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01:11-21 샘을 구한 손, 철 병거 앞에 멈춘 발

by 평화의길벗 posted Sep 01, 2026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사사기 01:11-21 샘을 구한 손, 철 병거 앞에 멈춘 발

*

유다의 정복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드빌을 치는 자리에서 갈렙은 그 성을 점령하는 자에게 딸 악사를 주겠다고 내걸었고,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 그것을 점령해 약속대로 악사를 아내로 맞습니다(11-13절). 출가하던 악사는 나귀에서 내려 아버지에게 복을 구하고, 메마른 남방 땅에 딸린 윗샘과 아랫샘을 얻습니다(14-15절). 겐 사람의 자손은 종려나무 성읍을 떠나 유다 황무지로 올라와 그 백성 가운데 자리를 잡고, 유다는 시므온과 함께 스밧을 진멸하며 블레셋의 성읍들까지 손에 넣습니다(16-18절). 그러나 여호와께서 함께 계셨음에도 골짜기 주민만은 철 병거 때문에 쫓아내지 못합니다(19절). 갈렙은 헤브론에서 아낙의 세 아들을 몰아내지만, 베냐민은 여부스 족속과 오늘까지 함께 삽니다(20-21절).

*

# 오늘 본문은 어제 읽은 유다의 첫 승리 기록에서 곧바로 이어집니다. 그런데 이야기의 결이 미묘하게 갈립니다. 앞부분은 한 여인이 샘을 구해 얻는 축복의 장면이고, 뒷부분은 승리의 행진이 철 병거 앞에서 멈추고 한 지파가 쫓아내야 할 이들과 동거를 시작하는 장면입니다. 같은 단락 안에 얻음과 놓침이 나란히 놓여 있습니다. 사사기는 예언서가 아니라 이야기책입니다. 화자가 설교하지 않고 장면을 나란히 붙여 놓는 방식으로 신학을 만듭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이것이 옳고 저것이 그르다"고 말해 주지 않습니다. 대신 악사의 손과 유다의 발을 나란히 보여 주고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어느 쪽입니까.

# 문학적으로 11-15절은 여호수아 15:15-19과 거의 같은 이야기입니다. 김회권 교수는 이 중복을 오류로 볼 필요가 없다고 말하면서, 여기에는 "연대기적 편집 원칙이 적용되기보다는 주제별 편집 원칙이 적용된 듯 보인다"고 정리합니다. 곧 여호수아 생전에 이루어진 옷니엘의 드빌 정복이, 가나안 남부 정복이라는 주제 아래 여호수아 사후 유다 지파의 정복 이야기 속으로 편입되었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왜 이 이야기를 여기에 다시 놓았는가입니다. 전성민 교수는 두 본문의 초점이 다르다고 봅니다. 여호수아서에서는 갈렙의 용맹이 중심 주제였지만, "사사기의 맥락에서는 악사의 모습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타협적인 승리 이야기들 사이에 끼워 넣은 이 장면은 주변 이야기와 대조를 이루면서, 사사기에 등장하는 다른 여인들의 처지를 평가하는 이상적인 기준이 됩니다.

# 역사적 배경도 함께 보아야 합니다. 드빌은 헤브론 남쪽의 성읍이고 옛 이름은 기랏 세벨, 곧 '책의 성읍' 또는 '서기관의 성읍'이라는 뜻입니다. 남방(네게브)은 이스라엘 최남단의 반건조 지대로, 물이 없으면 농사도 목축도 불가능한 땅입니다. 반면 19절의 '골짜기'로 옮겨진 히브리어 '에메크'는 우리가 떠올리는 좁고 가파른 계곡이 아니라, 병거가 자유롭게 달릴 수 있고 밀과 보리가 자라며 가축을 방목할 만큼 넓고 기름진 저지대입니다. 곧 유다는 산지는 얻었으나 가장 비옥한 평지는 얻지 못한 것입니다. 게다가 이때는 청동기에서 철기로 넘어가는 과도기였습니다. 철로 만든 병거는 당시 기준으로 압도적인 신무기였고, 아직 철기를 갖추지 못한 이스라엘에게는 실제로 두려운 상대였습니다. 두려움은 근거 없는 상상이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본문은 그 두려움을 정당한 사유로 인정해 주지 않습니다.

