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14:01-23 어머니의 태에서 우러나오는 긍휼로 다시 택하시는 하나님과 구덩이 맨 밑으로 떨어지는 교만의 종착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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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론의 멸망을 선포한 13장에 이어, 14장은 그 심판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먼저 밝힙니다. 여호와께서 야곱을 긍휼히 여기시며 이스라엘을 다시 택하여 그들의 땅에 두시고, 나그네 된 자가 야곱 족속과 연합하게 됩니다(1-2절). 이스라엘을 사로잡았던 자들이 도리어 사로잡히고, 압제하던 자들이 주관을 받는 완전한 역전이 일어납니다. 여호와께서 슬픔과 곤고와 고역에서 놓으시고 안식을 주시는 날에, 해방된 백성은 바벨론 왕에 대하여 노래를 지어 부릅니다(3-4a절). 그 노래는 조롱의 노래입니다. 압제하던 자가 어찌 그리 그쳤으며, 악인의 몽둥이와 통치자의 규를 여호와께서 꺾으시니 이제는 온 땅이 조용하고 평온하여 향나무와 레바논의 백향목까지 기뻐합니다(4b-8절). 시선은 지하 세계로 옮겨져, 스올이 소동하여 그를 영접하고 먼저 내려간 왕들이 "너도 우리 같이 연약하게 되었느냐" 하고 조롱하며, 비파 소리로 채워지던 그의 영화 위에 구더기가 깔리고 지렁이가 덮입니다(9-11절). 이어 노래는 절정에 이릅니다.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 하늘에서 떨어졌습니다.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자리를 높이고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앉아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겠다던 자가, 스올 곧 구덩이 맨 밑에 떨어집니다(12-15절). 사람들은 매장되지 못한 그의 주검을 자세히 살펴보며 놀라고(16-17절), 열방의 모든 왕들이 자기 집에서 영광 중에 자는 것과 달리 그는 자기 무덤에서 내쫓겨 밟힌 시체처럼 됩니다(18-20절). 마지막으로 여호와께서 친히 말씀하십니다. 이름과 남은 자와 아들과 후손을 바벨론에서 끊으시고, 고슴도치의 굴혈과 물웅덩이가 되게 하시며, 멸망의 빗자루로 청소하실 것입니다(21-2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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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사야 13장에서 시작된 열방 신탁은 14장에서 곧바로 방향을 한 번 틀었다가 다시 이어집니다. 김필회 교수에 따르면 13-23장은 주제와 대상에 따라 바벨론의 멸망(13:1-22), 이스라엘의 회복(14:1-2), 바벨론 왕에 대한 애가(14:3-23), 앗수르 제국의 몰락(14:24-27), 블레셋에 대한 경고(14:28-32)로 나뉩니다. 오늘 본문은 이 가운데 이스라엘의 회복과 바벨론 왕에 대한 조롱의 노래를 함께 담고 있습니다.
# 특히 1-2절의 위치가 중요합니다. 김필회 교수는 "1-2절은 13:2-22와 14:3-23을 연결해주는 역할을 담당한다"고 정리합니다. 앞의 13장과 관련해서는 바벨론의 심판이 곧 이스라엘의 운명에 전환점이 됨을 보여주고, 뒤의 조롱의 노래와 관련해서는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와 정착하게 될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로 그 노래를 부르게 될 것임을 보여줍니다. 그러니까 4b절부터 시작되는 노래는 허공에 떠 있는 시가 아닙니다. 포로에서 풀려나 고향 흙을 다시 밟은 사람들의 입에서 터져 나올 노래입니다.
# 4절의 '노래'로 번역된 히브리어 마샬은 일반적으로 격언이나 잠언, 비유를 의미하지만 때로는 조롱의 노래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김필회 교수는 이 노래에 만가(輓歌), 곧 죽은 자를 위해 부르는 장례의 노래 양식이 섞여 있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죽은 자를 위해 부르는 만가에서 일부 양식을 빌어옴으로써 바벨론의 영화와 교만을 조롱할 뿐만 아니라 바벨론을 이미 죽은 존재로 간주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온 세상을 공포에 떨게 하는 그 제국은, 예언자의 눈에는 이미 장례를 치르는 중입니다. 아직 살아 있는 자를 위해 미리 부르는 장송곡, 이것이 오늘 본문의 장르입니다.
