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29:15-24 그 손을 알아보는 날

by 평화의길벗 posted Aug 18,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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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29:15-24 그 손을 알아보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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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란 세워 둔 계획을 하나님께 뒤늦게 보고하는 일이 아니라, 그 계획을 세우고 있는 나 자신이 이미 누군가의 손에 빚어진 존재임을 알아보는 일입니다. 온전한 신앙이란 무엇을 더 쥐는 일이 아니라, 쥐고 있는 손이 본래 누구의 것이었는지를 깨닫는 생명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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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월도 중순을 지납니다. 한낮의 볕은 여전히 이마를 눅눅하게 적시는데, 저녁 무렵이면 어느새 바람의 결이 달라져 있습니다. 여름 내내 온 동네를 흔들어 놓던 매미 소리가 조금씩 성글어지고, 그 소리가 비운 자리에 이름 모를 풀벌레의 낮은 울음이 스며듭니다. 계절은 이렇게 아무 소란 없이 자리를 바꿉니다. 여름 한철을 견디느라 마음이 다 닳아 버린 분들, 애써 세운 계획이 자꾸 어그러져 밤마다 뒤척이는 분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근심을 가슴 한켠에 검은 봉지처럼 매달아 두고 사시는 모든 분의 심령 위에, 주님의 다사로운 평화가 깃들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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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기장이의 작업장에 가 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물레가 돌기 시작하면 흙덩이는 처음에 이리저리 흔들립니다. 그러다 토기장이의 두 손이 흙을 감싸는 순간, 흔들리던 것이 중심을 잡습니다. 그때 진흙이 하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만 부드러운 채로 손안에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 진흙이 만일 말을 할 수 있다면,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면 어떻겠습니까. 당신은 나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 어처구니없는 장면에서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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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전 705년에서 701년 사이, 예루살렘의 밤은 분주했습니다. 앗수르의 사르곤 2세가 죽고 산헤립이 즉위하자 제국 곳곳에서 반란의 기운이 일었고, 히스기야의 신하들은 그 틈을 노려 애굽과 주변 소국들 사이를 은밀히 오갔습니다. 문을 걸어 잠근 회의실, 촛불 하나, 낮은 목소리. 그것은 외교의 상식이었습니다. 앗수르의 눈을 피하려면 어두운 데서 움직여야 했으니까요. 그런데 예언자가 문제 삼은 것은 그 어둠이 아니었습니다. 그 방 안에 하나님의 자리가 없었다는 것, 그것이 예언자가 본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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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의 계획을 여호와께 깊이 숨기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의 일을 어두운 데에서 행하며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보랴 누가 우리를 알랴 하니"(사 29:15). 누가 우리를 보랴. 이 말은 무신론자의 말이 아닙니다. 이들은 성전을 드나들고 절기를 지키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다만 하나님을 예배의 대상으로는 인정하면서, 정치의 영역에서는 계산에서 빼놓았을 뿐입니다. 죄란 대개 하나님을 부정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들어오시지 못하는 방을 하나 따로 마련해 두는 일입니다. 자기 속으로 구부러진 마음이라는 오래된 표현이 있습니다. 시선이 바깥으로 열리지 못하고 자기 안으로만 말려 들어가는 상태, 그것이 어둠의 정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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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의 반문은 짧고 서늘합니다. "너희의 패역함이 심하도다 토기장이를 어찌 진흙 같이 여기겠느냐"(사 29:16). 여기서 패역함으로 옮겨진 히브리어는 본래 뒤집는다는 뜻을 지닌 말입니다. 그래서 어떤 번역은 이 대목을 아예 '너희는 모든 것을 거꾸로 뒤집는구나!'라고 옮깁니다. 도덕적 타락 일반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순서가 뒤집힌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히브리 사람들에게 빚어진 그릇을 뜻하는 말과 마음이 품은 계획을 뜻하는 말은 같은 뿌리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니 자기 계획을 숨기려던 그들은, 계획이라는 낱말을 입에 올리는 순간 이미 자신이 빚어진 존재임을 실토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계획을 세울 수 있는 그 능력조차 만든 것이 아니라 받은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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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는 『도덕경』 76장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뻣뻣하고 강한 것은 죽음의 무리에 속하고, 부드럽고 약한 것은 생명의 무리에 속한다. 토기장이의 물레 앞에서 이 말은 문자 그대로 사실이 됩니다. 굳어 버린 진흙은 아무것도 될 수 없습니다. 손이 아무리 정교해도, 이미 마른 흙덩이는 눌리는 대신 부서집니다. 