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21:01-17 밤이 어떻게 되었느냐

by 평화의길벗 posted Aug 07, 2026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이사야 21:01-17 밤이 어떻게 되었느냐

*

이사야 21장은 열방을 향한 세 개의 짧은 경고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먼저 '해변 광야'에 관한 경고입니다(1-10절). 남방 광야에서 회오리바람이 몰려오듯 갑작스러운 멸망이 바벨론에 닥치고, 속이던 자가 속임을 당하며 약탈하던 자가 약탈당합니다. 엘람과 메대가 부름을 받아 올라오고, 이 혹독한 묵시를 본 예언자는 해산하는 여인처럼 몸이 뒤틀립니다. 성 안에서는 여전히 잔칫상이 차려져 있는데, 하나님은 예언자에게 파수꾼을 세워 보고하게 하시고, 마침내 "함락되었도다 함락되었도다 바벨론이여"라는 판결이 떨어집니다. 이어 '두마'에 관한 경고가 나옵니다(11-12절). 세일에서 누군가 "파수꾼이여 밤이 어떻게 되었느냐"고 두 번 묻고, 파수꾼은 "아침이 오나니 밤도 오리라 네가 물으려거든 물으라 너희는 돌아올지니라"고 대답합니다. 마지막은 '아라비아'에 관한 경고입니다(13-17절). 대상들이 수풀에 숨어 밤을 지새우고, 데마 주민들은 목마른 자에게 물을, 도피하는 자에게 떡을 들려 보내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그리고 품꾼의 정한 기한처럼 정확하게, 일 년 내에 게달의 영광이 다하리라는 말씀으로 장이 닫힙니다.

*

# 이사야 13-23장은 이스라엘 주변 여러 민족의 운명을 다루는 '열방 신탁' 모음입니다. 각 신탁은 '경고'로 번역된 히브리어 '마사'(משא)라는 표제어로 시작하는데, 이 말은 본래 '들어 올림', 곧 예언자가 목소리를 높여 선포하는 무거운 짐 같은 말씀을 뜻합니다. 이사야서에서 '마사'는 30장 6절의 예외를 빼면 13-27장에서만 아홉 번 등장하며(13:1; 15:1; 17:1; 19:1; 21:1; 21:11; 21:13; 22:1; 23:1), 그 표제어를 따라 단락이 나뉩니다. 21장 한 장 안에만 세 개의 표제어가 들어 있으니, 오늘 본문은 세 편의 짧은 신탁을 나란히 읽는 셈입니다.

# 김필회 교수에 따르면 열방 신탁의 중심 주제는 이방 민족의 멸망 자체가 아니라 '여호와의 우주적 통치권'입니다. 고대 근동에서 신은 대체로 자기 민족의 땅 안에만 머무는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예언자들은 여호와의 통치가 가나안 땅의 경계를 넘어 앗수르와 바벨론과 아라비아 사막에까지 미친다고 선포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이 말씀이 선포된 자리입니다. 이 신탁들은 바벨론이나 에돔에 가서 낭독된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듣도록 주어졌습니다. 곧 열방 신탁은 강대국에 기대어 생존을 도모하려는 유다의 대외정책에 대한 고발이자, 민족들의 운명을 결정하시는 분에게서만 미래를 기대하라는 초청입니다. 김필회 교수는 이 신탁들이 아하스 왕의 어리석은 선택을 세계사적 시각에서 되비추는 동시에, 애굽에 의존하려 한 히스기야 왕에게 주는 경고이기도 하다고 정리합니다. 아버지는 앗수르를, 아들은 애굽을 붙들었을 뿐, 여호와를 의지하지 않은 것은 똑같았습니다.

