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23:01-18 돌아온 배가 잃어버린 항구, 칠십 년 뒤에 거룩해진 이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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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로에 관한 경고입니다(1절). 먼 바다를 누비던 다시스의 배들이 긴 항해를 마치고 돌아왔지만, 정작 정박할 두로가 황무하여 집도 들어갈 곳도 없어졌습니다. 그 소식은 뱃길 어귀 깃딤 땅에서부터 전해집니다. 시돈 상인들의 무역으로 부요하게 된 해변 주민들에게는 잠잠하라는 명령이 떨어지고(2절), 나일의 곡식을 큰 물로 실어 날라 열국의 시장이 되었던 지난 영화가 회고됩니다(3절). 바다 곧 바다의 요새가 자기는 산고를 겪지도 못하였고 자식을 길러 내지도 못하였다고 말하니, 뭇 항구의 어머니였던 시돈은 자식 없는 여인처럼 부끄러움을 당합니다(4절). 두로의 소식은 곡물 무역의 상대였던 애굽에까지 이르러 고통이 되고(5절), 해변 주민들은 서쪽 끝 다시스로 건너가며 슬피 부르짖으라는 명령을 받습니다(6절). 예언자는 묻습니다. 이것이 옛날에 건설되어 제 발로 먼 지방까지 가서 식민지를 세우던 그 희락의 성이냐(7절). 왕들에게 면류관을 씌우고 그 상인들이 고관이며 그 무역상들이 세상에서 존귀한 자로 대접받던 두로에게 누가 이 일을 정하였느냐(8절). 대답은 하나뿐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것을 정하셨으니, 모든 누리던 영화를 욕되게 하시며 세상의 모든 교만하던 자가 멸시를 받게 하려 하심입니다(9절). 두로의 속박에서 풀려난 딸 다시스는 이제 나일처럼 제 땅에 넘치고(10절), 여호와께서는 바다 위에 그의 손을 펴사 열방을 흔드시며 가나안에 대하여 그 견고한 성채를 무너뜨리라 명령하십니다(11절). 학대받은 처녀 딸 시돈은 다시는 희락하지 못하고, 배를 타고 깃딤으로 건너가도 거기서 평안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12절). 앗수르의 손에 들짐승의 거처가 되어 버린 갈대아 땅이 눈앞의 실물 교육으로 제시되고(13절), 처음의 곡소리가 다시 울리며 견고한 성읍이 파괴되었음이 확정됩니다(14절). 그러나 신탁은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두로는 한 왕의 연한 같이 칠십 년 동안 잊혀졌다가 기생의 노래처럼 다시 거리에 나서게 되고(15-16절), 칠십 년이 찬 후에 여호와께서 두로를 돌보시니 그가 다시 열방과 거래를 시작합니다(17절). 그리고 마지막 한 절이 모든 것을 뒤집습니다. 그 무역한 것과 이익이 거룩히 여호와께 돌려지고, 쌓아 두는 대신 여호와 앞에 사는 자의 배부른 양식과 좋은 옷이 됩니다(1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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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사야 23장은 13장부터 이어져 온 열방 신탁의 마지막 자리에 놓여 있습니다. 바벨론과 앗수르, 블레셋과 모압, 다메섹과 구스와 애굽, 두마와 아라비아, 그리고 뜻밖에도 예루살렘(22장)까지 차례로 호명되던 긴 행렬이 두로에서 끝납니다. 이 배치는 의미심장합니다. 열방 신탁의 문을 연 것은 칼로 세운 군사 제국 바벨론이었고, 그 문을 닫는 것은 돈으로 세운 상업 제국 두로입니다. 인간이 스스로를 높이는 두 가지 방식, 곧 무력과 자본이 신탁의 두 기둥으로 세워진 셈입니다. 그리고 이 명단이 끝나는 자리에서 곧바로 24장의 우주적 심판, 이른바 '이사야 묵시록'이 시작됩니다. 열방의 목록을 다 부르고 나서 예언자가 도달한 곳은 온 땅이었습니다. 두로의 무너짐은 한 도시의 사건이 아니라 세계의 질서 자체가 심판대에 선다는 신호입니다.
# 두로는 지중해 동안 페니키아의 해양 도시국가였습니다. 육지의 본토 시가지와 앞바다의 섬 요새로 이루어져 있었고, 그 섬 성벽은 고대 세계에서 함락 불가능의 대명사였습니다. 백향목과 자주색 염료, 유리와 정교한 목공품을 팔고 곡식과 광물을 사들이며, 깃딤(구브로)에서 다시스(오늘의 스페인 남부로 추정)에 이르는 지중해 전역에 무역 거점을 세웠습니다. 7절의 "그 백성이 자기 발로 먼 지방까지 가서 머물던"이라는 표현은 이 식민 활동을 가리킵니다.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도 두로가 낳은 딸이었습니다. 솔로몬 시대의 히람 왕처럼 두로는 이스라엘과도 오래 교류했고, 성전 건축의 백향목이 그 항구에서 왔습니다. 그러나 아합의 아내 이세벨이 시돈 왕의 딸이었다는 사실이 보여 주듯, 두로와 시돈은 이스라엘에 바알 종교를 실어 나른 통로이기도 했습니다. 물건과 함께 신들이 들어왔던 것입니다.
