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17:01-14 구원의 반석을 잊은 자들의 헛된 요새와 슬픔의 수확 열방의 소동을 한 번의 꾸짖음으로 흩으시고 남은 자를 지으신 이께로 돌이키시는 여호와

by 평화의길벗 posted Aug 04,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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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17:01-14 구원의 반석을 잊은 자들의 헛된 요새와 슬픔의 수확

열방의 소동을 한 번의 꾸짖음으로 흩으시고 남은 자를 지으신 이께로 돌이키시는 여호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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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메섹(아람)과 에브라임(북이스라엘)이 맺은 반앗수르 동맹의 비참한 해체와, 그 심판의 잿더미 위에서 도리어 창조주를 우러러보게 되는 남은 자의 회복, 그리고 시온을 삼키려 파도처럼 밀려오던 열방의 소동이 여호와의 꾸짖음 한 번에 겨와 티끌처럼 흩어지는 하룻밤의 반전을 선포하는 신탁입니다. 다메섹은 성읍을 이루지 못하고 무너진 무더기가 되며, 아로엘의 성읍들은 양 떼가 누워도 놀라게 할 자 없는 빈 들이 됩니다(1-2절). 에브라임의 요새와 아람의 남은 자가 함께 멸절하여 언약 백성과 이방이 한 심판에 묶이고(3절), 야곱의 영광은 쇠하며 살진 몸은 파리해져 추수 끝난 밭의 이삭과 감람나무 꼭대기의 과일 두세 개만 남습니다(4-6절). 그러나 바로 그 비워진 자리에서 사람이 자기를 지으신 이를 바라보고 손으로 만든 제단과 아세라와 태양상에서 눈을 거둡니다(7-8절). 견고하던 성읍이 황폐해진 까닭은 구원의 하나님을 잊고 능력의 반석을 마음에 두지 않은 채 기뻐하는 나무와 이방의 나무 가지를 이종한 데 있으며, 그 부지런한 경작은 근심과 심한 슬픔의 날에 빈손으로 끝납니다(9-11절). 마지막으로 바다 파도처럼 소동하던 많은 민족은 주의 꾸짖음 앞에 산에서 겨가 바람에 흩어지듯 사라지고, 저녁에 두려움을 당하던 백성은 아침이 오기 전에 원수의 자취가 없어진 것을 보게 됩니다(12-1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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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적·시대적 배경 : 본문의 삶의 자리는 주전 734~732년경의 이른바 '시리아-에브라임 전쟁'입니다. 북이스라엘의 베가와 아람의 르신은 반앗수르 동맹을 결성하고, 여기에 가담하지 않는 남유다의 아하스를 무력으로 압박했습니다. 아하스는 여호와를 신뢰하는 대신 앗수르 디글랏빌레셀 3세에게 조공을 바치며 정략적 동맹을 택했고, 그 결과 다메섹은 주전 732년에, 사마리아는 주전 722년에 차례로 무너집니다. 12-14절의 시야는 여기서 한 세대를 더 나아가 주전 701년 산헤립의 예루살렘 포위와 그 하룻밤의 붕괴까지 겹쳐 읽히는 이중 노출의 예언입니다.

# 문화·제의적 배경 : 10절의 '기뻐하는 나무'와 '이방의 나무 가지'는 고대 근동 전역에 성행하던 풍요 제의, 곧 아도니스 동산으로 알려진 관습을 가리키는 것으로 널리 이해됩니다. 얕은 그릇이나 작은 화단에 씨를 뿌려 인공적으로 빨리 싹을 틔우고, 그 조급한 발아를 풍요의 징조로 삼던 제의였습니다. 성소 안에서는 언약의 언어를 쓰면서 삶의 현장에서는 더 빠른 수확을 약속하는 이방의 기술에 마음을 내주던 혼합주의가 그 시대의 공기였습니다.

