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24:14-23 땅 끝에서 들려온 노래와 시온에 세워진 왕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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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의 심판 한가운데서 뜻밖의 노래가 들려옵니다. 바다에서, 동방에서, 바다 모든 섬에서 무리가 여호와의 위엄을 높이고 땅 끝에서는 의로우신 이에게 영광을 돌리자는 소리가 들립니다(14-16절 상). 그러나 예언자는 그 환호에 함께 서지 못합니다. 그는 도리어 나는 쇠잔하였다고 탄식하며, 두려움과 함정과 올무가 땅의 주민에게 이르렀음을, 땅이 취한 자같이 비틀거리다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리라는 것을 봅니다(16절 하-20절). 심판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 어둠으로 닫히지 않습니다. 그 날에 여호와께서 높은 군대와 땅의 왕들을 벌하시고, 마침내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왕이 되시니 달이 수치를 당하고 해가 부끄러워합니다(21-2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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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읽은 24장 1절에서 13절까지가 온 땅을 뒤집어엎으시는 심판의 굉음이었다면, 오늘 본문은 그 굉음이 잦아든 자리에서 갑자기 터져 나오는 노랫소리로 시작합니다. 이 급격한 전환이 24장 후반부를 읽는 첫 번째 열쇠입니다. 김필회 교수에 따르면 24장은 크게 1-13절과 14-23절로 나뉘고, 오늘 본문인 후반부는 다시 14-20절과 21-23절로 갈라집니다. 그리고 이 단락에 붙일 수 있는 가장 정직한 제목은 '이스라엘의 성급한 환호와 예언자의 전율'입니다. 노래하는 자들과 그 노래를 들으며 몸을 떠는 한 사람이 같은 화면 안에 함께 서 있는 것입니다.
# 노래하는 이들이 누구인지 본문은 직접 말하지 않습니다. 김필회 교수는 문맥에서 세 가지 단서를 뽑아냅니다. 첫째, 이들은 16절의 '우리'와는 구별되는 집단입니다. 둘째, 온 세상에 흩어져 살고 있는 자들입니다. 셋째, 여호와를 아는 자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심판의 대상인 마당에 그 심판을 기뻐하는 자들이라면, 민족들 가운데 흩어져 사는 이스라엘 사람들 말고는 달리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흩어진 유다 사람들은 기존의 질서를 뒤흔드는 어떤 엄청난 사건 속에서 이방 민족들을 향한 여호와의 심판을 읽어 냈고, 그것이 곧 이스라엘의 구원이 시작된 신호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노래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언자는 그 판단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땅에 대한 심판이 곧 이스라엘의 구원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습니다.
# 방위의 배치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바다는 지중해를 뜻하므로 14절의 '바다에서부터'는 서쪽입니다. 15절의 '동방'은 동쪽이고, '바다 모든 섬'은 시리아나 소아시아나 키프로스 해변을 가리키니 북쪽입니다. 그리고 16절의 '땅 끝'은 남쪽 끝일 수 있습니다. 서에서 동으로, 북에서 남으로, 사방이 한 이름을 부르는 소리로 채워집니다. 개역개정이 15절의 '영화롭게 하다'를 미완료로 옮겼지만 히브리어 본문은 명령형으로 읽습니다. "그러므로 동쪽에서 여호와를 영화롭게 하며 바다의 섬들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여라." 곧 이것은 단순한 관찰 보고가 아니라 부름입니다. 그런데 그 부름 바로 뒤에 예언자의 화 선언이 따라붙습니다. 이 어긋남이 오늘 본문의 심장입니다.