# 본문의 역사적 정황은 주전 8세기 앗수르의 압박입니다. 디글랏빌레셀 3세 이래 앗수르 왕들은 페니키아 해안을 거듭 침공해 조공을 강요했고, 산헤립의 원정 때에는 시돈 왕 룰리가 배를 타고 구브로로 달아났다가 그곳에서 죽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12절의 "일어나 깃딤으로 건너가라 거기에서도 네가 평안을 얻지 못하리라"는 말씀은 바로 그 도피의 기억을 되울립니다. 바다로 도망친 자에게 바다 건너편도 피난처가 되지 못했습니다. 훗날 두로는 느부갓네살에게 십삼 년을 포위당하고, 다시 이백여 년 뒤 알렉산더가 바다를 메워 제방을 쌓고 섬 요새를 함락합니다. 예언자가 선포한 "바다 위에 그의 손을 펴사"라는 말씀은 이렇게 여러 세기에 걸쳐 성취되었습니다.
# 문학적으로 23장은 심판(1-14절)과 회복(15-18절)의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고, 오늘 본문은 그 둘을 함께 읽습니다. 앞부분은 1절과 14절의 "다시스의 배들아 너희는 슬피 부르짖을지어다"가 큰 수미상관을 이루는 시(詩)이고, 뒷부분 15-18절은 "그 날에"로 열리는 산문 신탁입니다. 형식은 조롱과 애가가 뒤섞인 장송곡입니다. 도시는 여성으로 의인화되어 '처녀 딸 시돈'이라 불리고, 바다는 입을 열어 자기가 낳은 자식이 없다고 통곡합니다. 무역으로 온 세상을 낳아 기른 듯이 보이던 도시가 실은 아무것도 낳지 못한 불임의 여인이었다는 이 역설이 앞부분을 관통하는 뼈대라면, 뒷부분의 뼈대는 그 불임의 항구가 마침내 누군가의 밥과 옷을 낳게 된다는 반전입니다. 시가 무너뜨린 자리에서 산문이 다시 세웁니다. 그러므로 이 장은 심판으로 시작해 성별(聖別)로 끝납니다.
# 정경적으로 두로는 성경 전체에서 '상업적 교만'의 원형입니다. 에스겔은 두로를 향해 "네 무역이 많으므로 네 가운데에 강포가 가득하여 네가 범죄하였도다"(겔 28:16)라고 진단했고, 아모스는 두로가 형제의 계약을 기억하지 않고 온 백성을 에돔에 팔아넘겼다고 고발했습니다(암 1:9). 무역 자체가 죄는 아닙니다. 문제는 이익이 최고의 가치가 될 때 사람이 상품이 된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8장에서 큰 성 바벨론이 무너질 때 바다에서 배를 부리는 자들이 티끌을 머리에 뿌리며 애곡하는 장면과, 그 상품 목록의 마지막에 "종들과 사람의 영혼들"이 놓이는 장면은 에스겔의 두로 애가를 그대로 물려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사야 23장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18절에서 두로의 무역 이익이 마침내 여호와께 거룩히 구별되어 성전 앞에 놓이게 되리라고 선포하기 때문입니다. 이 약속은 스가랴 14장 20-21절에서 말 방울에까지 '여호와께 성결'이 새겨지고 만군의 여호와의 전에 다시는 상인이 없으리라는 환상으로 이어지고, 예수님이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셔서 한 이방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신 사건(막 7:24-30)과, 바울이 두로 해변에서 그곳 제자들과 함께 무릎 꿇고 기도한 장면(행 21:5)에서 조용히 성취됩니다. 심판의 대상이던 항구가 은혜의 자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파괴가 목적이 아니라 방향을 바꾸는 것이 목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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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절 돌아온 배가 잃어버린 항구, 잠잠하라는 명령
하나님은 사람이 가장 튼튼하다고 믿는 항구를 거두심으로 참된 정박지가 누구신지 물으시며, 요란한 번영의 소리를 그치게 하시고 당신 앞에 잠잠히 서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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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고는 뱃사람들을 부르는 곡소리로 시작됩니다. "다시스의 배들아 너희는 슬피 부르짖을지어다 두로가 황무하여 집이 없고 들어갈 곳도 없음이요"(사 23:1). 지중해 서쪽 끝까지 다녀온 원양 상선들이 돌아왔는데 항구가 사라졌습니다. 그 소식은 깃딤 땅에서부터 그들에게 전파되었습니다. 이어 예언자는 바다에 왕래하는 시돈 상인들로 말미암아 부요하게 된 해변 주민들에게 잠잠하라고 명령합니다(2절). 시홀의 곡식 곧 나일의 추수를 큰 물로 수송하여 들여 열국의 시장이 되었던 그 도시가(3절), 이제는 부끄러움의 자리에 섭니다. "시돈이여 너는 부끄러워할지어다"(사 23:4). 바다 곧 바다의 요새가 입을 열어 자기는 산고를 겪지 못하였고 출산하지 못하였으며 청년들을 양육하지도 처녀들을 생육하지도 못하였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소식이 애굽에 이르면 그들도 두로의 소식으로 말미암아 고통을 받을 것입니다(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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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문장의 배치가 이미 설교입니다. 예언자는 두로가 무너지는 장면을 성 안에서 보여 주지 않고, 바다 위에서 돌아오는 배의 갑판에서 보여 줍니다. 항해자에게 가장 두려운 일은 폭풍이 아닙니다. 폭풍은 견디면 지나갑니다. 정말 두려운 것은 폭풍을 다 견디고 돌아왔는데 돌아갈 항구가 없는 것입니다. 배는 무사한데 집이 없습니다. "들어갈 곳도 없음이요"라는 짧은 구절 안에, 평생을 벌어 돌아왔더니 정작 쉴 자리가 사라진 인생의 허망함이 통째로 들어 있습니다. 더구나 이 비보를 두로 사람들은 자기 성에서 듣지 못하고 깃딤, 곧 구브로 섬에서 전해 듣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빠른 정보망을 자랑하던 무역 도시가 자기 집의 소식을 남에게서 전해 듣는 처지가 된 것입니다. 원어의 결이 이 대목을 더 아프게 합니다. '황무하여'로 옮겨진 슛다드는 완료형인데,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이미 끝난 일처럼 말하는 예언적 완료형입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일은 아직 오지 않았어도 이미 이루어진 것입니다. 또 '전파되었음이라'의 니글라는 옷을 벗긴다는 뜻의 동사에서 왔습니다. 두로의 몰락은 소문처럼 흘러다닌 것이 아니라, 벗겨진 몸처럼 낱낱이 드러났습니다. 감출 것이 하나도 남지 않은 폭로, 그것이 심판의 모습입니다.
