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14:1-23 품과 구덩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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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 오늘은 이사야 14장 1절에서 23절까지 말씀으로 '품과 구덩이'라는 제목으로 묵상에세이를 나누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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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신앙이란 더 높은 데로 올라가려는 발버둥을 그치고, 우리를 품으시려고 먼저 낮아지신 분의 품 안으로 조용히 내려앉는 생명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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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월의 첫 주입니다. 새벽 네 시쯤 잠이 깨어 창을 열면 아직 어둠이 걷히지 않은 동쪽 하늘에 유난히 밝은 별 하나가 걸려 있습니다. 샛별입니다. 다른 별들이 다 흐려진 뒤에도 혼자 남아 반짝이는 그 빛이 어찌나 또렷한지, 저것이 별이 아니라 누가 걸어 둔 등불이 아닐까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삼십 분쯤 지나 동편이 발갛게 물들기 시작하면 그 별은 소리도 없이 사라집니다. 가장 밝았던 별이 가장 먼저 지워집니다. 해가 뜨는 자리에서는 어떤 별도 제 빛을 주장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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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여름을 힘겹게 통과하고 계신 분들이 있습니다. 열기가 가시지 않는 작업장에서 하루를 버티는 분들, 밤새 뒤척이다 새벽에야 겨우 눈을 붙이는 어르신들, 남들 다 가는 휴가가 자기 몫은 아니라고 여기며 묵묵히 일터를 지키는 분들이 계십니다. 무엇보다 오래 애써 올라온 자리에서 어느 날 갑자기 미끄러져 내린 분들, 그 낙차가 부끄러워 아무에게도 말 못 하고 계신 분들이 계실 줄 압니다. 이 계절을 견디고 계신 모든 분의 심령 위에, 주님의 다사로운 평화가 깃들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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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 한복판에도 그 새벽별이 뜹니다.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사 14:12). 예언자는 온 세상을 발아래 두었던 바벨론의 왕을 새벽별이라고 부릅니다. 잠깐 가장 밝았고, 해가 뜨자 사라진 별. 이름 하나로 한 제국의 전 생애를 요약해 버린 셈입니다. 그런데 이 노래의 결말이 서늘합니다. 하늘 꼭대기까지 오르겠다던 그가 도착한 곳은 "스올 곧 구덩이 맨 밑"(사 14:15)이었습니다. 가장 높은 곳을 향해 손을 뻗던 사람이 가장 낮은 구덩이에 처박히는 이 대칭을, 성경은 조금도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보여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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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13장부터 23장까지는 예언자의 시선이 예루살렘 성벽 너머로 넘어가는 대목입니다. 오늘 본문 4절에서 '노래'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마샬은 격언이나 비유를 뜻하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조롱의 노래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노래에 장례식에서 부르는 만가의 형식이 섞여 있다는 점입니다. 아직 시퍼렇게 살아 있는 제국을 두고 미리 장송곡을 부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끝까지 폭군의 이름은 나오지 않습니다. 이름이 지워졌기에 이 노래는 느부갓네살 한 사람에게 갇히지 않고, 로마의 황제에게도 20세기의 독재자에게도 그리고 오늘 우리 안의 작은 폭군에게도 그대로 겨누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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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무거운 노래를 시작하기 전에 예언자가 먼저 놓아둔 문장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야곱을 긍휼히 여기시며 이스라엘을 다시 택하여 그들의 땅에 두시리니"(사 14:1). '긍휼히 여기다'로 옮겨진 히브리어 라함은 자궁을 뜻하는 레헴에서 나온 말입니다. 아이가 잘해서가 아니라 내 몸에서 나왔기에 품는 사랑, 계산이 시작되기 이전의 사랑입니다.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어 오랜만에 동생 베냐민을 보았을 때 창자가 뒤틀리듯 정이 북받쳐 급히 울 곳을 찾았다고 했는데(창 43:30), 그 '북받침'을 표현한 단어가 바로 이 말의 친척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점잖은 동정이 아닙니다. 속에서 뒤틀리며 올라오는, 몸이 먼저 반응하는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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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택하여'라는 말도 예사롭지 않습니다. '다시'라는 부사는 그 전에 한 번 끊어졌음을 전제합니다. 예루살렘이 무너지던 날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셨다는 그 믿음까지 함께 무너졌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예언자는 그 폐허 한복판에서 선택의 갱신을 선포합니다. 신학의 문법으로 따지면 성립하지 않는 말이지만, 자식을 향한 어머니의 일방적인 사랑은 문법을 넘어섭니다. 그리고 이 회복의 문은 이방인에게도 열립니다. "나그네 된 자가 야곱 족속과 연합하여"(사 14:1). 품이 넓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품은 자기 사람을 지키느라 좁아지는 품이 아니라, 지키느라 오히려 넓어지는 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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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이 열리자 압제자의 손에서 몽둥이가 떨어집니다. "여호와께서 악인의 몽둥이와 통치자의 규를 꺾으셨도다"(사 14:5).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이제는 온 땅이 조용하고 평온하니." 