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30:18-33 기다리시는 하나님과 뒤에서 들리는 음성

by 평화의길벗 posted Aug 20,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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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30:18-33 기다리시는 하나님과 뒤에서 들리는 음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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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굽으로 내려가던 길 위에 뜻밖의 접속사 하나가 놓입니다. 그러나, 입니다. 심판의 선언이 끝나자마자 여호와께서 기다리신다는 말씀이 이어집니다. 은혜를 베푸시려고 기다리시고, 긍휼히 여기시려고 일어나신다는 것입니다(18절). 통곡하던 백성은 부르짖는 소리 그대로 응답을 받고, 환난의 떡과 고생의 물이 그대로 있는 자리에서 이제는 숨지 않으시는 스승을 눈으로 보게 됩니다(19-20절). 뒤에서 들려오는 음성이 좌우로 치우치는 걸음을 바른 길로 돌려세우자, 백성은 은과 금을 입힌 우상을 더러운 것처럼 내던집니다(21-22절). 그 뒤에 비와 곡식과 개울이 흐르고, 상처를 싸매시는 날 햇빛은 일곱 배가 됩니다(23-26절). 마지막으로 여호와의 이름이 원방에서 오시고, 앗수르를 위해 도벳의 불이 예비됩니다(27-3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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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본문은 이사야 28장에서 33장까지 이어지는 여섯 개의 '화' 신탁 가운데 세 번째 신탁의 뒷부분입니다. 어제 읽은 30장 1절에서 17절까지가 애굽으로 내려가는 길을 향한 책망이었다면, 오늘 본문은 그 책망이 끝나는 자리에서 시작합니다. 옥스퍼드 원어성경대전은 이 단락을 두 부분으로 나눕니다. 18절에서 26절까지는 '징계 중에 있는 남유다를 향한 기다리심과 응답과 회복의 약속'이고, 27절에서 33절까지는 '남유다의 징계 도구였던 앗수르의 심판과 남유다의 환희 예고'입니다. 앞의 것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향해 하시는 일이라면, 뒤의 것은 그 백성을 짓밟던 세력을 향해 하시는 일입니다. 구원은 언제나 이 두 얼굴을 함께 가집니다. 건져 내시는 일과 눌러 온 것을 치우시는 일은 한 사건의 앞뒷면입니다.

# 시기는 여전히 주전 705년에서 701년 사이, 히스기야가 앗수르의 멍에를 벗으려 애굽과 손을 잡던 때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어조는 어제와 완전히 다릅니다. 어제는 '화 있을진저'로 시작했는데 오늘은 '그러나'로 시작합니다. 히브리어 원문의 첫 낱말 라켄은 대개 '그러므로'로 옮겨져 심판의 결론을 이끄는 말인데, 여기서는 그 자리에 은혜가 들어섭니다. 죄를 열거한 뒤에 마땅히 와야 할 선고 대신 기다림이 옵니다. 문법이 기대하게 만든 것과 실제로 온 것 사이의 그 간격이 바로 복음입니다.

# 김필회 교수는 이 시기 이사야의 자리를 뒷날 랍사게의 연설과 나란히 놓고 설명합니다. 예언자는 30장 1절부터 7절에서 유다가 애굽에 의존한다고 고발했고 31장 1절에서는 군사력에 의존한다고 고발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앗수르에 항복할 것을 주장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애굽뿐 아니라 앗수르도 유다의 생존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에게 양자는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고 그는 정리합니다. 이 관점이 중요한 까닭은, 오늘 본문 27절 이하에서 앗수르가 심판을 받기 때문입니다. 유다를 때리던 막대기가 부러진다고 해서 유다가 옳았던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유다를 편들어 앗수르를 치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정의로 양쪽을 다 다루십니다. 이것이 18절이 굳이 '여호와는 정의의 하나님이심이라'고 못 박는 이유입니다.