2절의 "잠잠하라"는 명령은 이 단락의 열쇠입니다. 두로의 정체성은 소리였습니다. 흥정하는 소리, 짐을 부리는 소리, 항구의 웃음소리, 셈을 맞추는 소리. 그 소리가 곧 그 도시의 생명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소리를 그치게 하십니다. 여기 쓰인 동사 다맘은 벙어리가 된다는 뜻인데, 델리취를 비롯한 학자들은 이 말이 아카드어와 우가릿어의 '애곡하다'와 이어져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이 명령은 '애곡하라'로도 옮길 수 있습니다. 둘은 결국 한 가지를 가리킵니다. 너무 큰 슬픔 앞에서는 울음조차 나오지 않고 말문이 막혀 버린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침묵을 두 방향으로 씁니다. 하나는 심판 앞의 강제된 침묵이고("모든 육체는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지니라", 슥 2:13), 다른 하나는 은혜로 초대되는 침묵입니다("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시 46:10). 두로는 앞의 침묵으로 끌려갑니다. 스스로 잠잠해지기를 배우지 못한 자는 결국 잠잠해지도록 만들어집니다.
3절은 두로의 영광을 한 문장으로 요약합니다. 시홀은 나일강의 다른 이름이고, '큰 물'은 지중해를 가리킵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절의 원문에 운송이라는 개념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직역하면 나일의 추수가 곧 '그녀의 소득'이었다는 뜻입니다. 애굽 농부가 흘린 땀의 결실이 곧바로 두로의 수입 장부에 기록되었다는 말입니다. 두로는 씨를 뿌린 적도, 밭을 갈아 본 적도 없었습니다. 다만 중간에 서서 옮겼을 뿐인데 그 차익이 산지의 소출보다 컸습니다. 그렇게 두로는 '열국의 시장'이 되었습니다. 중개 자체가 죄는 아닙니다. 그러나 땀 흘린 자보다 옮긴 자가 더 많이 가져가는 구조가 굳어질 때, 그 도시는 이미 정의의 문제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4절의 바다가 하는 말은 본문에서 가장 서늘한 대목입니다. '바다의 요새'는 두로를 가리키는 별명입니다. 고대 시돈의 주화에는 '시돈 사람들의 어머니, 두로'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어머니라 불리던 도시였습니다. 그런데 그 어머니가 입을 열어 말합니다. "나는 산고를 겪지 못하였으며 출산하지 못하였다"(사 23:4). 온 세상의 물자를 실어 나르며 무수한 도시를 살찌운 그 항구가, 정작 자기 입으로 자기는 아무도 낳은 적이 없다고 고백합니다. '산고를 겪다'로 옮겨진 훌은 몸을 비틀며 떠는 모습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진통 없이 얻은 것은 자식이 아니라 상품입니다. 두로는 세상에 없는 것이 없는 도시였지만 생명을 낳은 적은 없었습니다. 유통했을 뿐 잉태하지 않았고, 옮겼을 뿐 길러 내지 않았습니다. 규모와 생명력을 혼동하는 모든 체제를 향한 진단이 여기 있습니다. 수치로 증명되는 번영과 실제로 사람을 낳고 기르는 생명력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오늘의 언어로 말하자면, 거래량은 해마다 늘어나는데 아이 울음소리는 그치는 사회, 통계는 성장하는데 사람은 소진되는 사회의 초상이 여기 있습니다. 그리고 이 불임의 고백은 18절에서 조용히 뒤집힙니다. 아무도 낳지 못했던 그 항구가 마침내 누군가의 밥과 옷을 낳게 되기 때문입니다.
5절이 덧붙이는 애굽의 반응은 이 심판이 한 도시에서 끝나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두로가 무너지자 곡식을 팔던 애굽이 아파합니다. 오늘의 표현으로는 공급망의 붕괴입니다. 세계는 이미 그때도 촘촘히 얽혀 있었고, 한 항구의 몰락은 여러 나라의 살림을 흔들었습니다. 예언자는 이 상호의존 자체를 정죄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그물망 어디에도 하나님을 위한 자리가 없었다는 것, 사람들이 서로에게만 매여 있었을 뿐 매어 주시는 분께는 매여 있지 않았다는 것을 드러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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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각자의 항구를 하나씩 두고 살아갑니다. 평생 일해서 마련한 집, 은퇴 후를 지켜 줄 통장, 나를 알아주는 자리와 관계망. 그 항구가 있기에 우리는 먼 바다로 나갈 용기를 냅니다. 그런데 본문은 묻습니다. 만일 항해를 마치고 돌아왔는데 그 항구가 사라져 있다면, 나는 무엇으로 남습니까. 퇴직과 은퇴, 자녀의 독립, 건강의 상실, 오래 섬기던 자리에서 내려오는 날은 누구에게나 옵니다. 그때 우리를 붙드는 것은 배의 크기가 아니라 참된 정박지가 어디였는지에 대한 대답입니다. 광양사랑의교회 성도들에게 권합니다. 지금 항해가 순조로울 때에 미리 물어 두십시오. 나의 최종 정박지는 어디인가.
