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30:1-17 내려가는 길과 돌이키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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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굽으로 내려가는 길을 향한 화의 선포입니다. 여호와께서는 나로 말미암지 아니한 계획을 베풀고 내 영으로 말미암지 아니한 맹약을 맺어 죄에 죄를 더하는 패역한 자식들을 부르십니다(1-2절). 예물을 실은 짐승 떼가 사나운 광야를 지나 내려가지만, 바로의 세력은 수치가 될 뿐이고 애굽의 이름은 가만히 앉은 라합입니다(3-7절). 그 뿌리는 여호와의 법을 듣기 싫어하여 부드러운 말만 구하는 마음이었고, 죄악은 갑자기 무너지는 높은 담처럼 조금도 남지 않게 부서집니다(8-14절). 그러나 심판의 한복판에 구원의 길이 놓입니다. 돌이켜 조용히 있어야 구원을 얻고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으리라는 부르심입니다. 유다는 원하지 아니하고 말을 타고 도망하기를 택하여, 남은 자는 산꼭대기의 깃대처럼 외로이 남습니다(15-1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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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본문은 이사야 28장에서 33장까지 이어지는 여섯 개의 '화' 신탁 가운데 세 번째 신탁의 앞부분입니다. 앞의 두 신탁이 술 취한 지도자들과 입술만 가까운 예배를 다루었다면, 이제 예언자의 시선은 나라의 운명을 결정하는 구체적인 외교 문서 위로 내려옵니다. 시기는 주전 705년에서 701년 사이입니다. 앗수르의 사르곤 2세가 전장에서 죽고 산헤립이 즉위하면서 제국 곳곳에 반란의 기운이 돌던 때입니다. 히스기야는 앗수르가 씌운 조공의 멍에를 벗어 버리려 했고, 그러기 위해 남쪽의 애굽과 손을 잡으려 했습니다. 당시 애굽은 구스 출신의 제25왕조가 다스리고 있었으나, 옛 제국의 이름만 남았을 뿐 실제로 앗수르의 전차를 막아 낼 힘은 없었습니다. 이사야는 이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반대한 진짜 이유는 정세 판단이 아니었습니다.
# 오늘 본문의 짜임새를 보면 예언자의 마음이 보입니다. 옥스퍼드 원어성경대전은 1절에서 17절까지를 두 겹의 평행 구조로 읽습니다. 앞의 여섯 절이 A(1-2절) 불신앙에 대한 정죄, B(3-5절) 동맹의 헛된 결과, C(6-7절) 헛수고의 강조로 흐르고, 뒤의 열 절이 A'(8-11절) 불신앙의 정죄, B'(12-14절) 헛된 결과, C'(15-17절) 헛수고의 강조로 같은 순서를 되풀이합니다. 다만 뒤가 앞보다 길고 구체적이며 훨씬 격렬합니다. 같은 말을 두 번 하되 두 번째가 더 아픈 것은, 처음 말을 듣고도 돌이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1절 자체도 '계획을 베푸나 나로 말미암지 아니하며', '맹약을 맺으나 나의 영으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죄에 죄를 더하도다'라는 세 마디가 원문에서 각각 네 단어, 여덟 단어, 열두 단어로 늘어나며 층계처럼 올라갑니다. 죄가 점점 커지고 있다는 것을 문장의 길이로 보여 주는 셈입니다.
# 김필회 교수는 이 본문을 뒷날 랍사게의 연설과 나란히 놓고 읽습니다. 앗수르의 사령관 랍사게는 예루살렘 성벽 앞에서 애굽을 두고 몸을 의지하는 자의 손을 찌르는 부러진 갈대 지팡이라고 조롱했는데, 애굽에 관한 랍사게의 주장은 이사야의 선포와 일치한다고 그는 지적합니다. 예언자도 도움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을 고발하면서 애굽을 '가만히 앉은 라합'이라 불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곧이어 그는 결정적인 단서를 답니다. 물론 이사야는 앗수르에 항복할 것을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애굽뿐만 아니라 앗수르도 유다의 생존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에게 양자는 별반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예언자가 서 있는 자리는 친애굽도 친앗수르도 아닌 제3의 자리, 곧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신뢰하는 자리였습니다. 오늘 본문 15절은 바로 그 제3의 자리를 한 문장으로 압축한 구절입니다.
