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38:01-22 내가 네 눈물을 보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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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선고에서 시작해 성전의 노래로 끝나는 이야기입니다.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자 이사야가 집을 정리하라는 여호와의 말씀을 전하고, 왕은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자신이 걸어온 길을 기억해 달라 통곡합니다(1-3절). 하나님은 곧바로 다른 말씀을 주십니다.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으니 수명에 십오 년을 더하고 이 성도 앗수르의 손에서 건져 내겠다는 것입니다. 그 확실성의 표로 해 그림자가 열 도 뒤로 물러갑니다(4-8절). 이어 왕의 노래가 놓입니다. 중년에 스올의 문에 들어간다는 탄식이 큰 고통조차 평안을 주려 하심이었다는 고백으로 돌아서고, 죄는 주의 등 뒤로 던져집니다(9-20절). 그러나 이야기는 완결되지 않습니다. 무화과 처방과 징조를 구하는 물음만 남긴 채 열린 채로 끝납니다(21-2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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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본문은 어제 읽은 예루살렘 구원의 밤 바로 다음에 놓여 있지만, 실제로 일어난 순서는 그 반대입니다. 김필회 교수는 39장에 나오는 바벨론 왕 므로닥발라단의 사절 파견을 근거로, 히스기야의 발병과 치유가 주전 701년 산헤립의 예루살렘 원정보다 "적어도 십이 년 또는 삼 년 이상 앞선 사건"이라고 정리합니다. 김근주 교수도 같은 자리에서 "히스기야의 병은 산헤립 침공 이전에 발병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고 말하며, 실제 사건의 순서는 38-39-36-37장이 된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편집자는 누구나 알 수 있는 연대기를 왜 뒤집어 놓았을까요. 김필회 교수는 이것이 "우연이나 무지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편집자의 의도에 속하는 것으로 주석 작업에서 반드시 고려되어야 할 해석학적" 문제라고 못 박습니다. 순서를 바꾼 그 손길 자체가 하나의 해석이라는 뜻입니다.
# 순서를 바꾸면 무엇이 달라집니까. 연대기대로 읽으면 38장의 약속이 먼저이고 36-37장의 구원은 그 약속의 성취가 됩니다. 그러나 지금의 문학적 순서대로 읽으면, 히스기야에게 주신 예루살렘 구원의 약속은 "아직 실현되지 않은 미래적 사건"이 됩니다. 김필회 교수의 표현대로 "701년의 예루살렘 해방은 구원사의 정점에 속하지만, 현재의 문맥에 따라 읽으면 앞으로 있을 예루살렘 구원의 모형이 될 뿐"입니다. 하룻밤에 십팔만 오천을 치신 그 놀라운 구원조차 최종적인 구원이 아니라 미래의 구원을 보여 주는 경험적 예로 상대화된 것입니다. 성경은 지난 은혜를 기념비로 세우지 않고 앞을 가리키는 이정표로 세웁니다.
# 그래서 이 장은 한 왕의 사적인 투병기가 아닙니다. 죽을병에서 살아난 히스기야에게 하나님은 뜬금없이 "이 성을 보호하리라"는 약속을 얹어 주십니다. 김필회 교수는 여기서 "왕의 운명과 예루살렘의 운명이 내적으로 일치한다"고 읽습니다. 곧 "왕의 치명적 질병에서 예루살렘의 절망적 위기를, 왕의 극적인 회복에서 예루살렘의 기적적인 구원을, 심판 선고 앞에서 왕이 취한 태도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기대하는 신앙인의 전형적인 모습을 읽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카리스 종합주석도 같은 자리에서 이스라엘의 왕이 "이스라엘의 대표이며 상징적 존재"이기에, 그의 사형 선고는 이스라엘의 멸망을, 그의 회복은 이스라엘의 구원을 상징한다고 설명합니다. 한 사람의 병상이 한 민족의 미래를 담는 그릇이 된 것입니다.