# '해변 광야'라는 표제는 그 자체로 모순처럼 들립니다. 광야는 메마르고 바다는 마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어 '미드바르 얌'은 문자적으로 '바다의 광야'인데, 여기서 '얌'은 대양이 아니라 고대 근동에서 생명의 젖줄이 되는 큰 강, 곧 유프라테스를 가리킵니다(참조 렘 51:36). 결국 이 표제는 강과 광야가 뒤엉킨 메소포타미아 남부, 곧 바벨론을 가리키는 우회적 이름입니다. 9절의 "함락되었도다 바벨론이여"가 그것을 확인해 줍니다. 존 오스월트는 이 모호한 표제가 남부 습지대 출신의 반역자 므로닥발라단(39:1)의 고향을 암시할 수 있다고 봅니다. 히스기야에게 사절을 보내 반앗수르 동맹을 권했던 바로 그 인물입니다. 유다가 기대를 걸었던 그 세력이, 실은 유다를 도울 수도 없고 자기 자신도 구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 '두마'는 예루살렘 남동쪽 사막의 큰 오아시스 이름이자, 히브리어로 '침묵·적막'이라는 뜻입니다. 창세기 25장 14절에서 이스마엘의 아들로 등장하는 이름이기도 합니다. 질문은 두마에서 오지 않고 '세일', 곧 에돔에서 옵니다. 데마와 드단은 홍해로 이어지는 대상로의 오아시스이며, 게달은 이스마엘의 둘째 아들의 후손으로 아라비아 북서쪽에서 양을 치며 장막에 살던 유목 부족입니다(창 25:13; 렘 49:29; 시 120:5). 21장 17절이 알려 주듯 게달 사람들은 특히 활을 잘 다루었습니다. 이 사막의 길과 오아시스와 부족들은 주전 8세기 앗수르 제국의 팽창 아래 내내 불안에 시달렸고, 훗날 바벨론의 마지막 왕이 데마를 오래 근거지로 삼기도 했습니다. 요컨대 21장은 제국의 심장부(바벨론)에서 시작해 사막의 변두리(에돔과 아라비아)까지, 그 시대 사람들이 기댈 만하다고 여겼던 모든 축이 차례로 흔들리는 광경입니다.

*

# 1-5절 회오리바람처럼 몰려오는 밤

하나님은 제국의 견고한 자랑을 광야의 회오리바람 한 자락으로 흩으시면서도, 그 심판을 전하는 예언자의 몸으로 함께 앓으시는 분이십니다.

.

'해변 광야'에 관한 경고가 선포됩니다. 적병이 광야에서, 두려운 땅에서 "남방 회오리바람 같이" 몰려옵니다(1절). 예언자는 이것을 "혹독한 묵시"라고 부릅니다. 속이는 자는 속이고 약탈하는 자는 약탈하며, 엘람은 올라가고 메대는 에워싸라는 명령이 떨어집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의 모든 탄식을 내가 그치게 하였노라"고 선언하십니다(2절). 이 묵시를 본 예언자의 반응은 육체적입니다. "나의 요통이 심하여 해산이 임박한 여인의 고통 같은 고통이 나를 엄습하였으므로 내가 괴로워서 듣지 못하며 놀라서 보지 못하도다"(3절). 마음이 어지럽고 두려움이 그를 덮치며, 기다리던 "희망의 서광이 변하여" 도리어 떨림이 됩니다(4절). 그런데 정작 성 안의 풍경은 딴판입니다. 식탁이 차려지고 파수꾼이 세워진 채로 사람들은 먹고 마십니다. 그 태평한 잔치 한복판으로 다급한 외침이 끼어듭니다. "너희 고관들아 일어나 방패에 기름을 바를지어다"(5절).

.

1절의 히브리어 원문은 우리말 성경과 어순이 다릅니다. '남방 회오리바람같이'가 먼저 나오고, '적병이'에 해당하는 단어는 원문에 없이 '그것이 왔다'는 동사 하나로 표현됩니다. 곧 원문의 주어는 회오리바람 자체입니다. 네게브 사막의 회오리바람은 굉음을 동반한 채 예고 없이 몰려와 모든 것을 삼켜 버립니다. 제국의 종말이 그렇게 온다는 것입니다. 성벽의 두께나 군대의 규모로 계산되지 않는, 통제 불가능한 방식으로 말입니다.