# 15절의 '힘'에 대해 김필회 교수가 다른 곳에서 남긴 한 줄이 이 본문을 여는 열쇠가 됩니다. 그는 판결과 공정처럼 '힘'과 '용기'도 구원 시대에 여호와께서 주시는 선물에 속한다고 정리하면서 그 근거 구절 가운데 하나로 30장 15절을 듭니다. 곧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을 것이거늘'의 그 힘은 우리가 훈련으로 길러 내는 능력이 아니라 받는 선물입니다. 히브리어 게부라는 전쟁터의 용맹을 뜻하는 낱말입니다. 그 용맹을 얻는 길이 말과 병거가 아니라 잠잠함과 신뢰라는 것, 이것이 이사야가 평생을 걸고 붙든 역설이었습니다. 신약은 이 역설을 그대로 이어받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하신 주님의 초청(마 11:28)은 '돌이킴과 쉼 속에서 구원을 얻으리라'는 오늘 본문의 히브리어 문장을 육신으로 옮겨 놓은 말씀입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바람을 향해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신 그 음성(막 4:39)도 같은 자리에서 울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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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절 나로 말미암지 아니한 계획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이 세운 계획의 출처를 물으시는 분이며, 당신의 영으로 말미암지 않은 언약을 언약으로 인정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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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락은 화의 선포로 열립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패역한 자식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이 계교를 베푸나 나로 말미암지 아니하며 맹약을 맺으나 나의 영으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죄에 죄를 더하도다"(1절). 부르시는 호칭이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원수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니고 '자식들'입니다.
이어 그들이 걸어간 길이 묘사됩니다. "그들이 바로의 세력 안에서 스스로 강하려 하며 애굽의 그늘에 피하려 하여 애굽으로 내려갔으되 나의 입에 묻지 아니하였도다"(2절). 내려갔다는 동사와 묻지 아니하였다는 동사가 나란히 놓입니다. 발은 부지런히 움직였는데 입은 열리지 않았습니다.
결과는 세 번 반복되는 한 낱말로 예고됩니다. "그러므로 바로의 세력이 너희의 수치가 되며 애굽의 그늘에 피함이 너희의 수욕이 될 것이라"(3절). 소안과 하네스까지 사신들이 이르렀으나(4절), 그들이 만나는 것은 도움이 아니라 부끄러움입니다. "그들이 다 자기를 유익하게 하지 못하는 민족으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하리니 그 민족이 그들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며 유익이 되지 못하고 수치가 되게 하며 수욕이 되게 할 뿐임이니라"(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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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의 세 마디를 원문의 결로 다시 들어 보아야 합니다. 히브리어 본문에서 이 세 마디는 모두 긍정문 다음에 강한 부정어가 따라오는 같은 모양으로 되어 있습니다. 계획을 베풀었다, 그러나 나로 말미암지 않았다. 맹약을 맺었다, 그러나 나의 영으로 말미암지 않았다. 옥스퍼드 원어성경대전은 이를 세 겹의 동의 대구법으로 보면서, 히브리 사람들에게 '셋'이 완전함을 나타내는 수였음을 함께 지적합니다. 곧 이 불신앙은 변명의 여지가 조금도 없다는 뜻입니다.
주목할 것은 하나님이 문제 삼으신 지점입니다. 그들이 계획을 세운 것 자체가 아닙니다. 계획은 지혜의 일입니다. 동맹을 맺는 것도 고대 근동에서는 상식이었습니다. 문제는 출처였습니다. 나로 말미암지 아니하며, 나의 영으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하나님은 결과가 나쁠 것을 미리 아셨기 때문에 화를 선포하신 것이 아니라, 그 계획이 어디에서 나왔는지를 물으시며 화를 선포하셨습니다. 신앙은 좋은 결정을 내리는 능력이기 이전에 결정의 출처를 정직하게 밝히는 일입니다.