어둠 속에서 계획을 굳히던 사람들의 문제도 결국 이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강해졌다고 믿었지만, 실은 굳어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확신이 단단해질수록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손이 닿을 수 없는 사람이 되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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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놀랍게도 신탁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고발 다음에 심판이 아니라 창조의 언어가 옵니다. "오래지 아니하여 레바논이 기름진 밭으로 변하지 아니하겠으며 기름진 밭이 숲으로 여겨지지 아니하겠느냐"(사 29:17). 오래지 아니하여. 이 한마디가 절망의 문장들 한복판에 시간의 문을 냅니다. 그리고 그 문 너머의 풍경이 이어집니다. "그 날에 못 듣는 사람이 책의 말을 들을 것이며 어둡고 캄캄한 데에서 맹인의 눈이 볼 것이며"(사 29:18). 눈여겨볼 것은 어둠이 걷힌 다음에 본다고 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어둡고 캄캄한 데에서 봅니다. 하나님은 어둠을 치우고 우리를 보게 하시는 대신, 어둠 한복판에서 눈을 뜨게 하십니다. 누가 우리를 보랴 하며 숨었던 그 어둠이, 이제 눈을 뜨는 자리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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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눈이 무엇을 보는지도 본문은 분명히 말합니다. 겸손한 자에게 기쁨이 더하고 가난한 자가 즐거워하는 반면, 강포한 자와 오만한 자는 그칩니다. 그리고 곧바로 법정 이야기가 나옵니다. 송사로 사람에게 죄를 씌우고, 성문에서 판단하는 자를 올무로 잡듯 하며, 헛된 일로 의인을 억울하게 하던 자들이 끊어진다는 것입니다. 눈이 열린다는 말은 개인의 영적 각성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성문에서 벌어지는 일을 똑바로 보는 눈, 억울한 사람의 얼굴을 알아보는 눈이 함께 열린다는 뜻입니다. 눈먼 신앙과 굽은 정의는 언제나 한 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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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세 절이 이 모든 것을 한 문장으로 모읍니다. "그의 자손은 내 손이 그 가운데에서 행한 것을 볼 때에 내 이름을 거룩하다 하며"(사 29:23). 손입니다. 15절에서 사람들이 부정했던 바로 그 손, 나를 짓지 않았다고 우겼던 그 손을, 이제 자손들이 알아봅니다. 부정되었던 손이 알아보아지는 손이 됩니다. 그래서 야곱은 다시는 부끄러워하지 않고 그 얼굴이 창백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형편을 바꾸시기 전에 얼굴을 바꾸십니다. 고개를 들게 하시는 일이 먼저입니다. 그리고 본문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닫힙니다. "마음이 혼미하던 자들도 총명하게 되며 원망하던 자들도 교훈을 받으리라"(사 29:24). 혼미하다는 말의 본뜻은 곁길로 헤맨다는 것입니다. 헤매던 사람이 길을 찾는 것이지, 똑똑한 사람이 더 똑똑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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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에게도 하나님이 들어오시지 못하는 방이 하나쯤 있습니다. 예배당에서는 주님이 내 인생의 주인이시라고 고백하면서, 사업의 손익을 따지는 자리에서는 그 고백을 잠시 접어 둡니다. 자녀의 진로를 정하는 늦은 밤의 대화에서, 노후를 계산하는 표 앞에서, 교회의 예산과 인사를 논의하는 회의석에서 우리는 자주 문을 잠급니다. 그리고 그 방에서 나온 결정을 다음 주일에 하나님께 추인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순서가 뒤집힌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그 순서를 바로 세우라고 우리를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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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이번 한 주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계획 하나를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반드시 나쁜 계획일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그 계획을 하나님 앞에 소리 내어 말할 수 있는지 물어보는 것입니다.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숨긴 계획이 아니라 아직 나누지 않은 계획일 뿐입니다. 말할 수 없다면, 바로 거기가 오늘 말씀이 우리를 찾아온 자리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를 더 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우리 곁에서 오래 얼굴이 보이지 않던 한 사람, 부끄러움 때문에 고개를 들지 못하는 한 사람에게 먼저 안부를 물어보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먼저 웃게 하실 얼굴을 우리가 먼저 알아보는 연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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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미 소리가 잦아든 자리에 풀벌레 소리가 들어서듯, 우리 안에서 굳어 가던 것들이 조금씩 물러나고 그 자리에 부드러운 것이 들어서기를 바랍니다. 물레는 이미 돌고 있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손을 뿌리치지 않는 것뿐입니다. 어두운 방의 문을 열어 두시고, 굳어 가던 마음을 다시 부드럽게 하시며, 오래지 아니하여 우리 삶에서 그 손이 행하신 일을 알아보는 눈을 얻으시기를, 그리하여 이 늦여름의 끝에서 다시 얼굴을 들고 걸어가는 평화의 순례자가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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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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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에서 보기

https://youtu.be/sXI3OvGHZW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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