# 신학적·정경적 배경 : 본문은 이사야 13~23장 '열방을 향한 경고' 묶음의 한가운데 있습니다. 그런데 제목은 '다메섹에 관한 경고'인데 정작 심판의 무게중심은 언약 백성 에브라임에게 옮겨 옵니다. 하나님을 떠나 세상과 동맹한 언약 공동체는 결국 이방과 구분되지 않는 자리에서 동일한 심판을 받는다는 준엄한 언약 신학입니다. 동시에 6절의 '주울 것이 남으리니'와 7절의 '지으신 이를 바라보겠으며'는 이사야 7장 스알야숩(남은 자가 돌아오리라)에서 시작된 남은 자 신학의 맥을 그대로 잇습니다. 심판은 언제나 정화를 위한 것이며, 그 끝에는 반드시 돌아오는 소수가 남습니다.

# 인문학적·철학적 배경 : 본문은 인간이 한계 상황에서 즉각 가동시키는 두 가지 자구책, 곧 밖으로는 요새와 동맹, 안으로는 제단과 부적을 나란히 세워 놓고 그 둘이 실은 하나의 뿌리에서 나왔음을 폭로합니다. 둘 다 '내가 나를 보장하겠다'는 자기 구원의 기획입니다. 김필회 교수님은 이 대목에서 인간이 만든 모든 안전장치가 창조주 앞에서 얼마나 가벼운지를 강조합니다. 아무리 거대한 제국의 군세라도 여호와의 임재 앞에서는 무게를 잃고 바람에 날리는 겨가 됩니다. 실존의 안전은 구조물이 아니라 인격적 관계 안에서만 주어진다는 것이 본문의 인문학적 통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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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절 무너진 무더기가 되는 인본주의적 동맹

하나님은 당신을 배제한 채 쌓아 올린 모든 군사적·정략적 안전망을 친히 해체하심으로, 오직 당신만이 참된 요새이심을 드러내시는 역사의 주권자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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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메섹에 관한 경고라"로 신탁이 열립니다. 다메섹은 장차 성읍을 이루지 못하고 무너진 무더기가 될 것이며(1절), 아로엘의 성읍들은 버림을 당하여 양 무리를 치는 곳이 되고 양이 누워도 놀라게 할 자가 없을 것입니다(2절). 그리고 "에브라임의 요새와 다메섹 나라와 아람의 남은 자가 멸절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영광 같이 되리라"는 선언이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라는 인장과 함께 찍힙니다(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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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메섹과 에브라임의 동맹은 당대의 눈으로 보면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었습니다. 앗수르라는 거대한 제국 앞에서 두 약소국이 힘을 합치는 것보다 더 현실적인 방책이 있었겠습니까. 김필회 교수님의 해석을 따르면, 3절의 '요새'(미브차르)는 단순한 성벽이 아니라 그들이 신뢰의 무게를 통째로 옮겨 실은 대상, 곧 그들의 실질적인 신(神)을 가리킵니다. 문제는 동맹 자체가 아니라, 그 동맹이 여호와의 자리를 대신 차지했다는 데 있습니다. 더욱이 이 동맹은 형제국 남유다를 겨누어 칼을 든 배교적 연대였습니다.

이 신탁의 구조는 매우 의도적입니다. 제목은 이방 도시 다메섹인데, 3절에 이르면 '에브라임의 요새'가 다메섹과 나란히 놓이고, 아람의 남은 자가 "이스라엘 자손의 영광 같이" 된다고 말합니다. 언약 백성이 이방의 운명을 재는 자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세상과 손을 맞잡은 교회는 세상의 심판표에 함께 기록됩니다. 하나님을 대적하기 위해 사람과 사람이 모아 쌓은 모든 연대는 결국 "무너진 무더기"라는 한 단어로 정리됩니다.