# 한 가지 더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회복은 환난이 끝난 뒤에 오지 않습니다. 20절은 분명히 말합니다. 환난의 떡과 고생의 물을 주시나, 네 스승은 다시 숨기지 아니하시리니. 떡이 치워지고 물이 걷힌 뒤에 스승이 나타나시는 것이 아니라, 그 떡과 그 물이 상 위에 그대로 놓인 채로 스승이 얼굴을 드러내십니다. 성경이 말하는 위로는 상황의 제거가 아니라 임재의 회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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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19절 기다리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심판하실 권한을 가지고도 은혜 베푸실 때를 기다리시며, 부르짖음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응답하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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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로 본문이 열립니다. 기다리시는 이유가 곧바로 두 번 밝혀집니다.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그리고 그 사이에 '일어나시리니'라는 동사가 놓입니다. 앉아 계시던 분이 몸을 일으키시는 그림입니다. 이어 그 모든 것의 근거가 제시됩니다. 대저 여호와는 정의의 하나님이심이라. 마지막은 복 선언입니다. 그를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하나님이 기다리시고, 사람이 기다립니다. 같은 낱말이 위아래로 마주 서 있습니다.

19절은 대상을 좁힙니다. 시온에 거주하며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백성아. 그리고 약속합니다. 너는 다시 통곡하지 아니할 것이라. 이유는 하나입니다. 그가 네 부르짖는 소리로 말미암아 네게 은혜를 베푸시되 그가 들으실 때에 네게 응답하시리라. 들으실 때에, 라는 표현이 눈에 걸립니다. 듣고 나서 한참 뒤가 아니라 듣는 그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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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절의 '기다리시나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카는 단순히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두고 사모하며 때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영어 성경들이 이 낱말을 '간절히 바라신다'로 옮기는 까닭이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다리시는 것은 힘이 모자라서가 아닙니다. 27절 이하를 보면 그분의 호흡 한 번에 열방이 까부름을 당합니다. 그런 분이 기다리십니다.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성품의 문제입니다.

더 눈여겨볼 것은 기다리심의 근거입니다. 대저 여호와는 정의의 하나님이심이라. 우리의 감각으로는 어색합니다. 정의의 하나님이라면 즉시 갚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의 정의가 곧 회복이라고 말합니다. 히브리어 미쉬파트는 저울을 맞추는 일에 그치지 않고 무너진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는 일까지를 포함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정의는 심판을 늦추는 이유가 되고, 동시에 심판을 반드시 이루시는 이유가 됩니다. 기다리심은 눈감아 주심이 아닙니다.

옥스퍼드 원어성경대전은 18절 이하가 앞선 1절에서 17절의 암울한 내용과 대조되는 자리라고 정리합니다. 곧 징계를 받고 있는 남유다를 향하여 여호와께서 그들을 기다리시고 응답하신다는 말씀을 주시며 그들 가운데 신앙 회복이 이루어질 것을 예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문맥이 그대로 은혜의 논리를 만듭니다. 심판의 말이 다 끝난 자리, 더는 할 말이 없는 자리에서 하나님이 먼저 입을 여십니다.

19절의 '들으실 때에'는 하나님의 응답이 얼마나 가까운지를 보여 줍니다. 이사야 65장 24절은 이것을 더 밀고 나갑니다.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내가 들을 것이며. 기도가 하늘에 닿기까지 걸리는 시간을 우리는 늘 길게 잡지만, 성경은 그 시간을 계속 줄여 나갑니다. 마침내 신약에서 그 거리는 사라집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기 때문입니다(요 1:14). 기다리시던 하나님이 결국 사람이 되어 오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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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은 우리 시대가 가장 서툰 일입니다. 우리는 삼 초 넘게 로딩되는 화면을 견디지 못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기다림을 두 방향으로 놓습니다. 하나님도 기다리시고 우리도 기다립니다. 우리가 기다림을 배우기 어려운 것은, 기다리는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 보면 기다림은 가장 능동적인 행위입니다. 그분은 기다리시면서 은혜를 준비하시고, 기다리시면서 일어나십니다.

