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17:1-14 반석을 치운 자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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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신앙이란 더 빨리 자라는 법을 배우는 일이 아니라, 내 발밑에 무엇이 놓여 있는지를 정직하게 확인하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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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름의 기세가 절정에 이르러 대지를 팽팽하게 채우는 팔월의 초입입니다. 짙은 녹음 속에 숨은 매미들이 타는 듯한 갈증을 쏟아내듯 쟁쟁하게 울어대고, 아스팔트 위로는 아지랑이가 아득하게 피어오릅니다. 귀를 먹먹하게 만드는 저 소란 앞에 서면, 여름이 영원할 것 같은 착각이 잠시 마음을 스치고 지나갑니다. 그러나 우리는 압니다. 저 우렁찬 소리도 한 계절을 넘기지 못한다는 것을. 이 뜨거운 날들을 견디며 각자의 자리를 지키고 계신 모든 분의 심령 위에, 주님의 다사로운 평화가 깃들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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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에는 한 폭의 기묘한 정원이 등장합니다. 사람들은 얕은 그릇에 씨를 뿌리고 정성껏 울타리를 두른 뒤, 밤새 물을 주어 아침이면 파릇한 싹이 돋게 했습니다. 고대 근동에서 성행하던 풍요 제의의 풍경입니다. 그들은 게으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누구보다 부지런했습니다. 그런데 예언자는 그 부지런한 정원을 두고 이렇게 말합니다. "근심과 심한 슬픔의 날에 농작물이 없어지리라"(사 17:11). 어째서 그토록 애쓴 수고가 빈손으로 끝났을까요. 답은 그 앞 절에 이미 놓여 있습니다. 그들은 화단을 만들기 위해 먼저 무언가를 치워야 했습니다. 바로 반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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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신탁이 울려 퍼진 시대는 주전 팔 세기의 어수선한 국제 정세 한복판이었습니다. 앗수르라는 거대한 제국이 밀려오자 북이스라엘과 아람은 서둘러 동맹을 맺었고, 여기에 가담하지 않는 남유다를 무력으로 압박했습니다. 형제가 형제를 겨누어 칼을 든 것입니다. 그것은 당대의 상식으로는 가장 합리적인 계산이었습니다. 약한 자끼리 힘을 합치는 것 말고 무슨 방법이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그 합리적인 계산 속에 당신의 이름만 빠져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리하여 그 견고하던 요새는 "무너진 무더기"(사 17:1)라는 한마디로 정리되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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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이 아픈 것은 심판의 명단 때문입니다. 신탁의 제목은 분명 이방 도시 다메섹을 향한 것인데, 정작 삼 절에 이르면 "에브라임의 요새와 다메섹 나라와 아람의 남은 자가 멸절하여"라고 말합니다. 언약 백성이 이방과 나란히 한 줄에 서게 된 것입니다. 세상과 손을 맞잡은 교회는 세상의 장부에 함께 기록됩니다. 우리가 무엇을 믿느냐보다 무엇에 기대어 서 있느냐가 우리의 정체를 결정합니다. 위기 앞에서 가장 먼저 떠올리는 이름, 계약서에 먼저 적어 넣는 이름, 그것이 실은 우리의 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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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지는 장면은 더 참혹합니다. "그 날에 야곱의 영광이 쇠하고 그의 살진 몸이 파리하리니"(사 17:4). 하나님은 추수꾼처럼 오셔서 그 무성하던 것들을 남김없이 베어 가십니다. 그런데 바로 그 다음 절에서 문장이 조용히 방향을 틉니다. "그러나 그 안에 주울 것이 남으리니 감람나무를 흔들 때에 가장 높은 가지 꼭대기에 과일 두세 개가 남음 같겠고"(사 17:6). 그것은 추수꾼의 손이 미처 닿지 못해 남은 것이 아닙니다.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위해 남겨 두라 하신 율법의 몫입니다. 하나님은 진멸을 말씀하시면서도 늘 셈에서 몇을 빼놓으십니다. 심판의 한복판에 은혜의 법이 숨어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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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몬 베유는 『중력과 은총』에서 이렇게 적었습니다. "은총은 채운다. 그러나 은총은 그것을 받아들일 빈 곳이 있는 데에만 들어갈 수 있으며, 그 빈 곳을 만드는 것도 은총이다." 살진 몸이 파리해지는 시간은 우리에게 상실로만 보입니다. 그러나 그 비워짐이 은총의 손길일 수 있다는 것, 이것이 본문이 우리에게 건네는 낯선 위로입니다. 그래서 칠 절이 가능해집니다. "그 날에 사람이 자기를 지으신 이를 바라보겠으며". 