# 한 가지를 더 기억해야 합니다. 사사기는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 21:25)로 끝나는 책입니다. 그 결말을 향해 가는 첫 장에서, 화자는 배교와 부르짖음과 구원자와 안식이 반복되는 저 익숙한 순환의 씨앗을 미리 심어 둡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옷니엘이 바로 이스라엘의 첫 사사가 됩니다(삿 3:9-11). 그러니 이 단락은 단순한 정복 보고가 아니라, 앞으로 삼백 년의 역사가 어디서 갈라지기 시작했는지를 보여 주는 분기점입니다.

*

# 11-15절 나귀에서 내려 샘을 구한 사람

하나님은 당신이 주신 것을 사모하여 구하는 손에 기꺼이 넘치도록 부어 주시는, 인색함이 없으신 아버지이십니다.

.

이야기는 드빌에서 시작합니다. "거기서 나아가서 드빌의 주민들을 쳤으니 드빌의 본 이름은 기랏 세벨이라"(11절). 갈렙이 군사들을 향해 선언합니다. "기랏 세벨을 쳐서 그것을 점령하는 자에게는 내 딸 악사를 아내로 주리라"(12절).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 그것을 점령했고, 갈렙은 약속대로 딸 악사를 그에게 아내로 줍니다(13절). 그리고 장면이 바뀝니다. 악사가 출가하는 날, 남편에게 아버지께 밭을 구하자고 청하고는 타고 가던 나귀에서 내립니다. 갈렙이 묻습니다.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14절). 악사가 대답합니다. "내게 복을 주소서 아버지께서 나를 남방으로 보내시니 샘물도 내게 주소서"(15절). 갈렙은 윗샘과 아랫샘을 그에게 줍니다.

.

원어를 들여다보면 이 장면이 훨씬 생생해집니다. 14절은 히브리어 '와예히'로 시작합니다. 옥스퍼드 원어성경대전은 이 단어가 "사건의 전환이나 새로운 화제를 도입할 때 쓰는 히브리 관용적 표현"이며, 우리말 성경이 종속절처럼 옮긴 것과 달리 원문은 여기서 문장을 한 번 끊어 박진감을 준다고 설명합니다. 직역하면 "그리고 그녀가 갈 때에 이런 일이 있었다"입니다. 독자의 시선을 붙잡아 세우는 장치입니다. 무언가 기억해야 할 일이 벌어진다는 신호입니다.

그 기억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박유미 교수는 여기서 서술의 주어가 바뀐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12-13절까지 악사는 아버지가 내건 상급이었고 남자들 손에 운명이 맡겨진 수동적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14절에서 "그동안 남자들에 의해 전리품처럼 취급되던 여성이" 시간절과 함께 등장해 대화의 주도권을 쥡니다. 개역개정이 "청하여"로 부드럽게 옮긴 히브리어 '핫테씨테후'는 '쑤트'의 사역형으로, 본래 '부추기다', '충동하다'는 뜻입니다. 옥스퍼드도 같은 결로 읽습니다. 칠십인역과 벌게이트는 이를 뒤집어 옷니엘이 악사를 재촉한 것으로 옮겼지만, 이 낱말은 여성 3인칭 주어에 남성 3인칭 목적격 접미어가 붙은 형태이므로 "그녀가 그를 재촉했다"로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옷니엘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고, 악사가 남편의 등을 떠밀었습니다.