# 또 하나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이 이야기가 열왕기하 20장과 나란히 놓여 있으면서도 결정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열왕기에서는 처방대로 무화과를 붙여 왕이 나았다는 보고가 분명히 나오지만, 이사야서에는 처방만 있고 나았다는 말이 없습니다. 김필회 교수는 이를 두고 "병에서 회복된 열왕기의 히스기야와 달리 이사야서의 히스기야는 아직 병에서 치유함을 받지 못했다"고 정리하며, 이사야 본문이 치유를 "아직 끝나지 않은 사건"으로 남겨 두었다고 봅니다. 그리고 그 열린 결말은 39장의 심판을 지나 40장 이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의 선포에서 비로소 닫힙니다. 오늘 우리가 읽는 이 장은 이사야서 전반부의 마지막 문 앞에 서서, 아직 오지 않은 위로 쪽으로 몸을 돌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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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절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하나님은 이미 내려진 선고 앞에서도 당신께로 돌아앉는 사람의 눈물을 외면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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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에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었고,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가 나아와 여호와의 말씀을 전합니다. "너는 네 집에 유언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사 38:1). 회복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 통보입니다. 히스기야는 그 선고를 받아들이는 대신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여호와께 기도합니다(2절). 그리고 이렇게 아룁니다.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주 앞에서 진실과 전심으로 행하며 주께서 보시기에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사 38:3). 그러고는 심히 통곡했습니다. 예언자의 말은 고발도 아니고 회개하라는 촉구도 아니었습니다. 다만 죽음이 필연적이라는 전갈이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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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네 집에 유언하라"는 말의 무게를 새겨야 합니다. 김필회 교수는 이 명령을 병자의 신분과 관련하여 읽습니다. "왕의 예기치 못한 죽음은 왕실 안에 당파적 권력 투쟁을 발생시켜 국가를 혼란에 빠뜨릴 수 있기에 후계자의 지명은 왕이 죽기 전에 긴급하게 정리해야 할 가장 중요한 과제"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어 '차우'는 '명령하다, 지시하다'라는 뜻의 동사 '차와'의 명령형으로, 임박한 죽음을 전제한 사무적인 지시입니다. 죽음을 앞둔 사람에게 남은 일이 서류 정리뿐이라는 통보만큼 잔인한 말이 있을까요. 더구나 카리스 종합주석에 따르면 당시 히스기야는 서른아홉 살 안팎의 젊은 나이였고 아직 상속자가 없었습니다. 므낫세가 열두 살에 즉위한 것을 역산하면, 그는 이 사건이 있고 삼 년이 지나서야 태어납니다. 다윗의 후손으로 메시야의 약속을 이어 가야 할 왕이 후사 없이 중년에 죽는다는 것은 개인의 불행을 넘어 언약의 선이 끊기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히스기야는 선고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 선고를 내리신 분에게로 나아갑니다. 얼굴을 벽으로 향했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김필회 교수는 이를 "왕으로서의 공적 활동을 중단하고 자신의 하나님에게로 나아간다"는 뜻으로 읽습니다. 여기서 벽은 성전의 벽이 아니라 그가 이사야를 만났던 방의 벽입니다. 카리스 종합주석은 같은 자세를 취했던 아합 왕과 나란히 놓고 대조합니다. 아합이 얼굴을 벽으로 향한 것은 나봇의 포도원을 갖지 못한 노여움 때문이었으나, 히스기야는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서 홀로 하나님께 몰입된 간구를 드리려" 돌아누웠다는 것입니다. 같은 몸짓이 어디를 향하느냐에 따라 삐침이 되기도 하고 기도가 되기도 합니다.
기도의 내용도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산헤립의 위협 앞에서 드린 기도(37:15-20)는 "그룹 사이에 계신 이스라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라는 장엄한 도입부로 열렸지만, 여기서는 그저 "여호와여"라고 이름을 부르며 시작합니다. 절박한 사람의 기도는 짧아집니다. 그는 자신이 "진실과 전심으로" 행했음을 아뢰며 기억해 달라고 청합니다. '에메트'는 흔들림 없이 일관되게 걸어온 성실을 가리키고, '레브 샬렘'은 둘로 나뉘지 않은 온전한 마음을 가리킵니다. 카리스 종합주석은 그 초점이 "행동의 완전함이 아니라 동기의 순전함"에 있다고 정확히 짚습니다. 자기 공로를 계산서로 내미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자신을 붙들어 주신 그 관계를 근거로 매달리는 것입니다. 성경의 기도 언어에서 '기억해 달라'는 청은 곧 '은혜를 베풀어 달라'는 뜻입니다.