또 하나, 오늘 우리에게 가장 낯선 명령이 "잠잠하라"입니다. 우리는 잠잠해지는 법을 잃어버린 시대를 삽니다. 예배 시간에도 손안의 화면이 울리고, 기도하려 눈을 감으면 오늘의 주가와 내일의 일정이 먼저 떠오릅니다. 교회조차 무엇을 더 해야 하는가를 논의하는 소리로 가득합니다. 하나님은 은혜로 잠잠할 기회를 먼저 주십니다. 주일의 예배가, 새벽의 고요가, 말씀 앞에 앉는 십오 분이 그 기회입니다. 그 초대를 계속 미루면 언젠가 강제된 침묵이 옵니다. 병상에서, 실직의 시간에, 관계가 끊어진 자리에서 우리는 결국 잠잠해집니다. 스스로 택한 침묵은 은혜가 되고, 미루다 당하는 침묵은 심판이 됩니다. 이번 한 주간, 소리를 끄고 앉는 시간을 하루에 한 번씩 정해 두는 것으로 이 말씀에 응답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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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9절 누가 이 일을 정하였느냐, 만군의 여호와께서 정하신 것이라
하나님은 열방의 흥망을 홀로 정하시는 만군의 여호와이시며, 스스로 높아진 모든 영화를 욕되게 하시고 교만한 자를 낮추어 참된 존귀가 어디서 오는지 가르치시는 역사의 유일한 주권자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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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는 해변 주민들에게 다시스로 건너가라고, 곧 피난하라고 명령하며 슬피 부르짖으라고 거듭 외칩니다(6절). 그리고 무너진 도시를 앞에 두고 묻습니다. "이것이 옛날에 건설된 너희 희락의 성 곧 그 백성이 자기 발로 먼 지방까지 가서 머물던 성읍이냐"(사 23:7). 이어 두 번째 질문이 이어집니다. 왕들에게 면류관을 씌우던 자요 그 상인들은 고관들이요 그 무역상들은 세상에 존귀한 자들이었던 두로에 대하여 누가 이 일을 정하였느냐(8절). 그리고 마침내 대답이 주어집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것을 정하신 것이라 모든 누리던 영화를 욕되게 하시며 세상의 모든 교만하던 자가 멸시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사 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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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절의 질문은 폐허 앞에 선 사람의 목소리입니다. "이것이 그 성읍이냐." 옛날에 건설되었다는 말은 두로의 자랑이 유구한 역사였음을 보여 줍니다. 헤로도토스는 두로 사람들이 자기 도시가 이천삼백 년 되었다고 말했다고 기록합니다. 오래되었다는 것, 한 번도 무너진 적이 없다는 것보다 더 단단한 안전 보장은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예언자는 그 유구함이 곧 영속성의 보증은 아님을 폐허의 사진 한 장으로 반박합니다. 오래 버텼다는 사실은 다음에도 버틸 것이라는 약속이 아닙니다. '희락의 성'이라는 별명도 마찬가지입니다. 두로의 삶은 즐거웠고 풍요했으며 세련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이 빠진 즐거움은 언제나 잠깐입니다.
8절은 두로의 힘이 무엇이었는지를 정확히 짚습니다. "면류관을 씌우던 자." 두로는 왕이 되려는 자가 찾아가야 하는 도시였습니다. 자본이 왕관을 만들었고, 상인은 고관 대접을 받았습니다. 여기 '고관들'로 옮겨진 사림의 단수형 사르는 왕족이나 지방 총독, 행정 장관을 가리키던 말입니다. 장사꾼이 통치자의 이름으로 불린 것입니다. 더 흥미로운 것은 '무역상들'로 번역된 케나안입니다. 본래 가나안 땅과 가나안 족속을 가리키던 고유명사가, 그들의 뛰어난 장사 수완 때문에 아예 '상인'이라는 보통명사가 되어 버렸습니다. 한 민족의 이름이 곧 직업의 이름이 된 것입니다. 그 뿌리가 되는 동사 카나으는 '무릎을 굽히다', '낮추다'라는 뜻입니다. 무릎 꿇음에서 시작한 이름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자리의 이름이 되었다는 이 아이러니가, 두로의 이야기 전체를 압축합니다.
이어지는 '존귀한 자들'의 히브리어 니크벳데는 '무겁다'를 뜻하는 어근 카바드에서 왔습니다. 존귀란 곧 무게입니다. 사람들은 돈에 무게를 실어 주었고, 그 무게가 곧 명예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같은 어근에서 나온 말이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영광, 곧 카보드입니다. 참된 무게는 오직 하나님께 있는데, 두로는 그 무게를 상품의 가격표에 옮겨 붙였습니다. 예언자의 질문 "누가 이 일을 정하였느냐"는 그래서 신학의 급소를 겨눕니다. 이 도시의 흥망을 결정할 권한이 누구에게 있느냐는 것입니다.