'나의 입에 묻지 아니하였도다'라는 2절 후반부는 히브리 왕들의 오랜 관행을 배경에 두고 있습니다. 다윗은 전쟁 앞에서, 이동 앞에서, 심지어 자기 백성을 되찾는 일 앞에서도 언제나 먼저 여호와께 물었습니다(삼상 23:2, 삼하 5:19). 물음은 정보를 얻기 위한 절차가 아니라 주권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확인하는 예식이었습니다. 히스기야의 신하들은 그 예식을 건너뛰었습니다. 건너뛰었다는 것은 이미 답을 정해 놓았다는 뜻입니다.
'애굽의 그늘'이라는 표현도 예사롭지 않습니다. 그늘은 성경에서 흔히 보호를 뜻합니다. 시편은 주의 날개 그늘 아래 피한다고 노래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 거룩한 낱말이 애굽에게 붙습니다. 하나님께 드려야 할 언어를 다른 것에게 돌려 쓰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것이 우상숭배의 가장 조용한 형태입니다. 우상은 대개 신전에서 시작되지 않고 어휘에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내려갔으되'라는 동사가 남습니다. 지리적으로 유다에서 애굽으로 가는 길은 실제로 내려가는 길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애굽으로 내려간다는 말은 언제나 그 이상을 뜻합니다. 조상들이 종살이하던 땅, 하나님이 강한 손으로 건져 내신 그 땅으로 되돌아 내려가는 일입니다. 출애굽의 방향을 거꾸로 되짚는 걸음입니다. 구원받은 자가 구원받기 전의 자리로 도움을 구하러 가는 것, 예언자의 눈에 그것은 외교의 실수가 아니라 신앙의 배교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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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계획을 세웁니다. 세워야 합니다. 문제는 그 계획이 어디에서 나왔는가입니다. 교회의 새 사업을 구상할 때, 자녀의 진학을 결정할 때, 이직과 이사를 저울질할 때 우리는 대개 자료를 모으고 사람을 만나고 계산을 마친 뒤에야 기도합니다. 그리고 그 기도를 결재 도장처럼 씁니다. 순서가 뒤집힌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결론을 승인해 달라고 부탁받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물음을 처음부터 들으시는 분입니다.
'애굽의 그늘'은 오늘도 여러 이름으로 있습니다. 든든한 인맥, 확실한 자격증, 넉넉한 자산, 힘 있는 사람과의 연결이 그렇습니다. 이것들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것을 '그늘'이라고 부르기 시작할 때, 곧 거기 피하면 안심이 된다고 느끼기 시작할 때 우리는 이미 내려가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가 지난 시대에 성장을 위해 붙잡았던 여러 방법들도 이 물음 앞에 서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계획이었습니까, 아니면 그분의 영으로 말미암은 것이었습니까.
우리 교회는 묻는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회의 앞에 기도 순서를 하나 더 넣자는 말이 아닙니다. 안건을 정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 앞에 상황을 펼쳐 놓고, 이 일에서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 시간을 실제로 갖자는 것입니다. 이번 한 주간, 이미 마음속으로 결론을 내려 둔 일이 있다면 그 결론을 잠시 내려놓고 다시 여쭤 보시기 바랍니다. 아직 묻지 않은 계획이 있다면, 그것이 오늘 말씀이 찾아온 자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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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11절 가만히 앉은 라합과 부드러운 말을 구하는 귀
하나님은 듣기 괴로운 진실을 끝까지 말씀하시는 분이며, 사람이 그 말씀을 지우려 할 때 도리어 서판에 새겨 영원히 남기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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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가 광야의 대상 행렬로 옮겨 갑니다. "네겝 짐승들에 관한 경고라 사신들이 그들의 재물을 어린 나귀 등에 싣고 그들의 보물을 낙타 안장에 얹고 암사자와 수사자와 독사와 날아다니는 불뱀이 나오는 위험하고 곤고한 땅을 지나 자기에게 무익한 민족에게로 갔으나"(6절). 예물은 무겁고 길은 사납습니다.
