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1:1-10 닮아 가는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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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이란 무엇을 이겼느냐가 아니라,
이긴 다음에 내 손이 무엇을 하는지를 배우는 평생의 훈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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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월의 첫날입니다. 아침 공기의 결이 어제와 다릅니다. 아직 한낮의 볕은 등을 뜨겁게 달구지만, 새벽에 창을 열면 서늘한 기운이 먼저 방으로 들어옵니다. 섬진강 쪽에서 올라오는 안개가 조금씩 두꺼워지고, 논은 이제 초록에서 연둣빛으로, 다시 누런빛으로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습니다. 여름내 억척스럽게 버텨 온 이들이 있습니다. 폭염 속에서 일하고, 병상을 지키고, 아이를 키우고, 무너지지 않으려고 하루하루를 비끄러매어 온 분들입니다. 그 모든 분의 심령 위에 주님의 다사로운 평화가 깃들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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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우리는 사사기를 읽습니다. 사사기는 부고로 시작하는 책입니다.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삿 1:1). 이 짧은 구절 하나로 한 시대가 닫힙니다. 홍해를 건너게 한 모세도 없고, 요단을 마르게 한 여호수아도 없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후계자도 없습니다. 모세는 죽기 전 여호수아를 세웠지만, 여호수아는 아무도 세우지 않고 떠났습니다. 남은 것은 아직 다 정복되지 않은 땅과, 서로 다른 열두 지파와, 그들 위에 계신 보이지 않는 왕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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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인생에도 그런 아침이 있습니다. 늘 앞에서 걸어 주던 분이 사라진 아침 말입니다. 부모를 여읜 아침, 오래 의지하던 목회자가 떠난 아침, 회사에서 나를 지켜 주던 선배가 자리를 옮긴 아침. 그런 아침에는 세상이 갑자기 넓어지고 내가 갑자기 작아집니다. 그날 이스라엘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이 무엇이었는지 보십시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여쭈어 이르되 우리 가운데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족속과 싸우리이까"(삿 1:1). 그들은 사람을 찾기 전에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신앙의 깊이는 모든 것이 잘될 때가 아니라, 의지하던 것이 사라졌을 때 드러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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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어를 들여다보면 이 물음이 더 애틋해집니다. '우리 가운데'로 옮긴 히브리어 '라누'는 '우리를 위해'로 옮기는 편이 더 자연스럽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물음은 이런 뜻입니다. "누가 우리를 위해 먼저 올라가 주겠습니까." 경건한 물음 속에 떨림이 배어 있습니다. 우리를 위해 앞장서 줄 사람이 없다는 막막함입니다. 그 떨림을 하나님은 나무라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유다가 올라갈지니라 보라 내가 이 땅을 그의 손에 넘겨 주었노라"(삿 1:2). 여기 '넘겨 주었노라'는 완료형입니다. 아직 한 발도 내딛지 않았는데 하나님은 이미 주었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문법에서는 언제나 은혜가 먼저고 순종이 나중입니다. 우리는 없는 것을 만들어 내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것을 향해 걸어 들어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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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유다는 이깁니다. 베섹에서 만 명을 치고, 그 성의 주인 아도니 베섹을 사로잡습니다. 여기까지는 눈부신 승리의 기록입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문장에서 이야기의 색이 달라집니다. "아도니 베섹이 도망하는지라 그를 쫓아가서 잡아 그의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을 자르매"(삿 1:6). 엄지손가락을 자르는 것은 다시 무기를 잡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고, 엄지발가락을 자르는 것은 다시는 달리지 못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것은 가나안 왕들이 하던 방식이었습니다. 구약성경 어디에도 이스라엘이 살아 있는 적군의 신체를 잘랐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첫 전투, 첫 승리, 그런데 벌써 손이 닮아 갑니다. 이겼는데 이긴 자리에서 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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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몬 베유는 『일리아스 또는 힘의 시』에서 힘이란 그것에 복종하는 자를 사물로 만들 뿐 아니라, 그것을 휘두르는 자마저 사물로 만들어 버린다고 썼습니다. 