혹시 응답이 없는 기도 제목을 오래 붙들고 계신 분이 있습니까. 오늘 본문은 그 침묵을 하나님의 무관심으로 읽지 말라고 합니다. 그 침묵은 저울이 멈춘 시간이 아니라 은혜가 준비되는 시간입니다. 그리고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를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성경이 복이 있다고 선언하는 사람은 응답을 받은 사람이 아니라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우리 교회가 기다릴 줄 아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열매를 서두르지 않고, 사람이 변하는 속도를 견디고, 하나님이 일하시는 때를 존중하는 공동체입니다. 우리를 향해 오래 기다려 주신 분이 계시기에 우리도 서로를 기다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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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절 숨지 않으시는 스승과 던져 버리는 우상

하나님은 고난의 한복판에서도 얼굴을 감추지 않으시고 뒤에서 길을 일러 주시는 스승이시며, 그 음성 앞에서 우리 손의 우상을 스스로 놓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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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절은 두 개의 문장이 하나로 이어져 있습니다. 주께서 너희에게 환난의 떡과 고생의 물을 주시나, 네 스승은 다시 숨기지 아니하시리니 네 눈이 네 스승을 볼 것이며. 앞은 고난이고 뒤는 임재입니다. 그 사이에 '그러나'가 있습니다.

21절은 그 스승이 하시는 일을 보여 줍니다. 너희가 오른쪽으로 치우치든지 왼쪽으로 치우치든지 네 뒤에서 말소리가 네 귀에 들려 이르기를 이것이 바른 길이니 너희는 이리로 가라 할 것이며. 앞이 아니라 뒤입니다. 큰 소리가 아니라 말소리입니다.

22절은 그 결과입니다. 조각한 우상에 입힌 은과 부어 만든 우상에 올린 금을 더럽게 하여, 불결한 물건을 던짐 같이 던지며 이르기를 나가라 하리라. 값비싼 것을 버립니다. 그것도 아까워하며가 아니라 더럽게 여겨서 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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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으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모레입니다. 가르치는 자라는 뜻이며, 율법을 뜻하는 토라와 같은 어근에서 나왔습니다. 옥스퍼드 원어성경대전은 20절에서 21절을 스승을 통해 주실 남유다를 위한 계시의 회복으로 읽습니다. 곧 백성이 혹 정도에서 벗어나는 일이 있다 할지라도 그 스승의 세밀한 인도에 의해서 바른 길을 걷게 될 것을 예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의 무게는 앞 문장과 붙여 읽을 때 비로소 드러납니다. 환난의 떡과 고생의 물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다만 그 상 앞에 스승이 함께 앉으십니다. 고난이 사라지는 대신 고난 속에 얼굴이 나타나는 것, 이것이 성경의 위로입니다.

21절의 '네 뒤에서'라는 표현이 이 본문의 심장입니다. 같은 자료는 이 표현이 스승이 매우 가까이에 언제나 함께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며, 그가 항상 친절하게 인도해 주신다는 사실을 암시한다고 풀이합니다. 또 '들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가 미완료형으로 쓰여 그들에게 지속적으로 말씀이 공급될 것임을 나타낸다고 덧붙입니다. 앞에서 끌어당기는 인도가 아니라 뒤에서 받쳐 주는 인도입니다. 앞에서 오는 소리는 우리를 재촉하지만, 뒤에서 오는 소리는 우리가 이미 잘못 들어선 뒤에도 우리를 놓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른 길이니'의 '핫데레크'는 정관사가 붙은 단수 명사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마땅히 걸어야 할 진리의 길은 오직 하나뿐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을 때(요 14:6), 그 정관사 하나가 마침내 한 인격이 되었습니다. 초대교회가 스스로를 '그 도'라고 불렀던 까닭도 여기 있습니다(행 9:2).

22절의 우상 버림은 회개의 열매입니다. 옥스퍼드 원어성경대전은 '더럽게 하여'에 해당하는 동사 타메가 강의 능동형으로 쓰여 그 의미가 한층 강조되고 있다고 지적하며, 이전까지 거룩하다고 여겨진 것에서 그 신성과 거룩성을 완전히 벗기고 부정한 것으로 여겨 헌신짝처럼 내버리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풀이합니다. 우상은 은과 금으로 입힌 것이었습니다. 값이 나가는 물건이었습니다. 그런데 스승의 음성을 들은 사람은 그것을 계산하지 않습니다. 값이 아니라 방향이 문제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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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삶에도 환난의 떡과 고생의 물이 상 위에 놓이는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가 하나님께 구하는 것은 대개 상을 치워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이 약속하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상은 그대로 있고 마주 앉으실 분이 오십니다. 이것이 시시하게 들린다면 우리는 아직 그 자리에 앉아 보지 않은 것입니다. 함께 앉아 주시는 분이 계신 고난과 혼자 견디는 고난은 전혀 다른 고난입니다.

