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22:01-25 지붕 위의 환호와 홀로 통곡하는 예언자, 행하신 이를 앙망하지 않는 자구책과 삭아 부러지는 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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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의 골짜기, 곧 예루살렘에 관한 경고입니다(1절). 앗수르 대군이 갑자기 물러가자 예루살렘 주민들은 모두 지붕에 올라가 해방을 환호하며 잔치를 벌입니다. 그러나 예언자는 그 환호에 동참하지 못하고 홀로 슬피 통곡합니다. 전쟁 중에 드러난 지도자들의 무능과 도망, 그리고 사건의 배후에서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읽어내지 못하는 백성의 무지가 예루살렘의 멸망을 필연으로 만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1-4절). 예언자는 방금 지나간 위기의 날을 회고합니다. 그 날은 여호와께로부터 이르는 소란과 밟힘과 혼란의 날이었고, 엘람과 기르의 군대가 골짜기마다 가득 찼으며, 여호와께서 유다를 덮었던 보호막을 친히 벗기신 날이었습니다(5-8a절). 예루살렘은 병기를 점검하고 성벽을 보수하며 저수지를 만들었지만, 정작 이 일을 행하신 이를 앙망하지 아니하였고 이 일을 옛적부터 경영하신 이를 공경하지 아니하였습니다(8b-11절). 주께서 통곡하며 굵은 베를 띠라고 부르시던 그 날에 그들은 도리어 소를 죽이고 양을 잡아 "내일 죽으리니 먹고 마시자" 하였고, 이 죄악은 죽기까지 용서받지 못하리라는 최후 판결이 선고됩니다(12-14절). 이어서 신탁은 두 명의 고위 관료에게 향합니다. 국고와 왕궁을 맡은 셉나는 자기에게 허락되지 않은 높은 곳에 묘실을 파다가 공처럼 광막한 땅에 내던져질 것이며(15-19절), 그를 대신해 세워진 엘리아김은 다윗의 집 열쇠를 어깨에 메고 단단한 곳에 박힌 못처럼 견고하게 세워지지만, 그 못 위에 아버지 집의 모든 영광이 걸리면서 결국 못이 삭아 부러지고 그 위에 걸린 것들이 다 부서질 것입니다(20-2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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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사야 22장은 13장부터 이어져 온 열방 신탁의 한가운데 놓여 있습니다. 바벨론과 블레셋과 모압과 다메섹과 애굽과 두마와 아라비아의 운명이 차례로 선포되는 행렬 속에, 뜻밖에도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이 '환상의 골짜기'라는 이름으로 끼여 있는 것입니다. 김필회 교수에 따르면 이 배치는 우연이 아닙니다. 편집자는 하나님을 배반한 하나님 백성의 운명이 이방 민족들의 운명과 다르지 않음을 보여주기 위해 유다에 관한 신탁을 민족들의 신탁 가운데 하나로 취급합니다. 주전 701년의 해방 사건에 신앙적으로 반응할 수 없었던, 하나님의 계획을 깨달아 알려는 의지도 능력도 없었던 이스라엘은 이방 민족들과 아무런 차이가 없었습니다. 자신의 신학적 정체성을 잃은 하나님의 백성은 열방 가운데 하나에 불과할 뿐이라는 이 서늘한 진단이, 22장이 지금 이 자리에 놓인 이유입니다.
# 본문의 역사적 배경은 주전 701년 앗수르 왕 산헤립의 예루살렘 포위 공격입니다. 히스기야는 앗수르의 속박에서 벗어나려고 애굽과 바벨론에 기대어 반앗수르 정책을 추진했고, 그 대가로 유다의 요새들이 차례로 무너지고 예루살렘은 새장에 갇힌 새처럼 고립되었습니다. 그런데 멸망 직전의 성읍 앞에서 앗수르 군대가 갑자기 철군합니다.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이것은 축제의 이유였지만, 이사야에게는 더 깊은 탄식의 이유였습니다. 김필회 교수는 이 지점을 예리하게 짚습니다. 적들의 철군은 예루살렘의 결사항전 때문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손의 간섭으로 주어진 것인데, 예루살렘 주민들은 눈앞의 현실만 즐길 뿐 그 배후에서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의지를 읽어내려 하지 않았습니다. 여호와께서 주신 기회를 잃어버린 백성에게 그 구원은 해방이 아니라 '미뤄진' 파국적 재앙일 뿐이었습니다.
