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27:02-13 밤낮으로 간수하시는 포도원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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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워야단을 벌하신 그 날에 이어지는 노래입니다. 여호와께서 친히 포도원지기가 되셔서 때때로 물을 주고 밤낮으로 간수하시겠다 하시고, 당신을 찌르던 찔레와 가시까지 화친의 자리로 부르십니다(2-5절). 그 돌봄의 끝은 야곱의 뿌리가 박히고 그 결실이 온 지면을 채우는 일입니다(6절). 이어 선지자는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치신 매와 원수를 치신 매가 결코 같지 않았음을 되묻고, 그 견책이 제단의 돌을 부수고 아세라를 넘어뜨려 죄를 씻어 내는 데까지 이르렀다고 밝힙니다(7-9절). 그러나 지각 없는 백성이 의지하던 견고한 성읍은 적막한 광야가 되고 마른 가지처럼 불살라집니다(10-11절). 그럼에도 본문은 흩어진 자를 하나하나 모으시고 큰 나팔을 불어 예루살렘 성산의 예배로 부르시는 약속으로 닫힙니다(12-1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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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본문은 이사야 24-27장, 곧 흔히 '이사야 묵시록'이라 불리는 큰 단락의 마지막 장에 놓여 있습니다. 김근주 교수는 이 네 장이 앞뒤의 말씀들과 뚜렷이 구별된다고 지적합니다. 13-23장이 두로와 모압과 다메섹처럼 이름을 가진 나라들을 하나씩 호명했다면, 24-27장은 특정한 나라를 넘어 온 땅과 온 역사를 시야에 넣고 하나님의 마지막 통치를 노래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단락에는 구체적인 연대나 왕의 이름이 거의 등장하지 않습니다. 대신 바다의 용, 잔치 상, 사망을 삼키심, 죽은 자의 부활 같은 큰 그림들이 이어집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 27장 1절이 리워야단을 벌하시는 장면인 것도 그 때문입니다. 혼돈의 세력이 제거된 자리에서 비로소 포도원의 노래가 시작됩니다.
# 이 노래를 읽는 열쇠는 이사야 5장입니다. 김필회 교수는 구약에서 포도원이 여호와의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을 가리킨다고 정리하면서, 이사야 5:1-7과 27:2-6을 나란히 놓고 예레미야 2:21과 12:10, 에스겔 17:6, 호세아 10:1, 시편 80:9-17을 함께 인용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친히 심으신 포도나무이며, 그분의 특별한 돌봄과 보호 아래 놓인 사적 소유물입니다. 그런데 5장의 포도원 노래는 기대와 실망의 노래였습니다. 좋은 포도를 바랐으나 들포도가 맺혔고, 주인은 울타리를 걷어 짓밟히게 하고 비를 내리지 말라 명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의 노래는 그 노래를 정면으로 뒤집습니다. 울타리를 걷으셨던 분이 이제 밤낮으로 간수하시고, 비를 거두셨던 분이 때때로 물을 주십니다. 데이비드 젝맨은 이 대목을 두고 하나님이 이 포도원을 위해 행하시는 일은 5장의 세세한 파괴 묘사를 하나하나 되돌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 또 하나 눈여겨볼 것은 심판의 두 얼굴입니다. 옥스퍼드 원어성경대전은 26:20-27:6과 27:7-13을 구분하여, 앞 단락이 악의 세력에 대한 철저한 심판과 하나님의 일방적 사랑을 통해 선민의 구원을 강조한다면, 뒤 단락은 하나님의 징계를 통해 이스라엘이 회복됨을 보여 준다고 정리합니다. 곧 이방을 향한 심판과 달리 언약 백성을 향한 매는 근본적으로 회복을 위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9절의 아세라와 태양상은 그 회복이 어디까지 파고들었는지를 보여 주는 증거입니다. 아세라는 가나안의 여신을 상징하는 목상이고, 태양상은 태양신 숭배와 결부된 분향단입니다. 예루살렘 성전 뜰에까지 들어와 있던 것들입니다. 유배는 나라를 잃는 일이었지만, 동시에 이 우상들이 뿌리째 뽑히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12-13절의 '창일하는 하수'는 유브라데 강을, '애굽 시내'는 애굽 국경의 와디를 가리킵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땅의 두 경계입니다. 