2절의 "속이는 자는 속이고 약탈하는 자는 약탈하도다"는 히브리어 분사형을 겹쳐 쓴 표현으로, 속임과 약탈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음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그 주체가 곧 대상이 될 것임을 암시합니다. 70인역은 이 어구를 "무시하던 자가 무시당하게 될 것이다"로 옮겼습니다. 권력과 자기 이익이 삶의 원리가 될 때 동맹은 언제든 뒤집힙니다. 오스월트가 지적하듯 엘람과 메대는 때로 바벨론의 동맹이었고 때로 그 적이었습니다. 이해타산 위에 세워진 관계는 이해타산이 달라지는 순간 칼이 됩니다. 이사야는 그런 원리 위에 인생을 세운 자들이 결국 비극으로 끝난다는 것을 봅니다. 그러므로 이 신탁의 진짜 청중은 바벨론이 아니라, 바벨론을 믿을 만한 언덕으로 여기던 예루살렘입니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3-4절입니다. 심판을 선포하는 예언자가 심판당하는 자의 고통을 자기 몸으로 앓습니다. '요통'으로 옮겨진 '마테나이 할르할라'는 허리 전체가 통증으로 가득 찬 상태를, '아하주니'는 고통이 그를 붙들어 사로잡았음을 뜻합니다. 그는 듣지도 보지도 못할 만큼 무너집니다. 예언자는 하나님의 확성기가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에 감응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겔 33:11) 말씀하실 때, 그 마음이 예언자의 몸을 통과하며 통증이 됩니다. 이 대목은 훗날 예루살렘을 보시며 우신 예수님(눅 19:41)과, 골고다에서 심판을 자기 몸으로 받아 내신 그리스도를 향해 열려 있습니다. 심판을 선포하시는 하나님과 그 심판을 자기 살로 감당하시는 하나님이 다른 분이 아니라는 사실이, 여기서 이미 예언자의 뒤틀린 허리로 예고되고 있습니다.

4절의 "희망의 서광"은 해 뜨기 직전의 어스름을 가리키는 '네쉐프'입니다. 새 날을 기다리며 숨을 고르던 그 시간이 도리어 떨림으로 바뀌었습니다. 5절의 잔치는 다니엘 5장에서 대적이 성문 앞에 이르렀는데도 잔을 들던 벨사살의 밤을 미리 보여 줍니다. '방패에 기름을 바르라'는 것은 가죽 방패가 마르지 않도록 손질해 전투를 준비하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잔칫상에서 벌떡 일어나 급히 기름을 바르는 준비는, 이미 늦은 준비입니다.

.

우리 시대의 교회도 자주 '방패에 기름을 바르는' 일을 마지막 순간까지 미룹니다. 한국 교회는 오랫동안 성장이라는 이름의 잔칫상에 앉아 있었습니다. 건물과 숫자와 프로그램이 우리를 지켜 줄 것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인구가 줄고 신뢰가 무너지고 다음 세대가 빠져나가는 지금, 회오리바람은 이미 광야를 건너오고 있습니다. 문제는 위기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위기를 알면서도 여전히 먹고 마시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위기를 숫자로만 계산하지 않는 공동체가 되기를 원합니다. 방패에 기름을 바르는 일은 더 큰 프로그램을 준비하는 일이 아니라, 매일 말씀 앞에 앉아 마른 마음을 적시는 일입니다. 그리고 3-4절의 예언자처럼, 심판받아 마땅한 자들을 향해서도 함께 아파할 줄 아는 감수성을 잃지 않는 일입니다. 무너지는 이웃을 보며 "그럴 줄 알았다"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예언자의 자리가 아니라 구경꾼의 자리에 서게 됩니다. 직장에서 밀려난 사람, 가게 문을 닫은 사람, 자녀 때문에 밤을 새우는 부모의 이야기를 들을 때 우리 허리가 함께 아파오는지 살펴야 합니다. 그 통증이 우리가 아직 하나님의 마음에 붙어 있다는 증거입니다.