그리고 한마디로 판결이 내려집니다. "애굽의 도움은 헛되고 무익하니라 그러므로 내가 애굽을 가만히 앉은 라합이라 일컬었느니라"(7절). 힘센 이름 뒤에 '가만히 앉은'이라는 수식어가 붙습니다.
이어 예언자에게 명령이 주어집니다. "이제 가서 백성 앞에서 서판에 기록하며 책에 써서 후세에 영원히 있게 하라"(8절). 그리고 그 까닭이 밝혀집니다. "대저 이는 패역한 백성이요 거짓말 하는 자식들이요 여호와의 법을 듣기 싫어하는 자식들이라"(9절).
마지막으로 백성의 육성이 그대로 인용됩니다. "그들이 선견자에게 이르기를 선견하지 말라 선지자에게 이르기를 우리에게 바른 것을 보이지 말라 부드러운 말을 하라 거짓된 것을 보이라 너희는 바른 길을 버리며 첩경에서 돌이키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우리 앞에서 떠나시게 하라 하는도다"(10-1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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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절의 '가만히 앉은 라합'은 이 본문에서 가장 신랄한 표현입니다. 라합은 고대 근동 신화에서 바다의 괴물을 가리키는 이름이었습니다. 옥스퍼드 원어성경대전은 이 이름이 바벨론 신화의 혼돈의 괴물 티아맛과 동일시되는 존재이며, 거대한 파도와 넘치는 물결을 일으키는 위험한 힘을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시편 87편 4절이 애굽을 라합이라 부른 것도 그 막강함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언자는 그 무시무시한 이름 앞에 '가만히 앉은'이라는 말을 붙입니다. 원문의 그 낱말은 휴식, 중지, 정지를 뜻합니다. 곧 힘을 잃고 주저앉은 괴물, 이름값을 못 하는 전설입니다. 앞의 '헛되고 무익하니라'도 원문에서는 공허함과 텅 빔이라는 두 낱말을 나란히 붙인 거친 표현입니다. 문법이 무너질 만큼 격한 어법으로, 애굽이라는 이름 자체가 텅 비어 있음을 말합니다.
여기서 예언자의 관찰력이 빛납니다. 그는 애굽이 악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애굽이 비어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의지하는 것들은 대개 사악해서가 아니라 비어 있어서 우리를 무너뜨립니다. 부러진 갈대 지팡이는 나를 해치려고 부러진 것이 아니라, 이미 부러져 있었을 뿐입니다. 김필회 교수가 랍사게의 연설을 두고 지적한 대로, 애굽은 실질적으로 도와줄 능력이 없기에 그에게 의존하는 자는 멸망을 피할 수 없습니다.
8절의 명령은 예언 사역의 성격을 바꿔 놓습니다. 지금까지 예언자의 말은 소리였습니다. 이제 그것이 글이 됩니다. 서판에 기록하고 책에 써서 후세에 영원히 있게 하라. 당대에 아무도 듣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기록하라는 명령입니다. 사람이 진실을 지우려 할 때 하나님은 그것을 지우지 못하게 새기십니다. 오늘 우리가 이사야 30장을 읽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 명령이 지켜졌다는 증거입니다. 아무도 듣지 않는 자리에서 바르게 말하는 일은 헛되지 않습니다. 그 말이 서판이 되어 다음 세대의 눈앞에 놓입니다.
10절과 11절은 성경 전체에서 가장 솔직한 자기 고백 가운데 하나입니다. 백성이 원한 것은 침묵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선지자를 찾아왔습니다. 다만 내용을 주문했을 뿐입니다. 바른 것 말고 부드러운 것을, 거친 것 말고 매끄러운 것을. 원문에서 그들이 요구한 '부드러운 말'은 미끄럽다는 뜻의 낱말이며, '거짓된 것'은 사람을 홀리는 말을 뜻합니다. 종교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종교의 메뉴판을 고쳐 쓰는 일, 이것이 8세기 예루살렘의 죄였습니다.