9절의 대답은 단호합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정하셨습니다. '정하다'로 번역된 야아츠는 계획하고 경영한다는 뜻으로, 바로 앞 장에서 예루살렘을 향해 "이 일을 옛적부터 경영하신 이를 공경하지 아니하였느니라"(사 22:11)고 하실 때 쓰인 그 단어와 짝을 이룹니다. 예루살렘도 두로도 같은 진단을 받습니다. 역사의 설계자는 따로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 목적도 분명히 밝혀집니다. '영화'로 옮겨진 게온은 본래 하나님께 속한 위엄을 가리키는 말인데, 사람에게 쓰이면 곧 하나님의 자리를 넘보는 교만이 됩니다. 그리고 '멸시를 받게 하려'의 어근 칼랄은 '가볍다'는 뜻입니다. 앞의 카바드가 '무겁다'였으니, 이 한 절 안에서 무거움과 가벼움이 정면으로 부딪칩니다. 스스로 무거워지려 한 자를 하나님이 가볍게 하십니다. 이는 이사야 2장에서 이미 선포된 주제의 반복입니다. "그 날에 여호와께서 홀로 높임을 받으시리라"(사 2:11). 하나님은 인간의 영광을 미워하시는 옹졸한 분이 아닙니다. 다만 스스로를 신의 자리에 놓은 영광은 반드시 무너뜨리십니다. 그 무너짐이 사람에게는 재난이지만, 하나님께는 사람을 살리시는 수술입니다.
이 대목은 십자가에서 완성됩니다. 세상의 존귀를 다 가진 두로가 욕을 당한 자리에서, 세상의 존귀를 다 버리신 한 분이 스스로 낮아지셨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빌 2:6-7). 두로는 면류관을 씌워 주고 이익을 챙겼지만, 그리스도는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높아지려다 낮아진 도시와 낮아지심으로 높아지신 주님이 한 폭의 대조를 이룹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에서 존귀의 방향은 언제나 아래를 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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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한국 사회는 두로의 언어를 그대로 씁니다. 무엇을 얼마에 샀는가가 사람의 등급을 정하고, 자산의 규모가 인격의 무게처럼 취급됩니다. 슬프게도 교회 안에서도 그 저울이 작동합니다. 헌금의 액수로 사람이 달리 보이고, 사회적 지위에 따라 직분과 발언권이 배분된다면 우리는 이미 두로의 회계 장부를 예배당에 들여놓은 것입니다. 광양사랑의교회는 그 저울을 뒤집는 공동체이기를 원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무게는 하나님이 실어 주시는 것이지 사람이 매기는 것이 아닙니다. 낯선 이가 들어왔을 때 우리가 무엇을 먼저 보는지, 그것이 우리의 신앙을 정직하게 드러냅니다.
개인의 삶에서도 물어야 합니다. 나는 나 자신에게 면류관을 씌우기 위해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자녀의 학벌, 내 이름 앞에 붙는 직함, 사람들이 알아주는 성취를 위해 쏟는 시간과 하나님 앞에 홀로 앉는 시간의 비율은 얼마입니까. 또한 우리는 소비의 방식으로 신앙을 고백하는 시대를 삽니다. 무엇을 사고 어디에 돈을 쓰는가는 신학적 행위입니다. 값싼 물건 뒤에 누군가의 눈물이 있지는 않은지, 내 편리가 다른 이의 착취를 딛고 서 있지는 않은지 묻는 일은, 이 본문이 오늘 우리에게 요구하는 매우 구체적인 순종입니다. 두로의 죄는 무역이 아니라 무역이 신이 된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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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14절 바다 위에 펴신 손, 깃딤에도 없는 평안
하나님은 사람이 손댈 수 없다고 여기는 바다 위에까지 손을 펴사 가장 견고한 성채를 흔드시는 분이시며, 무너진 제국의 폐허를 다음 세대의 교과서로 삼아 돌아오라 부르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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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로의 지배에서 풀려난 딸 다시스에게 말씀이 임합니다. "딸 다시스여 나일 같이 너희 땅에 넘칠지어다 너를 속박함이 다시는 없으리라"(사 23:10). 이어 심판의 주체가 다시 선명해집니다. 여호와께서 바다 위에 그의 손을 펴사 열방을 흔드시며, 가나안에 대하여 명령을 내려 그 견고한 성채를 무너뜨리게 하십니다(11절). 그리고 시돈을 향한 선고가 이어집니다. "너 학대 받은 처녀 딸 시돈아 네게 다시는 희락이 없으리니 일어나 깃딤으로 건너가라 거기에서도 네가 평안을 얻지 못하리라"(사 23:12). 이어 예언자는 손가락으로 한 곳을 가리킵니다. 갈대아 사람의 땅을 보라, 그 백성이 없어졌고 앗수르 사람이 그곳을 들짐승이 사는 곳이 되게 하였으며 망대를 세우고 궁전을 헐어 황무하게 하였다는 것입니다(13절). 그리고 처음의 곡소리가 다시 울리며 단락이 닫힙니다. "다시스의 배들아 너희는 슬피 부르짖으라 너희의 견고한 성읍이 파괴되었느니라"(사 2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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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절은 해석이 갈리는 구절이지만, 본문의 흐름 안에서 읽으면 뜻이 드러납니다. 다시스는 두로가 세운 가장 먼 거점이었습니다. 모든 이익이 본국 두로로 흘러가는 구조 안에 묶여 있던 식민지가, 본국의 몰락과 함께 그 굴레에서 풀려납니다. 이제 강물이 둑을 넘듯 제 땅을 자유롭게 흐르라는 것입니다. 심판의 신탁 한가운데 놓인 이 해방의 문장은 결코 곁가지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늘 누군가의 해방을 동반합니다. 억누르던 체제가 무너질 때 눌려 있던 자들이 숨을 쉽니다. 예언서의 심판은 파괴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잘못 배열된 세계를 다시 바르게 세우는 하나님의 정의로운 재편입니다.