뒤에서 들려오는 음성을 들으려면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잠시 멈추어야 합니다. 앞만 보고 달리는 사람은 등 뒤의 말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그것은 확성기 소리가 아니라 말소리이기 때문입니다. 하루에 십 분이라도 소리를 끄고 앉아 보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펴고 천천히 읽으시기 바랍니다. 그 음성은 대개 거창한 계시가 아니라 어제 읽은 말씀 한 구절로 옵니다.

그리고 우리 손에 들린 은과 금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의 우상은 신전에 있지 않습니다. 통장에 있고 이력서에 있고 자녀의 성적표에 있습니다. 그것들 자체가 악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것이 내 불안을 달래는 물건이 되었다면, 그것은 이미 우상입니다. 광양사랑의교회는 서로의 손을 열어 주는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손에 쥔 것을 놓으라고 다그치는 대신, 뒤에서 들려오는 음성을 함께 듣자고 청하는 교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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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26절 싸매시고 일곱 배로 밝히시는 회복

하나님은 돌이킨 백성의 땅과 몸과 마음을 함께 회복시키시며, 상처 난 자리마다 일곱 배의 빛을 부으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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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의 그림이 넓게 펼쳐집니다. 씨를 뿌린 땅에 비가 오고 곡식이 풍성하고 기름지게 됩니다(23절). 가축은 광활한 목장에서 먹고, 밭 가는 소와 어린 나귀까지도 키와 쇠스랑으로 까부른 좋은 먹이를 먹습니다(24절). 짐승의 몫까지 챙기는 회복입니다.

25절은 어조를 바꿉니다. 크게 살륙하는 날 망대가 무너질 때에 각 고산마다 각 준령마다 그 위에 개울과 시냇물이 흐를 것이며. 무너짐과 흐름이 한 문장 안에 있습니다.

26절이 절정입니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의 상처를 싸매시며 그들의 맞은 자리를 고치시는 날에는 달빛은 햇빛 같겠고 햇빛은 일곱 배가 되어 일곱 날의 빛과 같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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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절에서 26절의 회복은 개인의 마음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땅과 비와 곡식과 가축이 함께 회복됩니다. 성경의 구원은 언제나 이렇게 넓습니다. 로마서 8장은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다고 말하고(롬 8:22), 그 피조물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을 고대한다고 말합니다. 사람의 회복은 언제나 땅의 회복과 함께 옵니다. 사람이 하나님께로 돌아설 때 땅도 숨을 쉽니다.

25절의 '개울과 시냇물'은 뜻밖의 자리에서 흐릅니다. 고산과 준령, 곧 물이 있을 수 없는 높고 마른 곳입니다. 그것도 망대가 무너지는 날에 흐릅니다. 사람이 쌓아 올린 방어물이 무너지는 바로 그 자리에서 물길이 열립니다. 무너짐이 끝이 아니라 통로가 된다는 것, 이것이 오늘 본문이 반복하는 문법입니다.

26절의 '상처를 싸매시며'는 이사야 1장 6절과 짝을 이룹니다. 거기서 이스라엘은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하고 터지고 새로 맞은 흔적뿐이며,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부드럽게 함을 받지 못하였다고 했습니다. 싸매지 못한 상처가 이제 싸매집니다. 예언서 첫 장에서 열어 둔 상처를 하나님이 친히 닫으십니다. '맞은 자리'라는 말도 정직합니다. 하나님은 그 자리가 누구의 매로 생긴 것인지 숨기지 않으십니다. 징계하신 손과 싸매시는 손이 같은 손입니다. 호세아 6장 1절이 그것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일곱 배'는 창조의 완전수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하신 그 빛이 일곱 배가 됩니다. 회복은 원상 복구가 아니라 새 창조입니다. 상처 이전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통과한 자리에 더 밝은 빛이 옵니다. 요한계시록이 마침내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고 말할 때(계 22:5), 오늘 본문의 일곱 배는 거기까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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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우익 선생이 나무를 두고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소나무는 상처를 관솔로 만들고 감나무는 상처를 아름다운 무늬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부러진 감나무 가지의 아물지 않은 틈으로 빗물이 스며들어 까맣게 뭉친 자리가 먹감나무의 그 귀한 무늬가 됩니다. 상처가 없으면 무늬도 없습니다. 오늘 본문이 말하는 회복도 그러합니다. 하나님은 맞은 자리를 없던 일로 만들지 않으시고, 그 자리를 고치시면서 거기에 빛을 부으십니다.