그러나 이 파괴는 증오가 아니라 애정에서 나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이 가짜 요새 안에서 가짜 평안을 누리는 것을 끝내 견디지 못하시는 분입니다. 가짜 성벽을 헐어서라도 참 요새이신 그리스도께로 돌이키시려는 질투 어린 사랑이 여기 있습니다. 신약은 이 참 요새를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행 4:12)라는 고백으로, 또 반석 위에 지은 집의 비유(마 7:24-25)로 이어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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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한국교회는 위기 앞에서 무엇을 '요새와 막대기'로 붙들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일하심보다 자본의 규모, 세상 기업을 모방한 행정 시스템, 사회적 명망을 지닌 이들과의 세련된 연대를 영적 안전망으로 삼으려는 유혹이 우리 안에 깊습니다. 그런 요새는 세속화의 폭풍이 아니라 그저 시간이 지나는 것만으로도 소리 없이 주저앉습니다.

우리에게 이 말씀은 아주 구체적인 질문으로 다가옵니다. 사업의 고비에서 먼저 떠올리는 이름이 누구입니까. 자녀의 진로 앞에서 우리가 실제로 계산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기도는 나중에 하고 먼저 사람을 찾아 줄을 대는 습관, 불의한 관행에 눈감고 편승하여 자구책을 마련하려는 얄팍함을 오늘 꺾어 버립시다. 교회의 기초석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만을 전적으로 의뢰할 때, 광양의 일터와 가정에 세상이 흔들 수 없는 하나님 나라의 견고한 샬롬이 자리 잡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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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8절 살진 몸을 파리하게 하시는 정화와 지으신 이를 향한 눈 들기

성령 하나님은 우리 안에 붙은 세속의 살을 아프게 깎아내시는 연단을 통해, 우리 영혼의 시선을 오직 자기를 지으신 이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께로 돌이키시는 정화의 영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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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에 야곱의 영광이 쇠하고 그의 살진 몸이 파리하리니"(4절). 그 모습은 추수하는 자가 곡식을 거두고 손으로 이삭을 벤 것 같고, 르바임 골짜기에서 이삭을 주운 것 같습니다(5절). 그러나 그 안에 주울 것이 남습니다. 감람나무를 흔들 때에 가장 높은 가지 꼭대기에 과일 두세 개가 남음 같고, 무성한 나무의 가장 먼 가지에 네다섯 개가 남음 같습니다(6절). 그리고 "그 날에 사람이 자기를 지으신 이를 바라보겠으며 그의 눈이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뵙겠고"(7절), 자기 손으로 만든 제단을 바라보지 아니하며 자기 손가락으로 지은 아세라나 태양상을 보지 아니할 것입니다(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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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진 몸'은 북이스라엘이 여로보암 2세 시대 이래 누려 온 번영의 몸집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것은 축복의 증거가 아니라 교만이 붙은 군살이었습니다. 그래서 심판의 이미지가 추수입니다. 추수는 남김없이 베어 가는 일입니다. 게다가 5절의 '르바임 골짜기'는 예루살렘 남서쪽의 곡창지대로, 가장 풍요롭던 곳을 예로 들어 그 풍요마저 이삭줍기의 대상이 된다고 말하는 셈입니다.

그런데 6절에서 신탁이 방향을 틉니다. "그러나 그 안에 주울 것이 남으리니." 감람나무 꼭대기의 과일 두세 개는 추수꾼의 손이 닿지 않아 남겨진 것이 아니라, 율법이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위해 남겨 두라 명한 그 몫입니다(신 24:20). 심판의 한복판에 은혜의 법이 숨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진멸을 말씀하시면서도 늘 셈에서 몇을 빼놓으십니다. 그 몇이 남은 자입니다.