# 21절부터 23절까지는 결이 또 달라집니다. 여기서부터는 하늘과 땅이 함께 무대가 됩니다. 여호와께 적대적인 하늘의 군대, 하늘과 지상에서 동시에 벌어지는 싸움, 한시적인 감금, 여러 날 뒤의 최종 심판. 김필회 교수는 후대의 묵시문학이 바로 이 21-22절의 표상들을 발전시켜 종말론적 사건을 기술하는 데 사용했다고 지적하며, 요한계시록 20장 1절에서 3절을 나란히 놓고 읽어 볼 것을 권합니다. 그래서 24장부터 27장까지를 흔히 '이사야의 소묵시록'이라 부릅니다. 그리고 전체 24장은 23절 후반부의 종말론적 신앙고백에서 정점에 도달합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왕이 되신다는 그 한 문장이, 1절부터 이어진 모든 파국의 소음을 삼켜 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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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14-15 사방에서 터져 나온 찬양의 소리
하나님은 온 땅이 무너지는 자리에서도 당신의 위엄을 알아보고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을 세상 끝까지 흩어 두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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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 단락의 마지막 그림은 감람나무를 흔든 뒤 가지 끝에 남은 몇 알이었습니다. 모든 소리가 잦아든 폐허였습니다. 그런데 14절이 갑자기 소리를 되살립니다. "무리가 소리를 높여 부를 것이며 여호와의 위엄으로 말미암아 바다에서부터 크게 외치리니"(사 24:14). 원문은 문장 첫머리에 3인칭 복수 독립인칭대명사 '그들'을 세워 둡니다. 개역개정이 '무리'로 옮긴 그 말입니다. 이어 15절은 방향을 바꾸어 부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동방에서 여호와를 영화롭게 하며 바다 모든 섬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영화롭게 할 것이라"(사 24:15). 노래의 내용은 단순합니다. 여호와의 위엄, 그리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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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노래가 터져 나온 자리를 먼저 보아야 합니다. 잔치가 파한 자리, 포도주가 끊긴 자리, 성문이 부서진 자리입니다. 사람이 쌓아 올린 모든 소리가 꺼진 다음에야 이 노래가 들립니다. 김필회 교수는 이들을 '여호와를 아는 자들', 곧 세상에 흩어져 살면서도 그분을 알아보는 자들로 봅니다. 흩어짐은 원래 심판이었습니다. 1절에서 여호와께서 주민들을 흩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흩어짐의 자리가 바로 찬양의 진지가 됩니다. 심판으로 흩어진 곳이 예배가 드려지는 곳이 되는 이 역설은 이사야서 전체가 붙들고 있는 하나님나라의 논리입니다. 훗날 사도행전 8장에서 예루살렘 교회가 박해로 흩어졌을 때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한 것도 같은 문법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이라는 표현도 가볍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은 열왕기상 8장 17절과 20절에 한 번 더 나오는 표현으로, 신명기의 이름 신학을 전제합니다. 제의에서 여호와의 이름은 여호와 자신을 대신하는 표현입니다. 이름은 그 이름을 가진 분의 행위와 업적을, 명성과 명예를 담은 역동적인 단위입니다. 그러니까 여호와의 이름을 영화롭게 한다는 것은 그분이 실제로 하신 일을 기억하고 그것을 소리 내어 말한다는 뜻입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곳에서 억지로 짜내는 감탄이 아니라, 역사의 한복판에서 그분의 손자국을 알아본 사람의 증언입니다. 15절이 명령형이라는 사실도 여기서 무게를 얻습니다. 찬양은 감정이 차오를 때 저절로 나오는 것이기 이전에, 명령으로 주어지는 순종의 행위입니다.