# 문학적으로 22장은 두 개의 독립된 신탁이 '환상의 골짜기에 관한 경고'라는 표제 아래 함께 놓인 구조입니다. 첫 번째 신탁(1-14절)은 성읍 전체를 향하고, 두 번째 신탁(15-25절)은 특이하게도 개인을 향합니다. 왕을 제외하고 특정 개인에게 신탁이 주어지는 경우는 성경에서 매우 예외적인데, 히스기야 왕 곁에서 최고위직으로 활동했던 셉나와 엘리아김이 그 수신자로 등장합니다. 이 둘은 산헤립이 랍사게를 보내 협상할 때 유다를 대표해 나간 세 사람에 속한 인물들로(왕하 18:18; 사 36:3), 예루살렘의 대앗수르 정책에 깊이 관여했던 실세들이었습니다. 김필회 교수는 예언자가 엘리아김의 실패에서 다윗 왕조 몰락의 징후를 보았다고 말합니다. 두 신탁을 하나로 묶는 끈은 '다윗 왕조의 쇠약'입니다. 하나님은 흔들리는 다윗의 집을 굳건한 반석 위에 세우려 하셨으나, 주요 인물들의 실정이 그 왕조를 거듭 위기로 몰아갑니다.
# '환상의 골짜기'라는 표제 자체가 쓰라린 아이러니입니다. 예루살렘 주변에 실제로 이런 이름을 가진 골짜기는 없습니다. 김필회 교수는 이를 예언자가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표현으로 봅니다. 예루살렘이 골짜기들로 둘러싸여 있고 환상의 내용이 적들의 포위 공격이기에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입니다. 계시의 빛이 선포되어야 할 시온 산이 영적 어둠의 골짜기로 추락한 성읍, 환상을 받고도 보지 못하는 성읍. 아모스 이래로 예언자들이 뒤집어 온 '여호와의 날' 신학이 여기서도 관철됩니다. 백성들이 구원의 날로 기대하던 여호와의 날은, 정작 예루살렘이 소란과 밟힘과 혼란에 떨어지는 날이었습니다(암 5: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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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절 지붕 위의 환호와 홀로 통곡하는 예언자
하나님은 구원 사건의 배후에서 당신의 의지를 읽어내기를 원하시며, 깨닫지 못하는 백성의 내일을 미리 보시고 예언자의 눈물로 함께 우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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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의 골짜기에 관한 경고가 선포되면서 예언자는 탄식 어린 질문을 던집니다. "네가 지붕에 올라감은 어찌함인고"(사 22:1). 온 성읍이 소란하며 떠들고 즐거워하지만, 예언자는 그 죽임을 당한 자들이 칼에 죽은 것도 아니요 전쟁에 사망한 것도 아니라고 폭로합니다(2절). 관원들은 다 함께 도망하였다가 활을 버리고 결박을 당했고, 멀리 도망한 자들도 다 잡혔습니다(3절). 그래서 예언자는 말합니다. "돌이켜 나를 보지 말지어다 나는 슬피 통곡하겠노라 내 딸 백성이 패망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나를 위로하려고 힘쓰지 말지니라"(사 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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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지붕에 올라간 것은 우상숭배나 애곡을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김필회 교수에 따르면 이들은 성 밖에서 예기치 않게 벌어진 일, 곧 예루살렘을 포위했던 적들의 갑작스러운 철군을 보려고 평평한 지붕으로 올라갔습니다. 포위 앞에 몸을 숨겼던 사람들이 다 밖으로 나와 생존을 기뻐하며 떠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언자는 묻습니다. 기뻐하기에 앞서 먼저 물어야 할 것이 있지 않은가. 적들이 왜 물러갔는가. 이스라엘 군대가 그들을 물리쳤는가. 전혀 아닙니다. 예루살렘의 방어를 책임진 관원들은 싸우다 죽은 것이 아니라 도망치다 잡힌 자들이었습니다. 김필회 교수는 이를 "위기관리에 책임이 있는 예루살렘 지휘부의 도덕적 붕괴"라 부릅니다. 지도자들의 총체적 무능과 무책임이 전쟁 중에 낱낱이 드러났는데도, 성읍은 그 부끄러움을 직면하는 대신 축제를 선택했습니다.