# 12-15절의 '아침의 아들 계명성'은 오랫동안 논쟁의 대상이었습니다. 히브리어 헬렐 벤 샤하르는 '빛나는 자, 새벽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금성을 가리킵니다. 칠십인역은 이를 헤오스포로스로, 라틴어 불가타는 루시퍼로 옮겼고, 여기서 후대에 '루시퍼가 곧 사탄'이라는 대중적 관념이 생겨났습니다. 그러나 김필회 교수는 이 본문에서 사탄이나 천사의 타락을 전혀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는 "예언자는 아마도 의도적으로 땅에 떨어진 신적 존재에 관한 신화에 뿌리를 두고 있는 이 이름을 폭군에게 적용한 것 같다"고만 말합니다. 곧 예언자는 당대 사람들이 알고 있던 신화의 이름 하나를 빌려와 인간 폭군의 교만을 조롱한 것입니다. 종교개혁자 칼빈도 이 본문이 천사의 교만이 아니라 인간의 교만을 말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우리는 이 본문에서 무엇보다 먼저 '사람이 하나님이 되려 할 때 어떻게 되는가'를 읽어야 합니다.
# 13-14절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뭇 별'과 '북극 집회의 산'은 고대 가나안의 신화적 표상을 배경으로 합니다. 가나안 신화에서 만신전의 최고 통치자 엘은 별들 위에 거처를 가지고 있었고, 신들은 북쪽 끝의 산 차폰에서 모임을 갖고 역사와 민족들의 운명을 결정한다고 여겨졌습니다. 폭군은 바로 그 자리, 신들의 회의를 주재하는 최고신의 자리를 탐냅니다. 김필회 교수는 이를 이렇게 요약합니다. "이스라엘의 입장에서 보자면, 폭군은 만왕의 왕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자리에 도전한다." 교만은 결국 자리싸움입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자기를 앉히려는 시도입니다.
# 역사적으로 이 신탁이 겨냥하는 바벨론은 나보폴라살과 느부갓네살이 세운 신바벨론 제국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끝까지 폭군의 이름을 부르지 않습니다. 김필회 교수는 "이 폭군의 이름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는 점을 짚어 줍니다. 이름이 지워졌기에 이 노래는 한 시대의 한 인물에게만 갇히지 않습니다. 느부갓네살에게도, 로마의 황제에게도, 20세기의 독재자에게도, 그리고 오늘 우리 안의 작은 폭군에게도 이 노래는 그대로 겨누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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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절 어머니의 태에서 우러나오는 긍휼, 다시 택하시는 사랑
하나님은 자녀를 낳은 어머니의 태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으로, 끊어진 자리에서 다시 택하시고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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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야곱을 긍휼히 여기시며 이스라엘을 다시 택하여 그들의 땅에 두시리니 나그네 된 자가 야곱 족속과 연합하여 그들에게 예속될 것이며"(사 14:1). 바벨론의 폐허를 그리던 예언의 붓끝이 방향을 바꿉니다. 심판의 장면 다음에 곧바로 놓인 것은 긍휼입니다. 2절에서는 민족들이 이스라엘을 데리고 본토로 돌아오고, 전에 자기를 사로잡던 자들을 사로잡고 자기를 압제하던 자들을 주관하는 완전한 역전이 선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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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휼히 여기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라함은 자궁을 뜻하는 명사 레헴에서 파생된 동사입니다. 김필회 교수는 이 단어가 "자녀에게 아무런 대가 없이 베푸는 어머니의 헌신적인 사랑을 표현한다"고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가장 강력한 표현이 여기 놓였습니다. 아이가 잘해서가 아니라 자기 몸에서 나왔기 때문에 품는 사랑, 계산이 시작되기 이전의 사랑입니다.
'다시 택하여'라는 표현도 그냥 지나칠 수 없습니다. 김필회 교수는 여기 붙은 '다시'가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신학적 단절이 초래됐음을 전제하는 것 같다"고 봅니다. 주전 587년의 파국 앞에서 많은 사람들은 선택신앙의 종말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셨다는 그 믿음이 무너진 성벽과 함께 무너졌습니다. 예언자는 그 패배주의에 맞서 '선택의 갱신'을 선포합니다. 신명기 신학의 문법으로 따지자면 '새로운 선택'이란 성립할 수 없는 말이지만, 김필회 교수의 표현대로 "당신 자녀 이스라엘에 대한 그분의 일방적인 사랑이 이를 가능하게" 만듭니다.