하나님은 그 넓은 땅에 흩어진 자기 백성을 곡식 이삭을 떨듯이 하나하나 모으시겠다고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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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절 포도원지기가 되신 여호와
하나님은 자기 포도원을 스스로 지키시려고 포도원지기의 자리로 내려오셔서, 때때로 물을 주고 밤낮으로 간수하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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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에 너희는 아름다운 포도원을 두고 노래를 부를지어다"(2절)는 명령으로 노래가 열립니다. 노래의 화자는 하나님 자신입니다. "나 여호와는 포도원지기가 됨이여 때때로 물을 주며 밤낮으로 간수하여 아무든지 이를 해치지 못하게 하리로다"(3절). 이어 하나님은 "나는 포도원에 대하여 노함이 없나니"(4절)라고 선언하십니다. 찔레와 가시가 대적하여 싸운다면 밟고 모아 불사르시겠다고 하시지만, 곧바로 다른 길을 여십니다.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 힘을 의지하고 나와 화친하며 나와 화친할 것이니라"(5절). 그리고 그 결과가 6절에 놓입니다. "후일에는 야곱의 뿌리가 박히며 이스라엘의 움이 돋고 꽃이 필 것이라 그들이 그 결실로 지면을 채우리로다"(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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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절에서 여호와께서 스스로를 부르시는 이름이 놀랍습니다. '포도원지기'입니다. 히브리어 '노체라'는 지키고 파수한다는 뜻의 분사형으로, 잠시 맡아 두는 것이 아니라 지키는 일을 계속하고 있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포도원 주인이 삯꾼에게 맡기는 것이 보통인데, 주인이 직접 망대에 올라 밤을 새우시겠다는 것입니다. '때때로'로 옮겨진 표현은 '순간마다'라는 뜻에 가깝고, '밤낮으로'는 지킴에 빈틈이 없음을 강조합니다. 이사야 5장에서 하나님은 울타리를 걷고 비를 그치게 하셨습니다. 여기서는 그 반대의 일이 하나하나 되돌려집니다. 심판의 언어를 그대로 뒤집어 은혜의 언어로 바꾸는 것, 이것이 이 노래의 문학적 힘입니다.
4절과 5절의 관계를 놓치면 안 됩니다. 옥스퍼드 원어성경대전은 5절 서두의 '그리하지 아니하면'을 4절의 '내가 그것을 밟고 모아 불사르리라'를 받는 말로 보아, '하나님의 혹독한 심판을 받지 아니하려면'이라는 뜻으로 풀이합니다. 그리고 '나와 화친하라'는 말이 한 절 안에서 두 번 반복된 것에 주목합니다. 히브리어로는 '그가 나와 함께 샬롬을 만들 것이다'라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을 찌르던 가시에게 하나님께서 먼저 평화를 제안하시는 것입니다. 심판이 불가피한 것은 하나님께 자비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회개하고 화친할 기회를 주셨음에도 계속 대적하기 때문이라는 이 주석의 지적은 정확합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사랑이 식은 자리가 아니라, 거절당한 사랑이 서 있는 자리입니다.
이 화친의 초대는 신약에서 십자가로 완성됩니다. 바울은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 1:20)고 썼습니다. 우리를 찌르던 가시가 오히려 그분의 머리에 얹혔고, 대적하던 자들이 그 피로 화친을 얻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요 15:1)고 하셨을 때, 그분은 바로 이 노래를 자기 자신에게 끌어당기신 것입니다. 이사야 5장의 들포도 문제는 더 나은 농사법으로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참포도나무 되신 아들이 포도원 안으로 들어오심으로 해결되었습니다. 6절의 "지면을 채우리로다"는 그래서 한 민족의 번영을 넘어섭니다. 젝맨은 이 구절이 인종적 이스라엘에 국한되지 않는 범세계적 성취를 내다본다고 읽습니다. 열매가 담을 넘어 온 땅을 덮는 그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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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신앙을 자주 '내가 나를 지키는 일'로 이해합니다. 더 굳게 결심하고 더 촘촘하게 관리하면 무너지지 않으리라 여깁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지키는 분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자리는 지키는 자리가 아니라 지킴을 받는 자리입니다. 광양사랑의교회가 매일 아침 성경을 펴는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묵상은 내가 하루를 붙드는 기술이 아니라, 밤새 나를 간수하신 분 앞에 나를 다시 데려다 놓는 일입니다. 지난 밤 내가 잠든 사이에도 포도원지기는 깨어 계셨습니다.