예언자의 통곡은 그래서 단순한 연민의 눈물이 아닙니다. 김필회 교수는 이 통곡이 이들의 무책임한 기쁨과 심각한 내적 부패에서 예루살렘의 멸망이 피할 수 없는 현실임을 보며 우는 울음이라고 설명합니다. 구원을 환호하는 백성들 한가운데서 임박한 멸망을 슬퍼하는 예언자의 눈물은 풍자적이기까지 합니다. 지금 웃고 있는 예루살렘 사람들이 앞으로 흘리게 될 눈물을 예언자가 미리 흘리고 있는 것입니다. 위로를 거절하는 그의 모습에서 우리는 백성의 완악함을 아파하시는 하나님의 마음, 곧 예언자의 몸을 빌려 우시는 하나님의 애통을 봅니다.
이 눈물은 칠백 년 후 같은 성읍을 향해 다시 흘려집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눅 19:41-42).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호하는 무리 한가운데서 홀로 우신 그리스도는, 지붕 위의 환호 한가운데서 홀로 통곡한 이사야의 완성이십니다. 보이는 사건에 취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때를 알지 못하는 백성을 향한 눈물이 구약과 신약을 관통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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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위기를 넘기고 나면 그것으로 끝내는 데 익숙합니다. 병이 나았고, 부도를 면했고, 자녀가 시험에 붙었고, 교회의 어려운 고비가 지나갔으면, 감사 예배 한 번으로 사건을 종결짓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묻습니다. 그 구원의 배후에 계신 분의 의도를 읽으려 했는가. 그 위기가 우리에게 요구하던 돌이킴을 시작했는가. 광양사랑의교회는 지나온 은혜의 사건들을 자축의 재료가 아니라 해석의 과제로 받아야 합니다. 공동체가 함께 지나온 위기 앞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지키셨다"는 고백과 함께 "하나님이 이 일로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가"를 묻는 것, 그것이 지붕 위의 환호와 골짜기의 통곡을 가르는 경계선입니다. 또한 우리는 웃는 무리 속에서 울 줄 아는 사람이 필요한 시대를 삽니다. 모두가 회복과 반등을 말할 때 공동체의 감춰진 부패를 아파하는 눈물, 그 예언자적 눈물이 교회를 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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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1절 여호와의 날, 그리고 행하신 이를 앙망하지 않는 자구책
하나님은 이 일을 옛적부터 경영하신 역사의 설계자이시며, 당신을 바라보지 않는 모든 인간적 대비를 허망하게 하시는 주권자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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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는 시선을 방금 지나간 위기의 날로 돌립니다. 그 날은 "환상의 골짜기에 주 만군의 여호와께로부터 이르는 소란과 밟힘과 혼란의 날"이었습니다(사 22:5). 엘람 사람은 화살통을 메었고 기르 사람은 방패를 드러냈으며, 병거는 아름다운 골짜기에 가득하고 마병은 성문에 정렬되었습니다(6-7절). 여호와께서 유다를 덮었던 것을 벗기시매, 그 날에야 예루살렘은 수풀 곳간의 병기를 바라보았습니다(8절). 다윗 성의 무너진 곳을 보수하고, 아랫못의 물을 모으고, 가옥을 헐어 성벽을 견고하게 하고, 두 성벽 사이에 저수지를 만들었습니다(9-11a절). "그러나 너희가 이를 행하신 이를 앙망하지 아니하였고 이 일을 옛적부터 경영하신 이를 공경하지 아니하였느니라"(사 2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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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절의 "소란과 밟힘과 혼란"은 히브리어로 메후마, 메부사, 메부카입니다. 김필회 교수가 주목하듯 예언자는 발음이 유사한 세 단어를 연이어 배치해 그 날의 혼돈을 소리로 재현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 혼란의 출처입니다. 그것은 "주 만군의 여호와께로부터" 이르렀습니다. 앗수르의 침공은 여호와로부터 온 것인데, 예루살렘 사람들은 그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부르짖는 모순 속에 있었습니다. 자신들을 치고 계신 분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심을 전혀 인식하지 못한 것입니다. 예언자가 엘람과 기르를 굳이 호명한 것도 의도적입니다. 김필회 교수의 해석에 따르면, 한때 바벨론과 손잡고 앗수르에 맞섰던 엘람이 이제 앗수르 군대의 일원이 되어 예루살렘을 공격하는 모습은 동맹 외교의 허망함을 보여주었고, 반앗수르 정책을 추진하다 멸망해 기르로 유배된 아람 사람들이 이제 앗수르 군인이 되어 이곳저곳 끌려다니는 모습은 예루살렘이 맞이할 자신의 미래였습니다. 유다는 엘람과 기르의 운명에서 자기 운명을 미리 보아야 했습니다.