가장 무서운 문장은 마지막입니다.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우리 앞에서 떠나시게 하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는 이사야가 가장 사랑한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바로 그 이름을 치워 달라고 합니다. 거룩하신 이가 계시면 자기들의 계획이 계속 불편해지기 때문입니다. 불편한 것은 진실입니다. 진실을 치우면 남는 것은 편안한 파멸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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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에게도 부드러운 말을 구하는 귀가 있습니다. 우리는 설교를 듣되 나를 흔들지 않는 설교를 원하고, 상담을 청하되 이미 정해 둔 답을 확인해 주는 상담을 원합니다. 알고리즘은 이 욕구를 정확히 압니다. 우리가 좋아할 말만 골라 하루 종일 들려줍니다. 그렇게 몇 해를 지내면 우리는 자기 목소리의 메아리 속에 갇힙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선지자를 찾아가 메뉴를 주문했지만, 우리는 그럴 필요도 없이 이미 주문된 세상을 배달받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이 일은 일어납니다. 듣기 싫은 말을 하는 사람은 점점 자리를 잃고, 매끄러운 말을 하는 사람이 중심에 섭니다. 그러다 어느 날 공동체 전체가 아무도 진실을 말하지 않는 곳이 되어 있습니다. 한국 교회가 지난 몇십 년 사이 겪은 여러 아픈 일들의 뿌리에도 이 침묵이 있습니다. 문제를 몰라서가 아니라, 문제를 말하는 사람을 견디지 못해서 생긴 일들입니다.
우리 교회는 바른 말이 살아 있는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바른 말이 거친 말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각자가, 나에게 듣기 좋은 말만 하는 사람 곁에 오래 머물고 있지 않은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이번 한 주간, 최근에 나를 불편하게 했던 한마디를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그 말이 사실이었다면, 그 사람은 오늘 본문의 선견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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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14절 갑자기 무너지는 담
하나님은 사람이 의지하는 거짓을 끝내 버티게 두지 않으시는 분이며, 무너뜨림으로써 무엇이 참된 터였는지를 보게 하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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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가 대답하십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이 말을 업신여기고 압박과 허망을 믿어 그것을 의지하니"(12절). 그들이 치워 달라고 한 바로 그 이름으로 말씀이 시작됩니다.
첫 번째 그림은 담입니다. "이 죄악이 너희에게 마치 무너지게 된 높은 담이 불쑥 나와 갑자기 무너짐 같게 되리라 하셨은즉"(13절). 담은 서서히 기울다가 한순간에 넘어갑니다.
두 번째 그림은 그릇입니다. "그가 이 나라를 무너뜨리시되 토기장이가 그릇을 깨뜨림 같이 아끼지 아니하고 부수시리니 그 조각 중에서, 아궁이에서 불을 붙이거나 물웅덩이에서 물을 뜰 조각을 얻지 못하리라"(1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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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절의 '압박과 허망'은 우리말로는 뜻이 잘 잡히지 않는 표현입니다. 앞의 낱말은 남을 눌러 얻은 부당한 이득을, 뒤의 낱말은 굽은 것과 비뚤어진 것을 뜻합니다. 곧 정직하지 않은 방식으로 확보한 안전을 가리킵니다. 애굽에 보낸 예물은 어디서 나왔겠습니까. 낙타 등에 실린 보물은 결국 백성에게서 거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나라는 반드시 자기 백성을 쥐어짜게 되어 있습니다. 바깥의 강대국에 낼 것을 안에서 마련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불신앙과 착취는 언제나 한 몸입니다.
담의 비유가 무서운 것은 '갑자기'라는 말 때문입니다. 담은 어느 날 갑자기 무너지지만, 사실 무너짐은 오래전에 시작되었습니다. 배가 부른 벽면, 눈에 잘 안 띄는 균열, 조금씩 스며든 물이 이미 담 안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사람이 보기에 갑작스러운 것은 대개 하나님 보시기에 오래된 것입니다. 우리 삶의 무너짐도 그렇습니다. 사건은 하루에 터지지만 균열은 여러 해에 걸쳐 자랍니다.