그리고 이 노래는 지리적으로 이스라엘의 국경 바깥에서 울립니다. 성전에서, 시온에서 나오는 소리가 아닙니다. 서쪽 바다에서, 동방에서, 바다 모든 섬에서 나옵니다. 예배의 중심이 무너진 시대에 예배가 어디서 계속되는가를 이 구절이 미리 보여 줍니다. 훗날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리라고 하신 그 말씀의 뿌리가 여기까지 닿아 있습니다. 성전이 무너져도 이름은 불립니다. 제도가 흔들려도 증언은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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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는 지금 어떤 의미로든 흩어지는 시대를 지나고 있습니다. 주일 예배당의 숫자가 줄고, 오래 다니던 교회를 떠난 이들이 늘고, 신앙의 언어가 공적 광장에서 조롱거리가 되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이 상황을 우리는 흔히 위기라고 부릅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흩어진 자리에서 노래가 시작될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문제는 건물의 크기가 아니라, 흩어진 자리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를 사람이 남아 있는가입니다. 광양사랑의교회의 성도들이 예배당을 나서서 각자의 일터와 가게와 병원과 교실로 흩어질 때, 그 흩어짐이 패배가 아니라 파송이 되기를 원합니다. 애양병원 병실에서, 카페의 커피 머신 앞에서, 아이들의 그림책 앞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불린다면 그곳이 곧 바다 모든 섬입니다. 오늘 하루, 내가 서 있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이 하신 일 한 가지를 소리 내어 말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 한마디가 이 본문이 말하는 찬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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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16-20 나는 쇠잔하였고 나는 쇠잔하였으니
성령 하나님은 성급한 낙관에 취하지 않고 아직 남은 밤을 함께 아파하도록 예언자의 마음을 붙드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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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절 전반부까지는 노래가 계속됩니다. "땅 끝에서부터 노래하는 소리가 우리에게 들리기를 의로우신 이에게 영광을 돌리세 하도다"(사 24:16). 그런데 같은 절 후반부에서 문장이 급격히 꺾입니다. "그러나 나는 이르기를 나는 쇠잔하였고 나는 쇠잔하였으니 내게 화가 있도다 배신자들은 배신하고 배신자들이 크게 배신하였도다"(사 24:16). 노래를 듣는 '우리'가 있고, 그 안에서 홀로 화를 선언하는 '나'가 있습니다. 이어지는 17절부터 20절까지는 그 '나'가 본 것을 그대로 옮깁니다. 두려움과 함정과 올무, 열리는 위의 문과 진동하는 땅의 기초, 깨지고 갈라지고 흔들리는 땅, 취한 자같이 비틀거리다 마침내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는 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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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가 왜 화를 선언했는지가 이 단락의 핵심입니다. 김필회 교수는 이렇게 정리합니다. 흩어진 이스라엘 사람들의 열광적인 반응이 예언자를 심각한 불안에 빠뜨렸고, 그는 자신이 본 이상 앞에서 전율하며 스스로에게 화를 선언했다는 것입니다. 환호하는 자들과 달리 그는 이스라엘의 구원에 관해 아무것도 인지하지 못했습니다. 그가 본 것은 점점 더 짙게 땅을 뒤덮는 재앙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언자의 탄식은 비관주의가 아니라 정직입니다. 남들이 다 아침이라고 외칠 때 아직 밤이라고 말하는 사람의 외로움입니다. 김필회 교수는 여기에 한 줄을 덧붙입니다. 종말의 결정적 승리를 경험하기까지는 어둠과 고난의 길을 통과해야 하는데, 이미 구원이 온 것처럼 구는 사람들 때문에 이사야가 탄식한다는 것입니다.
'쇠잔하였고'라는 말은 4절에서 땅이 쇠잔하다고 할 때 쓰인 그 말입니다. 땅이 마르듯 예언자도 말라 갑니다. 그는 심판의 바깥에 서서 손가락질하는 관찰자가 아니라, 심판의 무게를 자기 몸에 받아 내는 사람입니다. 배신을 뜻하는 말이 세 번 반복되며 소리로 부딪히는 16절 후반부의 언어유희도, 그의 말이 논리적 설명이 아니라 신음에 가깝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유대 사상가 아브라함 요수아 헤셸은 예언자란 격렬하게 느끼는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예언자의 정서는 하나님의 마음에 대한 참여이지 개인의 기질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사야의 전율은 그 시간에 하나님께서 무엇을 느끼고 계셨는지를 보여 주는 창입니다. 심판을 집행하시는 분이 그 심판을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이, 한 사람의 떨림을 통해 드러납니다.