8절의 "덮였던 것"으로 번역된 마사크는 성막 문의 휘장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출 26:36). 시편은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덮은 구름을 같은 단어로 표현합니다(시 105:39). 김필회 교수는 이 단어에 신학적 상징이 담겨 있다고 봅니다. 여호와께서 유다를 외부의 적들로부터 지켜주시던 그 보호막을 친히 벗기셨다는 것입니다. 구원자께서 보호를 거두시는 순간, 유다에게 남은 것은 자기 손의 대비뿐이었습니다. 그들은 실제로 놀랍도록 부지런했습니다. 병기고를 열고, 성벽의 균열을 보수하고, 물을 확보하고, 방어에 방해가 되는 가옥들을 헐었습니다. 역대하 32장과 고고학 연구는 히스기야 시대에 실제로 대대적인 성벽 보강과 수로 공사가 있었음을 확인해 줍니다. 문제는 대비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김필회 교수는 본문에 숨겨진 동사의 대조를 짚어냅니다. 그들은 병기를 '바라보았고'(나바트, 8절) 성벽의 무너진 곳을 '보았지만'(라아, 9절), 정작 이 일을 행하신 이를 '앙망하지'(나바트) 아니하였고 옛적부터 경영하신 이를 '공경하지'(라아) 아니하였습니다(11절). 같은 눈으로 병기는 보면서 하나님은 보지 않은 것입니다. "옛적부터 경영하신 이"라는 표현은 이 위기가 우연한 재난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하나님이 빚어 오신 계획임을 말해 줍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위기를 오직 정치적, 군사적 시각으로만 파악했고, 그들에게 하나님은 성전에서 제사나 받으시는 분으로 축소되어 있었습니다. 시편 기자의 고백이 정확히 이 지점을 겨냥합니다.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시 1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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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벽을 보수하고 저수지를 만드는 일은 죄가 아닙니다. 죄는 그 모든 대비의 목록에서 하나님을 지운 것입니다. 오늘 한국교회도 위기 앞에서 부지런합니다. 재정 위기 앞에서 경영 컨설팅을 받고, 다음 세대 위기 앞에서 프로그램을 도입하고, 신뢰 추락 앞에서 이미지를 관리합니다. 그 성실함이 무의미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모든 회의록 어디에도 "이 일을 행하신 이를 앙망하자"는 항목이 없다면, 우리는 히스기야의 예루살렘을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광양사랑의교회의 성도들 각자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보험과 연금과 통장 잔고로 인생의 성벽을 보수하는 부지런함 속에서, 정작 내 인생을 옛적부터 경영해 오신 분 앞에 무릎 꿇는 시간은 얼마나 됩니까. 위기 때 우리가 가장 먼저 여는 것이 통장인지 성경인지를 스스로 물어야 합니다. 대비는 하되, 대비를 우상으로 삼지 않는 것. 저수지를 만들되, 물을 주시는 분을 앙망하는 것. 그것이 신앙과 실천적 무신론을 가르는 좁은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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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14절 통곡하라 부르시던 날의 잔치, 용서받지 못할 죄
하나님은 심판의 날에도 회개의 자리로 초청하시는 자비의 하나님이시지만, 그 초청을 냉소로 조롱하는 완악함에는 최후의 판결을 내리시는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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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에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것은 통곡하며 애곡하며 머리털을 뜯으며 굵은 베를 띠는 것이었습니다(12절). 그러나 백성들은 기뻐하며 즐거워하여 소를 죽이고 양을 잡아 고기를 먹고 포도주를 마시면서 말했습니다. "내일 죽으리니 먹고 마시자"(사 22:13). 