그릇의 비유는 더 잔인합니다. 어제 본문 29장 16절에서 토기장이는 빚으시는 분이었습니다. 오늘 30장 14절에서 같은 토기장이가 깨뜨리시는 분으로 나타납니다. 빚으시는 손과 깨뜨리시는 손이 같은 손이라는 것, 이것이 예언서의 냉정한 진실입니다. 게다가 본문은 그 깨어짐의 정도를 구체적으로 말합니다. 아궁이의 불을 옮길 만한 조각도, 웅덩이에서 물을 뜰 만한 조각도 남지 않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깨진 옹기 조각은 결코 버리는 물건이 아니었습니다. 불씨를 나르고 물을 뜨고 글씨를 적는 데 쓰였습니다. 곧 아무 쓸모도 남지 않는 파멸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 무서운 그림 안에도 은혜의 논리가 숨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무너뜨리시는 것은 담이지 백성이 아닙니다. 깨뜨리시는 것은 그릇이지 토기장이의 마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잘못 기대고 있는 것을 무너뜨리심으로 우리가 기대야 할 것을 보게 하십니다. 예레미야가 뒷날 토기장이의 집에 내려갔을 때, 깨진 진흙은 버려지지 않고 다시 다른 그릇으로 빚어졌습니다(렘 18:4). 무너짐은 마지막 말이 아닙니다. 다만 무너지기 전에 돌이키는 편이 훨씬 낫다는 것을, 오늘 본문 15절이 곧이어 말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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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삶에서 갑자기 무너지는 담은 무엇입니까. 건강일 수 있고 관계일 수 있고 재정일 수 있습니다. 무너지고 나서야 우리는 그것이 오래 기울고 있었음을 압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할 일은 무너짐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기울어진 곳을 지금 들여다보는 것입니다. 부부 사이에 오래 미뤄 둔 대화, 몇 년째 미루어 온 검진, 조금씩 늘어난 빚, 슬며시 소홀해진 예배가 그런 자리입니다.
교회 공동체에도 담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다 알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는 문제,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굳어진 절차, 한 사람의 헌신에만 기대어 굴러가는 사역이 그렇습니다. 이런 것들은 무너지기 전까지는 아무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그리고 무너질 때는 조각도 남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는 균열을 미리 말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무너진 뒤에 수습하는 공동체보다 기울 때 서로 붙들어 주는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혹시 이미 무너진 자리를 지나고 계신 분이 있다면, 조각 하나 남지 않은 것 같은 그 자리에서도 토기장이의 손은 여전히 물레 앞에 계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조각을 다시 진흙으로 삼으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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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17절 돌이켜 조용히 있어야
하나님은 구원과 힘을 사람의 속도가 아니라 당신께로 돌이키는 조용함 속에 두시는 분이며, 백성이 원하지 아니할 때에도 그 길을 거두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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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의 말씀 한복판에서 문이 하나 열립니다. "주 여호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돌이켜 조용히 있어야 구원을 얻을 것이요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을 것이거늘"(15절 상).
그런데 문장은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고"(15절 하). 열린 문 앞에서 백성이 등을 돌립니다.
그들의 대답이 그대로 인용됩니다. "이르기를 아니라 우리가 말 타고 도망하리라 한 고로 너희가 도망할 것이요 또 이르기를 우리가 빠른 짐승을 타리라 한 고로 너희를 쫓는 자가 빠르리니"(16절).
마지막 그림은 텅 빈 산등성이입니다. "한 사람이 꾸짖은즉 천 사람이 도망하겠고 다섯이 꾸짖은즉 너희가 다 도망하고 너희 남은 자는 겨우 산꼭대기의 깃대 같겠고 산 위의 기치 같으리라 하셨느니라"(1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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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절은 이사야서 전체에서 가장 자주 인용되는 구절 가운데 하나입니다. 원문을 그대로 옮기면 이렇습니다. 돌이킴과 쉼 속에서 너희가 구원을 얻을 것이요, 조용함과 신뢰함 속에 너희의 힘이 있을 것이다. 네 개의 낱말이 두 짝을 이룹니다.