*

# 6-10절 파수꾼을 세우고 그가 보는 것을 보고하게 하라

성령 하나님은 어둠 속에서 눈을 열어 주시어, 세상이 아직 보지 못하는 하나님의 판결을 먼저 듣고 전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

주께서 예언자에게 명하십니다. "가서 파수꾼을 세우고 그가 보는 것을 보고하게 하되"(6절). 마병대가 쌍쌍이 오는 것과 나귀 떼와 낙타 떼를 보거든 귀를 기울여 자세히 들으라는 것입니다(7절). 파수꾼은 사자처럼 부르짖습니다. "주여 내가 낮에 늘 망대에 서 있었고 밤이 새도록 파수하는 곳에 있었더니"(8절). 마침내 마병대가 쌍쌍이 오는 것이 보이고, 그때 판결이 선포됩니다. "함락되었도다 함락되었도다 바벨론이여 그들이 조각한 신상들이 다 부서져 땅에 떨어졌도다"(9절). 그리고 예언자는 자기 백성을 이렇게 부릅니다. "내가 짓밟은 너여, 내가 타작한 너여, 내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께 들은 대로 너희에게 전하였노라"(10절).

.

파수꾼은 성벽 위 가장 높은 곳에 홀로 서서, 남들이 잠든 시간에 눈을 뜨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의 일은 싸우는 것이 아니라 보고 알리는 것입니다. 8절의 고백은 그 직무의 고단함을 그대로 보여 줍니다. 낮에도 늘 망대에 서 있었고, 밤이 새도록 파수하는 곳에 있었습니다. 예언자의 소명이 바로 그러합니다. 에스겔은 이 이미지를 자기 정체성으로 삼았고(겔 3:17; 33:1-7), 예수님은 종말의 제자들에게 "깨어 있으라"고 명하시며 문지기의 비유를 주셨습니다(막 13:33-37). 사도 바울은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자"고 권했습니다(살전 5:4-8).

9절의 선언은 히브리어에서 같은 말을 두 번 반복합니다. 확정된 판결이라는 뜻입니다. 주목할 것은 무너진 것이 성벽만이 아니라 "조각한 신상들"이라는 사실입니다. 바벨론 사람들은 국가신 벨(마르둑)을 비롯한 수많은 신상을 세워 두었습니다. 제국이 무너진다는 것은 그 제국이 의지하던 신들이 함께 부서진다는 뜻입니다. 오스월트의 물음이 날카롭습니다. 바벨론의 우상들이 바벨론조차 구원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바벨론 밖에서 그 우상을 신뢰하는 자들을 구원하겠습니까. 요한계시록은 이 선언을 그대로 이어받아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계 18:2)라고 외칩니다. 이사야가 본 한 제국의 밤은, 역사 속 모든 제국의 마지막 밤에 대한 예고편이었습니다.

10절의 표현은 뭉클합니다. '짓밟힌 자, 타작당한 자'는 유다 백성입니다. 소들이 곡식 위를 돌며 짓이기면 껍질과 줄기가 뭉개지고 알곡이 드러납니다. 그들은 앗수르라는 타작기 아래 짓이겨져 왔습니다. 예언자는 그 뭉개진 백성을 향해 "내가 들은 대로 너희에게 전하였노라"고 말합니다. 곧 이 무서운 소식은 구경거리로 전해진 정보가 아니라, 상처 입은 백성을 향한 위로의 통지였습니다. 너희를 짓밟던 힘도 영원하지 않다는 것, 너희 운명을 결정하는 분은 제국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시라는 것입니다. 타작은 파괴가 아니라 알곡을 얻는 과정이며, 그 마당의 주인은 손에 키를 드신 분이십니다(마 3:12).

.

교회는 세상의 파수꾼입니다. 그러나 파수꾼의 권위는 목소리의 크기가 아니라 '본 것'의 정확성에서 나옵니다. 망대에 서 보지도 않고 소리부터 지르는 사람은 파수꾼이 아니라 소음입니다. 오늘 한국 교회가 사회적 신뢰를 잃은 자리 가운데 하나가 여기입니다. 진영의 언어를 성경의 언어인 양 확성기에 얹어 외치면서, 정작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고 계신지는 오래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파수꾼의 첫째 자질은 발언이 아니라 응시입니다.

그래서 매일 말씀 앞에 앉는 묵상의 자리가 곧 망대입니다. 우리 교회가 매일성경으로 하루를 여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새벽마다 본문 한 단락을 붙들고 앉는 그 시간이, 우리 각자를 자기 삶의 망대에 세웁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본 것은 반드시 '보고'되어야 합니다. 가정에서 자녀에게, 일터에서 동료에게, 마을에서 이웃에게 우리가 본 하나님을 전하는 일이 파수꾼의 후반부입니다.