한국교회는 지금 울타리 밖의 위협을 셈하는 데 익숙해져 있습니다. 사회의 냉담함, 다음 세대의 이탈, 줄어드는 숫자를 두고 자주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본문은 찔레와 가시를 향해서도 먼저 화친을 제안하라고 가르칩니다. 교회를 향해 날 선 말을 던지는 이들을 향해 우리가 취할 첫 태도는 방어나 반격이 아니라 초대여야 합니다. 옥스퍼드 원어성경대전이 디모데후서 2:25을 끌어와 말하듯, 교회는 대적하는 자들에게 회개의 기회를 여는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를 가장 아프게 찌르는 사람이 대개 가장 가까운 사람인데, 하나님께서 먼저 화친을 제안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만이 그 자리에서 먼저 손을 내밀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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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9절 회복을 위한 매, 정결을 낳는 견책
하나님은 원수를 치시는 매와 자녀를 치시는 매를 결코 같게 하지 않으시고, 그 견책까지도 죄를 씻어 내는 은혜의 도구로 삼으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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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절은 두 개의 수사학적 질문입니다. "주께서 그 백성을 치셨던들 그 백성을 친 자들을 치심과 같았겠으며 백성이 죽임을 당하였던들 백성을 죽인 자가 죽임을 당함과 같았겠느냐"(7절). 8절은 그 답을 설명합니다. "주께서 백성을 적당하게 견책하사 쫓아내실 때에 동풍 부는 날에 폭풍으로 그들을 옮기셨느니라"(8절). 9절은 그 견책이 무엇을 낳았는지 말합니다. "야곱의 불의가 속함을 얻으며 그의 죄 없이함을 받을 결과는 이로 말미암나니 곧 그가 제단의 모든 돌을 부서진 횟돌 같게 하며 아세라와 태양상이 다시 서지 못하게 함에 있는 것이라"(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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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절의 질문은 대답을 이미 품고 있습니다.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앗수르와 바벨론을 쓰셔서 이스라엘을 치신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매와, 그 앗수르와 바벨론이 끝내 받은 매는 같은 종류가 아니었습니다. 옥스퍼드 원어성경대전은 이 대목에서 이방을 향한 심판과 달리 언약 백성을 향한 징계는 근본적으로 회복을 위한 것이라고 못박습니다. 젝맨도 전쟁과 포로 생활이 유다에 대한 하나님의 '치심'이었으나 그 언약적 징계는 새로운 영적 이해와 죄의 제거, 곧 갱신으로 이어졌다고 읽습니다. 같은 고통이라도 그 끝이 다르면 전혀 다른 사건입니다. 원수의 매는 파멸로 끝나지만, 아버지의 매는 회복으로 끝납니다.