한 가지 더 눈여겨볼 것은 회복의 문이 이방인에게도 열린다는 사실입니다. '나그네 된 자'가 야곱 족속과 연합합니다. 가나안 땅에 함께 사는 이방인들에게 회복된 이스라엘의 문호가 개방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자기 백성 안에서 닫히지 않습니다. 이 문은 훗날 그리스도 안에서 활짝 열려, 멀리 있던 자들이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지고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헐어 버리시는 데까지 이릅니다(엡 2:13-14).
다만 2절의 역전을 읽을 때는 조심해야 합니다. 김필회 교수는 여기에 분명한 경고를 답니다. 억눌렸던 자가 억눌렀던 자에게 상응하는 복수를 기대하는 것은 심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이러한 구절들에 근거하여 복수를 신학적으로 정당화시키는 행태는 말씀 선포의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감추어진 복수심을 합리화시키려는 이기적 해석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절망의 밑바닥에 있는 자들에게 주어진 위로이지, 힘을 되찾은 자들의 보복 면허가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 정의의 부정적 표현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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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신앙이 무너져 본 적 있는 자리를 떠올려 봅니다. 사업이 무너지고, 관계가 끊어지고, 오래 붙들었던 확신이 통째로 흔들린 자리 말입니다. 그때 우리를 다시 세우는 것은 우리의 결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다시'입니다. 다시 택하신다는 이 말씀은, 한 번 실패한 사람에게 하나님이 여전히 남겨 두신 자리가 있다는 선언입니다.
광양사랑의교회는 이 '다시'의 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한 번 넘어진 사람이 다시 설 수 있는지, 실수한 사람의 이름이 계속 불리는지, 오래 보이지 않던 얼굴이 돌아왔을 때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자리를 내어 주는지를 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그네 된 자'를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도시에 함께 살아가는 이주노동자와 결혼이주여성과 유학생들, 교회 문턱을 처음 넘는 이들에게 우리의 문이 실제로 열려 있는지 점검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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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8절 안식을 주시는 날, 온 땅이 함께 부르는 노래
하나님은 압제자의 몽둥이와 규를 꺾으셔서 사람에게만이 아니라 온 피조 세계에 쉼을 돌려주시는 해방자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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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너를 슬픔과 곤고와 및 네가 수고하는 고역에서 놓으시고 안식을 주시는 날에"(사 14:3) 백성은 바벨론 왕에 대하여 노래를 지어 부릅니다. "압제하던 자가 어찌 그리 그쳤으며 강포한 성이 어찌 그리 폐하였는고"(사 14:4). 여호와께서 악인의 몽둥이와 통치자의 규를 꺾으셨습니다(5절). 그 결과 "이제는 온 땅이 조용하고 평온하니 무리가 소리 높여 노래하는도다"(사 14:7). 놀랍게도 향나무와 레바논의 백향목까지 기뻐하며 "네가 넘어져 있은즉 올라와서 우리를 베어 버릴 자 없다"고 말합니다(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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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절의 '안식'은 관념적인 마음의 평온이 아닙니다. 김필회 교수는 여호와께서 주시는 안식이 "일차적으로 주변 적들의 위협과 침략으로부터 안전하게 지켜주시는 그분의 보호를 그 내용으로" 갖는다고 설명합니다. 신명기와 여호수아가 말하는 그 '쉼'입니다(신 12:10; 수 23:1). 그리고 후반절의 '고역'이라는 단어는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당하였던 강제노역을 회상시킵니다. 곧 바벨론으로부터의 해방을 애굽 종살이로부터의 해방과 겹쳐 놓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늘 같은 방식으로 기억되고 다시 일어납니다.
5절의 '몽둥이와 규'는 왕의 손에 들린 홀로 그의 통치권을 상징합니다. 6절이 보여주는 그 통치의 실체는 참혹합니다. 성을 내며 사정없이, 쉴 새 없이 민족들을 매질하고 짓밟는 것입니다. 김필회 교수의 표현대로 "민족들을 매질하고 짓밟는 것 자체가 압제자의 존재목적"이었습니다. 폭력 외에는 다른 언어를 갖지 못한 권력, 그것이 제국입니다.