7절의 '바라보겠으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샤아'는 곁눈질이나 관조가 아니라 마음을 온통 쏟아 의지하며 우러러보는 시선입니다. 흥미롭게도 8절은 같은 동사를 부정형으로 반복합니다. 지으신 이를 향해 눈을 드는 것과 손으로 만든 제단에서 눈을 거두는 것은 하나의 사건의 앞뒷면입니다. 김필회 교수님은 이 대목에서 참된 회개란 새로운 것을 하나 더 얹는 일이 아니라 시선의 대상이 통째로 바뀌는 일임을 강조합니다. 우상은 논박으로 무너지지 않고, 더 아름다운 분을 보게 될 때 비로소 손에서 놓입니다.

또 하나 눈여겨볼 것은 7절이 하나님을 '자기를 지으신 이'라 부르는 점입니다. 구원의 회복이 창조의 언어로 표현됩니다. 내가 나를 만든 자가 아니라는 자각, 곧 피조물의 겸손이 신앙의 출발점입니다. 이 시선이 신약에서는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 12:2)로 이어집니다. 광야의 놋뱀을 쳐다본 자가 살았듯(민 21:9, 요 3:14-15), 십자가에 달리신 분을 우러러보는 시선이 우리를 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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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인 수가 줄고 재정이 축소되며 사회의 신뢰를 잃어 가는 오늘 한국교회의 '파리해짐'을, 우리는 단지 위기로만 읽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 안에 가득했던 가짜 영광과 공로주의의 군살을 태워 내시는 은혜의 연단일 수 있습니다. 목회적 성공 신화, 인맥의 제단, 물량주의라는 이름의 아세라 상을 말씀의 도끼로 베어 내지 않는 한 거룩함은 요원합니다.

광양사랑의교회 성도들이 살진 몸이 파리해지는 계절을 통과할 때, 곧 사업이 줄고 건강을 잃고 계획이 접히는 시간을 지날 때, 낙심과 원망보다 먼저 물을 것이 있습니다. 주님이 지금 내 손에서 무엇을 놓게 하려 하시는가. 자녀의 성적표를 제단 삼고 남과의 비교를 태양상 삼았던 마음을 정직하게 내려놓읍시다. 그리고 가정예배의 자리에서 한 가지를 연습합시다. 오늘 하루 내 눈이 가장 오래 머문 곳이 어디였는지 서로 나누는 것입니다. 시선이 바뀌면 삶이 바뀝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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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11절 반석을 잊은 자리에서 자란 조급한 싹과 슬픔의 수확

성자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능력의 반석이 되시는 분이시니, 그분을 잊은 자리에서 아무리 부지런히 심고 가꾸어도 남는 것은 근심과 심한 슬픔뿐임을 깨우치시는 참 생명의 공급자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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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에 그 견고한 성읍들이 옛적에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버린 바 된 수풀 속의 처소와 작은 산 꼭대기의 처소 같아서 황폐할 것입니다(9절). 그 까닭은 분명합니다. "이는 네가 네 구원의 하나님을 잊어버리며 네 능력의 반석을 마음에 두지 아니한 까닭이라." 그래서 기뻐하는 나무를 심으며 이방의 나무 가지도 이종합니다(10절). 심는 날에 울타리를 두르고 아침에 씨가 잘 발육하도록 하였으나, 근심과 심한 슬픔의 날에 농작물이 없어질 것입니다(1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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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절의 비유는 뼈아픕니다. 그토록 견고했던 성읍이 가나안 정복 때 원주민이 도망치며 버리고 간 폐허처럼 된다는 것입니다. 한때 하나님이 그들 앞에서 쫓아내셨던 이들의 신세를 이제 그들이 그대로 물려받습니다. 심판은 그렇게 대칭적입니다.

10절이 진단의 핵심입니다. '잊어버리며'로 옮겨진 '샤카흐'는 기억이 흐려지는 자연스러운 망각이 아니라, 마음에 두기를 그만두는 의지적 방치에 가깝습니다. '능력의 반석'(추르 마우제크)은 인생을 요새처럼 감싸 보호하시는 가장 견고한 기초를 뜻합니다. 이스라엘의 노래는 본래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시 18:2)였는데, 그 반석을 마음에서 치우자 그 빈자리에 무엇이 들어왔습니까. '기뻐하는 나무'와 '이방의 나무 가지'입니다.