11절의 이미지는 압도적입니다. "여호와께서 바다 위에 그의 손을 펴사." 바다는 고대인에게 인간의 통제가 끝나는 곳, 혼돈의 세력이 웅크린 곳이었습니다. 두로는 바로 그 바다를 자기 성벽으로 삼았습니다. 육지에서 아무리 강한 군대가 와도 물이 가로막는 한 안전하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바다 위에 손을 펴십니다. '손을 펴다'는 성경에서 여호와의 권능으로 심판을 행하시는 것을 나타내는 관용 표현입니다. 이 표현은 출애굽기에서 모세가 손을 들어 바다를 가르던 장면(출 14:21)을 곧바로 불러옵니다. 더구나 '열방을 흔드시며'의 어근 라가즈는 두려움으로 떠는 것을 뜻하는데, 바로 홍해를 건넌 뒤 부른 모세의 노래에서 "여러 나라가 들으면 떨며"(출 15:14)라고 할 때 쓰인 그 단어입니다. 애굽의 병거를 삼킨 그 바다가 이제 두로의 방벽을 배신합니다. 사람이 마지막 보루로 삼는 그 자리가 바로 하나님의 손이 가장 자유롭게 움직이는 자리입니다. 훗날 갈릴리 바다 위를 걸으시고 풍랑을 꾸짖어 잔잔하게 하신 분(막 4:39)은, 이사야가 본 그 손의 주인이 누구신지를 몸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12절의 "거기에서도 네가 평안을 얻지 못하리라"는 이 단락에서 가장 아픈 말씀입니다. 위기가 닥치면 사람은 더 멀리 도망하려 합니다. 시돈의 왕이 실제로 배를 타고 구브로로 건너갔듯이, 우리는 문제가 생긴 자리에서 벗어나면 평안이 올 것이라 기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리되지 않은 채 옮겨 간 자리에는 같은 불안이 먼저 도착해 기다립니다. 지리적 이동은 영적 문제의 해답이 되지 못합니다. 요나가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을 때 바다가 그를 놓아주지 않았던 것처럼, 도망은 언제나 미완의 여행입니다. 참된 평안은 장소를 바꾸어 얻는 것이 아니라 주인을 바꾸어 얻는 것입니다.
13절은 눈앞의 실물 교육입니다. 예언자는 갈대아를 가리키며 보라고 합니다. 학자들은 이 구절이 주전 710년 앗수르 왕 사르곤 2세가 옛 바벨론을 함락시킨 사건을 염두에 둔 것으로 봅니다. 논리는 간명합니다. 그 오래되고 거대한 성읍조차 들짐승이 사는 불모지가 되었다면, 그보다 작은 항구 하나쯤 무너뜨리는 것은 얼마나 쉽겠느냐는 것입니다. '들짐승이 사는 곳'으로 옮겨진 치임은 본래 바싹 마른 불모지를 뜻하는 어원에서 왔습니다. 사람의 웃음소리가 있던 자리에 사막의 짐승 소리만 남는 풍경입니다. 하나님은 새로운 논증을 펴지 않으시고 이미 있는 폐허를 손짓으로 가리키실 뿐입니다. 역사는 하나님의 교실이고 무너진 제국들은 그 교실의 교과서입니다. 문제는 인간이 그 교과서를 읽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앗수르는 갈대아를 무너뜨렸지만 자신도 무너졌고, 바벨론도 페르시아도 그 뒤를 이었습니다.
14절은 1절의 곡소리를 그대로 되풀이하며 시를 닫습니다. 다만 한 곳이 달라졌습니다. 1절에서는 "두로가 황무하여 집이 없고"라고 했는데, 14절에서는 "너희의 견고한 성읍이 파괴되었느니라"라고 합니다. 여기 '견고한 성읍'으로 옮겨진 마오즈는 요새, 피난처, 힘의 근거지를 뜻하는 말입니다. 놀랍게도 이사야는 같은 단어를 다른 곳에서 하나님께 씁니다. "주는 빈궁한 자의 요새이시며 환난 당한 가난한 자의 요새이시며"(사 25:4). 사람이 스스로 쌓은 마오즈는 파괴되지만, 하나님이신 마오즈는 무너지지 않습니다. 첫 곡소리와 마지막 곡소리 사이에 갇힌 이 시는, 결국 우리에게 요새를 바꾸라고 요구합니다. 흔들 수 있는 모든 것이 흔들리는 이유는, 흔들리지 않는 것만 남게 하시려는 은혜 때문입니다.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히 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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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는 유난히 견고한 성채를 많이 쌓습니다. 노후를 지켜 줄 자산 포트폴리오, 자녀를 안전하게 실어 나를 교육의 사다리, 나를 지켜 줄 보험과 자격증. 이런 것을 준비하는 성실함이 잘못은 아닙니다. 다만 그 모든 성벽이 바다 위에 세워져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두로가 믿었던 바다는 하나님의 손이 가장 쉽게 닿는 곳이었습니다. 지난 몇 해 우리가 겪은 감염병과 금리와 물가의 파도는 그 사실을 이미 충분히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파도가 잦아들자마자 더 높은 성벽을 쌓는 일로 돌아갑니다. 광양사랑의교회는 이 반복에서 벗어나는 공동체이기를 원합니다. 위기가 지나간 자리에서 우리가 먼저 복구해야 할 것은 성벽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한국교회도 여기서 정직해야 합니다. 우리는 성장의 시대에 세운 건물과 조직과 명성이라는 성채를 가지고 있고, 그것이 흔들릴 때마다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흔들리는 것은 흔들려야 할 것입니다. 무너진 것을 서둘러 다시 세우려 하기 전에, 무엇이 무너졌고 왜 무너졌는지를 묻는 일이 먼저입니다. 