이어지는 동작도 예사롭지 않습니다. 악사는 출가 길에 올라탄 나귀에서 갑자기 내립니다. 갈렙이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라고 묻는데, 히브리어 '마 라크'는 단 두 낱말이고 직역하면 "무엇을 너에게"입니다. 박유미 교수는 이것이 "무슨 일이냐"라는 놀람의 물음이라고 봅니다. 그만큼 딸의 행동이 뜻밖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악사가 구한 것은 사치품이 아니었습니다. '밭'으로 옮겨진 '사데'는 성읍과 대비되는 경작 가능한 평지를 가리키고, 그 밭이 놓인 남방은 물이 없으면 아무것도 자라지 않는 땅입니다. 그러니 샘물을 구한 것은 "단순히 재산에 대한 욕심이 아니라 생존권과 복지에 관한 문제"였습니다. 남자들이 전쟁의 승패만 셈하고 있을 때, 악사는 자신이 살아갈 땅의 형편을 미리 살피고 가족이 생계를 이어갈 방법을 찾은 것입니다.

이 장면이 왜 사사기 첫 장에 놓였는지가 여기서 분명해집니다. 전성민 교수는 이렇게 정리합니다. "하나님이 온전히 다스리시는 사회에서는 여성도 자신의 이름을 가지며, 안전하게 살아가며, 당당히 자신의 필요를 요구하고, 그 필요를 채움받을 수 있다." 악사는 사사기에서 이름을 가지고, 나귀를 타고, 스스로 말하고, 요구한 것을 받은 유일한 여인에 가깝습니다. 이 그림은 사사기 19장의 이름 없는 여인, 나귀에 실려 죽은 채 돌아와 열두 조각으로 나뉜 그 여인과 정확히 반대편에 서 있습니다. 첫 장의 악사는 마지막 장의 비극을 재는 자입니다.

그리고 갈렙이 있습니다. 김회권 교수는 여호수아 15장을 다루면서, 갈렙이 발로 밟는 땅을 차지하는 특전을 받았고 그것은 "가나안 정복 전쟁의 선봉에 서는 책임감에 대한 보상"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런 갈렙이 딸의 청에 윗샘과 아랫샘을 함께 얹어 주는 대목에서 우리는 "갈렙의 너그러운 도량"을 봅니다. 딸은 하나를 구했는데 아버지는 둘을 주었습니다. 이 아버지의 손이 곧 하나님의 손을 비춥니다. 훗날 예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요 4:1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악사가 아버지에게 구한 두 샘은, 구하는 자에게 넘치도록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성품을 미리 비추는 거울입니다.

.

우리는 자주 이미 받은 것의 목록만 세면서 삽니다. 정복은 끝났고 땅은 분배되었으니 이제 남은 일은 지키는 것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악사는 받은 땅의 성격을 정확히 알았습니다. 남방은 그냥 두면 아무것도 자라지 않는 땅이었습니다.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구원받았다는 사실만으로 삶이 저절로 비옥해지지 않습니다. 은혜의 땅에도 샘이 있어야 합니다. 말씀을 읽는 시간, 기도의 자리, 함께 예배하는 공동체, 정직하게 나눌 수 있는 한 사람. 이 샘들은 저절로 솟지 않고 구해야 얻습니다. 오늘 한국 교회의 피로 가운데 적지 않은 부분이 여기서 옵니다. 받은 것은 많은데 마르지 않는 샘을 구하지 않아서, 물 없는 밭에서 열매를 기대하며 지쳐 가는 것입니다.

악사가 나귀에서 내린 그 동작을 기억합시다. 가던 길에서 잠시 내려서지 않으면 구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에게도 내려서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광양사랑의교회가 바쁜 일정 한복판에서도 잠시 멈추어 "주님, 제게 샘물도 주소서"라고 아뢰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갈렙의 자리도 함께 배웁시다. 누군가 우리에게 무언가를 구할 때, 우리는 하나만 겨우 내어놓고 마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윗샘과 아랫샘을 함께 얹어 주는 사람입니까. 자녀에게, 후배에게, 우리 곁의 약한 이웃에게 인색하지 않은 손이 되는 것, 그것이 하나님 아버지를 닮는 가장 구체적인 길입니다.