앞서 본 대로 이것은 아도니스 동산의 이미지입니다. 얕은 그릇에 씨를 뿌려 아침이면 싹이 트게 하는 기술, 곧 빠른 결과를 보증한다는 유혹입니다. 울타리까지 정성껏 두르고 밤새 물을 줍니다. 게으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부지런했습니다. 본문의 무서움이 여기 있습니다. 근면이 방향을 잃으면 근면할수록 빨리 망합니다.

11절의 '심한 슬픔'에 해당하는 '아누쉬'는 낫지 않는 상처, 치료가 불가능한 고통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예레미야가 자기 상처를 두고 쓴 바로 그 단어입니다(렘 15:18, 30:12). 조급하게 얻은 싹은 조급하게 시듭니다. 예수님의 네 가지 땅 비유에서 돌밭의 씨가 곧 싹이 났으나 뿌리가 없어 말라 버린 것과 정확히 겹칩니다(마 13:5-6). 반석은 밟고 서는 것이지 심는 곳이 아닙니다. 반석 위에 집을 세우지 않고 반석을 치운 자리에 화단을 만든 것이 이스라엘의 어리석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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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그리스도인이 구원의 하나님을 마음 한켠으로 밀어 둔 채, 세상이 검증했다는 성공의 방식이라는 이방의 가지를 가정과 일터와 자녀의 심령에 부지런히 이종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열심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반석을 치운 자리에서의 열심이라는 것이 문제입니다.

광양사랑의교회 믿음의 가정들은 이 조급한 경작을 멈추어야 합니다. 주일 예배당의 언어와 월요일 일터의 도량형이 서로 다른 위선을 회개합시다.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것은 더 빨리 싹트는 법이 아니라 더 깊이 뿌리내리는 법입니다. 아이에게 결과를 재촉하는 부모가 아니라 뿌리 내릴 시간을 지켜 주는 부모가 됩시다. 느리더라도 말씀 안에서 정직하게 흘린 땀만이, 근심과 심한 슬픔의 날에도 없어지지 않는 의의 열매를 남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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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14절 파도처럼 소동하는 열방과 아침이 오기 전의 반전

하나님은 바다처럼 밀려와 당신의 백성을 삼키려는 열방의 소동을 단 한 번의 꾸짖음으로 겨와 티끌처럼 흩으시는 역사의 절대 주권자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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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프다 많은 민족이 소동하였으되 바다 파도가 치는 소리 같이 그들이 소동하였고 열방이 충돌하였으되 큰 물이 몰려옴 같이 그들도 충돌하였도다"(12절). 그러나 주께서 그들을 꾸짖으시면 그들이 멀리 도망함이 산에서 겨가 바람 앞에 흩어짐 같고 폭풍 앞에 떠도는 티끌 같을 것입니다(13절). "보라 저녁에 두려움을 당하고 아침이 오기 전에 그들이 없어졌나니 이는 우리를 노략한 자들의 몫이요 우리를 강탈한 자들의 보응이니라"(1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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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절은 소리의 묘사로 가득합니다. 소동, 충돌, 큰 물이 몰려옴. 위협은 언제나 먼저 소리로 옵니다. 실체보다 소음이 먼저 도착합니다. 예언자는 그 소리의 크기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컸습니다. 다만 그 소리 위에 한 마디를 얹습니다. "주께서 그들을 꾸짖으시리니."

