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35:01-10 광야에 난 거룩한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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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돔의 황폐를 선언한 34장의 뒷면입니다. 심판으로 사막이 된 세상 한편에서, 버려졌던 광야와 메마른 땅이 도리어 기뻐하며 백합화 같이 피어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사론의 아름다움을 입습니다(1-2절). 그 소식은 먼저 약한 손과 떨리는 무릎에게, 겁내는 자들에게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라"는 명령으로 도착합니다(3-4절). 하나님이 오시자 맹인의 눈이 밝아지고 저는 자가 사슴 같이 뛰며, 뜨거운 사막이 못이 되고 승냥이 눕던 자리에 갈대와 부들이 자랍니다(5-7절). 그리고 그 땅 한가운데 대로 하나가 놓입니다. 거룩한 길이라 불리는 이 길에서는 사나운 짐승도 만나지 않고 우매한 행인도 헤매지 않습니다(8-9절). 마침내 속량함을 받은 자들이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고, 영영한 희락 앞에서 슬픔과 탄식은 달아납니다(1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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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사야 34장과 35장은 한 장의 앞뒷면과 같습니다. 김근주 교수는 이 두 장을 24-27장과 같은 장르에 속하되 분량이 적은 '소묵시록'으로 규정하면서, 여기 등장하는 에돔이 특정한 한 민족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며 그 백성에게 폭력을 행하고 억울한 피를 흘리게 한 세력 전체를 대표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34장에서 에돔은 광야로 변하고, 35장에서 이스라엘의 광야는 좋은 땅으로 변합니다. 원수를 갚으시는 그날이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구원의 복된 날이 되는 것입니다. 심판과 구원은 서로 다른 두 사건이 아니라 한 사건의 두 얼굴입니다.
# 35장이 놓인 자리도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이 장은 히스기야 시대를 다루는 28-39장의 흐름 안에서 28-33장 뒤에 붙어, 뒤이어 오는 36-39장과 함께 이사야서의 전반부를 마무리합니다. 동시에 이 장은 40장 이후를 향해 문을 열어 놓습니다. 광야에 대로가 놓인다는 모티브는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는 40장의 선포에서 그대로 다시 울리고, 10절은 포로 귀환을 노래하는 51장 11절과 글자 하나까지 동일합니다. 즉 35장은 앗수르의 위협 아래 있던 예루살렘을 향한 위로이면서, 동시에 바벨론 포로기를 지나갈 훗날의 백성을 향해 미리 놓아 둔 다리입니다.
# 본문의 두 이미지는 원어의 결을 알면 더 선명해집니다. 1절의 '사막'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라바'는 풀 한 포기 없는 불모지를 뜻하는데, 정관사가 붙으면 유다 남부에서 홍해에 이르는 특정 지역을 가리키지만 여기서는 정관사 없이 홀로 쓰여 어느 곳이든 메마른 자리를 통칭합니다. 오늘 내가 서 있는 마른 자리도 여기에 포함된다는 뜻입니다. '백합화'로 옮겨진 '하바찰레트'는 추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면 갈멜산과 사론 평야는 물론 팔레스틴 전역에서 피어나는 꽃이며, 솔로몬의 성전 기둥머리에도 그 문양이 새겨졌습니다(대하 4:5). 고난의 겨울 다음에 오는 아름다운 미래이자, 거룩한 아름다움 자체를 가리키는 꽃인 것입니다. 한편 김필회 교수는 이사야 62장을 다루면서 "여호와께서 구속하신 자"라는 호칭이 35장 8-9절의 '거룩한 길'로 다니게 될 '구속 받은 자들'을 회상시킨다고 밝히고, 백성을 한정하는 '거룩'은 특권이 아니라 귀속성을 함축한다고 덧붙입니다. 거룩한 백성이란 하나님께 바쳐진 자들, 그분만을 경배하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이 정의는 오늘 본문 8절을 읽는 열쇠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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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절 버려진 땅이 먼저 피어난다
하나님은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마른 땅을 골라 당신의 영광을 피워 내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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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은 사람의 회개나 결단이 아니라 땅의 기쁨으로 시작합니다.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고, 사막이 백합화 같이 피어 즐거워합니다. 그 꽃은 한두 송이가 아니라 "무성하게" 피어 기쁜 노래가 되고, 그 자리는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사론의 아름다움을 얻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시선이 옮겨집니다. 그것들이 보게 되는 것은 자신들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여호와의 영광 곧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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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바논과 갈멜과 사론은 이스라엘 사람이 아름다움을 말할 때 떠올리던 세 이름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앞 33장 9절에서는 그 셋이 모두 시들어 있었습니다. "레바논은 부끄러워하고 마르며 사론은 사막과 같고 바산과 갈멜은 나뭇잎을 떨어뜨리는도다."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는 한 가장 비옥한 땅도 사막이 된다는 뜻입니다. 35장은 그 문장을 정확히 뒤집습니다. 여호와께서 오시면 사막이던 곳이 도리어 레바논이 되고 갈멜이 되고 사론이 됩니다. 김근주 교수의 표현대로, 하나님의 백성에게 갈멜과 사론은 따로 있지 않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그들이 서 있는 곳이 곧 갈멜이고 사론입니다. 