남편을 움직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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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이 아름답습니다. 악사는 밭 하나를 구했는데 아버지는 윗샘과 아랫샘을 함께 얹어 주었습니다. 하나를 구한 손에 둘이 놓였습니다. 이 아버지의 손이 우리가 아는 어떤 아버지의 손을 닮았습니다. 훗날 예수께서는 사마리아의 우물가에서 한 여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요 4:14). 우물가에서 물동이를 들고 있던 여인에게 주신 것은 물 한 잔이 아니라 마르지 않는 샘 하나였습니다. 산 위에 파 놓은 웅덩이에 고인 빗물은 며칠이면 마르지만, 대지 깊은 곳에서 솟는 샘은 가뭄에도 마르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번 여름을 버틸 물이 아니라, 다음 가뭄에도 마르지 않을 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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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 이런 문장이 있습니다.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어딘가에 우물을 감추고 있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어린 왕자와 조종사는 목이 타는 사막 한복판에서 밤새 걷다가 새벽에 우물 하나를 만납니다. 그 사막은 걷기 전에도 사막이었고 걷고 난 뒤에도 사막이었습니다. 달라진 것은 땅이 아니라 그 땅을 보는 눈이었습니다. 악사에게 네게브는 물 없는 황무지가 아니라 아직 샘을 구하지 않은 땅이었습니다. 우리 인생에도 그런 자리가 있습니다. 메마르다고 결론 내리기 전에, 우리는 그 땅에 샘이 있는지를 구해 본 적이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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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같은 본문 조금 뒤에는 정반대의 장면이 나옵니다. 유다 지파는 스밧을 진멸하고 그 성읍을 호르마라 불렀고, 블레셋의 가사와 아스글론과 에그론까지 손에 넣었습니다. 승승장구였습니다. 그러다 한 문장에서 멈춥니다. "여호와께서 유다와 함께 계셨으므로 그가 산지 주민을 쫓아내었으나 골짜기의 주민들은 철 병거가 있으므로 그들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며"(삿 1:19). 여호와께서 함께 계셨다, 그런데 못 쫓아냈다. 이 두 문장이 한 호흡 안에 나란히 놓여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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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조심스럽게 짚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유다의 두려움은 근거 없는 상상이 아니었습니다. 그 시대는 청동기에서 철기로 넘어가던 과도기였고, 철로 만든 병거는 실제로 압도적인 무기였습니다. 게다가 그들이 포기한 '골짜기'는 우리가 떠올리는 좁은 계곡이 아니라 병거가 자유롭게 달릴 수 있고 밀과 보리가 자라는 넓고 기름진 저지대였습니다. 얻기 어렵고, 잃으면 뼈아픈 땅이었습니다. 그러니 문제는 두려움을 느낀 것이 아닙니다. 두려움에게 결정권을 넘겨준 것입니다. 계산이 틀린 것이 아니라, 그 계산표 어디에도 하나님의 자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때부터 믿음이 현실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이 믿음을 해석하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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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마지막 두 절이 옵니다. 갈렙은 헤브론에서 아낙의 세 아들을 몰아냈고(삿 1:20), 베냐민 자손은 예루살렘의 여부스 족속을 쫓아내지 못해 "오늘까지" 그들과 함께 살았습니다(삿 1:21). 같은 시대, 같은 약속, 같은 하나님이었습니다. 한 노인은 모두가 두려워하던 거인의 땅을 자기 몫으로 골랐고, 한 지파는 다투지 않아도 되는 이유를 찾았습니다. 저는 이 '오늘까지'라는 말이 오래 마음에 걸립니다. 한 세대가 미룬 일이 수백 년의 현실이 되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균열은 대개 명백한 배신이 아니라 불완전한 순종에서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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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가나안인데 사람마다 다른 땅을 보았습니다. 갈렙은 약속을 보았고, 악사는 샘을 보았고, 유다는 철 병거를 보았고, 베냐민은 함께 살아도 되는 이유를 보았습니다. 환경이 사람을 가른 것이 아니라 해석이 사람을 갈랐습니다. 오늘 한국 교회의 피로도 여기서 옵니다. 우리는 받은 것이 참 많은 교회입니다. 예배당이 있고 성경이 있고 전통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땅에 샘을 구하지 않아서, 물 없는 밭에서 열매를 기다리며 지쳐 갑니다. 반대로 어떤 자리에서는 너무 일찍 계산을 끝냅니다. 전해야 할 자리에서 분위기를 재고, 화해해야 할 자리에서 자존심을 재고, 정직해야 할 자리에서 손익을 잽니다. 그 계산들은 대개 틀리지 않아서 더 무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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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오늘 우리가 할 일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나귀에서 내리는 일입니다. 가던 길에서 잠시 내려서지 않으면 구할 수도 없습니다. 하루 십 분이라도 멈추어 "주님, 제게 샘물도 주소서" 하고 아뢰는 자리가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멈춰 선 자리를 다시 보는 일입니다. 여러분의 삶에서 "여기까지가 내 한계"라고 스스로 선을 그은 자리는 어디입니까. 그 자리에 하나님을 초대하지 않은 채 홀로 계산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본문이 우리에게 먼저 알려 주는 것은 우리의 실패가 아니라 하나님의 함께하심입니다. 여호와께서 유다와 함께 계셨습니다. 멈춰 선 그 순간에도 함께 계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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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을 지나온 들녘이 이제 색을 바꾸고 있습니다. 저 곡식이 여물 수 있는 것은 지난여름 어느 날 뿌리가 땅속 깊은 곳에서 물길 하나를 찾아냈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만난 그 물길이 오늘의 낟알을 채웁니다. 우리의 가을도 그러하기를 바랍니다. 남들이 보는 성과가 아니라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 뿌리내린 샘 하나로 여물어 가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마른 땅으로 보내진 자리에서도 담대히 복을 구하고, 철 병거 앞에서도 한 걸음 더 내딛는, 그 평화의 순례자가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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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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