그리고 도망치지 않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갈등이 있는 관계에서, 감당하기 버거운 자리에서, 응답이 더딘 기도의 자리에서 우리는 자꾸 깃딤으로 건너가려 합니다. 그러나 평안은 건너간 곳에 있지 않고 돌이킨 자리에 있습니다. 오늘 도망치고 싶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는 것, 그것이 이 본문이 우리에게 청하는 가장 실제적인 순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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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18절 칠십 년 뒤의 항구, 거룩히 여호와께 돌려진 이익
하나님은 잊혀진 세월의 끝까지 기억하고 계시다가 때가 차면 몸소 찾아오시는 분이시며, 무너뜨린 그 손으로 다시 세우시고 쌓아 두던 이익을 당신 앞에 사는 자의 양식과 옷으로 바꾸어 놓으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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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시가 끝나고 산문 신탁이 시작됩니다. "그 날부터 두로가 한 왕의 연한 같이 칠십 년 동안 잊어버린 바 되었다가 칠십 년이 찬 후에 두로는 기생의 노래 같이 될 것이라"(사 23:15). 이어 잊혀진 기생을 향한 노랫말이 인용됩니다. "잊어버린 바 되었던 기생이여 수금을 가지고 성읍에 두루 다니며 기묘한 곡조로 많은 노래를 불러서 너를 다시 기억하게 하라"(사 23:16). 그리고 칠십 년이 찬 후에 여호와께서 두로를 돌보시니, 두로는 다시 값을 받고 지면에 있는 열방과 음란을 행하게 됩니다(17절). 마지막 절에서 신탁 전체가 뒤집힙니다. "그 무역한 것과 이익을 거룩히 여호와께 돌리고 간직하거나 쌓아 두지 아니하리니 그 무역한 것이 여호와 앞에 사는 자가 배불리 먹을 것과 잘 입을 것이 되리라"(사 2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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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칠십 년'입니다. 성경에서 칠십 년은 예레미야가 바벨론 포로 기간으로 선포한 그 햇수이고(렘 25:11, 29:10), 시편이 사람의 일생을 헤아릴 때 쓴 햇수이기도 합니다(시 90:10). 본문은 그것을 "한 왕의 연한 같이"라고 풀어 줍니다. 한 왕조의 수명, 곧 한 세대가 통째로 지나가는 시간입니다. 고대 근동의 비문에도 신에게 버림받은 도시가 칠십 년 동안 폐허로 남는다는 관용적 표현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칠십 년은 달력의 숫자이기 전에 '완전히 잊혀지는 기간'을 뜻합니다. 여기서 심판의 진짜 형벌이 드러납니다. 두로에게 내려진 최종 형벌은 파괴가 아니라 망각이었습니다. 무역 도시에게 잊혀진다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거래처가 이름을 지우면 그 도시는 지도에서 사라집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가장 두려운 형벌은 실패가 아니라 아무도 나를 기억하지 않는 것입니다.
16절의 비유는 냉정합니다. 두로는 늙은 기생에 비유됩니다. 손님이 끊긴 여인이 수금을 들고 거리로 나가 옛 곡조를 노래하며 다시 기억되기를 구하는 모습입니다. 여기 인용된 두 줄은 당시 실제로 불리던 유행가의 한 대목이었을 것이라고 보는 학자들이 많습니다. 예언자는 세상의 노랫말을 그대로 가져와 두로의 신세에 붙였습니다. 조롱이 섞여 있지만, 동시에 이 비유는 무섭도록 정직합니다. 회복된 두로가 회개한 성자가 아니라는 것을 성경이 숨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17절은 한술 더 뜹니다. 다시 일어선 두로가 하는 일은 예전과 같습니다. 값을 받고 열방과 거래하는 일, 곧 예언자가 '음란'이라 부른 그 일입니다. 성경은 회복을 미화하지 않습니다. 사람도 도시도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자리에 결정적인 한마디가 놓여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두로를 돌보시리니"(사 23:17). '돌보다'로 번역된 파카드는 성경에서 두 방향으로 쓰이는 말입니다. 벌하러 찾아오시는 것도 파카드이고, 은혜로 찾아와 살피시는 것도 파카드입니다. 사라를 '돌보사' 아들을 주신 일(창 21:1)과, 애굽에서 신음하는 백성을 '돌보신' 일(출 4:31)이 같은 단어입니다. 무너뜨리신 그 손이 칠십 년 뒤에 다시 찾아오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장 전체의 주어가 처음부터 끝까지 한 분이었음을 깨닫습니다. 정하신 이도 여호와요(9절), 바다 위에 손을 펴신 이도 여호와요(11절), 잊혀진 항구를 다시 찾아오신 이도 여호와이십니다. 심판과 회복은 두 신의 두 성품이 아니라, 한 분 하나님의 한 마음이 시간 위에 그린 하나의 곡선입니다.