땅의 조건이 아니라 임재가 아름다움의 근거라는 이 선언은, 훗날 말구유와 광야와 십자가 곁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 복음의 문법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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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자주 자리를 바꾸어 문제를 풀려고 합니다. 더 좋은 부서, 더 큰 도시, 더 형편이 나은 교회로 옮기면 삶이 피어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자리를 옮겨 주는 대신 그 자리에 하나님이 오신다고 말합니다. 지방 소멸이라는 말이 익숙해진 시대에 광양사랑의교회가 붙들 소식이 여기 있습니다. 사람 수가 줄고 젊은이가 떠나는 자리라 해도, 여호와의 영광이 임하면 그곳이 곧 갈멜입니다. 오늘 우리가 먼저 할 일은 옮길 곳을 찾는 일이 아니라, 지금 서 있는 이 마른 자리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알아보는 눈을 얻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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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4절 약한 손과 떨리는 무릎에게
성부 하나님은 겁내는 자들을 버려두지 않으시고 친히 오셔서 갚으시고 구원하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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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이야기 다음에 곧바로 사람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너희는 약한 손을 강하게 하며 떨리는 무릎을 굳게 하며 겁내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라"(3-4절). 명령은 겁내는 자 본인이 아니라 그 곁에 선 사람들에게 주어집니다. 그리고 그 격려의 근거가 제시됩니다.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복하시며 갚아 주실 것이라 하나님이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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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등장하는 "약한 손", "떨리는 무릎", "겁내는 자"는 힘 있는 자들이 교만하게 활보하는 세상에서 떨며 살아가는 이들을 가리킵니다. 주목할 것은 격려의 내용입니다. 본문은 "힘을 내라, 네 안에 잠든 가능성을 깨워라"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강해질 이유는 그들 안에 있지 않고 오시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히브리어 본문에서 이 격려는 "너희 하나님이 오신다"는 사실 하나에 전적으로 매달려 있습니다. 신약의 히브리서가 지친 신자들을 향해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히 12:12)라고 권면할 때 인용한 구절이 바로 이 대목입니다. 낙심한 이를 세우는 일은 감정을 북돋우는 기술이 아니라, 오시는 하나님을 함께 바라보게 하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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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서로의 손을 붙들어 주라고 부름받은 공동체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격려가 종종 힘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그것이 "당신은 할 수 있다"는 말에서 멈추기 때문입니다. 이미 손이 약하고 무릎이 떨리는 사람에게 더 힘내라는 말은 짐이 됩니다. 오늘 본문이 알려 주는 격려의 방식은 다릅니다. 함께 앉아 "하나님이 오십니다"라고 말해 주는 것입니다. 실직의 통보를 받은 성도에게, 병상에서 밤을 지새우는 가족에게, 자녀 문제로 무너져 내린 부모에게 우리가 건넬 수 있는 가장 정직한 말도 이것입니다. 다음 주 심방과 소그룹 나눔에서, 조언을 준비하기 전에 함께 바라볼 하나님을 먼저 준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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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7절 그 때에 열리고 솟아나는 것들
성자 예수님은 닫힌 것을 열고 마른 자리에 물을 내시는 분으로 오셔서, 이 예언을 몸으로 이루신 메시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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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에"가 두 번 반복됩니다. 맹인의 눈이 밝고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리며, 저는 자가 사슴 같이 뛰고 말 못하는 자의 혀가 노래합니다. 그 이유가 곧바로 붙습니다.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6절). 뜨거운 사막이 못이 되고 메마른 땅이 원천이 되며, 승냥이가 눕던 폐허에는 풀과 갈대와 부들이 자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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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몸에 일어나는 일과 땅에 일어나는 일이 한 문장으로 묶여 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구원은 영혼만의 사건이 아니라 몸과 땅을 포함하는 사건입니다. 닫혀 있던 감각이 열리는 것과 마른 땅에서 물이 솟는 것은 같은 은혜의 두 표현입니다. 이 대목은 신약에서 결정적으로 다시 읽힙니다. 감옥에 갇힌 세례 요한이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물었을 때, 예수께서는 자신의 혈통이나 권위를 설명하지 않으시고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마 11:5). 오늘 본문 5-6절을 그대로 가져오신 것입니다. 