민간 신앙은 질병을 곧바로 죄의 결과로 읽지만, 김필회 교수는 구약에 자신의 무죄함을 내세워 간구하는 예가 드물지 않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그러면서 그의 통곡이 "신세 한탄이나 비통함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려는 기도자의 간절함의 표현"이라고 해석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우리에게는 내밀 공로가 없지만, 우리를 위해 통곡하시며 기도하신 분이 계십니다. 겟세마네에서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던 그분이(히 5:7) 지금도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기에, 우리는 히스기야보다 더 담대히 그러나 더 겸손히 그 벽 앞에 돌아앉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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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는 나쁜 소식을 받아 든 사람에게 곧바로 다음 대책을 요구합니다. 진단서를 받으면 병원을 알아보고, 통보를 받으면 다음 자리를 찾아야 하고, 무너지면 곧바로 일어서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왕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유명한 의사를 찾아가지 않았고 왕실 회의를 소집하지도 않았습니다. 얼굴을 돌려 벽을 향하고 울었을 뿐입니다. 의학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어리석어 보이는 그 자리가 오늘 본문의 출발점입니다. 광양사랑의교회 성도들에게 권합니다. 감당할 수 없는 소식을 받은 날, 대책을 세우기 전에 먼저 돌아앉는 시간을 가지십시오. 세상을 향해 열려 있던 얼굴을 잠시 닫고 하나님께만 몰입하는 그 십 분이, 이후의 모든 결정을 다르게 만듭니다. 또한 우리의 기도가 세련되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기를 바랍니다. 히스기야의 기도는 문장이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정직해서 응답되었습니다. 서운함과 억울함과 두려움을 그대로 아뢰는 것이 하나님을 등지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 돌아앉는 가장 깊은 신뢰의 표현입니다. 가정에서도 그러합니다. 자녀에게 우는 법을 감추도록 가르치는 대신, 울 자리를 아는 사람으로 키우는 것이 신앙 교육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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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8절 십오 년과 열 도 물러간 그림자
하나님은 시간과 그림자의 주인이시며, 한 사람의 생명 안에 공동체의 구원을 함께 담아 주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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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가 끝나기도 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사야에게 임합니다(4절). 하나님은 이사야를 다시 보내시며 이렇게 말씀하게 하십니다. "네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네 수명에 십오 년을 더하고"(사 38:5). 그리고 한 가지가 더 얹힙니다. "너와 이 성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건져내겠고 내가 또 이 성을 보호하리라"(사 38:6). 이어 그 약속의 확실성을 보여 주는 징조가 주어집니다. 아하스의 해시계에 나아갔던 해 그림자가 뒤로 열 도 물러갑니다(7-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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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신탁의 도입부가 유난히 장중합니다. '말씀 사건의 양식'과 예언자에게 주는 명령과 사자의 전언 양식이 겹쳐 나옵니다. 