첫째 낱말 슈바는 돌이킴, 곧 회개입니다. 옥스퍼드 원어성경대전은 이 돌아옴이 위기의 상황에서 세상 권력을 의지하던 자들이 구원의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며, 여호와의 말씀을 멸시하던 자들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라고 풀이합니다. 둘째 낱말 나하트는 원래 있던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두는 것을 뜻하며, 구약에 여덟 번밖에 나오지 않는 드문 낱말로 평온함(전 4:6)과 쉼(욥 17:16)의 뜻으로 쓰였습니다. 본문에서는 위기를 벗어나려고 주변 나라를 정신없이 왕래하지 않고 마음의 중심을 잡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셋째와 넷째 낱말은 잠잠함과 신뢰함입니다. 위기 앞에서 아직 닥치지도 않은 일을 이미 벌어진 것처럼 떠들어 대는 것이 사람의 심리이고, 그 위기에서 빠져나가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것이 연약한 인간의 한계입니다. 하나님은 그 심성을 모르지 않으십니다. 그럼에도 정반대의 태도를 명하시는 것은, 오직 그 길만이 구원에 이르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 잠잠함은 홍해 앞에서 모세가 요구한 것과 같은 잠잠함이며(출 14:13-14), 아람과 북이스라엘의 연합군 앞에서 이사야가 아하스에게 요구했던 태도와 같습니다(사 7:4-9).
여기서 반드시 구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조용함은 무기력이 아닙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체념이 아닙니다. 이 조용함은 방향을 바꾸는 일에서 나옵니다. 돌이킴이 먼저이고 조용함이 그다음입니다. 돌이키지 않은 채로 가만히 있는 것은 조용함이 아니라 마비입니다. 회개 없는 평온은 신앙이 아니라 무감각입니다.
그리고 힘에 대한 정의가 뒤집힙니다. 앞에서 살펴본 대로 김필회 교수는 판결과 공정처럼 힘과 용기도 구원 시대에 여호와께서 주시는 선물에 속한다고 정리합니다. 게부라는 전사의 용맹을 뜻하는 낱말인데, 그 용맹의 저장고가 병기고가 아니라 신뢰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힘을 축적으로 이해합니다. 더 모으고 더 갖추면 더 강해진다고 믿습니다. 성경은 힘을 관계로 이해합니다. 누구에게 잇대어 있는가가 곧 힘입니다.
15절 마지막 다섯 글자가 이 본문 전체를 비극으로 만듭니다.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이 문을 닫으신 것이 아닙니다. 백성이 들어가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구원의 길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길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파멸이 왔습니다. 조용히 있는 것보다 무언가 하는 편이 훨씬 견딜 만했기 때문입니다. 불안한 사람에게 가장 어려운 일은 멈추는 일입니다.
16절의 대답에는 히브리어 특유의 강한 부정이 들어 있습니다. 아니라, 우리가 반드시 말을 타고 도망하리라. 그런데 예언자의 응답은 그들의 말을 그대로 되돌려 줍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도망할 것이다. 도망하겠다고 말한 사람은 도망하게 됩니다. 빠른 것을 타겠다고 한 사람은 더 빠른 추격자를 만납니다. 속도로 살아남으려는 사람에게 세상은 언제나 더 빠른 것을 준비해 둡니다. 이것이 속도의 신앙이 맞이하는 결말입니다.
17절은 언약의 약속이 거꾸로 뒤집힌 자리입니다. 신명기와 여호수아는 한 사람이 천을 쫓으리라고 약속했습니다(신 32:30, 수 23:10). 그런데 여기서는 한 사람의 꾸짖음에 천 명이 도망합니다. 축복의 문장이 그대로 저주의 문장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그림, 산꼭대기에 홀로 선 깃대. 원문의 낱말은 배의 돛대를 뜻합니다. 배는 사라지고 돛대만 남은 풍경, 군대는 흩어지고 깃발만 남은 언덕입니다. 카리스 종합주석은 이것이 전쟁의 참담한 패배와 소수의 생존을 나타내며, 그 생존조차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것임을 보여 준다고 풀이합니다. 곧 남은 자가 있다는 것 자체가 은혜입니다. 이사야의 아들 이름이 '남은 자가 돌아오리라'였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그 외로운 깃대는 절망의 표지인 동시에 희미한 소망의 표지입니다.