8절의 '적당하게'라는 부사가 이 단락의 심장입니다. 히브리어 원문은 되질하듯 정확히 헤아려 재는 이미지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분에 못 이겨 매를 드시는 분이 아닙니다. 견딜 수 있는 만큼, 부러지지 않을 만큼, 정확히 헤아려 재신 분량만큼 치십니다.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애 3:33)라는 예레미야의 고백이 여기 겹칩니다. 동풍은 광야에서 불어와 모든 것을 말리는 뜨겁고 사나운 바람입니다. 그 바람에 실려 백성이 옮겨졌다는 것은 유배의 참혹함을 감추지 않는 표현입니다. 그러나 그 바람조차 하나님의 손 안에 있었습니다. 폭풍은 방향을 잃고 몰아친 것이 아니라, 백성을 어디론가 '옮기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9절이 밝히는 열매는 뜻밖의 것입니다. 성전이 아니라 우상이 무너진 것입니다. 제단의 돌이 부서진 횟돌처럼 되었다는 것은, 그 제단이 다시는 쌓이지 못하도록 가루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아세라 목상과 태양상이 다시 서지 못하게 되었다는 말은, 유배가 이스라엘의 뿌리 깊은 우상숭배를 끝냈다는 역사적 사실을 가리킵니다. 실제로 바벨론 포로기를 지난 뒤 이스라엘은 다시는 조직적인 우상숭배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잃은 것은 나라였고 얻은 것은 하나님이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히 12:6)고 쓴 것은 바로 이 신학의 신약적 계승입니다. 다만 우리의 죄를 없이 하는 최종적 근거는 우리가 견딘 매가 아니라, 우리 대신 매를 맞으신 그분의 채찍입니다.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 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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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고난 앞에서 두 가지 질문 사이를 오갑니다. '왜 하필 나인가'와 '언제 끝나는가'입니다. 본문은 세 번째 질문을 가르칩니다. '이 일을 통해 무엇이 무너지고 있는가'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삶에서 굳이 무너뜨리려 하시는 제단이 있지는 않은지 묻는 것입니다. 성공이라는 이름의 제단, 인정이라는 이름의 아세라, 안전이라는 이름의 태양상이 우리 마음의 뜰 안에 서 있지는 않은지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부수시려고 때로 우리를 낯선 땅으로 옮기십니다.
한국교회가 지난 몇 해 겪어 온 신뢰의 추락도 이 자리에서 읽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외부의 공격으로만 해석하려는 유혹을 받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하나님의 백성이 맞는 매에는 언제나 정결하게 하려는 목적이 있다고 말합니다. 규모와 영향력이라는 제단이 부서지는 것이 우리에게 손해가 아니라 은혜일 수 있습니다. 광양사랑의교회가 작은 자리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이유는 우리가 강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되질하듯 헤아려 주신 분량 안에 우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감당하고 있는 그 무게가 당신을 부러뜨리려는 무게가 아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버지는 눈금을 재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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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11절 지각 없는 백성과 적막한 성읍
하나님은 우리를 지으시고 조성하신 창조주이시기에, 지음받은 자가 지으신 이를 알아보지 못하는 그 무지를 가장 아파하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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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저 견고한 성읍은 적막하고 거처가 황무하며 버림 받아 광야와 같은즉 송아지가 거기에서 먹고 거기에 누우며 그 나무 가지를 먹어 없이하리라"(10절). 견고했던 성이 이제 짐승의 목장이 되었습니다. 11절은 그 폐허의 마지막 장면을 그립니다. "가지가 마르면 꺾이나니 여인들이 와서 그것을 불사를 것이라 백성이 지각이 없으므로 그들을 지으신 이가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시며 그들을 조성하신 이가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시리라"(1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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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절의 '견고한 성읍'이 어느 성인지를 두고 견해가 나뉩니다. 옥스퍼드 원어성경대전은 앗수르나 바벨론 같은 이방 왕국의 성으로 보는 견해와, 언약 백성이 의지했던 성으로 보는 견해를 함께 소개합니다. 어느 쪽으로 읽든 요점은 같습니다. 사람이 쌓아 올린 견고함은 하나님 없이는 반드시 적막해진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26장이 "우리에게 견고한 성읍이 있음이여 여호와께서 구원을 성벽과 외벽으로 삼으시리로다"(사 26:1)라고 노래한 직후에 이 구절이 놓인 것은 의도된 배치입니다. 참으로 견고한 성은 벽이 두꺼운 성이 아니라 하나님이 성벽이신 성입니다.
가장 무거운 말은 11절의 '지각이 없으므로'입니다. 히브리어는 분별과 통찰을 뜻하는 말로, 도덕적 실패보다 앞서는 인식의 실패를 가리킵니다. 이사야는 책의 첫 장에서 이미 같은 진단을 내렸습니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사 1:3). 젝맨은 27:9b-11에서 우리가 다시 이사야 1장으로 되돌아온다고 지적하는데, 정확한 관찰입니다. 문제는 정보의 부족이 아니라 관계의 망각입니다.
