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39:1-8 열어 보인 창고
*
온전한 신앙이란 무엇을 얼마나 가졌느냐가 아니라,
가진 것을 누구의 이야기로 말하느냐를 배우는 평생의 훈련입니다.
.
팔월의 끝자락입니다. 한낮의 볕은 아직 등을 뜨겁게 달구는데, 해가 기울고 나면 바람의 결이 달라진 것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논둑길을 걸어 보면 벼가 고개를 숙이기 시작했고, 감나무 아래에는 채 익지 못하고 떨어진 열매가 몇 알 뒹굴고 있습니다. 곧 곳간을 손볼 계절이 옵니다. 무엇을 거두어 어디에 넣어 둘지 헤아리는 계절, 한 해의 수고가 곳간의 크기로 환산되는 계절입니다. 여름 내내 애쓰고도 손에 잡히는 것이 적어 마음이 헛헛하신 분들, 반대로 거둔 것은 많은데 어쩐지 마음은 더 허전하신 분들, 그 모든 분의 심령 위에 주님의 다사로운 평화가 깃들기를 소망합니다.
.
오늘 본문에는 한 사람이 자기 창고를 활짝 여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것도 처음 본 손님들 앞에서, 하나도 빠짐없이, 자랑스럽게 엽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 장면을 미담으로 적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열린 문에서 나라의 마지막이 시작되었다고 적습니다. 창고의 문은 대개 도둑이 열지만, 이 창고는 주인이 열었습니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스스로 빗장을 풀게 했을까요. 우리도 살면서 여러 번 그런 문 앞에 섭니다. 누군가 나를 알아봐 주었을 때, 오래 기다린 인정이 뜻밖에 찾아왔을 때, 우리는 무엇인가를 열어 보이고 싶어집니다. 그때 우리가 여는 것이 무엇인지가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를 말해 줍니다.
.
배경을 알면 이 장면이 달리 보입니다. 히스기야는 얼마 전 죽을병에서 살아난 사람입니다. 얼굴을 벽으로 향한 채 통곡했고, 하나님은 그의 눈물을 보시고 십오 년을 더해 주셨습니다. 해 그림자가 뒤로 열 도 물러가는 것을 두 눈으로 본 사람입니다. 그 소식이 먼 나라까지 퍼졌습니다. 바벨론 왕 므로닥발라단이 축하의 편지와 예물을 보내옵니다. 김필회 교수는 그가 앗수르에 맞서 평생을 도모한 사람이며, 이 사절단은 사실 앗수르 몰래 우호조약을 맺으러 온 것 같다고 봅니다. 축하라는 겉옷 아래 동맹이라는 속옷이 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옷을 알아보지 못한 것이 이 이야기의 비극입니다.
.
"히스기야가 사자들로 말미암아 기뻐하여 그들에게 보물 창고 곧 은금과 향료와 보배로운 기름과 모든 무기고에 있는 것을 다 보여 주었으니"(사 39:2). 기뻐했다는 말이 먼저 나옵니다. 나무랄 수 없는 기쁨입니다. 세계의 강자가 변방의 작은 나라를 알아봐 주었으니 어찌 기쁘지 않겠습니까. 다만 그 기쁨이 무엇을 밀어냈는지가 문제였습니다. 그 자리는 원래 증언의 자리였습니다. 어떻게 살아났느냐고 묻는 손님들 앞에서 그는 물러간 그림자를 이야기할 수도 있었고, 자기 눈물을 보신 분을 소개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창고 쪽으로 몸을 돌렸습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이 은혜 아닌 것을 자랑할 때, 그 자랑은 언제나 은혜를 지운 자리 위에 세워집니다.
.
이윽고 이사야가 찾아와 묻습니다. 그 사람들이 무슨 말을 했으며 어디서 왔느냐고. 왕은 첫 질문에는 답하지 않고 둘째 질문에만 답합니다. 그들이 원방 곧 바벨론에서 왔다고요. 우리가 대화에서 슬쩍 건너뛰는 질문이 대개 우리의 급소입니다. 선지자는 다시 묻습니다. 그들이 무엇을 보았느냐고. 그러자 왕이 대답합니다. "그들이 내 궁전에 있는 것을 다 보았나이다 내 창고에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아니한 보물이 하나도 없나이다"(사 39:4). 뉘우침이 아니라 뿌듯함이 배어 있는 대답입니다. 하나님의 질문은 함정이 아니라 문인데, 그는 그 문 앞에서 다시 한 번 창고를 택했습니다.
.