혹시 지나간 상처 때문에 오늘이 무거운 분이 계십니까. 그 상처를 서둘러 덮으려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딱지는 손톱으로 떼어 내는 것이 아니라 아래에서 새살이 차오를 때 저절로 떨어집니다. 우리가 할 일은 상처를 감추는 것이 아니라, 싸매시는 손 앞에 그 자리를 그대로 내어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서로의 맞은 자리를 아는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아프지 않은 척하지 않아도 되는 교회, 흉터를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되는 교회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서로에게 일곱 배의 빛까지는 못 되어도, 캄캄한 밤에 켜 드는 작은 등불 하나는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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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33절 원방에서 오시는 이름과 도벳의 불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짓밟던 세력을 반드시 다루시며, 그 심판의 밤을 당신의 백성에게는 절기의 노랫밤으로 바꾸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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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이 바뀝니다. 보라 여호와의 이름이 원방에서부터 오되 그의 진노가 불 붙듯 하며 빽빽한 연기가 일어나듯 하며(27절). 입술에는 분노가 찼고 혀는 맹렬한 불 같습니다. 호흡은 목에까지 미치는 하수 같아서 멸하는 키로 열방을 까부르시고, 여러 민족의 입에는 미혹하는 재갈을 물리십니다(28절).

그런데 29절에서 소리가 바뀝니다. 너희가 거룩한 절기를 지키는 밤에 하듯이 노래할 것이며 피리를 불며 여호와의 산으로 가서 이스라엘의 반석에게로 나아가는 자 같이 마음에 즐거워할 것이라. 같은 밤에 한쪽에서는 불이 붙고 한쪽에서는 피리 소리가 납니다.

30절에서 32절은 앗수르의 낙담을 그립니다. 여호와의 목소리에 앗수르가 낙담하고, 예정하신 몽둥이가 그 위에 더해질 때마다 소고를 치며 수금을 탑니다. 33절이 마지막입니다. 대저 도벳은 이미 세워졌고 또 왕을 위하여 예비된 것이라 깊고 넓게 하였고 거기에 불과 많은 나무가 있은즉 여호와의 호흡이 유황 개천 같아서 이를 사르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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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스퍼드 원어성경대전은 이 단락을 여호와께서 유다를 구원하시는 동전의 다른 한 측면으로 읽습니다. 곧 앗수르에 대한 심판과 이로 인한 남유다의 환희를 말하는 것이며, 여호와께서는 그의 백성을 환난으로부터 건져 내셔서 그들에게 안식을 주실 뿐 아니라 그들을 압제하던 자들을 철저히 응징하심으로써 세상에서 악을 제하실 것이라고 정리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심판을 당할 앗수르는 일차적으로 이사야 당시의 앗수르를 가리키지만 더 나아가서는 세상에 있는 모든 악을 대표한다고 덧붙입니다.

27절의 '여호와의 이름'이라는 표현이 특이합니다. 여호와께서 오신다고 하지 않고 그 이름이 오신다고 합니다. 고대 근동에서 이름은 그 존재의 성품과 명예를 통째로 담는 말이었습니다. 앗수르가 랍사게의 입으로 더럽힌 것이 바로 그 이름이었고(사 37:23), 이제 그 이름이 친히 먼 곳에서부터 오십니다. 하나님이 자기 이름을 지키러 오시는 것입니다.

28절의 '멸하는 키로 열방을 까부르며'는 곡식을 까부르는 농사일의 그림입니다. 그런데 바로 앞 24절에서 같은 키가 소와 나귀의 먹이를 까부르는 데 쓰였습니다. 같은 도구가 한쪽에서는 짐승에게 좋은 먹이를 마련하고 다른 쪽에서는 열방을 흩어 버립니다. 하나님의 손은 하나인데 그 손이 닿는 자리에 따라 결과가 갈립니다.