그런데 이 절이 하나님을 부르는 호칭을 보십시오. '그들을 지으신 이', '그들을 조성하신 이'입니다. 심판을 선언하는 문장에서 굳이 창조주의 이름을 두 번 부르십니다. 옥스퍼드 원어성경대전은 여기 쓰인 '불쌍히 여기다'가 애간장이 탈 정도로 그 대상을 사랑하는 것을 뜻하고, '은혜를 베풀다'가 높은 이가 낮은 이에게 몸을 숙여 과분한 호의를 베푸는 것을 뜻한다고 풀이합니다. 곧 이 구절은 하나님의 무정함이 아니라, 창조주의 애끓는 심정이 끝내 거절당한 자리를 보여 줍니다. 지으신 이가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을 두고 돌아서시는 장면만큼 슬픈 장면이 성경에 또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보시고 우신 것도 같은 마음이었습니다.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마 2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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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각이 없다는 것은 무식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경 지식이 넉넉하고 신앙 경력이 길어도 지각을 잃을 수 있습니다. 지각은 내가 지음받은 존재라는 사실을 매 순간 기억하는 감각입니다. 이 감각이 무뎌지면 예배는 습관이 되고, 기도는 요구가 되며, 은혜는 당연한 것이 됩니다. 오늘 하루, 내가 나를 만들지 않았다는 그 단순한 사실 앞에 잠시 서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사회는 지금 견고한 성읍을 쌓는 일에 온 힘을 쏟고 있습니다. 자산과 스펙과 보험이라는 이름의 성벽입니다. 그것들이 나쁘다는 말이 아닙니다. 다만 그 성벽 안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면 그 성은 언젠가 송아지가 누워 되새김질하는 자리가 됩니다. 광양사랑의교회의 성도들이 자녀에게 물려주어야 할 것은 더 두꺼운 성벽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아보는 지각입니다. 다음 세대가 교회를 떠나는 이유를 프로그램의 부족에서만 찾을 일이 아닙니다. 그들이 우리에게서 지으신 이를 알아보는 사람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면, 그것이 더 아픈 진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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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13절 하나하나 모으시고 큰 나팔을 부시는 날
성령 하나님은 세상 곳곳에 흩어진 자들을 하나도 흘리지 않으시고 하나하나 거두어, 마침내 예배의 자리로 불러 모으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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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이스라엘 자손들아 그 날에 여호와께서 창일하는 하수에서부터 애굽 시내에까지 과실을 떠는 것 같이 너희를 하나하나 모으시리라"(12절). 그리고 마지막 절입니다. "그 날에 큰 나팔을 불리니 앗수르 땅에서 멸망하는 자들과 애굽 땅으로 쫓겨난 자들이 돌아와서 예루살렘 성산에서 여호와께 예배하리라"(13절). 심판으로 시작한 24장의 긴 여정이 예배로 끝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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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절의 '과실을 떠는 것 같이'는 추수 때 곡식이나 올리브를 떨어 거두는 모습입니다. 타작마당의 그림입니다. 그런데 이 절에서 떠는 대상은 곡식이 아니라 백성이고, 떠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하나하나'라는 말이 붙습니다. 히브리어로는 '하나에 하나씩'이라는 표현입니다. 대량으로 쓸어 담는 수확이 아니라, 이삭 하나까지 손으로 주워 담는 수확입니다. 유브라데에서 애굽 국경까지,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땅의 두 끝을 다 훑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옥스퍼드 원어성경대전은 이 예언이 일차적으로는 바벨론 등 이방 땅의 포로들을 모으실 것이라는 예언이며, 이차적으로는 종말의 때에 모든 영적 이스라엘을 한 곳에 모으실 것이라는 예언이라고 정리합니다. 목자가 아흔아홉을 두고 하나를 찾아 나서시는 복음서의 장면이 이미 여기 예고되어 있습니다.
13절의 '큰 나팔'은 이스라엘의 삶에서 여러 겹의 의미를 지닙니다. 절기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였고, 무엇보다 희년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였습니다. 옥스퍼드 원어성경대전이 지적하듯 나팔은 모든 빚을 탕감하고 노예 상태에서 해방시킨다는 사실을 알리는 소리였습니다. 그러니 이 나팔은 전쟁의 나팔이 아니라 해방의 나팔입니다. 이 주석은 이 예언이 일차적으로는 고레스의 귀환 칙령을,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재림 때 택하신 자들을 모으는 천사들의 나팔을 가리킨다고 보면서(마 24:31), 동시에 신약 시대에 온 세계에서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이 죄에서 해방되어 나아오게 될 것을 예언한 것으로도 읽습니다. 그렇게 읽으면 '큰 나팔'은 구원의 복음이고, 나팔을 부는 자는 복음을 전하는 모든 성도입니다.