그래서 선고가 내립니다. "보라 날이 이르리니 네 집에 있는 모든 소유와 네 조상들이 오늘까지 쌓아 둔 것이 모두 바벨론으로 옮긴 바 되고 남을 것이 없으리라"(사 39:6). 그리고 재물만이 아니라 자손 중 몇이 그 왕궁의 환관이 되리라는 말씀이 이어집니다. 무서운 것은 이 선고가 새로운 낱말을 쓰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왕이 '다 보여 주었다'고 한 그 '다'가 그대로 '남을 것이 없으리라'가 되고, 그가 자랑스럽게 발음한 '바벨론'이 그대로 유배지의 주소가 됩니다. 자랑은 목록을 만들고, 그 목록은 훗날 그대로 압수 목록이 됩니다. 사백 년 전 시리아의 대 바실리우스는 이렇게 권했습니다. 탐욕의 음침한 곳간을 헐어 버리고, 정히 곳간을 갖고 싶거든 가난한 이들의 뱃속에 곳간을 지으라고요. 쌓아 둔 잉여는 결국 도둑과 군대를 부른다는 것입니다. 히스기야의 창고가 바로 그러했습니다. 그가 자랑하려고 연 문이 백 년 뒤 침탈의 지도가 되었습니다. 옮겨지지 않는 창고는 오직 하나, 사람의 굶주린 배 속과 하나님의 품뿐입니다.
.
이 이야기의 마지막 문장이 오래 마음에 남습니다. "당신이 이른 바 여호와의 말씀이 좋소이다"(사 39:8). 그는 항변하지 않고 판결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한마디를 덧붙입니다. 내 생전에는 평안과 견고함이 있으리라고요. 여기서 해석이 갈립니다. 어떤 이는 자녀가 끌려간다는 말을 듣고 제 시대의 평안을 헤아리는 무책임을 봅니다. 김필회 교수는 다른 쪽을 봅니다. 심판을 의로운 결정으로 받아들이면서도 하나님께 매달려 그 심판을 견뎌 내겠다는 신앙의 자세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씁니다. 심판을 취소시킬 수는 없지만 연기시킬 수는 있다고요. 두 해석이 다 옳을지 모릅니다. 한 사람 안에 벽을 향해 울던 히스기야와 창고를 열어 보이던 히스기야가 함께 있었듯이, 우리 안에도 그 두 사람이 함께 살고 있으니까요.
.
오늘 우리에게도 편지가 옵니다. 뜻밖의 인정, 예상하지 못한 초대, 나를 대단하게 여겨 주는 눈길입니다. 그것 자체는 죄가 아닙니다. 다만 그 앞에서 우리가 어느 쪽으로 몸을 돌리는지가 우리를 드러냅니다. 병이 나은 이야기를 나눌 자리에서 우리는 자주 병원과 보험과 인맥을 이야기합니다. 회복된 사업을 말할 자리에서 매출과 규모를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말할 수 있는 자리에서 자꾸 내가 가진 것을 말하는 것, 그것이 히스기야의 실수였고 우리의 습관입니다. 그러니 대답의 첫 문장을 미리 정해 두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이 한 문장을 준비해 두지 않으면 우리 입은 늘 하던 대로 창고 문부터 엽니다.
.
그리고 '내 생전에는'이라는 계산을 조금 늘려 잡았으면 합니다. 우리 시대만 무사하면 된다는 셈법은 짧고, 그 짧음의 대가는 언제나 다음 세대가 치릅니다. 히스기야는 바로 앞 장에서 아버지는 자녀에게 주의 진실을 알게 하리라고 노래했습니다. 그 노래가 노래로 끝나지 않으려면, 자녀에게 보여 줄 것이 창고가 아니라 무릎이어야 합니다. 오늘 저녁 밥상에서 재산 이야기 대신 하나님이 우리 가정에 하신 일 한 가지를 이야기해 보십시오. 그것은 바벨론으로도 옮겨지지 않는 유산입니다. 아이들은 부모가 물려준 것보다 부모가 무엇을 자랑했는지를 더 오래 기억합니다. 우리가 식탁에서 반복해 말한 것이 곧 그들의 창고가 됩니다.
.
곧 추수의 계절이 옵니다. 곳간을 여는 계절이지요. 다만 우리의 곳간은 자랑을 위해 열리지 않고 나눔을 위해 열리기를 바랍니다. 거둔 것을 세어 보이는 손이 아니라, 거두게 하신 분을 가리키는 손이 되기를 바랍니다. 곳간이 커서 복된 것이 아니라, 곳간의 문이 어디를 향해 열리느냐로 복이 결정됩니다. 배고픈 이웃의 뱃속에 쌓아 둔 것은 그 어떤 제국도 실어 가지 못합니다. 그리하여 이 가을, 여러분의 문이 열릴 때마다 사람들이 여러분의 재산이 아니라 여러분의 하나님을 보게 되기를, 그 문 앞에서 평화의 순례자가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
평화의길벗_라종렬
.
유튜브에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