'꾸짖다'(가아르)는 창조주가 혼돈의 물을 향해 발하시는 명령의 언어입니다. 홍해가 갈라진 것도 여호와의 꾸짖음 앞에서였습니다(시 106:9). 그러니 열방을 바다에 비유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아무리 광포해도 바다는 창조주의 피조물일 뿐이며, 창조주의 한 마디 앞에서 제 자리를 압니다. 이 권세는 갈릴리 바다의 풍랑을 향해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그 실체를 드러냈습니다(막 4:39). 제자들이 물은 그대로가 정답입니다.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13절의 '겨'와 '티끌'은 무게 없음의 이미지입니다. 창을 든 군대와 바람에 날리는 겨 사이의 간극이 곧 하나님과 제국 사이의 간극입니다. 그리고 14절이 이 모든 것을 시간의 언어로 압축합니다. "저녁에 두려움을 당하고 아침이 오기 전에." 앗수르 대군 십팔만 오천 명이 하룻밤 사이에 시체가 된 그 아침(사 37:36)이 이 예언의 역사적 실물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종종 우리가 밤을 다 견디기도 전에 도착합니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밤을 이길 힘이 아니라, 아침이 반드시 온다는 사실을 붙들고 밤을 지나는 믿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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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오늘도 교회를 향해 파도처럼 밀려옵니다. 기독교의 언어를 조롱하는 목소리, 모든 것을 숫자로 환산하는 시스템, 교회의 무능을 비웃는 여론 앞에서 우리는 종종 아하스처럼 떨며 타협의 카드를 만지작거립니다. 그러나 그 소리의 크기가 그 실체의 무게는 아닙니다.


광양사랑의교회 동역자들은 영적 패배주의에 굴복하지 맙시다. 직장에서 정직하게 처신하다가 겪는 불이익, 신앙 때문에 감수해야 하는 소외의 파도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히 합시다. 14절의 승리는 우리가 싸워 얻은 것이 아니라 주께서 꾸짖어 얻으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몫은 반격이 아니라 신뢰입니다. 저녁에는 두려움이 우리를 에워쌀지라도, 무릎 꿇고 기도한 뒤 맞이할 아침에는 주님의 승리만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 아침을 믿고 오늘 하루의 정직함을 지키는 것, 그것이 남은 자의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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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역사의 주인이시며 우리의 참된 요새가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

무너진 무더기가 될 성벽을 붙들고 안심하던 어리석음을 이 시간 자복합니다.

주님을 계산에서 빼놓은 채 사람과 힘을 모아 쌓아 올린 우리의 동맹이

실은 얼마나 얄팍한 것이었는지 정직하게 보게 하시고,

오직 그리스도라는 반석 위에 우리 삶의 집을 다시 세우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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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지으신 주님,

살진 몸이 파리해지는 시간을 지날 때 원망 대신 시선을 들게 하옵소서.

손으로 만든 제단과 손가락으로 지은 아세라에서 눈을 거두게 하시고,

감람나무 꼭대기에 남겨 두신 두세 개의 열매처럼

주님의 은혜로 남겨진 존재임을 잊지 않게 하옵소서.

비워진 자리마다 거룩하신 주님의 얼굴을 뵙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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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의 반석이 되시는 주님,

구원의 하나님을 마음에서 치워 놓은 채

빨리 싹트는 이방의 가지를 부지런히 심었던 우리의 조급함을 용서하옵소서.

근심과 심한 슬픔의 날에 없어질 것을 위해 밤을 새우지 않게 하시고,

느리더라도 말씀 안에 깊이 뿌리내리는 정직한 수고를 기뻐하게 하옵소서.

우리 광양사랑의교회의 가정마다 이 뿌리가 자라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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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군의 여호와여,

바다 파도처럼 소동하는 세상의 소리 앞에서 떨지 않게 하옵소서.

주님의 꾸짖음 한 번이면 제국의 병거도 산의 겨처럼 흩어질 것을 믿습니다.

저녁에 두려움을 당할지라도 아침이 오기 전에 일하시는 주님을 신뢰하며,

오늘 하루 우리에게 맡겨진 자리에서 정직하게 서 있는

거룩한 남은 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어두운 밤을 하룻밤 사이에 새 아침으로 바꾸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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