주목할 곳은 돌아온 자들의 출신지입니다. '앗수르 땅에서 멸망하는 자들'과 '애굽 땅으로 쫓겨난 자들'입니다. 앗수르와 애굽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두 개의 큰 유혹이자 두 개의 큰 공포였습니다. 북에서 오는 칼과 남에서 오는 동맹, 그 사이에서 이스라엘은 늘 흔들렸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두 땅에서 사람들이 돌아옵니다. 사람이 가장 멀리 떠내려간 자리, 가장 부끄러운 자리가 하나님께는 회복의 출발점이 됩니다. 그리고 그들이 돌아와서 하는 일은 성전을 다시 짓는 것도, 나라를 세우는 것도 아닙니다. 예배입니다. 이사야 묵시록의 마지막 단어가 '예배하리라'인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역사의 끝은 승리의 개선식이 아니라 무릎 꿇는 예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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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하나'라는 말 앞에 오래 머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통계로 사람을 세지 않으십니다. 교회를 떠난 그 한 사람, 소식이 끊긴 그 한 사람, 이제는 기도의 명단에서도 빠진 그 한 사람을 하나님은 여전히 이삭 줍듯 찾고 계십니다. 우리가 포기한 이름을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니 오늘 그 이름 하나를 다시 기도 수첩에 적어 넣는 것으로 이 묵상을 마무리해도 좋겠습니다.
그리고 나팔은 우리 입에 맡겨져 있습니다. 옥스퍼드 원어성경대전이 말하듯 복음 전파는 목회자나 선교사만의 몫이 아니라 모든 성도에게 부여된 사명입니다. 광양사랑의교회가 국제비전선교회와 함께 파키스탄과 열방을 향해 손을 내미는 일도, 카페에서 그림책을 함께 읽는 자리도, 이웃에게 건네는 한마디 안부도 모두 이 나팔의 한 소절입니다. 큰 소리로 불라 하셨습니다. 앗수르에 있는 사람도, 애굽으로 밀려간 사람도 들을 수 있을 만큼 크게 불라 하셨습니다. 오늘 당신의 자리에서 그 나팔은 어떤 소리로 울리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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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포도원지기 되신 주님,
울타리를 걷으셨던 그 손으로
다시 물을 주시고 밤을 새워 지키시니
우리가 오늘 여기 서 있습니다.
우리를 지키는 일을 우리에게 맡기지 않으시고
친히 망대에 오르신 사랑을 찬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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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찌르던 가시에게도
먼저 화친을 청하신 주님,
방어하는 마음, 되갚으려는 마음을 내려놓게 하시고
우리도 먼저 손을 내미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그 화평이
우리 가정과 교회의 언어가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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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질하듯 헤아려 매를 드시는 아버지,
지금 우리가 지고 있는 무게가
우리를 부러뜨리려는 무게가 아님을 믿습니다.
우리 마음의 뜰에 서 있는 제단을 부수시고
아세라와 태양상을 넘어뜨리셔서
잃은 것보다 얻은 것이 크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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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지으시고 조성하신 주님,
지각을 잃지 않게 하소서.
익숙함이 은혜를 덮지 않게 하시고
예배가 습관이 되지 않게 하소서.
견고한 성읍을 쌓는 일보다
주님을 알아보는 눈을 자녀에게 물려주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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흩어진 자를 하나하나 거두시는 주님,
우리가 포기한 그 한 사람을
주님은 여전히 찾고 계심을 믿습니다.
우리 입술에 큰 나팔을 맡기셨사오니
앗수르에 있는 이도 애굽에 있는 이도 듣도록
오늘 우리의 삶으로 그 소리를 내게 하소서.
그리하여 마침내 주의 성산에서
함께 무릎 꿇고 예배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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