*

# 16절 종려나무 성읍을 떠나 황무지로 올라간 사람들

하나님은 혈통과 출신을 넘어 당신을 따르기로 한 이들을 당신의 백성 한가운데로 불러 앉히시는, 문을 활짝 여시는 분입니다.

.

한 절짜리 짧은 기록이 끼어듭니다. "모세의 장인은 겐 사람이라 그의 자손이 유다 자손과 함께 종려나무 성읍에서 올라가서 아랏 남방의 유다 황무지에 이르러 그 백성 중에 거주하니라"(16절).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속한 겐 족속의 후손들이, 유다 자손과 함께 종려나무 성읍을 떠나 남쪽 황무지로 올라가 그곳 백성 가운데 자리를 잡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전쟁 보고 한복판에 갑자기 한 이방 가문의 이주 기록이 놓여 있습니다.

.

'종려나무 성읍'은 일반적으로 여리고를 가리킨다고 봅니다. 신명기 34:3과 역대하 28:15이 여리고를 그렇게 부르기 때문입니다. 전성민 교수는 오아시스를 낀 요새화된 성읍을 통칭하는 표현일 수도 있다고 덧붙입니다. 어느 쪽이든 물이 풍부하고 살기 좋은 땅이라는 점은 같습니다. 겐 자손은 그 땅을 떠나 '아랏 남방의 유다 황무지'로 올라갑니다. 물이 귀하고 척박한 곳입니다. 방향으로 보면 명백한 손해입니다. 안락에서 결핍으로, 도시에서 광야로 옮겨 간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본문은 이유를 말하지 않고 다만 그들이 "유다 자손과 함께" 올라갔고 "그 백성 중에 거주"했다고만 적습니다. 김회권 교수는 이 단락을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속한 겐 족속이 유다 지파에 합류하여 유다-시므온 지파의 연합 정복 전쟁에 참여한 이야기"로 읽습니다. 그들은 혈통으로 이스라엘이 아니었습니다. 미디안 계열의 유목민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이 가는 길에 자기 삶을 붙였습니다. 편안한 성읍에 남는 대신, 하나님이 일하시는 자리를 택한 것입니다. 이것은 라합이 그러했고 룻이 그러했던 것과 같은 계열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경계는 핏줄이 아니라 언약에 대한 응답으로 그어집니다.

다만 여기에 그늘도 함께 읽어야 정직합니다. 전성민 교수는 칠십인역 사본과 고대 라틴어 역본이 이 대목에서 겐 사람들이 '아말렉 백성' 가운데 거주했다고 기록한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새번역 난외주도 그 독법을 소개하고, 사무엘상 15:6에서 사울이 겐 사람들에게 아말렉에게서 떠나라고 경고하는 장면도 이 독법과 맞물립니다. 만일 그렇다면 이 승리의 대열 안에서도 이미 "미묘한 타협이 시작되는" 셈입니다. 하나님 백성과 함께 걷기로 했으나 여전히 옛 이웃과 뒤섞여 있는 자리. 오늘 본문 전체가 그 애매한 경계선 위에 서 있습니다.

정경의 흐름에서 보면 이 짧은 기록은 훨씬 무겁습니다. 사사기는 이방 신들과 뒤섞이다 결국 정체성을 잃어가는 이스라엘의 이야기입니다. 그 책의 첫 장에, 이방인이 자기 안락을 버리고 하나님의 백성 편으로 건너온 이야기가 놓여 있습니다. 그리고 뒤로 갈수록 그 방향이 뒤집힙니다. 아셀 지파는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못해 도리어 "그 땅의 주민 가나안 족속 가운데 거주"하게 됩니다(삿 1:32). 겐 사람은 이스라엘 가운데로 들어왔는데, 이스라엘은 가나안 가운데로 들어갔습니다. 화자는 한 절짜리 기록 하나로 그 역전을 미리 새겨 둔 것입니다. 훗날 사도 바울이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엡 2:19)고 선언한 그 문이, 여기서 이미 조금 열려 있습니다.