김필회 교수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끄는 도입부의 이러한 구조는 이사야서 전반부에서는 이곳이 유일하다"고 지적하며, 그 이유를 두 신탁의 내용이 정반대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짧은 간격을 두고 같은 사건에 상반된 말씀이 주어지면 신탁의 진정성이 의심받습니다. 확대된 도입부는 그 의심을 잠재우며 "이사야가 자신의 생각에 따라 충동적으로 처신하지 않고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말씀을 선포하고 있음을" 분명히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것을 배웁니다. 김필회 교수의 말대로 "예언자가 선포하는 하나님의 의지는 취소될 수 없이 확정된 결정이라기보다는 아직은 그 문이 열려져 있는 결정"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변덕스럽지 않지만, 그 뜻을 이루시는 과정과 방법 안에는 기도가 들어설 자리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호칭도 달라졌습니다. 죽음을 선고하실 때는 그저 '여호와'였는데, 위로를 주실 때는 "네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이십니다. 칼빈은 이것이 히스기야에게 베풀어진 은혜가 그 조상 다윗과 맺으신 언약에 뿌리내리고 있음을, 곧 "약속을 지키시는 여호와의 변함없는 신실하심"에서 온 것임을 나타낸다고 보았습니다. 카리스 종합주석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렇게 적습니다. "만일 히스기야가 후손을 보지 못하고 죽는다면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그리스도도 태어나지 않으셨을 것이다." 한 병상의 기도가 구속사의 실을 이어 붙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에서 듣고 보셨다는 두 동사는, 그 기도가 참되고 진실한 것으로 인정받았다는 선언입니다. 하나님은 말을 들으시는 분일 뿐 아니라 소리 없이 흐르는 눈물까지 보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이 응답에는 히스기야가 구하지 않은 것이 하나 얹혀 있습니다. 그는 치유만 구했는데 하나님은 예루살렘의 구원까지 약속하십니다. 김필회 교수는 이 대목이 38장 안에서는 이해가 쉽지 않다고 인정하면서도, 바로 여기서 "히스기야의 개인적 구원 체험 안에 이스라엘의 구속사가 편입되고 있음"을 봅니다. 나아가 생명의 연장에 이어 성읍의 구원이 연속으로 두 번 언급되고 '이 성읍'이라는 지시형용사가 붙는 것을 근거로, 신탁의 강조점이 오히려 후자에 놓여 있다고 읽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 제목보다 늘 큰 답을 주십니다. 그 큰 답은 대개 우리 한 사람을 넘어서 우리가 속한 공동체를 향합니다.
그리고 십오 년이라는 숫자를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됩니다. 카리스 종합주석은 이렇게 묻습니다. 하나님께서 단순히 죽음을 취소하실 수도 있었을 텐데 왜 굳이 십오 년이라는 기한을 정하셨는가. 그리고 이렇게 답합니다. "죽었어야 하는 히스기야에게 있어서 15년은 긴 기간일 수 있지만, 역사의 흐름 속에서 15년은 제한된 시간이다." 김필회 교수의 표현은 더 날카롭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취소된 것이 아니라 연기된 것이다." 그림자가 열 도 물러간 그 징조 자체가 이 진실을 품고 있습니다. 물러간 그림자는 멈춘 것이 아니라 다시 움직입니다. 히스기야가 십오 년을 얻었듯, 예루살렘도 정해진 만큼의 시간을 얻었을 뿐입니다. 은혜는 무한하지만 유예는 유한합니다. 그러므로 연장된 시간은 마음껏 늘어질 시간이 아니라 돌이킬 시간입니다. 징조가 벌어진 장소가 하필 '아하스의 계단'이라는 것도 우연이 아닙니다. 김필회 교수는 그 이름이 "우상숭배의 불신앙에 떨어진 아하스와 오직 야훼에게만 의존하는 히스기야를 대비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선택되었"으며, 그림자를 물리시는 말씀은 곧 "아하스의 불신앙과 정치적 오판이 초래한 파국적 재앙이 히스기야의 순종과 기도에 의해 다시 한시적으로 극복되어졌음을" 함축한다고 봅니다. 하나님은 아버지가 만든 시계 위에서 아들의 시간을 되돌려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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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시간이 실은 연장된 시간입니다. 