17절과 18절 전반부의 그림은 사냥의 언어입니다. 함정은 짐승을 잡으려고 파 놓은 구덩이이고, 올무는 새 사냥꾼의 그물입니다. 두려운 소리에 놀라 도망하면 함정에 빠지고, 함정에서 겨우 올라오면 올무가 기다립니다. 아모스 5장 19절에서 사자를 피하다 곰을 만나고 집에 들어가 벽에 손을 짚었다가 뱀에게 물리는 그 구조와 똑같습니다. 도망칠 곳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18절 후반부부터 그림의 축척이 갑자기 우주로 확대됩니다. 위에 있는 문이 열린다는 표현은 하늘의 창을 열어 홍수를 내리신 창세기 7장의 기억을 불러옵니다. 땅의 기초가 진동한다는 말은 지진의 표상입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흔들리지 않게 놓으신 땅의 기초가 요동한다는 것은, 창조의 질서 자체가 되감기고 있다는 뜻입니다. 20절의 두 비유는 반대로 지극히 일상적입니다. 술 취한 사람의 비틀거림과, 밤을 지내려고 얼기설기 지은 원두막이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입니다. 우주적 파국을 술꾼과 원두막으로 그려 내는 이 낙차가 예언자의 언어입니다. 그리고 20절 후반부가 이유를 밝힙니다. 그 위의 죄악이 중하기 때문입니다. 땅을 무너뜨리는 것은 외부의 적이 아니라 땅이 스스로 짊어진 죄의 무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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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신앙 언어에는 성급한 환호가 너무 많습니다. 사회의 어떤 사건을 두고 이것이 하나님의 심판이라며 손뼉을 치고, 미워하던 세력의 몰락을 구원의 신호로 읽어 내고, 그 위에 서둘러 승리의 노래를 얹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예언자는 그 노래에 합류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심판이 남의 일이 아님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무너지는 땅 위에 우리도 함께 서 있습니다. 교회가 세상을 향해 손가락질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14절의 무리 편에 서 버린 것입니다. 광양사랑의교회는 시대의 어둠 앞에서 먼저 우는 공동체가 되기를 원합니다. 남의 무너짐을 기뻐하지 않고, 그 무너짐 속에 있는 사람의 얼굴을 먼저 보는 공동체 말입니다. 소그룹 모임에서 누군가 무너진 이야기를 꺼냈을 때 곧바로 해석과 교훈을 얹지 않고 잠시 함께 침묵하는 것, 그것이 예언자의 자세를 배우는 가장 작은 훈련입니다. 오늘 하루, 성급하게 결론 내리고 싶은 어떤 사건 하나를 떠올리고 그 판단을 하루만 미뤄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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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21-23 만군의 여호와께서 왕이 되시고
성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될 하나님의 왕권은 해와 달의 빛조차 부끄럽게 만드는 참된 영광의 통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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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절에서 땅이 쓰러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한다고 했으니,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21절이 "그 날에"로 새로 시작합니다. "그 날에 여호와께서 높은 데에서 높은 군대를 벌하시며 땅에서 땅의 왕들을 벌하시리니"(사 24:21). 하늘의 군대와 땅의 왕들, 곧 위와 아래의 모든 권세가 한꺼번에 호명됩니다. 22절은 그들의 운명을 그립니다. 죄수가 깊은 옥에 모이듯 모여 갇혔다가 여러 날 후에 형벌을 받습니다. 그리고 23절이 이 모든 것의 결론입니다. "그 때에 달이 수치를 당하고 해가 부끄러워하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왕이 되시고 그 장로들 앞에서 영광을 나타내실 것임이라"(사 2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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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회 교수는 이 단락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현재의 문맥에서 보자면 땅의 심판은 이스라엘의 승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최종적이며 완전한 승리를 의미하며, 우주적 재앙은 하나님 왕권의 수립에서 정점에 도달한다는 것입니다. 14절에서 노래하던 이들이 틀린 것은 노래한 것 자체가 아니라 노래의 주어를 잘못 잡은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구원을 노래했지만, 본문이 도달하는 곳은 여호와의 왕 되심입니다. 심판의 끝은 어느 민족의 승리가 아니라 한 분의 즉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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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절의 '높은 군대'는 민족들의 수호천사나 신적 통치자들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다니엘 10장에서 미가엘이 바사의 군주와 헬라의 군주와 싸우는 장면이 그 배경입니다. 다만 다니엘서와 달리 여기서는 여호와께서 직접 하늘의 군대와 지상의 왕들을 함께 벌하십니다. 대리자가 없습니다. 22절의 '옥'은 감옥으로 쓰이는 구덩이입니다. 요셉이 던져진 구덩이와 예레미야가 갇힌 웅덩이가 같은 말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그들이 곧바로 소멸되지 않고 여러 날 후에 형벌을 받는다는 점입니다. 심판에도 하나님의 시간표가 있고, 그 시간표는 우리의 조급함과 다릅니다. 요한계시록 20장 1절에서 3절이 이 표상을 그대로 이어받아 사탄이 무저갱에 결박되었다가 잠깐 놓이는 장면으로 발전시킵니다. 후대의 묵시문학은 바로 이 두 절을 종말론의 문법으로 삼았습니다.