신약은 이 15절을 예수님의 초청으로 다시 씁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 11:28-29). 돌이킴과 쉼, 이 두 낱말이 그대로 있습니다. 다른 것은 이제 그 쉼이 하나의 명령이 아니라 한 인격이라는 점입니다. 우리는 이제 조용함이라는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조용하신 한 분께로 돌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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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는 속도의 시대입니다. 빠른 것을 타겠다는 16절의 고백은 오늘 우리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문제가 생기면 곧바로 검색하고, 불안하면 즉시 연락하고, 기다림이 조금만 길어지면 다른 방법을 찾습니다. 기도는 대개 마지막 순번입니다. 다 해 보고 안 되면 그때 기도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순서를 뒤집습니다. 돌이킴이 먼저이고, 조용함이 그다음이고, 구원은 그 안에서 옵니다.
조용함을 연습하는 구체적인 방법을 권해 드립니다. 결정을 하루 늦추는 것입니다. 급한 일일수록 그렇게 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 하루 동안 하나님께 여쭙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손에 쥐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우리가 실제로 의지하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 십 분만이라도 아무 소리 없이 하나님 앞에 머무는 시간을 가져 보시기 바랍니다. 그 십 분이 아깝게 느껴진다면, 우리는 이미 애굽으로 내려가는 길 위에 있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도 이 부르심 앞에 서 있습니다. 교인이 줄고 사회의 신뢰가 떨어지자 우리는 더 빠른 방법을 찾았습니다. 더 큰 행사, 더 강한 홍보, 더 세련된 프로그램을 준비했습니다. 그중 어떤 것도 그 자체로 악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모든 것보다 먼저 물어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우리는 돌이켰습니까. 우리는 잠잠했습니까. 회개 없이 속도를 올리는 것은 방향이 틀린 채로 더 멀리 가는 일일 뿐입니다.
광양사랑의교회는 잠잠함을 배우는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조급하지 않은 교회, 결과를 서두르지 않는 교회, 하나님이 일하시는 속도를 견딜 줄 아는 교회입니다. 그리고 지금 산꼭대기의 깃대처럼 홀로 남았다고 느끼시는 분이 계시다면, 그 외로운 깃대가 바로 남은 자의 표지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그 하나에서 다시 시작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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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주님,
계획은 부지런히 세우면서
그 계획이 어디서 왔는지는
한 번도 묻지 않았던 저희를 용서하옵소서.
발은 애굽으로 내려가면서
입은 주님께 열지 않았습니다.
결정하기 전에 여쭙는 백성이 되게 하시고
저희 계획 위에 주님의 영이 머물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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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듣기 좋은 말만 골라 듣느라
저희 귀가 얇아졌습니다.
바른 것을 보이지 말라 하고
부드러운 말을 하라 하던 그 입술이
저희의 입술이었음을 고백합니다.
거룩하신 주님을 저희 앞에서 치우려 했던 마음을 거두시고
불편한 진실 앞에 머물 용기를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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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기울어진 담을 못 본 체하며 살았습니다.
남을 눌러 얻은 것을 안전이라 부르고
비뚤어진 것에 기대어 평안하다 하였습니다.
무너지기 전에 돌이키게 하시고
깨어진 조각마저 다시 빚으시는
토기장이의 손을 신뢰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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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돌이켜 조용히 있어야 구원을 얻고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는다 하셨으니
그 길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등을 돌렸던 저희를 불쌍히 여기옵소서.
빠른 것을 타려는 조급함을 내려놓고
주님 앞에 멈추어 서게 하옵소서.
저희 가정과 광양사랑의교회가
속도가 아니라 신뢰로 강해지는 공동체가 되어
산꼭대기의 외로운 깃대 하나에서도
다시 시작하시는 주님을 보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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