.

우리 교회 안에도 겐 자손이 있습니다. 모태신앙의 계보에 속하지 않은 분들, 인생의 중반에 처음 예배당 문을 밀고 들어온 분들, 가족 중 홀로 믿는 분들입니다. 본문은 그들을 손님이 아니라 "그 백성 중에" 거주한 사람으로 기록합니다. 곁방이 아니라 한가운데입니다. 광양사랑의교회가 새로 오신 분들을 오래 지켜본 뒤에야 자리를 내어 주는 교회가 아니라, 처음부터 함께 올라가는 동행으로 맞이하는 교회이기를 바랍니다. 오래 다닌 사람의 자리와 방금 온 사람의 자리가 다르지 않은 것, 그것이 이 한 절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환대입니다.

동시에 우리 자신에게도 물어야 합니다. 우리는 종려나무 성읍에 머물러 있습니까, 아니면 황무지로 올라가고 있습니까. 신앙의 결정적 순간은 대개 손해를 감수하는 방향으로 한 걸음 옮기는 자리에서 옵니다. 더 편한 일정, 더 안전한 관계, 더 익숙한 자리를 내려놓고 하나님이 일하시는 곳으로 옮겨 가는 걸음 말입니다. 오늘 우리 가정과 일터에서 그런 이동이 어디에 필요한지 정직하게 생각해 봅시다. 그리고 그 이동이 혼자 하는 결심이 아니라 "유다 자손과 함께" 올라가는 동행이라는 사실도 기억합시다. 신앙은 홀로 버티는 고집이 아니라 함께 걷는 길입니다.

*

# 17-19절 승리의 행진, 그리고 철 병거 앞에서 멈춘 발

하나님은 사람의 형편이 좋을 때나 막힐 때나 변함없이 당신의 백성과 함께 계시는, 결코 물러서지 않으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십니다.

.

승리의 기록이 이어집니다. 유다가 형제 시므온과 함께 스밧에 거주하는 가나안 족속을 쳐서 진멸했고, 그래서 그 성읍의 이름을 호르마라 불렀습니다(17절). 이어 "유다가 또 가사 및 그 지역과 아스글론 및 그 지역과 에그론 및 그 지역을 점령하였고"(18절), 블레셋의 주요 성읍들까지 손에 넣습니다. 그리고 19절이 옵니다. "여호와께서 유다와 함께 계셨으므로 그가 산지 주민을 쫓아내었으나 골짜기의 주민들은 철 병거가 있으므로 그들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며." 한 문장 안에 함께하심과 못함이 나란히 놓입니다.

.

'호르마'라는 이름부터 보아야 합니다. 김회권 교수가 짚듯이 이 이름은 '진멸'을 뜻합니다. 하나님께 온전히 바쳐 드린다는 뜻의 '헤렘'과 같은 뿌리에서 왔습니다. 승리한 성읍에 승리자의 이름이 아니라 '바쳐 드림'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정복은 전리품을 챙기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일이라는 고백이 지명 하나에 새겨졌습니다. 여기까지는 좋습니다.

그런데 19절에서 문장의 결이 갈라집니다. 옥스퍼드 원어성경대전은 이 절도 '와예히'로 시작한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개역개정은 "여호와께서 유다와 함께 계셨으므로"라고 옮겨 마치 산지 주민을 쫓아낸 이유만 설명하는 것처럼 읽히게 했지만, 원문은 독립된 단문으로 "그리고 여호와께서 유다와 함께 계셨다"라고 선언합니다. 곧 하나님의 함께하심은 산지 전투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정복 전쟁 기간 내내 이어진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뒷부분에는 '키'가 두 번 나옵니다. 대부분의 영어 성경이 앞의 '키'는 but으로, 뒤의 '키'는 because로 옮깁니다. 직역하면 이렇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골짜기의 주민들을 쫓아내지 못했다. 왜냐하면 철 병거가 그들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이 두 문장이 나란히 놓인 것이 본문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셨다. 그런데 못 쫓아냈다. 옥스퍼드는 이 모순처럼 보이는 진술을 잇달아 기록한 것 자체가 저자의 의도라고 봅니다. "유다 지파의 실패가 결코 하나님의 힘이 부족하거나 그분이 돕지 않아서가 아니라, 유다 지파 자체의 믿음의 부족에 있음을 보여" 주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기보다 골짜기 거민의 철 병거를 더 두려워한 것, 그것이 실제 이유였습니다.