이에 만군의 여호와께서 친히 예언자의 귀에 들려 이르셨습니다. "진실로 이 죄악은 너희가 죽기까지 용서하지 못하리라"(사 2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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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점은 다시 현재로 돌아와 1-4절과 이어집니다. 국가적 재난과 예기치 못한 구원을 경험한 백성에게 하나님이 요구하신 것은 잔치가 아니라 회개였습니다. 김필회 교수의 말대로, 환호하기에 앞서 위기의 본질을 파악해야 했고, 구원을 기뻐하기에 앞서 죄악을 참회해야 했으며, 승리를 축하하기에 앞서 전쟁 중에 드러난 총체적 부패와 무능력을 직시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회개를 촉구하는 예언자의 외침에 돌아온 것은 자포자기적이며 냉소적인 반응이었습니다. "내일 죽으리니 먹고 마시자." 이 말은 단순한 향락의 구호가 아닙니다. 어차피 망할 것이라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이유가 무엇이냐는, 하나님의 경고를 조롱하는 실천적 무신론의 선언입니다. 극단적 위기를 겪고도 내일의 멸망은 이들의 관심사가 아니었고, 유일하게 중요한 것은 오늘의 즐거움뿐이었습니다.
김필회 교수는 이 단락에서 뼈아픈 통찰 하나를 남깁니다. 구원 경험에서 하나님의 경고와 훈계라는 교훈을 찾아낸다면 그 경험은 다음 위기에서 신앙의 반석이 되지만, 그렇지 못하면 일회적인 사건으로 끝나고 만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주전 701년의 구원 경험을 새로운 출발을 위해 여호와께서 주신 기회로 만드는 데 실패했습니다. 그 실패의 끝에 "죽기까지 용서하지 못하리라"는 선고가 섭니다. 이는 하나님의 자비가 바닥났다는 말이 아니라, 회개 자체를 조롱거리로 삼는 자에게는 용서가 닿을 자리가 없다는 말입니다. 회개의 문을 스스로 걸어 잠근 자에게는 사죄의 은총도 들어갈 길이 없습니다.
훗날 바울은 부활을 부인하는 자들의 논리로 바로 이 구절을 인용합니다.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고전 15:32). 부활이 없다면 냉소가 옳습니다. 내일이 없다면 오늘의 쾌락이 전부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셨기에, 우리의 오늘은 먹고 마시다 끝나는 날이 아니라 주의 일에 힘쓰는 날이 됩니다(고전 15:58). 이사야 22장의 냉소의 잔치는, 부활 신앙만이 인간을 절망의 향락에서 건져낼 수 있음을 역설적으로 증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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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죽으리니 먹고 마시자"는 오늘 우리 시대의 공기이기도 합니다.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는 청년들의 자조 속에, 어차피 바뀌지 않는다는 시민들의 정치적 냉소 속에, 그리고 어차피 은혜로 구원받았으니 대충 살자는 값싼 은혜의 신앙 속에 같은 문장이 흐릅니다. 교회가 이 냉소를 꾸짖기 전에 먼저 물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통곡을 명하시는 자리에서 잔치를 벌인 적이 없는가. 공동체의 수치가 드러난 날에 회개 대신 자축과 변명을 선택한 적이 없는가. 광양사랑의교회는 시대의 징계 앞에서 웃음소리를 낮추고 베옷을 챙기는 교회이기를 원합니다. 회개는 패배자의 몸짓이 아니라, 하나님이 예비하신 다음 문을 여는 유일한 열쇠입니다. 우는 자의 자리로 내려가는 공동체만이, 다시 웃는 날을 하나님께로부터 선물로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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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25절 사사로운 묘실을 판 셉나와 삭아 부러진 엘리아김의 못