폭력은 맞는 사람만 망가뜨리지 않습니다. 때리는 사람의 손도 함께 망가집니다. 유다가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승리를 가나안의 방식으로 누렸고, 그렇게 조금씩 자기가 몰아내야 할 대상을 자기 안에 들여놓았습니다. 사사기는 이 미끄러운 내리막을 이백 년 동안 따라 내려가다가, 마침내 이런 문장에서 멈춰 섭니다.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 21:25). 그 파국은 어느 날 갑자기 온 것이 아닙니다. 첫 승리의 날, 잘린 엄지 하나에서 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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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서늘한 것은 이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공의를 가장 먼저 알아본 사람이 언약 백성이 아니라 사로잡힌 이방 왕이라는 사실입니다. 아도니 베섹은 자기가 칠십 명의 왕에게 행한 일을 그대로 당하면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내가 행한 대로 내게 갚으셨다고요. 그는 한순간에 알아보았는데, 이스라엘은 이백 년 동안 배우지 못했습니다. 성경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대목입니다. 우리는 예배당 안에서 정의를 노래하면서, 예배당 밖에서 남의 손가락을 자르는 일에 익숙합니다. 옳은 편에 섰다는 확신이 잔인함의 면허가 되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이기면서 지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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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묵상이란 오늘 본문에서 나를 유다 편에 세워 두고 승리를 즐기는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승리 뒤에 남은 내 손을 들여다보는 일입니다. 우리는 흔히 묵상을 위로받는 시간으로만 여깁니다. 그러나 말씀은 거울이어서, 잘된 얼굴만이 아니라 잘된 다음의 표정까지 비춥니다. 이번 주에 내가 이긴 자리가 어디였는지 떠올려 보십시오. 직장에서 내 판단이 옳았던 회의, 가정에서 내가 결국 이겼던 말다툼, 관계에서 상대가 먼저 사과했던 순간 말입니다. 그 자리에서 내 손은 무엇을 했습니까. 이겨 놓고도 상대의 엄지를 마저 자르지는 않았습니까. 신앙은 무엇을 이겼느냐가 아니라 이긴 다음에 어떤 손을 가졌느냐로 드러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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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오면 밤나무 아래를 지나게 됩니다. 밤송이는 온몸이 가시입니다. 그 가시는 열매를 지키려고 돋아난 것입니다. 그러나 때가 되면 송이는 스스로 벌어져 가시를 놓고, 안에 품었던 것을 땅에 내어놓습니다. 끝까지 가시로 남는 밤송이는 없습니다. 신앙의 여정도 그러합니다. 우리에게도 자신을 지키려고 돋아난 가시가 있습니다. 상처받지 않으려고, 무시당하지 않으려고, 밀리지 않으려고 세운 날카로움입니다. 그 가시가 한동안 우리를 지켜 준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면 우리는 가시만 남은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이기게 하시는 데서 그치지 않고, 이긴 다음에 벌어질 수 있게 하십니다. 손을 펴게 하십니다. 가나안의 손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손을 갖게 하십니다. 못 자국이 있는 그 손은 한 번도 남의 엄지를 자른 적이 없고, 오직 잘린 손을 붙들어 일으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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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는 예루살렘을 쳤으나 그 성은 다윗 때에 이르러서야 온전히 그분의 도성이 되었고, 유다 지파의 미완은 마침내 유다 지파에서 나신 한 분에게서 완성되었습니다. 우리를 위해 먼저 올라가 주실 이가 누구냐는 사사기의 첫 물음에 대한 대답은, 갈보리 언덕을 먼저 오르신 그분입니다. 우리가 다 쫓아내지 못하는 것들을 그분이 십자가에서 이기셨습니다. 그러니 오늘 다 이루지 못한 자리에 서 계신 분들, 몇 년째 같은 자리에서 미끄러지고 계신 분들은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사기는 우리 힘으로는 완결이 없다는 것을 이백 년에 걸쳐 가르치는 책이고, 그 가르침의 끝에서 우리는 비로소 참된 왕을 기다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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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월이 시작되었습니다. 곧 들녘이 익고, 우리의 한 해도 거두어지는 계절로 접어들 것입니다. 이 가을, 여러분이 무엇을 이기시든 그 이김이 여러분의 손을 거칠게 만들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긴 자리마다 먼저 감사가 있기를, 옳은 자리마다 먼저 온유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몰아내야 할 것을 닮지 않고, 우리를 위해 먼저 오르신 분을 닮아 가는, 그 평화의 순례자가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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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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