전성민 교수도 같은 결론에 이르는데, 그 근거가 흥미롭습니다. 훗날 하솔 왕 야빈도 철 병거를 가지고 있었지만 드보라와 바락은 승리했습니다(삿 4-5장). 그러니 철 병거는 "실패의 피상적인 이유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본질적인 이유는 불순종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유다의 두려움은 근거 없는 상상이 아니었습니다. 앞서 보았듯 이 시기는 청동기에서 철기로 넘어가는 과도기였고, 철 병거는 실제로 압도적인 무기였습니다. 그러니 문제는 두려움을 느낀 것이 아니라, 두려움에게 결정권을 넘긴 것입니다. 계산이 틀린 것이 아니라, 계산에 하나님을 넣지 않은 것입니다. 그때부터 믿음이 현실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이 믿음을 해석하기 시작합니다.

지리적으로도 이 멈춤은 뼈아팠습니다. 옥스퍼드가 설명하듯 '에메크'는 병거가 달릴 수 있고 밀과 보리가 자라며 소와 양을 방목할 수 있는 넓고 기름진 저지대입니다. 유다는 척박한 산지를 얻고 가장 좋은 땅을 남에게 남겨 둔 셈입니다. 김회권 교수의 표현대로 사사기 화자는 여기서 "철 병거에 독자의 주목을 집중"시킵니다. 눈길을 끄는 것은 승리의 목록이 아니라 멈춰 선 자리입니다. 그리고 그 멈춤은 오래가지 않아 다음 세대의 배교로 이어집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정직하게 알려 줍니다. 신앙의 붕괴는 어느 날 갑자기 하나님을 부인하면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여기까지만" 하고 발을 멈추는 그 자리에서 이미 시작됩니다. 훗날 예수께서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고 말씀하신 것은, 철 병거가 사라졌다는 뜻이 아니라 철 병거가 최종 결정권을 잃었다는 선언입니다.

.

우리에게도 철 병거가 있습니다. 그것은 대개 실제로 강력합니다. 감당하기 어려운 재정 상황, 오래된 관계의 벽,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 건강, 아무리 애써도 바뀌지 않는 직장의 구조, 자녀 앞에 놓인 현실의 조건. 이런 것들 앞에서 우리는 쉽게 계산을 끝냅니다. 여기까지가 내 한계라고, 이 정도면 충분히 애썼다고 스스로를 설득합니다. 그리고 그 설득은 대개 사실에 근거해 있어서 반박하기가 어렵습니다. 오늘 한국 교회 안에도 그런 멈춤이 많습니다. 복음을 전해야 할 자리에서 분위기를 계산하고, 정의를 말해야 할 자리에서 손익을 계산하고, 화해해야 할 자리에서 자존심을 계산합니다. 계산이 틀려서가 아니라, 그 계산표에 하나님의 자리가 없어서 우리는 골짜기를 잃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우리를 정죄하려고 이 이야기를 남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먼저 선언합니다. 여호와께서 함께 계셨다고. 이 순서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함께하심은 우리가 이겼기 때문에 주어지는 상급이 아니라, 우리가 멈춰 선 자리에서도 이미 사실인 은혜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가 할 일은 철 병거의 크기를 다시 재는 것이 아니라, 함께 계신 분의 크기를 다시 보는 것입니다. 광양사랑의교회가 "이 정도면 됐다"고 스스로 그은 선 앞에서 한 번 더 여쭙는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삶에서 지금 멈춰 선 자리는 어디입니까. 그 자리에 하나님을 초대하지 않은 채 홀로 계산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한 걸음만 더 내디뎌 봅시다. 그 한 걸음이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신앙의 지도를 바꿉니다.