하나님은 맡기신 권력을 사유화하는 자를 그 자리에서 내던지시며, 다윗의 집 열쇠를 끝내 신실하신 한 분 참된 종의 어깨에 두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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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탁이 이제 한 개인을 향합니다. 국고를 맡고 왕궁을 맡은 자 셉나에게 하나님이 물으십니다. "네가 여기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 여기에 누가 있기에 여기서 너를 위하여 묘실을 팠느냐"(사 22:16). 여호와께서 그를 단단히 결박하고 장사같이 세게 던지시며, 공같이 광막한 곳에 던지실 것입니다(17-18절). 그의 관직은 박탈되고(19절), 그 자리에 힐기야의 아들 엘리아김이 세워집니다. 하나님은 그를 "내 종"이라 부르시고, 셉나의 옷과 띠를 그에게 입히시며, 다윗의 집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두십니다. "그가 열면 닫을 자가 없겠고 닫으면 열 자가 없으리라"(사 22:22). 그는 단단한 곳에 박힌 못같이 견고하게 세워질 것입니다(23절). 그러나 그의 아버지 집의 모든 영광, 곧 종지로부터 항아리까지 온갖 그릇들이 그 못 위에 걸리고, 마침내 단단한 곳에 박혔던 못이 삭아 부러져 그 위에 걸린 것들이 다 부서질 것입니다(24-2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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셉나가 고발당한 표면적 이유는 무덤입니다. 김필회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셉나는 아버지의 이름이 소개되지 않는 낮은 집안 출신으로, 본래대로라면 기드론 골짜기의 서민 묘지에 묻혀야 할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최고위직의 권세를 이용해 존귀한 자들에게만 허락된 높은 반석에 자기 묘실을 쪼아 만들었습니다. 세 번이나 반복되는 "여기에"라는 말에는, 네가 감히 어떻게 이곳에 묻히려 하느냐는 추궁이 담겨 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화려한 무덤 자체는 비난거리가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자리였습니다. 그는 위임받은 공적 권력을 사적 영광을 위해 남용했고,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를 무너뜨렸습니다. 그러나 김필회 교수는 고발의 더 깊은 층을 봅니다. "주인의 집에 수치를 끼치는 너"라는 책망은 무덤 하나를 겨냥한 것이 아니라, 왕궁에서 반앗수르 정책을 주도하며 다윗 왕조를 멸망 직전까지 몰아넣은 셉나의 정치적 책임을 겨냥한다는 것입니다. 이사야의 눈에 셉나는 다윗 왕조와 예루살렘을 위기에 빠뜨린 장본인이었습니다. 열왕기하 18장에서 그가 왕궁 책임자에서 서기관으로 강등되어 나타나는 것은 이 신탁의 성취를 보여줍니다.
셉나를 대신해 세워진 엘리아김의 이름은 '하나님께서 일으켜 세우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내 종"이라 부르시며 파격적인 권위를 주십니다. 그는 예루살렘 주민과 유다 집의 아버지가 되고, 다윗의 집 열쇠를 어깨에 멥니다. 김필회 교수는 이 대목이 겉보기에는 개인 신탁 같지만 실제 관심은 다윗 왕조의 보존에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앗수르 문제로 흔들리는 다윗 왕조를 다시 굳건히 세우시려고 엘리아김에게 통치권을 위임하신 것입니다. 못의 비유가 그것을 보여줍니다. 천막을 고정하는 말뚝처럼 그가 단단히 박히면 다윗 왕조라는 천막이 안전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대와 약속 속에 출발한 엘리아김은 족벌주의의 덫에 걸려 몰락합니다. 그의 못 위에 "아버지 집의 모든 영광"이 걸립니다. 종지부터 항아리까지, 그에게 기대어 출세하려는 집안사람들의 온갖 청탁과 욕망이 주렁주렁 매달립니다. 벽에 박힌 못이 걸린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부러지듯이, 엘리아김도 집안사람들의 불의의 무게에 눌려 파멸합니다. 다윗 왕조를 세워야 할 사람이 자기 집안의 영광을 세우다가 무너진 것입니다. 김필회 교수의 말대로, 다윗 왕조의 흔들림을 막아주려는 하나님의 노력이 정치가들의 무능과 부패에 의해 다시 한번 좌절됩니다.