오늘 아침 눈을 뜬 것도, 지난 계절의 위기를 통과해 온 것도 당연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그 연장된 시간을 무엇으로 채우는가입니다. 히스기야는 십오 년을 얻었지만 그 기간에 므낫세를 낳았고, 카리스 종합주석의 지적대로 그 소중한 기회를 다음 세대에게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전하는 일에 온전히 쓰지 못한 듯 보입니다. 오늘 한국 교회도 여러 차례 유예를 받았습니다. 사회적 신뢰가 흔들릴 때마다 다시 기회가 주어졌고, 문을 닫을 뻔한 자리마다 사람이 채워졌습니다. 그러나 유예를 면죄부로 읽는 순간, 연장된 시간은 회개의 시간이 아니라 방심의 시간이 됩니다. 광양사랑의교회는 우리에게 주어진 이 시간을 무엇으로 쓰고 있는지 물어야 합니다. 성도 개인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큰 병을 지나온 분, 사업의 고비를 넘긴 분, 관계의 파국을 겨우 피한 분들이 계십니다. 그때 드린 서원을 기억하십니까. 우리가 되돌려 받은 시간은 우리 것이 아니라 맡겨진 것입니다. 오늘 하루의 계획표에 그 사실이 한 줄이라도 반영되어 있다면, 우리는 십오 년을 헛되이 쓰지 않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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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16절 스올의 문 앞에서 부른 노래
성령 하나님은 절망의 밑바닥에서 터져 나온 정직한 탄식조차 기도로 받아 올리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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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잠시 멈추고 한 편의 노래가 놓입니다. "유다 왕 히스기야가 병들었다가 그의 병이 나은 때에 지은 글이라"(9절). 그는 자신이 지나온 자리를 이렇게 회고합니다. "내가 말하기를 나의 중년에 스올의 문에 들어가고 나의 여생을 빼앗기게 되리라 하였도다"(사 38:10). 다시는 산 자의 땅에서 여호와를 뵙지 못하리라 하였고(11절), 자신의 거처가 목자의 장막처럼 걷혀 옮겨졌으며 직공이 베를 잘라 말듯 생명이 말렸다고 탄식합니다(12절). 제비같이 학같이 지저귀며 비둘기같이 슬피 울었고, 눈이 쇠하도록 우러러보며 "여호와여 내가 압제를 받사오니 나의 중보가 되옵소서"라고 부르짖었습니다(14절). 그리고 마침내 이렇게 아룁니다. "주여 사람이 사는 것이 이에 있고 내 심령의 생명도 온전히 거기에 있사오니 원하건대 나를 치료하시며 나를 살려 주옵소서"(사 3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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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노래의 형식부터 특이합니다. 카리스 종합주석은 표제만 보면 감사시 같은데 내용과 운율은 애가에 가깝고, 그렇다고 애가의 정형적 특징도 갖추지 않은 애매한 형태라고 분석합니다. 그리고 그 애매함 자체가 의도라고 봅니다. 곧 이 노래에는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에 대한 감사도 담겨 있지만, 그 감사의 기쁨은 음울한 전망에 의해 흐릿해진다"는 것입니다. 감사와 탄식이 섞인 이 목소리야말로 실제 신앙인의 목소리입니다. 우리의 찬송에도 아직 마르지 않은 눈물이 섞여 있고, 우리의 탄식에도 이미 감사의 씨앗이 들어 있습니다. 이 노래가 정형에서 벗어난 덕분에, 정형에 맞출 수 없는 우리 마음이 여기에 들어와 앉을 자리가 생겼습니다.
'중년에'로 번역된 '비드미 야마이'는 문자적으로 '내 날들의 절반에'라는 뜻입니다. 카리스 종합주석은 여기 쓰인 '데미'가 '그치다'에서 파생된 명사로 다른 본문에서는 '침묵', '휴식'으로도 옮겨진다는 점을 들어, 히스기야가 인생의 절정을 "해가 정점에 이른 정오 시간에 햇볕을 피해서 쉬어야 하는" 그 시각에 비유한 것으로 봅니다. 한낮에 그늘을 찾아 잠시 앉았는데 그대로 일어나지 못하게 된 사람의 심정입니다. '스올의 문'이라는 표현도 그러합니다. 문이란 한번 지나가면 되돌아올 수 없는 경계입니다. '여생을 빼앗기게 되리라'의 '푸카드티'는 수동형으로, 남은 세월이 자기 의지와 무관하게 강탈당한 것 같은 뉘앙스를 담고 있습니다. 억울함이 문장의 문법 속에까지 배어 있는 것입니다.