18절이 이 곡선의 정점입니다. 두로의 무역과 이익이 "거룩히 여호와께 돌려집니다." 여기 쓰인 카데쉬는 성전에 바쳐 구별한다는 뜻의 제의 용어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세속적이라 여겨지던 것, 곧 장부와 이문과 환어음이 성소의 언어로 불립니다. 그리고 곧바로 두 가지가 금지됩니다. "간직하거나 쌓아 두지 아니하리니." 두로의 죄가 무엇이었는지를 이 금지가 거꾸로 비춰 줍니다. 두로의 죄는 버는 것이 아니라 쌓는 것이었습니다. 창고가 목적이 된 삶이었습니다. 회복의 표지는 더 많이 버는 것이 아니라 쌓지 않는 것입니다. 마지막 문장은 그 이익이 어디로 흘러가는지를 말해 줍니다. "여호와 앞에 사는 자가 배불리 먹을 것과 잘 입을 것이 되리라." 이익이 사람의 밥이 되고 옷이 됩니다. 창고에서 식탁으로, 금고에서 옷장으로 방향이 바뀝니다. 4절에서 자기는 아무것도 낳지 못했다고 통곡하던 그 불임의 항구가, 마침내 누군가의 배부름과 따뜻함을 낳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심판이 겨냥한 목표였습니다. 파괴가 아니라 방향의 전환입니다.
이 약속은 성경 전체를 관통해 흘러갑니다. 스가랴는 그 날에 말 방울에까지 "여호와께 성결"이라 새겨질 것이며 만군의 여호와의 전에 다시는 상인이 있지 아니하리라고 보았습니다(슥 14:20-21). 거룩과 일상의 경계가 사라지는 날입니다. 예수님은 심판의 대상이던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셔서 한 이방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셨고(막 7:24-30), 회개하지 않는 고라신과 벳새다를 향해 두로와 시돈에서 그런 일이 있었다면 벌써 회개하였으리라고 하셨습니다(마 11:21). 그리고 사도행전은 짧지만 눈부신 한 장면을 남깁니다. 예루살렘으로 가던 바울이 두로에 들러 그곳 제자들을 찾아냈고, 온 교회가 아내와 자식과 함께 성 밖 해변까지 배웅하며 함께 무릎 꿇고 기도했다는 것입니다(행 21:5). 배가 짐을 부리던 그 모래밭이 기도의 자리가 되었습니다. 이사야가 본 칠십 년 뒤의 항구는 그렇게 실현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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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양은 항구의 도시입니다. 제철소의 불빛과 컨테이너 부두의 크레인이 밤을 밝히고, 우리 성도들 가운데 적지 않은 분들이 그 물류와 제조의 현장에서 일하십니다. 오늘 본문은 그 일터를 정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일의 결실이 어디로 흘러가는지를 묻습니다. 18절은 신앙과 직업을 나누는 이분법을 무너뜨립니다. 거룩은 예배당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번 돈이 향하는 방향에 있습니다. 헌금과 십일조, 구제와 나눔은 단순히 얼마를 떼어 내는 일이 아니라 내 노동 전체에 방향을 주는 일입니다. 이번 주에 받은 급여를 앞에 두고 한번 물어보십시오. 이 돈은 창고로 가는가, 식탁으로 가는가. 광양사랑의교회가 그 물음을 함께 나누는 공동체가 되기를 원합니다.
또 하나, 칠십 년의 침묵을 지나고 계신 분들께 이 말씀을 전합니다. 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 것 같은 시간, 오래 기도했는데 응답이 없는 시간, 한때 활발히 쓰임 받다가 지금은 잊혀진 것 같은 자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칠십 년이 '찬다'고 말합니다. 잊혀진 세월에도 눈금이 있고, 그 눈금을 세고 계신 분이 계십니다. 하나님은 두로를 잊지 않으셨습니다. 하물며 당신의 자녀를 잊으시겠습니까. 그리고 그분이 다시 찾아오실 때, 우리가 잃어버렸던 것을 그대로 돌려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거룩한 것으로 바꾸어 주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회복은 원상 복구가 아니라 성별입니다. 하나님은 무너진 항구를 다시 세우실 뿐 아니라, 그 항구에 부려지는 짐의 목적지를 바꾸어 놓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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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바다와 육지를 함께 지으신 하나님 아버지,
긴 항해를 마치고 돌아온 배가 항구를 잃은 것처럼
저희도 애써 쌓은 것들이 사라지는 날을 만날 수 있음을 압니다.
저희의 참된 정박지가 주님이심을 순조로운 날에 미리 배우게 하시고
무엇을 더 해야 하는가의 소음을 잠시 끄고
주님 앞에 잠잠히 앉는 시간을 날마다 갖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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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옛적부터 경영하시는 만군의 여호와여,
면류관을 씌우던 손이 도리어 욕을 당하는 것을 보며
저희가 사람에게 무게를 실어 주던 저울을 내려놓습니다.
값으로 사람을 달아 보던 시선을 거두어 주시고
가시 면류관을 쓰신 주님을 따라
낮아짐으로 높아지는 길을 광양사랑의교회가 걷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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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위에 손을 펴시는 주님,
저희가 마지막 보루로 삼는 그 자리가
주님의 손이 가장 자유로이 움직이시는 자리임을 고백합니다.
흔들리는 것들이 흔들릴 때에 두려워하지 않게 하시고
깃딤으로 건너가 평안을 찾으려는 도피를 그치고
무너지지 않는 요새이신 주님께로 돌이키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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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십 년의 끝까지 기억하시는 주님,
잊혀진 것 같은 세월에도 눈금을 세고 계심을 믿습니다.
때가 차면 몸소 찾아오시는 주님을 기다리게 하시고
무너뜨린 그 손으로 다시 세우시는 은혜를 신뢰하게 하옵소서.
저희의 무역과 노동과 살림을 거룩히 주께 돌리게 하시고
간직하거나 쌓아 두는 자리에서 떠나
주님 앞에 사는 이들의 배부른 양식과 따뜻한 옷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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