여기 쓰인 히브리어 동사는 곁눈질이 아니라 마음을 온통 쏟아 우러르는 시선을 뜻합니다. 그리고 같은 동사가 곧바로 부정형으로 반복됩니다. "자기 손으로 만든 제단을 바라보지 아니하며"(사 17:8). 눈을 드는 일과 눈을 거두는 일은 하나의 사건의 앞뒷면입니다. 우상은 논박으로 무너지지 않습니다. 더 아름다운 분을 보게 될 때 비로소 손에서 놓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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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 절은 이 모든 비극의 뿌리를 한 문장으로 진단합니다. "이는 네가 네 구원의 하나님을 잊어버리며 네 능력의 반석을 마음에 두지 아니한 까닭이라". 여기서 '잊어버린다'는 말은 기억이 흐려지는 자연스러운 망각이 아니라, 마음에 두기를 그만두는 의지적인 방치에 가깝습니다. 한자로 분주할 망(忙)은 마음 심(心) 곁에 망할 망(亡)을 세워 둔 글자입니다. 너무 바쁘면 마음이 사라지고, 마음이 사라진 자리에서 우리는 가장 중요한 것을 잊습니다. 반석은 밟고 서는 자리이지 씨를 심는 화단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반석을 치우고 그 자리에 얕은 흙을 붓습니다. 더 빨리 싹이 트는 쪽을 택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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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단락에서 예언자는 소리를 묘사합니다. "많은 민족이 소동하였으되 바다 파도가 치는 소리 같이 그들이 소동하였고"(사 17:12). 위협은 언제나 실체보다 소음이 먼저 도착합니다. 그러나 그 소리 위에 한 마디가 얹힙니다. 주께서 꾸짖으시면 그들은 산에서 겨가 바람 앞에 흩어짐 같을 것이라고. 창을 든 제국과 바람에 날리는 겨 사이의 아득한 간극이 곧 하나님과 세상 사이의 간극입니다. 그리고 십사 절이 이 모든 것을 시간의 언어로 압축합니다. "저녁에 두려움을 당하고 아침이 오기 전에 그들이 없어졌나니". 하나님의 구원은 때로 우리가 밤을 다 견디기도 전에 도착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밤을 이길 힘이 아니라, 아침이 반드시 온다는 사실을 붙들고 밤을 지나는 믿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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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의 정원은 어떠합니까. 교회가 위기 앞에서 먼저 손을 뻗는 곳, 성도가 불안할 때 가장 먼저 확인하는 숫자, 부모가 자녀에게 물려주려고 애쓰는 방식 속에 혹시 이방의 가지가 심겨 있지는 않은지 살펴야 합니다. 문제는 열심이 부족한 것이 아닙니다. 반석을 치운 자리에서의 열심이라는 것이 문제입니다. 조급하게 얻은 싹은 조급하게 시듭니다.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것은 더 빨리 싹 틔우는 법이 아니라 더 깊이 뿌리내리는 법입니다. 아이에게 결과를 재촉하는 어른이 아니라, 뿌리 내릴 시간을 지켜 주는 어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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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인 수가 줄고 사회의 신뢰를 잃어 가는 오늘의 현실을 우리는 흔히 위기라고만 부릅니다. 그러나 어쩌면 이것은 우리 몸에 붙어 있던 군살이 깎여 나가는 시간인지도 모릅니다. 규모가 곧 은혜라고 믿었던 마음, 성공한 사람의 간증만 무대에 올렸던 습관, 사람의 인정을 하나님의 인정으로 착각했던 자리들이 하나씩 드러나고 있습니다. 부끄럽지만 다행한 일입니다. 드러나야 고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파리해짐이 곧 버려짐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무너뜨리시는 그 손으로 다시 세우십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잃어버린 살집을 서둘러 되찾는 일이 아니라, 남겨 두신 두세 개의 열매가 무엇인지 알아보는 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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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진 겨울을 견디고 겉잎이 다 찢겨 밑동만 남은 씨도리배추가, 봄이 오면 기어코 노란 장다리꽃을 피워 올립니다. 남겨진 것은 초라해 보이지만 결코 버려진 것이 아닙니다. 감람나무 꼭대기의 과일 두세 개처럼, 하나님은 오늘도 당신의 셈에서 우리를 빼놓지 않으십니다. 매미 소리가 사그라들고 아침 공기가 서늘해질 그날까지, 손에 쥔 것이 줄어드는 계절을 지나실지라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그 비워진 자리는 은총이 들어오려고 마련된 자리입니다. 반석을 치우지 않은 삶, 흔들리는 소리 앞에서도 발밑이 든든한 삶으로, 이 여름을 건너가는 평화의 순례자가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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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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