그러나 이 좌절은 이야기의 끝이 아닙니다. 요한계시록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자신을 이렇게 소개하십니다.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가 이르시되"(계 3:7). 엘리아김에게 잠시 맡겨졌다가 삭아 부러진 그 열쇠의 직분이, 마침내 부러지지 않는 한 분의 어깨에 놓인 것입니다. 이사야는 이미 노래했습니다.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사 9:6). 사람의 못은 걸린 무게를 이기지 못해 부러지지만, 그리스도는 우리의 모든 죄와 수치의 무게를 지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도리어 우리를 견고케 하셨습니다. 셉나와 엘리아김의 실패가 가리키는 곳은 결국, 다윗의 집을 영원히 세우실 참된 궁내대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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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단락은 직분을 맡은 모든 사람을 향한 거울입니다. 교회의 직분이든 직장의 자리든, 그것은 주인의 집을 위해 위임된 것이지 내 묘실을 파는 데 쓰라고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오늘 한국교회가 세상의 조롱거리가 된 지점이 바로 여기입니다. 공적 직분의 사유화, 담임 자리의 세습, 학연과 혈연으로 얽힌 정실 인사, 교회 재정을 가문의 자산처럼 다루는 관행. 셉나의 묘실과 엘리아김의 못이 우리 안에 함께 있습니다. 신실하게 시작한 사람도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이 엘리아김의 경고입니다. 광양사랑의교회의 모든 직분자들은 정기적으로 스스로 물어야 합니다. 내 못에 지금 무엇이 걸려 있는가. 주님의 일인가, 내 집안의 영광인가. 그리고 우리 모두는 인생의 무게를 걸 자리를 다시 살펴야 합니다. 사람이라는 못은, 그가 아무리 단단해 보여도 언젠가 삭습니다. 자녀도 배우자도 목회자도 우리의 못이 될 수 없습니다. 부러지지 않는 못,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그리스도께만 인생 전부를 걸 때, 우리는 무너지지 않는 집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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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 아버지,
앗수르가 물러간 것만 보고 지붕에 올라 환호하던 예루살렘처럼
저희도 사건의 배후에 계신 주님을 읽지 못한 채
눈앞의 안도만을 은혜라 불러온 것을 회개합니다.
구원의 사건마다 담아 두신 주님의 뜻을 묻는
깨어 있는 눈을 저희에게 허락하여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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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수지를 만들고 성벽을 보수하면서도
이 일을 행하신 이를 앙망하지 않았던 유다의 어리석음이
보험과 통장과 대비책으로 인생의 성벽만 쌓아 온
저희의 모습임을 고백합니다.
대비하되 의지하지 않게 하시고
계획하되 옛적부터 경영하시는 주님을 먼저 바라보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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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곡하라 부르시던 날에 잔치를 벌이며
내일 죽으리니 먹고 마시자 하던 그 냉소가
저희 시대와 저희 마음에도 스며 있음을 자복합니다.
부활의 소망으로 절망의 향락을 이기게 하시고
울어야 할 자리에서 울 줄 아는
정직한 심령을 광양사랑의교회에 부어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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맡겨 주신 직분으로 자기 묘실을 파던 셉나와
집안의 영광을 못에 걸다가 부러진 엘리아김을 거울삼아
저희의 모든 자리가 주인의 집을 위한 자리 되게 하옵소서.
삭아 부러질 못이 아니라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께 인생을 걸고
그 어깨에 우리의 무게를 맡기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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