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38:1-22 그림자가 물러난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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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신앙이란 남은 시간을 세는 일이 아니라, 되돌려 받은 시간을 누구의 것으로 살 것인지 정하는 생명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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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월의 마지막 주간입니다. 해가 눈에 띄게 이르게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한낮에는 여전히 볕이 따갑지만, 네 시가 조금 넘으면 마당의 그림자가 담을 타고 성큼 올라섭니다. 여름내 짧게 웅크려 있던 그림자들이 다시 길어지는 계절, 사람들은 그 길이를 보고 계절이 바뀌는 줄을 압니다. 시계를 보지 않고도 그림자만 보고 하루의 어디쯤에 서 있는지 알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림자는 늘 한 방향으로만 자라기에, 그것을 보는 일은 곧 시간이 한쪽으로만 흐른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되돌릴 수 없는 시간 앞에서 조바심이 나는 분들이 있습니다. 놓쳐 버린 계절이 아까워 잠을 뒤척이는 분들도 있습니다. 담벼락에 길어지는 그림자를 바라보며 저마다의 오후를 건너가는 모든 분의 심령 위에, 주님의 다사로운 평화가 깃들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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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에는 그 규칙이 한 번 깨어지는 오후가 나옵니다. 왕궁 뜰에 놓인 계단에 드리운 해 그림자가, 내려가던 길을 멈추고 열 도를 뒤로 물러섭니다. 세상의 모든 시계가 앞으로만 갈 때 한 사람의 시계만 뒤로 물러선 것입니다. 죽음의 선고를 받고 자리에 누운 왕은 그 광경을 병상에서 지켜보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하필 그림자를 움직이셨을까요. 그리고 그 그림자는 그 뒤에 어떻게 되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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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주전 팔 세기 말, 유다 왕 히스기야의 시대였습니다. 앗수르라는 제국이 온 근동을 발밑에 두고 있었고, 예루살렘은 그 손아귀에서 언제 부서질지 모르는 작은 도성이었습니다. 성경학자들은 이 이야기가 실제로는 앗수르 군대가 예루살렘을 에워싸기 몇 해 전의 일이었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이사야서는 그 순서를 일부러 뒤집어, 나라가 구원받은 이야기를 앞에 두고 왕이 죽을병에 걸린 이야기를 뒤에 놓았습니다. 우연이 아닙니다. 이미 이루어진 구원을 결승선으로 삼지 말고, 아직 오지 않은 구원을 바라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한 사람의 투병기이면서 동시에 한 민족의 자화상입니다. 왕이 죽을병에 걸린 것처럼 그 나라도 죽을병을 앓고 있었고, 왕이 살아난 것처럼 그 나라도 살아날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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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통보로 시작됩니다. 선지자 이사야가 병상에 나아와 말합니다. "너는 네 집에 유언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사 38:1). 회복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 문장입니다. 남은 일은 후계자를 세우고 서류를 정리하는 것뿐이라는 말입니다. 그때 히스기야가 한 일은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여호와께 기도했습니다. 용한 의원을 부르지도 않았고 신하들을 모아 대책을 세우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세상을 향하던 얼굴을 닫고 하나님께로 돌아누웠을 뿐입니다. 그리고 울었습니다.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주 앞에서 진실과 전심으로 행하며 주께서 보시기에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사 38:3). 저는 이 대목에서 오래 멈추어 섭니다. 벽을 향해 돌아눕는 일은 세상의 눈에는 등을 돌리는 일이지만, 하늘의 눈에는 정면으로 마주 서는 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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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은 곧바로 왔습니다.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네 수명에 십오 년을 더하고"(사 38:5). 들으셨다는 말과 보셨다는 말이 나란히 놓여 있습니다. 하나님은 소리 내어 아뢴 말만 들으시는 분이 아니라, 소리 없이 흘러내린 것까지 보시는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응답에는 그가 구하지 않은 것이 한 가지 얹혀 있었습니다. 이 성도 함께 건져 내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목숨 하나를 구했는데, 하나님은 그 목숨에 도성 전체의 운명을 함께 실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응답은 늘 우리의 기도 제목보다 큽니다. 