가장 아픈 대목은 11절입니다. 그가 두려워한 것은 고통 자체가 아니라 다시는 여호와를 뵙지 못하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카리스 종합주석은 히브리어 원문에 '오드'가 한 번뿐인데 우리말 성경이 "뵈옵지 못하리니, 뵈옵지 못하겠고"로 두 번 옮긴 것은 '야흐'가 연달아 나오는 강조를 살린 번역이라고 설명합니다. 그가 잃을까 두려워한 것은 목숨이 아니라 예배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의 목록과 견주어 볼 만한 대목입니다. 우리는 못 해 본 일을 아쉬워하지만, 그는 더 이상 드리지 못할 예배를 아쉬워했습니다.
그리고 14절의 부르짖음이 이 노래의 한복판을 관통합니다. "나의 중보가 되옵소서." 하나님께 하나님이 보증이 되어 달라고 청하는 이 역설적인 기도가, 구약의 신앙이 도달한 가장 깊은 자리 가운데 하나입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설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 하나님 자신이 그 자리에 서 주시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이 간구는 신약에서 응답됩니다. 하나님이시면서 사람이신 한 분,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 2:5)는 고백이 그것입니다. 히스기야의 병상에서 터져 나온 이 한마디는, 아직 오지 않은 중보자를 향해 뻗은 손입니다. 16절에서 '치료하소서, 살려 주소서'로 옮겨진 두 동사는 사역형으로, 명령형뿐 아니라 미완료형으로도 읽을 수 있어 "당신이 나를 치유하시며 나를 살게 하시리이다"라는 확신의 고백이 되기도 합니다. 탄식의 문장이 어느새 신뢰의 문장으로 바뀌는 지점이 바로 여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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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직한 탄식을 잃어버린 것이 오늘 우리 신앙의 큰 손실입니다. 우리는 예배당에서 늘 괜찮은 표정을 짓고, 기도회에서 남들이 듣기 좋은 문장을 고릅니다. 그러나 히스기야의 노래는 "억울합니다, 아직 한창인데 왜 지금입니까"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그 말을 성경 한복판에 남기셨습니다. 광양사랑의교회의 나눔 자리가 그런 정직이 허락되는 자리이기를 바랍니다. 힘든 사람에게 곧바로 위로의 정답을 얹지 말고, 먼저 그 사람의 문장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 주십시오. 성령께서는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는 분입니다(롬 8:26). 우리의 앓는 소리를 기도로 번역해 주시는 분이 계시기에, 우리는 잘 정리되지 않은 채로도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아울러 우리가 무엇을 잃을까 두려워하는지도 점검해야 합니다. 병상에 누웠을 때 가장 아쉬운 것이 못다 이룬 성취라면, 우리의 삶은 이미 예배에서 너무 멀리 와 있는 것인지 모릅니다. 오늘 우리 사회는 아픈 사람에게 빨리 회복해 돌아오라고 재촉합니다. 회복의 속도가 곧 그 사람의 성실함으로 계산되는 자리에서, 오래 앓는 사람은 자기 고통에 더해 미안함까지 짊어집니다. 교회만은 그 셈법에서 벗어나 있어야 합니다. 오래 앓는 성도, 오래 기다리는 부모, 오래 흔들리는 청년에게 우리가 건네야 할 것은 회복의 시한이 아니라 함께 앉아 있어 주는 시간입니다. 이번 한 주, 병상에 있거나 마음이 무너진 한 사람의 이름을 정해 그를 위해 소리 내어 기도하고, 가능하다면 안부를 묻는 짧은 연락 하나를 보내십시오. 우리의 기도가 남의 탄식을 대신 들어 주는 자리까지 넓어질 때, 그 기도는 비로소 히스기야의 기도를 닮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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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22절 등 뒤에 던지신 죄, 그리고 열린 결말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당신의 등 뒤로 던지시고, 아직 닫히지 않은 결말 속으로 우리를 부르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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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는 마침내 돌아섭니다. "보옵소서 내게 큰 고통을 더하신 것은 내게 평안을 주려 하심이라 주께서 내 영혼을 사랑하사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지셨고 내 모든 죄를 주의 등 뒤에 던지셨나이다"(사 38:17). 