그런데 이 노래에서 가장 아름다운 대목은 8절입니다. 폭군이 쓰러지자 사람만 기뻐한 것이 아닙니다. 레바논의 백향목이 기뻐합니다. 백향목은 많은 나라들이 탐내던 최고의 목재였고, 제국은 궁전과 신전을 짓기 위해 그 숲을 남벌했습니다. 김필회 교수는 이렇게 정리합니다. "나무를 남벌하던 폭군이 죽자 레바논의 향나무와 백향목이 환성을 지른다. 세상과 자연이, 모든 피조세계가 한 마음으로 기뻐한다." 인간의 교만은 사람만 착취하지 않습니다. 땅과 숲과 강까지 함께 신음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바울은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고,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을 고대한다고 했습니다(롬 8:19,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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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기다리는 구원이 사람 몇 명의 영혼 구원에 머물러 있지 않은지 돌아봅니다. 성경이 그리는 구원의 날에는 나무가 기뻐하고 땅이 숨을 돌립니다. 우리 신앙이 이웃과 피조 세계를 함께 품고 있는지, 아니면 나와 내 가족의 안녕에서 멈춰 서 있는지 물을 일입니다.
또 하나, 3절이 말하는 '안식을 주시는 날'을 오늘 우리 삶의 리듬으로 붙들어야 합니다. 쉼 없이 몰아세우는 시대에 주일을 지키고, 손을 놓고, 아무 성과 없이 하나님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을 확보하는 것 자체가 저항입니다. 광양사랑의교회가 성도들에게 더 많은 일이 아니라 참된 쉼을 줄 수 있는 공동체인지, 우리의 사역 일정이 사람을 살리는지 소진시키는지 정직하게 점검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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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11절 스올의 소동, 구더기가 요가 되고 지렁이가 이불이 되는 자리
하나님은 죽음 너머까지 다스리시며, 사람이 쌓아 올린 영화가 어디까지 유효한지를 마지막 자리에서 드러내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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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이 지하로 내려갑니다. "아래의 스올이 너로 말미암아 소동하여 네가 오는 것을 영접하되"(사 14:9) 세상의 모든 영웅을 움직이게 하고 열방의 모든 왕을 그들의 왕좌에서 일어서게 합니다. 그들이 입을 모아 말합니다. "너도 우리 같이 연약하게 되었느냐 너도 우리 같이 되었느냐"(사 14:10). 그리고 마지막 한 줄이 서늘합니다. "네 영화가 스올에 떨어졌음이여 네 비파 소리까지로다 구더기가 네 아래에 깔림이여 지렁이가 너를 덮었도다"(사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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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회 교수는 이 장면을 "침묵만이 지배하던 스올이 갑자기 소란을 떤다"고 묘사합니다. 고대인들의 사고에 의하면 지상에서의 신분과 지위가 스올에서도 형식상 유지되어, 왕들은 통치하지는 않지만 보좌에 앉아 영원한 잠을 잔다고 여겨졌습니다. 죽은 자들은 극도로 약화된 생명력을 가진 채 그림자와 같은 존재로 지냅니다. 히브리어 본문은 이들을 러파임이라 부르는데, 개역개정은 칠십인역을 따라 이 단어를 옮기지 않았습니다. 현대 역본들은 '죽은 자들의 영들' 또는 '그림자들'로 번역합니다.
먼저 내려간 왕들의 조롱에는 오래 눌려 있던 감정이 배어 있습니다. "너도 우리 같이 되었느냐"라는 말은 곧 "너도 우리처럼 죽었구나"라는 뜻입니다. 압도적인 힘 앞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던 자들에게는 절대권력이 무너졌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한 기쁨이 됩니다.