동시에 10절을 기억해야 합니다. 파수꾼의 보고는 짓밟힌 자들을 향해야 합니다. 무너지는 소식을 고소하게 전하는 사람이 아니라, 뭉개진 이들에게 "당신을 짓밟던 그 힘도 영원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해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 지역에도 타작 마당을 지나는 이들이 있습니다. 공장이 문을 닫아 일자리를 잃은 가장, 병원비 앞에 무너진 가정, 홀로 남은 어르신들입니다. 그들에게 교회의 첫 마디는 정죄가 아니라 "만군의 여호와께 들은 대로" 전하는 소망이어야 합니다.


*

# 11-12절 아침이 오나니 밤도 오리라

성자 예수 그리스도는 값싼 위로 대신 정직한 진실을 말씀하시면서, 그 밤 한복판에서 "돌아오라"고 부르시는 참된 아침이십니다.

.

두마에 관한 경고입니다. 사람이 세일에서 파수꾼을 부릅니다. "파수꾼이여 밤이 어떻게 되었느냐 파수꾼이여 밤이 어떻게 되었느냐"(11절). 두 번 반복되는 물음입니다. 파수꾼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아침이 오나니 밤도 오리라 네가 물으려거든 물으라 너희는 돌아올지니라"(12절).

.

이 두 절은 이사야서에서 가장 짧고 가장 신비로운 신탁입니다. '두마'라는 지명이 '침묵·적막'을 뜻한다는 사실부터 의미심장합니다. 하나님의 심판 아래 적막해진 땅, 소리가 끊긴 자리라는 이름입니다. 그런데 질문은 두마가 아니라 세일, 곧 에돔에서 옵니다. 사막의 변두리에 사는 사람들조차 밤이 언제 끝나느냐고 유다의 파수꾼에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밤이 어떻게 되었느냐"는 물음은 단순한 시각 확인이 아닙니다. 이 밤이 얼마나 남았느냐, 이 지배가 언제 끝나느냐, 우리가 언제쯤 숨을 쉴 수 있느냐는 절박한 질문입니다. 물음이 두 번 반복되는 데서 그 다급함이 묻어납니다. 그런데 파수꾼의 대답은 우리가 기대하는 것과 다릅니다. 그는 "곧 아침입니다"라고 시원하게 말하지 않습니다. "아침이 오나니 밤도 오리라." 아침은 옵니다. 그러나 그 아침 뒤에 다시 밤이 옵니다. 앗수르의 밤이 걷히면 바벨론의 밤이 이어질 것입니다. 오스월트는 이것을 주전 701년 산헤립의 물러남이라는 '서광' 뒤에 이어질 또 다른 어둠으로 읽습니다. 4절에서 이미 "희망의 서광이 변하여 내게 떨림이 되도다"라고 말한 그 경험이 여기서 격언처럼 압축된 셈입니다.

이것은 냉소가 아니라 정직입니다. 파수꾼은 거짓 위로를 팔지 않습니다. 상황이 좋아지는 것과 구원받는 것은 다른 일이기 때문입니다. 정치가 바뀌고 경제가 나아지고 병이 낫는 아침은 옵니다. 그러나 하나님 없는 아침은 또 다른 밤의 서두일 뿐입니다. 그래서 파수꾼은 마지막에 결정적인 한마디를 덧붙입니다. "너희는 돌아올지니라." 히브리어 '슈브'(שוב), 곧 회개를 뜻하는 바로 그 단어입니다. 밤이 언제 끝나느냐고 묻는 사람에게 파수꾼은 시간표 대신 방향을 줍니다. 문제는 밤의 길이가 아니라 우리가 어디를 향해 서 있느냐라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 어둠 속의 응답을 이렇게 이어받았습니다.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어두운 데를 비추는 등불로 여기고 주의하는 것이 옳으니라"(벧후 1:19). 밤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방법은 밤을 세는 것이 아니라 등불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의 마지막에 그 아침의 이름이 밝혀집니다.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 별이라"(계 22:16). 다시는 밤으로 이어지지 않는 단 하나의 아침, 그분이 그리스도이십니다. 바울의 권면도 같은 자리에 서 있습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롬 13:12).