*

# 20-21절 아낙을 몰아낸 노인, 여부스와 동거한 지파

하나님은 오래전 하신 약속을 세월이 흘러도 끝내 지키시는, 신실하심으로 역사를 이끄시는 분이십니다.

.

마지막 두 절은 두 장면을 나란히 붙여 놓습니다. "그들이 모세가 명령한 대로 헤브론을 갈렙에게 주었더니 그가 거기서 아낙의 세 아들을 쫓아내었고"(20절). 그리고 곧바로 "베냐민 자손은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여부스 족속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므로 여부스 족속이 베냐민 자손과 함께 오늘까지 예루살렘에 거주하니라"(21절). 한 사람은 거인을 몰아냈고, 한 지파는 이방 족속과 동거를 시작했습니다. 화자는 아무 논평도 달지 않고 그저 두 장면을 이어 붙입니다.

.

20절은 사실 10절에서 이미 말한 내용의 반복입니다. 옥스퍼드 원어성경대전은 그 반복이 의도적이라고 봅니다. 유다 지파의 정복 전쟁을 마무리하면서 갈렙의 모습을 다시 세워, "전쟁의 승패는 믿음에 의해 좌우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갈렙에게는 사실상 백지수표가 주어져 있었습니다. 모세를 통해 그가 밟는 땅을 주겠다는 약속을 받았고(신 1:36), 여호수아도 그렇게 확인해 주었습니다(수 14:9). 그렇다면 더 편하고 기름진 땅을 고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갈렙은 모두가 두려워하던 아낙 자손의 땅, 헤브론을 골랐습니다. 사십 년 전 열 정탐꾼의 보고로 온 이스라엘이 무너졌던 바로 그 이름 앞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간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스스로를 메뚜기로 여길 만큼 두려워했던 그 거인들을(민 13:32-33) 이 노인이 몰아냅니다.

김회권 교수의 정리를 빌리면, 갈렙의 특전은 "가나안 정복 전쟁의 선봉에 서는 책임감에 대한 보상"이었습니다. 특권이 먼저 있고 책임이 따라온 것이 아니라, 책임을 진 자리에 특권이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그가 받은 그 땅에서 그는 다시 한번 앞장섰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배우는 것은 갈렙의 담대함만이 아닙니다. 사십 년 전에 하신 약속을 사십 년 뒤에 지키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입니다. 갈렙은 그 약속 하나를 붙들고 광야의 사십 년을 견뎠고, 노인이 되어서도 그 약속을 회수하러 갔습니다. 사사기의 첫 장에서 유일하게 흔들림 없이 서 있는 사람이 가장 나이 많은 사람이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합니다.

바로 그 옆에 베냐민이 있습니다. 앞서 8절은 유다 자손이 예루살렘을 쳐서 점령했다고 기록했는데, 21절은 베냐민이 여부스 족속을 쫓아내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이 긴장을 두고 두 지파가 예루살렘 지역을 나누어 차지했을 가능성, 또는 당시 예루살렘이 훗날 성전이 선 중심지보다 훨씬 넓은 지역을 가리켰을 가능성이 제시됩니다. 어느 쪽이든 결과는 같습니다. 김회권 교수가 지적하듯 이 구절은 "사사기 저자가 살아 있는 시점까지도" 그 성에 베냐민 지파와 여부스 족속이 함께 살고 있는 상황을 증언합니다. "오늘까지"라는 말이 무섭습니다. 한 세대의 미룸이 수백 년의 현실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두 장면의 대조가 말하는 바는 분명합니다. 같은 시대, 같은 약속, 같은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거인 앞으로 걸어 들어갔고 한 지파는 이방 족속과 나란히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환경이 갈라놓은 것이 아니라 해석이 갈라놓았습니다. 갈렙에게 헤브론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이었고, 베냐민에게 예루살렘은 굳이 다투지 않아도 되는 땅이었습니다. 신앙의 균열은 대개 명백한 배신이 아니라 불완전한 순종에서 시작됩니다. 조금 남겨 둔 것, 나중에 하자고 미룬 것, 굳이 지금은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 자라서 다음 세대의 우상이 됩니다. 훗날 다윗이 바로 그 여부스 족속을 몰아내고 예루살렘을 차지하기까지(삼하 5:6-9) 이스라엘은 그 미룸의 대가를 오래 치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성에서, 유다 지파의 사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끝까지 물러서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남겨 둔 자리마다 그분이 대신 들어가 싸우셨습니다.