그리고 그 큰 응답은 대개 나 한 사람을 넘어, 내가 속한 자리와 사람들을 향해 흘러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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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나서 그림자가 물러섰습니다. 뜰의 계단 위를 내려가던 해 그림자가 열 도를 되돌아 올라간 것입니다. 그런데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물러난 그림자는 멈춘 것이 아니라 다시 움직였습니다. 그날 오후에도 해는 어김없이 저물었고, 왕이 얻은 것은 영원이 아니라 십오 년이었습니다. 로마의 세네카는 『인생의 짧음에 관하여』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짧은 인생을 받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인생을 짧게 만드는 것이다." 그는 사람들이 시간만은 아낌없이 내어 주면서, 정작 그 시간을 무엇으로 채울지는 아무도 셈하지 않는다고 탄식했습니다. 히스기야에게 주어진 십오 년도 그러했습니다. 길이로 보면 넉넉한 선물이었지만, 무엇으로 채우느냐에 따라 그 십오 년은 은혜의 기간이 될 수도 있고 흘려보낸 시간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림자를 물려 주신 하나님은 시간을 멈춰 주지는 않으셨습니다. 다만 방향을 돌아볼 기회를 주셨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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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난 뒤에 그가 지은 노래가 이 장의 한복판에 남아 있습니다. 그 노래는 곱게 정돈된 감사가 아닙니다. "나의 중년에 스올의 문에 들어가고"라는 억울함으로 시작해서, 제비같이 학같이 지저귀며 비둘기같이 슬피 울었다는 고백을 지나갑니다. 그러다가 어느 지점에서 문장이 돌아섭니다. "보옵소서 내게 큰 고통을 더하신 것은 내게 평안을 주려 하심이라"(사 38:17). 그리고 그는 자신의 모든 죄가 주의 등 뒤로 던져졌다고 노래합니다. 하나님이 무언가를 기억하실 때는 그것을 눈앞에 두신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등 뒤로 던지셨다는 것은 다시는 눈앞에 두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병에서 건져 주신 그 손이 실은 죄에서 건져 주신 손이었음을, 그는 살아난 다음에야 알았습니다. 은혜는 늘 지나고 나서 더 크게 읽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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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장은 이상하게 끝납니다. 무화과 한 뭉치를 상처에 붙이면 나으리라는 처방이 주어지고, 왕이 여호와의 전에 올라갈 징조가 무엇이냐 묻는 데서 이야기가 멈춥니다. 나았다는 말도 없고, 그 물음에 대한 대답도 없습니다. 성경은 이 이야기를 일부러 열어 둔 채 덮은 것입니다. 아직 낫지 않은 사람, 아직 응답을 손에 쥐지 못한 사람도 이 이야기 안에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처방전은 이미 주어졌습니다. 남은 일은 그것을 상처에 붙이는 일뿐입니다. 우리 손에도 매일 아침 펼치는 처방전이 한 장씩 놓입니다. 읽기만 하고 붙이지 않으면 그것은 끝내 종이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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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한국 교회는 여러 차례 유예를 받았습니다. 신뢰가 무너질 뻔한 자리마다 다시 기회가 주어졌고, 문을 닫을 뻔한 예배당마다 사람이 채워졌습니다. 그러나 유예를 면죄부로 읽는 순간, 연장된 시간은 돌이킴의 시간이 아니라 방심의 시간이 됩니다. 우리 각자의 삶도 다르지 않습니다. 큰 병을 지나온 분, 사업의 고비를 겨우 넘긴 분, 관계의 파국을 아슬아슬하게 피한 분들이 계십니다. 그날 밤 드렸던 서원을 우리는 얼마나 기억하고 있습니까. 되돌려 받은 시간은 원래 내 것이 아니라 맡겨진 것입니다. 그리고 회복의 목적지는 건강도 성공도 아니었습니다. 히스기야가 끝까지 구한 것은 다시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는 일이었고, 그가 죽음보다 두려워한 것도 다시는 주를 뵙지 못하는 일이었습니다. 우리가 잃을까 두려워하는 목록의 맨 앞에 예배가 놓여 있다면, 우리는 이미 살아 있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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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저녁이면 담벼락의 그림자가 조금씩 더 길어질 것입니다. 그 그림자는 오늘도 앞으로만 갑니다. 그러나 우리는 압니다. 한 사람의 눈물 앞에서 그림자를 물려 주신 분이 계시고, 그분은 지금도 우리의 소리 없는 것까지 보고 계신다는 것을. 사랑하는 여러분, 되돌려 받은 이 계절을 마음껏 쓰시되 누구의 것으로 쓸지를 먼저 정하시기 바랍니다. 아직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 채로도 주의 전에 올라가는 발걸음이 되시고, 길어지는 그림자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이 늦여름의 평화의 순례자가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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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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