.

우리는 늘 "이 밤이 언제 끝나느냐"고 묻습니다. 이 불황이 언제 끝나느냐, 이 병이 언제 낫느냐, 이 관계가 언제 회복되느냐고 묻습니다. 그 물음 자체는 잘못이 아닙니다. 에돔 사람도 물었고, 하나님은 "네가 물으려거든 물으라"고 허락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질문을 막지 않으십니다. 다만 그분의 대답이 우리 예상과 다를 뿐입니다.

한국 교회는 오랫동안 '아침만 있는 신앙'을 팔아 왔습니다. 믿으면 다 잘 된다는 약속, 기도하면 밤은 끝난다는 확언이 강단을 채웠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파수꾼은 밤도 온다고 말합니다. 이 정직함을 회복하지 않으면 우리 신앙은 첫 번째 어둠 앞에서 무너집니다. 반대로 이 정직함을 받아들이면, 우리는 밤 속에서도 견디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성도들에게 권합니다. 상황이 나아지기를 구하는 기도와 함께, 방향을 돌이키는 기도를 드립시다. "너희는 돌아올지니라"는 말씀 앞에서, 밤의 길이를 계산하는 대신 내가 지금 어디를 향해 서 있는지를 묻는 것입니다. 오늘 내 하루의 첫 시선이 어디를 향하는가, 내 지갑과 시간이 어느 쪽으로 흘러가는가, 내 말이 누구를 세우고 누구를 무너뜨리는가를 살피는 일이 곧 돌아옴입니다. 그렇게 돌아선 사람에게는, 밤이 아직 끝나지 않았어도 이미 아침의 빛이 마음에 떠오릅니다.

*

# 13-17절 목마른 자에게 물을, 도피하는 자에게 떡을

하나님은 심판의 한복판에서도 물 한 그릇과 떡 한 덩이를 준비시키시는 분, 무너지는 자 곁에 환대를 명하시는 분이십니다.

.

아라비아에 관한 경고입니다. 드단 대상들이 아라비아 수풀에서 유숙합니다(13절). 평소 같으면 오아시스 마을에 머물렀을 대상들이 길가 덤불에 몸을 숨긴 채 밤을 보내는 것입니다. 이어 데마 땅 주민들에게 명령이 주어집니다. "물을 가져다가 목마른 자에게 주고 떡을 가지고 도피하는 자를 영접하라"(14절). 그들이 칼날을 피하며, 뺀 칼과 당긴 활과 전쟁의 어려움에서 도망하였기 때문입니다(15절). 그리고 마지막 선언이 옵니다. "품꾼의 정한 기한 같이 일 년 내에 게달의 영광이 다 쇠멸하리니 게달 자손 중 활 가진 용사의 남은 수가 적으리라"(16-17절). 그리고 장은 이렇게 닫힙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

데마와 드단과 게달은 홍해로 이어지는 사막 대상로의 요충지들이었습니다. 향료와 금과 보석이 이 길을 따라 오갔고, 그 길목을 지키는 이들은 부를 쌓았습니다. 그런데 그 번영의 길이 지금은 도망자의 길이 되었습니다. 대상들은 오아시스 대신 덤불에 숨고, 정착민들은 문 앞에 나타난 난민을 맞이해야 합니다. 사막에서 물과 떡은 곧 목숨입니다. 그러므로 14절의 명령은 인정 어린 권유가 아니라, 심판의 소식 한가운데 하나님께서 끼워 넣으신 계명입니다.

이 배치가 놀랍습니다. 하나님은 심판을 선포하시면서 동시에 그 심판을 통과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명하십니다. 무너지는 자를 향해 손가락질하라고 하지 않으시고, 물그릇을 들고 나가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심판의 소식을 듣는 자의 첫 반응은 안도가 아니라 준비여야 합니다. 저 사람들이 우리 문 앞에 도착할 것이니 물을 길어 두라는 것입니다.

16절의 "품꾼의 정한 기한 같이 일 년 내에"라는 표현은 이 예언의 성격을 잘 드러냅니다. 품꾼의 계약 기간은 하루도 늘어나지 않고 하루도 줄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시간은 그렇게 정확합니다. 인간의 영광은 무한히 이어질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계약서에 적힌 기한을 가진 유한한 것입니다. 활을 잘 다루던 게달의 용사들, 곧 그 시대의 최정예 무력조차 그 기한 앞에서는 숫자가 줄어들 뿐입니다.