.

우리 안에도 "오늘까지" 함께 살고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여러 해 전에 정리했어야 할 습관, 미뤄 온 사과 한마디, 못 본 척해 온 관계의 상처, 편해서 놓지 못한 타협. 처음에는 대단치 않아 보였을 것입니다. 지금 당장은 문제가 되지 않으니 나중에 하자고 미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들은 사라지지 않고 함께 나이를 먹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목록을 하나 작성하게 합니다. 내가 쫓아내지 못한 채 함께 살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름을 붙여 적어 보는 일에서 변화가 시작됩니다.

그리고 갈렙의 자리도 봅니다. 그는 나이를 이유로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가장 두려운 곳을 자기 몫으로 골랐습니다. 광양사랑의교회의 어르신들이 갈렙과 같은 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젊은 세대에게 "우리 때는 이랬다"는 회고가 아니라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신다"는 증언을 물려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것이 이룬 목록이 아니라 걸어간 방식이라는 점을 기억합시다. 우리가 남긴 여부스 족속은 우리 자녀의 이웃이 됩니다. 오늘 우리가 정직하게 정리하는 한 가지가 다음 세대의 짐을 하나 덜어 줍니다.

*

# 거둠의 기도

주님,

샘 없는 땅으로 보내진 딸이

나귀에서 내려 아버지를 부른 것처럼

우리도 오늘 가던 길에서 잠시 내려섭니다.

받은 것만 세며 마른 밭에 서 있던 우리에게

구할 줄 아는 마음을 주소서.

하나를 구한 손에

윗샘과 아랫샘을 함께 얹어 주시는

너그러우신 아버지를 봅니다.

.

문을 여시는 하나님,

종려나무 성읍의 안락을 뒤로하고

황무지로 올라간 겐 자손처럼

우리도 편안한 자리가 아니라

주께서 일하시는 자리를 택하게 하소서.

처음 오신 분들이 곁방이 아니라

주의 백성 한가운데 앉게 하시고,

광양사랑의교회가

경계를 긋는 교회가 아니라

문을 여는 교회가 되게 하소서.

.

함께 계신 주님,

승리의 목록을 세다가

철 병거 앞에서 멈춰 선 우리를 보십니다.

두려움을 느낀 것이 죄가 아니라

두려움에게 결정을 맡긴 것이 죄임을 압니다.

우리의 계산표에 주님의 이름을 적게 하시고,

현실이 믿음을 해석하지 않게 하시고

믿음이 현실을 해석하게 하소서.

멈춰 선 그 자리에서

한 걸음 더 내딛게 하소서.

.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

사십 년 전 하신 말씀을

노인이 된 갈렙에게 지키신 주님,

그 신실하심에 기대어 오늘을 걷습니다.

우리 안에 오늘까지 함께 살아온 것들을

이름 붙여 주 앞에 내어놓습니다.

남겨 둔 것이 자라

다음 세대의 짐이 되지 않게 하시고,

우리가 이룬 목록이 아니라

우리가 걸어간 순종의 방식을

자녀들에게 물려주게 하소서.

우리가 남겨 둔 자리마다 대신 들어가

끝까지 물러서지 않으신

유다 지파의 사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Articles

1 2 3 4 5 6 7 8 9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