29절의 '거룩한 절기를 지키는 밤'은 유월절 밤입니다. 애굽의 장자가 죽던 그 밤에 이스라엘은 집 안에서 어린 양을 먹었습니다. 심판과 구원이 같은 밤에 일어났습니다. 앗수르의 진영에 여호와의 사자가 내려간 그 밤도 그러했고(사 37:36), 마침내 골고다의 어둠도 그러했습니다. 성경에서 가장 캄캄한 밤들은 언제나 가장 결정적인 구원의 밤이었습니다.

33절의 '도벳'은 예루살렘 남쪽 힌놈 골짜기에 있던 자리로, 아하스 때부터 자녀를 불에 태워 몰렉에게 바치던 곳이었습니다(왕하 23:10, 렘 7:31). 유다가 자기 자녀를 태우던 그 불구덩이가 이제 유다를 삼키려던 제국의 왕을 위해 예비됩니다. 사람이 만든 지옥이 그 사람을 만든 자에게 돌아갑니다. 그리고 그 불을 사르는 것이 '여호와의 호흡'입니다. 창세기 2장에서 흙에 생기를 불어넣으신 그 호흡이 여기서는 심판의 유황 개천이 됩니다. 생명을 주는 숨과 악을 태우는 숨은 같은 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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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는 심판의 언어 앞에서 자주 당황합니다. 사랑의 하나님이 왜 불과 유황을 말씀하시는가 하는 질문 때문입니다. 그러나 눌려 본 사람은 압니다. 심판이 없는 사랑은 결국 가해자의 편입니다. 짓밟힌 이에게 하나님이 아무것도 하지 않으신다면 그것은 자비가 아니라 방치입니다. 오늘 본문이 앗수르를 다루시는 이유는 유다가 의로워서가 아니라, 악이 영원히 이기도록 두지 않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지금 억울한 자리에 계신 분이 있다면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직접 갚지 않아도 됩니다.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니라(롬 12:19). 우리가 복수의 짐을 내려놓을 수 있는 것은, 그 일을 맡으신 분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29절을 다시 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그 밤에 한 일은 싸운 것이 아니라 노래한 것이었습니다. 피리를 불며 여호와의 산으로 올라가는 순례자처럼 즐거워했습니다. 광양사랑의교회가 그런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세상이 무너지는 소리 한복판에서도 찬송을 잃지 않는 교회,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신뢰 때문에 노래하는 교회입니다. 그 노래가 우리가 드릴 수 있는 가장 정직한 신앙고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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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주님,

저희를 심판하실 권한을 가지고도

은혜 베푸실 때를 기다리고 계신 주님 앞에 섭니다.

저희는 삼 초를 기다리지 못하면서

주님께는 늘 더디다고 투정하였습니다.

기다리시는 주님의 마음을 배우게 하시고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다는 그 말씀을

저희 삶으로 확인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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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환난의 떡과 고생의 물이 놓인 상 앞에서

저희는 상을 치워 달라고만 기도했습니다.

그 상 앞에 마주 앉아 주시는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음을 용서하옵소서.

앞만 보고 달리느라 듣지 못한

등 뒤의 나직한 말소리에

저희 귀를 다시 열어 주옵소서.

.

주님,

은과 금을 입힌 것들을 손에 쥐고

그것이 저희를 지켜 줄 줄 알았습니다.

불안을 달래려고 만든 것들이

어느새 주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더럽게 여겨 내던질 용기를 주시고

빈손으로도 주님만 의지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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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저희의 맞은 자리를 아시는 주님,

찢으신 손으로 싸매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상처를 없던 일로 만들지 마시고

그 자리에 일곱 배의 빛을 부어 주옵소서.

그리하여 저희의 흉터가

주님의 은혜를 증언하는 무늬가 되게 하옵소서.

.

주님,

악이 영원히 이기지 못하게 하시는 주님,

저희 손으로 갚으려는 마음을 내려놓습니다.

불이 붙는 밤에도

피리를 불며 주님의 산으로 오르는

순례자의 마음을 주옵소서.

그 밤에도 노래하는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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