그리고 장의 마지막 문장이 모든 것을 봉인합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바벨론도, 에돔도, 아라비아도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습니다. 김근주 교수가 정리하듯 열방 신탁의 청중은 열방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며, 그 목적은 열방에 일어난 일들이 여호와께서 하신 일임을 확인시키는 데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힘은 하나님의 손에 들린 도구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마 25:35)라고 하실 때, 그분은 이 사막의 계명을 하나님 나라의 최종 심판 기준으로 세우고 계신 것입니다.

.

우리는 무너지는 세상을 두 가지 방식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관전자의 눈이고, 다른 하나는 물그릇을 든 사람의 눈입니다. 뉴스에 재난이 나오면 우리는 대개 관전자가 됩니다. 분석하고 논평하고 분노하다가 채널을 돌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데마 주민들에게 논평을 요구하지 않으시고 물을 요구하셨습니다.

오늘 우리 곁에도 '도피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산업 현장을 떠도는 이주노동자들, 빚에 쫓겨 자리를 옮긴 가정, 학교를 견디지 못해 나온 청소년,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돌아갈 자리가 없는 청년들입니다. 광양은 산업도시이면서 동시에 사람들이 끊임없이 오가는 길목입니다. 데마가 그랬듯이 말입니다. 교회가 그 길목의 오아시스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거창한 사업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카페의 따뜻한 커피 한 잔, 아이들에게 읽어 주는 그림책 한 권, 병상 곁에 앉아 함께 있어 주는 한 시간이 사막의 물 한 그릇입니다.

또 하나, 16-17절의 '정한 기한'을 우리 삶에 적용해야 합니다. 우리가 붙들고 있는 것들에는 모두 기한이 있습니다. 직위에도, 건강에도, 아이들이 우리 품에 머무는 시간에도 기한이 있습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은 조급해지는 대신 겸손해집니다. 영원하지 않은 것에 인생 전부를 걸지 않게 되고, 영원하신 분께 오늘을 드리게 됩니다. 게달의 영광은 일 년이었지만, 그 말씀을 하신 분의 이름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

# 거둠의 기도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

견고해 보이는 것들이 회오리바람 한 자락에 흩어지는 것을 봅니다.

우리가 기대어 서 있던 것들이 무엇인지 정직하게 보게 하시고,

잔칫상에서 일어나 주님 앞에 무릎 꿇게 하소서.

심판을 선포하면서도 함께 아파하셨던 예언자의 마음을 우리에게도 주시어,

무너지는 이웃 앞에서 우리 허리가 함께 아프게 하소서.

.

파수꾼을 세우시는 하나님,

저희를 각자의 삶의 망대에 세워 주소서.

낮에도 서 있고 밤이 새도록 지키는 자리에서

주님께서 무엇을 하고 계신지 오래 바라보게 하시고,

본 것을 정확하게 전하는 입술을 주소서.

짓밟히고 타작당한 이들에게

주님께 들은 소망을 전하는 파수꾼이 되게 하소서.

.

아침이신 주 예수님,

밤이 언제 끝나느냐고 묻는 저희에게

값싼 위로 대신 정직한 말씀을 주심을 감사합니다.

아침이 와도 다시 밤이 오는 세상에서

다시는 저물지 않는 광명한 새벽 별이신 주님만을 바라보게 하소서.

밤의 길이를 세는 대신 주님께로 돌아서게 하시고,

오늘 저희 마음에 주님의 빛이 떠오르게 하소서.

.

환대를 명하시는 하나님,

심판의 소식 한복판에서도 물과 떡을 준비시키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저희 교회가 이 길목의 오아시스가 되게 하시고,

목마른 이에게 물을, 쫓기는 이에게 떡을 내미는 손이 되게 하소서.

저희가 붙든 모든 것에 기한이 있음을 기억하게 하시고,

영원하신 주님께 오늘 하루를 온전히 드리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Articles

1 2 3 4 5 6 7 8 9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