김근주 교수의 지적처럼, 예수께서는 메시아가 오시면 일어날 일을 삶과 행위로 직접 보여 주심으로써 자신이 그리스도이심을 입증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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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오늘의 교회는 무엇으로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증명하겠습니까. 교리적 진술도 필요하지만, 주님은 그 방식을 택하지 않으셨습니다. 한국 교회가 사회의 신뢰를 잃어 온 지난 시간을 돌아보면, 우리에게 부족했던 것은 옳은 문장이 아니라 눈이 열리고 무릎이 펴지는 실제였습니다. 광양사랑의교회의 자리에서 이 질문은 매우 구체적입니다. 우리 곁에 말이 막힌 사람은 누구입니까. 돌봄의 손길이 닿지 않아 마른 채 남겨진 자리는 어디입니까. 예배당 안에서 부르는 노래가 예배당 밖의 누군가에게 물 한 줄기로 흘러갈 때, 우리는 설명하지 않고도 그리스도를 증언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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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10절 거룩한 길, 노래하며 돌아가는 길
하나님은 길이 없던 자리에 길을 내시고, 그 길 끝까지 당신의 백성을 안전하게 데려가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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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피고 물이 솟은 그 땅 한복판에 대로 하나가 놓입니다. 그 길은 "거룩한 길"이라 불립니다. 깨끗하지 못한 자는 지나가지 못하고, 우매한 행인도 그 길에서는 헤매지 않습니다. 사자도 사나운 짐승도 그리로 올라오지 못하므로 마주칠 일이 없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절이 전체를 매듭짓습니다. "여호와의 속량함을 받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들의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로다"(1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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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길의 성격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안전한 길입니다. 34장 10절이 그린 심판의 땅은 사람이 지날 수 없을 만큼 무너진 곳이었는데, 하나님이 은총으로 내시는 길은 누구나 걷기 쉬운 큰길입니다. 우매한 자도 길을 잃지 않는다는 말은 이 길이 사람의 총명에 기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둘째, 구별된 길입니다. 8절의 "구속함을 입은"이라는 표현은 히브리어 원문에는 없고 직역하면 "그것은 그 길을 걷는 이들을 위한 것이다"에 가깝지만, 9절이 이 길을 걷는 이들을 "구속함을 받은 자"로 부르기에 그 번역이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았습니다. 여기서 김필회 교수가 밝힌 대로, 이 길이 요구하는 '거룩'은 자격이나 특권이 아니라 귀속성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 그분만을 경배하는 자가 걷는 길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 길은 흠 없는 사람만 들어서는 좁은 문이 아니라, 값 주고 되찾아진 사람이 걸어가는 귀향길입니다. 10절의 "사라지리로다"에 해당하는 '누쓰'는 본래 패하여 도망가는 모습을 그리는 말입니다. 슬픔과 탄식이 조용히 옅어지는 것이 아니라, 영영한 희락 앞에서 참패하여 달아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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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람일수록 "나 같은 사람이 이 길에 서 있어도 되는가" 하는 물음 앞에 자주 멈춰 섭니다. 그러나 이 길의 통행 조건은 나의 결백이 아니라 하나님의 속량입니다. 값이 이미 치러졌기에 우리는 걷습니다. 동시에 이 길은 혼자 걷는 길이 아닙니다. 본문의 마지막 장면은 개인의 도착이 아니라 무리의 귀환이며, 침묵의 행렬이 아니라 노래하는 행렬입니다. 우리 교회의 예배와 소그룹, 그리고 함께하는 식탁이 바로 그 행렬의 연습입니다. 오늘 하루 우리가 붙들 것은 이것입니다. 아직 광야를 지나고 있어도 우리는 이미 길 위에 있고, 그 길의 끝은 슬픔이 아니라 시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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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마른 땅을 골라 꽃을 피우시는 하나님,
오늘 우리가 서 있는 이 자리를 광야로 여겨 자꾸만 다른 곳을 기웃거렸습니다.
자리를 옮겨 주시기를 구하기 전에
이 자리에 임하신 주님의 아름다움을 먼저 보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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겁내는 자에게 친히 오시는 하나님,
약한 손과 떨리는 무릎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우리 곁에 있습니다.
힘을 내라는 말 대신 함께 앉아 주님을 바라보게 하시고,
우리의 위로가 우리 자신이 아니라 오시는 주님께 기대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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닫힌 것을 여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
주님은 말이 아니라 열린 눈과 펴진 무릎으로 스스로를 증명하셨습니다.
우리 교회의 삶이 그 증거가 되게 하시고,
예배당 안의 노래가 담장 밖 마른 자리로 흘러가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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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없는 곳에 길을 내시는 하나님,
우리의 자격이 아니라 주님의 속량이 이 길의 통행증임을 믿습니다.
아직 광야를 지날지라도 이미 길 위에 있음을 잊지 않게 하시고,
마침내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는 그 행렬에 우리를 세워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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