사람만 숨을 돌린 것이 아닙니다. 향나무와 레바논의 백향목이 기뻐하며 말합니다. "네가 넘어져 있은즉 올라와서 우리를 베어 버릴 자 없다"(사 14:8). 궁전을 짓겠다고 숲을 통째로 밀어내던 그 손이 멈추자 나무들이 환성을 지르는 것입니다. 사람의 교만은 결코 사람만 다치게 하지 않습니다. 땅과 숲과 강이 함께 신음합니다. 그래서 구원의 날에는 나무도 함께 노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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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은 이제 지하로 내려갑니다. 죽음의 침묵만 흐르던 스올이 갑자기 소란해집니다. 먼저 내려간 왕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새로 온 손님을 맞으며 말합니다. "너도 우리 같이 연약하게 되었느냐"(사 14:10). 그리고 이어지는 한 줄이 오래 마음에 걸립니다. "네 영화가 스올에 떨어졌음이여 네 비파 소리까지로다 구더기가 네 아래에 깔림이여 지렁이가 너를 덮었도다"(사 14:11). 밤마다 비파 소리가 흐르던 침실에서 자던 사람이 마지막으로 눕는 자리에서 요가 되어 준 것은 구더기였고 이불이 되어 준 것은 지렁이였습니다. 성경은 이 장면에서 눈을 돌리지 않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쌓고 있는지 정확히 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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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절에서 15절까지, 폭군의 독백이 인용됩니다.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앉으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가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사 14:13-14). 짧은 두 절에 '내가'라는 말이 다섯 번 나옵니다. 올라가고, 높이고, 앉고, 다시 올라가고, 마침내 같아지겠다는 것입니다. 창세기에서 뱀이 건넸던 그 오래된 제안,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는 속삭임이 여기서 왕관을 쓰고 되풀이됩니다. 그러나 결말은 단 한 절입니다. 하늘 끝을 향하던 자가 구덩이 맨 밑에 떨어집니다. 그가 원했던 가장 높은 곳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자리로 굴러떨어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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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몬 베유는 『중력과 은총』에서 이렇게 적었습니다. 중력은 아래로 끌어내리고 날개는 위로 올려 주는데, 무게 없이 아래로 내려가게 하는 날개는 어떤 날개인가. 그리고 그는 모든 자연적 운동이 중력을 따르지만 오직 은총만이 그 법칙의 예외라고 했습니다. 저는 이 문장을 오늘 본문 옆에 나란히 놓아 봅니다. 바벨론의 왕은 날개로 올라가려다 중력에 걸려 떨어졌습니다. 떨어짐은 언제나 올라가려던 자에게 일어납니다. 그런데 성경은 전혀 다른 하강을 하나 더 보여 줍니다.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신 분의 내려오심입니다(빌 2:6-7). 떨어지는 것과 내려오는 것은 다릅니다. 떨어짐은 교만의 끝이고, 내려옴은 사랑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신약은 '샛별'이라는 그 이름을 잠깐 빛나다 사라진 폭군에게서 거두어, 지지 않는 빛이신 분께 돌려 드립니다(벧후 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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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에도 '내가'라는 독백은 그치지 않습니다. 성공과 서열이 사람의 값을 매기고, 조금이라도 위로 올라서야 안심이 되는 공기 속에서 우리는 자랍니다. 더 아픈 것은 교회마저 그 문법을 빌려 쓸 때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크기와 숫자로 스스로를 증명하려 할 때,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명분으로 사람의 양심 위에 올라설 때, 우리는 이미 북극 집회의 산을 오르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 등반을 조용히 멈춰 세웁니다. 하나님이 마지막에 드시는 것은 벼락이 아니라 빗자루였습니다(사 14:23). 요란하지 않게, 그러나 남김없이 쓸어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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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우리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올라가는 대신 품이 되어 주는 일입니다. 아이가 실수했을 때 야단보다 먼저 안아 주는 부모의 품, 실적이 부진한 동료의 뒷자리를 말없이 채워 주는 손, 오래 보이지 않던 얼굴이 예배당에 다시 나타났을 때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옆자리를 내어 주는 마음. 구덩이와 품은 둘 다 움푹 팬 자리입니다. 생김새는 닮았는데, 하나는 떨어지는 자리이고 하나는 안기는 자리입니다. 무엇이 그 차이를 만듭니까. 그 자리에 누가 먼저 내려와 있느냐입니다. 주님이 먼저 내려와 계신 낮은 자리는 더 이상 구덩이가 아니라 품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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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별은 오늘도 뜰 것입니다. 그리고 해가 오르면 어김없이 사라질 것입니다. 우리가 부러워해야 할 것은 잠깐 가장 밝은 별이 아니라, 그 별을 지우며 떠오르는 해입니다. 이 여름의 한복판에서, 조금 더 높은 자리를 얻으려 애쓰기보다 누군가에게 품이 되어 주는 일에 마음을 쏟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스스로 낮아지심으로 우리를 일으키신 그분의 걸음을 따라, 오늘도 이 땅을 걷는 평화의 순례자가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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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성도가 매일성경으로 매일 묵상하는 광양사랑의교회 평화의길벗_라종렬 목사였습니다. 묵상의 여정에 있는 여러분의 오늘 하루도 주님의 평화가 함께하시길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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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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