스올은 주께 감사하지 못하고 사망은 주를 찬양하지 못하지만(18절), "오직 산 자 곧 산 자는 오늘 내가 하는 것과 같이 주께 감사하며 주의 신실을 아버지가 그의 자녀에게 알게 하리이다"(사 38:19). 그리고 노래는 성전의 음악으로 끝납니다. "여호와께서 나를 구원하시리니 우리가 종신토록 여호와의 전에서 수금으로 나의 노래를 노래하리로다"(사 38:20). 그러나 장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사야는 한 뭉치 무화과를 종처에 붙이면 왕이 나으리라 처방하고(21절), 히스기야는 "내가 여호와의 전에 올라갈 징조가 무엇이냐"고 묻습니다(22절). 그 물음에는 아무 대답도 주어지지 않은 채 이야기가 닫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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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절은 이 노래의 신학적 정점입니다. 히스기야는 고통이 끝난 자리에서 뒤를 돌아보며, 그 고통이 자신에게 무엇을 남겼는지 한 단어로 요약합니다. '샬롬', 곧 평안이며 온전함입니다. 카리스 종합주석은 "진실로 깨닫는 자에게는 고통조차도 그를 연단, 완성시키려는 하나님의 은혜가 된다"고 정리합니다. '사랑하사'로 옮겨진 '하샤크'는 내적으로 단단히 결합된 사랑을 뜻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병에서 건져 내신 정도가 아니라, 그에게 붙어 계셨습니다. 그리고 죄를 "등 뒤에 던지셨다"는 표현이 이어집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무언가를 기억하실 때는 그것을 얼굴 앞에, 눈앞에 두신다고 말합니다. 등 뒤로 던지신다는 것은 그 반대, 곧 다시는 시야에 두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노래의 전반부(10-14절)에는 병을 죄와 연결 짓는 암시가 전혀 없었다는 점입니다. 살아난 뒤에야 그는 자신의 회복이 곧 용서였음을 깨닫습니다. 은혜는 언제나 나중에 더 크게 읽힙니다.
18-19절의 대조는 오해되기 쉬운 대목입니다. 스올이 주를 찬양하지 못한다는 말은 죽은 뒤의 운명에 대한 완결된 교리가 아니라, 정경이 완성되기까지 점진적으로 밝아져 가는 계시 과정의 한 지점입니다. 카리스 종합주석도 이 견해가 가장 무난하다고 정리합니다. 히스기야가 붙든 것은 '지금 살아 있는 자만 찬양할 수 있다'는 절박함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바란 삶은 단순한 생명의 연장이 아니라 주를 찬양하며 경배하는 삶이었습니다. 여기서 예배하는 자가 곧 살아 있는 자라는 정의가 나옵니다. 그리고 신약은 이 지점을 훌쩍 넘어섭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통과해 부활하심으로써, 이제는 죽음조차 찬양을 끊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어린 양 앞에서 그치지 않는 새 노래가 있기 때문입니다(계 5:9-14). 히스기야가 십오 년을 구해 얻은 그 노래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영원으로 얻었습니다. 19절이 아버지가 자녀에게 신실하심을 알게 하겠다는 다짐으로 끝나는 것도 놓칠 수 없습니다. 은혜를 경험한 사람의 다음 과제는 언제나 전달입니다.
그런데 왜 이 아름다운 노래 뒤에 무화과 처방과 대답 없는 질문이 붙어 있을까요. 김필회 교수는 여기에 이 장의 열쇠가 있다고 봅니다. 열왕기와 달리 이사야서에서는 "이사야는 처방을 명령하지 않고 치료 방법을 가르쳐 줄 뿐"이며 "그 처방대로 시행하여 병에서 치유함을 받았다는 말도 없"습니다. 곧 "이사야서의 히스기야는 아직 병에서 치유함을 받지 못했다. 그에게는 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처방전만 주어졌을 뿐"입니다. 그는 이 열린 결말을 이스라엘 전체에 대한 그림으로 읽습니다. "히스기야가 상징하는 이스라엘의 회복은 아직 미래에 속한다." 바벨론에 의한 심판은 피할 수 없지만, 그 심판을 이기고 일어설 처방전은 미리 주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처방전이 무엇인지에 대해 그는 조심스럽게 이렇게 제안합니다. "심판에 떨어진 이스라엘이 이사야가 선포하였던 하나님의 말씀에 다시 귀를 기울여 순종한다면 이들에게 구원이 주어질 수 있다." 이사야서 전반부에 모인 말씀 자체가 무화과 뭉치라는 것입니다. 처방은 이미 우리 손에 있고, 붙이는 일만 남아 있습니다.