23절의 두 문장은 서로를 설명합니다. 달이 수치를 당하고 해가 부끄러워한다는 것은 창백해지고 빛을 잃는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재앙 때문이 아닙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왕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더 큰 빛 앞에서 작은 빛이 무색해지는 것입니다. 고대 근동에서 해와 달은 신으로 섬겨지던 대상이었고, 시간과 계절과 운명을 주관한다고 여겨졌습니다. 그 해와 달이 낯을 붉히는 자리에서, 사람이 두려워하던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습니다. 김필회 교수는 여호와의 왕 되심이 새로이 보좌에 올라가심을 뜻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합니다. 모든 피조 세계를 창조하신 그분은 처음부터 영원까지 변함없는 왕이시며, 다만 눈에 보이지 않았던, 또는 희미하게만 인식되었던 그 왕권이 마지막 때에 누구나 볼 수 있게 완전하게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영광, 곧 카보드는 보이지 않는 왕권의 외적 모습입니다. 이사야가 6장에서 성전에서 뵈었던 그 영광이, 24장에 이르러 온 세상의 무대 위로 나옵니다.
'그 장로들 앞에서' 영광을 나타내신다는 표현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출애굽기 24장에서 모세와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칠십 인 장로가 시내산에 올라 하나님을 뵙고 먹고 마셨습니다. 언약 체결의 장면입니다. 그 표상이 여기서 다시 쓰입니다. 김필회 교수는 24장에서 구약의 다양한 전승이 자유롭게 활용되고 있으므로 이 장로들을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인물로만 한정하는 것은 너무 이른 결론일 수 있다고 봅니다. 바로 다음 장인 25장에서 여호와께서 만민을 위하여 산 위에 잔치를 베푸시는 장면이 이어지는 것을 보면, 이 장로들은 민족들을 대표하는 자들로 읽는 편이 자연스럽습니다. 요한계시록의 이십사 장로를 나란히 놓고 읽어 보라는 권면도 같은 맥락입니다. 그리고 신약은 이 왕좌의 이름을 밝힙니다. 시온 산에서 왕이 되신 그분은 십자가 위에 유대인의 왕이라는 패를 달고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계시록 21장 23절은 오늘 본문을 이렇게 완성합니다.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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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는 시대는 왕이 너무 많은 시대입니다. 정치의 왕, 자본의 왕, 알고리즘의 왕, 여론의 왕이 저마다 우리의 시간과 감정을 징수해 갑니다. 그리고 그 왕들은 하나같이 지금 자기가 마지막 왕인 것처럼 굴어 마음을 조급하게 만듭니다. 오늘 본문은 그 조급함의 뿌리를 자릅니다. 높은 군대도, 땅의 왕들도, 결국 깊은 옥에 모이는 죄수의 자리로 내려갑니다. 그러니 우리가 붙들 것은 저 왕들의 일정표가 아니라 시온에 세워질 왕좌입니다. 이것은 세상을 등지라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왕좌를 믿기 때문에 오늘의 자리에서 조급하지 않게 정직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성적표 앞에서, 인사 발령 앞에서, 진단서 앞에서 우리가 무너지지 않는 이유는 그것들이 마지막 판결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광양사랑의교회의 가정마다 이 순서가 회복되기를 원합니다. 저녁 식탁에서 오늘 하루 누가 우리를 다스렸는지를 한번 돌아보고, 그 자리에 다시 한 분의 이름을 올려놓는 것입니다. 해가 부끄러워지는 그 아침을 기다리는 사람은, 오늘의 어둠을 견딜 힘을 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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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땅 끝까지 흩어 두신 주님,
무너진 자리에서도 주의 위엄을 알아보는 눈을 우리에게 주십시오.
성전이 흔들리고 제도가 낡아 가는 시대에도
저마다 선 자리에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 백성이 되게 하시고,
흩어짐을 패배가 아니라 파송으로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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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우시는 주님,
남의 무너짐을 서둘러 기뻐하지 않게 하십시오.
아직 끝나지 않은 밤을 아침이라 우기지 않게 하시고,
함정과 올무 사이에서 지친 이들의 얼굴을 먼저 보게 하시며,
예언자의 전율을 우리 마음에도 나누어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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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온의 왕이신 주님,
해와 달이 부끄러워하는 그 날을 우리에게 기억시켜 주십시오.
높은 군대와 땅의 왕들이 저마다 마지막인 척하는 이 시대에
우리의 시간과 마음을 다스릴 분이 오직 주님이심을 고백하게 하시고,
그 왕좌를 바라보며 오늘 하루를 정직하게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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