마지막 질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버지 아하스는 징조를 구하라는 하나님의 파격적인 제안을 위선적인 경건으로 거절했습니다(7:12). 아들 히스기야는 아무도 권하지 않았는데 스스로 징조를 구합니다. 김필회 교수는 두 사람이 "너희가 믿지 않으면 정녕 서지 못하리라"(7:9)는 말씀을 중심으로 서로 대척점에 서 있다고 정리하며, 히스기야의 징조 요구가 "아하스의 거절로 인해 초래된 심판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는 교육적 성격"을 갖는다고 봅니다. 또한 그가 구한 것이 단순한 완치 증명이 아니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감'이라는 사실도 중요합니다. 이는 그의 노래 20절과 이어지고, 더 넓게는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자"는 순례의 노래(2:2-5)에까지 닿습니다. 대답이 주어지지 않은 그 질문은 독자에게 넘겨진 질문입니다. 당신도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겠느냐고, 성경이 우리에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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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신앙을 완결된 이야기로 만들고 싶어 합니다. 간증에는 늘 깔끔한 결말이 필요하고, 기도 응답에는 확인 도장이 있어야 마음이 놓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장을 열어 둔 채 덮습니다. 아직 낫지 않은 사람, 아직 응답을 손에 쥐지 못한 사람도 이 이야기 안에 있다는 뜻입니다. 오늘 한국 교회는 지난 부흥의 기억을 완결된 결말처럼 붙들고 있는지 모릅니다. 김필회 교수의 경고처럼 한 세기 전의 구원 경험이 오늘의 순종을 대신해 주지는 않습니다. 어제의 은혜는 오늘 신앙의 토양이 될 수는 있어도, 오늘의 회개를 면제해 주는 부적이 될 수는 없습니다. 광양사랑의교회의 성도들에게 권합니다. 처방전은 이미 우리 손에 있습니다. 매일 펴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무화과 뭉치를 상처에 붙이는 일, 곧 들은 말씀을 실제 삶의 아픈 자리에 붙여 보는 일만 남아 있습니다. 읽기만 하고 붙이지 않으면 처방전은 종이일 뿐입니다. 또 하나, 여호와의 집에 올라갈 징조를 구하십시오. 이 물음은 병이 나았느냐가 아니라 예배로 돌아가겠느냐는 물음입니다. 회복의 목적지는 건강도 성공도 아니고 예배입니다. 이번 주일, 아직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 채로도 예배의 자리에 올라가는 것, 그것이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남긴 대답 없는 질문에 대한 우리의 대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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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주여, 돌이킬 수 없다고 여긴 소식 앞에서
얼굴을 벽으로 향하게 하소서.
대책을 세우기 전에 먼저 돌아앉게 하시고
정직한 눈물로 아뢰게 하소서.
주는 말을 들으실 뿐 아니라
소리 없는 눈물까지 보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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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과 그림자의 주인이신 하나님,
우리가 누리는 오늘이 연장된 시간임을 잊지 않게 하소서.
물러간 그림자가 다시 움직이듯
유예된 날들도 흘러가는 줄 알게 하시고
남은 시간을 방심이 아니라 돌이킴으로 채우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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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이여, 우리의 앓는 소리를 기도로 번역하여 주소서.
스올의 문 앞에서 터져 나온 탄식조차
주 앞에서는 버려지지 않음을 믿습니다.
잃을까 두려운 것들의 목록 맨 앞에
주를 뵙는 예배가 놓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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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죄를 등 뒤로 던지신 주님,
아직 낫지 않은 자리에서도 감사하게 하시고
받은 은혜를 자녀에게 전하는 아비가 되게 하소서.
손에 들린 처방전을 상처에 붙이게 하시며
무엇이 해결되기 전이라도
주의 전에 올라가는 발걸음이 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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