11절이 그리는 마지막 그림은 잔인할 만큼 정확합니다. 왕궁의 위엄을 채우던 비파 소리가 스올로 떨어지고, 세상 왕에게 마땅히 주어져야 할 예우가 거절됩니다. 김필회 교수의 말 그대로 "그에게는 요로 구더기가, 이불로 지렁이가 주어집니다." 최고급 침구 위에서 잠들던 사람이 마지막에 덮는 것이 무엇인지를 성경은 눈을 돌리지 않고 보여줍니다. 예수님이 들려주신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가 겹쳐집니다.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지어 여러 해 쓸 물건을 쌓아 두고 평안히 쉬자고 말하던 그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눅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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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본문은 우리에게 마지막 자리에서 되돌아보는 눈을 요구합니다. 내가 지금 쌓고 있는 것 가운데 무엇이 그 자리까지 따라오는지를 묻는 것입니다. 직함도, 실적도, 통장의 숫자도 따라오지 않습니다. 따라오는 것은 사랑한 만큼입니다.
동시에 이 말씀은 눌려 지내는 이들에게 주는 위로이기도 합니다. 지금 나를 짓밟는 힘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 그 힘도 언젠가 같은 자리에 눕는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오늘의 억울함을 견딜 힘을 얻습니다. 다만 그 앎이 복수의 상상이 아니라 하나님께 맡기는 기도가 되게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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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15절 아침의 아들 계명성,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먼 곳으로
성자 예수 그리스도는 스스로 높아지려다 떨어진 인간과는 정반대로, 스스로 낮아져 내려오심으로 우리를 일으켜 세우신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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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사 14:12). 이어 폭군의 독백이 인용됩니다.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앉으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가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사 14:13-14). 그러나 결말은 한 줄입니다. "그러나 이제 네가 스올 곧 구덩이 맨 밑에 떨어짐을 당하리로다"(사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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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회 교수는 이 단락에 '폭군[헬렐]의 추락'이라는 제목을 붙이고 이렇게 요약합니다. "세상을 정복한 폭군의 교만은 끝이 없어 하늘에까지 오르려 한다. 그러나 민족들뿐만 아니라 신들마저도 무시하는 폭군은 권력과 영화의 최정점에 도달했을 때 한 순간에 스올로, 구덩이의 맨 밑바닥으로 떨어진다. 교만의 종착점은 영화가 아니라 멸망일 뿐이다."
12절이 만가의 전형적 요소인 '어찌 그리'로 시작하는 것도 의미심장합니다. 장례의 노래 형식을 빌려 아직 살아 있는 제국의 죽음을 미리 부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라는 호칭은 새벽 동쪽 하늘에서 가장 밝게 빛나는 별, 곧 금성을 가리킵니다. 금성의 운명은 정해져 있습니다. 가장 밝게 빛나는 그 별은 해가 뜨면 반드시 사라집니다. 예언자는 이 이름 하나로 폭군의 전 생애를 압축했습니다. 잠깐 가장 밝았고, 해가 뜨자 없어졌습니다.
13-14절의 독백에서 '내가'라는 말이 다섯 번 반복됩니다. 올라가고, 높이고, 앉고, 올라가고, 같아지겠다는 것입니다. 김필회 교수는 여기에 하늘과 신들의 산이라는 두 개의 신화적 표상이 섞여 있다고 설명합니다. 가나안 신화의 최고신 엘은 별들 위에 거처를 가지고 있었고, 신들은 북쪽 끝의 산 차폰에 모여 역사와 민족들의 운명을 결정했습니다. 폭군은 그 회의의 상석을 노립니다. "이스라엘의 입장에서 보자면, 폭군은 만왕의 왕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자리에 도전한다"는 것입니다.
15절은 13절의 정확한 반전입니다. 하늘에 오르려던 자가 스올로 떨어지고, 북쪽 가장 먼 곳의 산에 오르려던 자가 구덩이의 가장 먼 곳으로 떨어집니다. 김필회 교수의 표현대로 "폭군은 자신이 원했던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으로 전락"합니다. 창세기 3장에서 뱀이 건넸던 그 제안, 곧 "하나님과 같이 되어"(창 3:5)라는 유혹이 인류사 내내 되풀이되고 있는 것입니다. 바벨탑을 쌓으며 "우리 이름을 내고"(창 11:4)라고 말하던 그 입술과 이 독백은 같은 입술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정반대의 길을 걸으신 한 분을 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빌 2:6-7). 폭군은 하나님과 같아지려고 올라가다 떨어졌고,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동등하신 자리를 붙들지 않고 스스로 내려오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이셨습니다(빌 2:9). 떨어지는 것과 내려오는 것은 다릅니다. 떨어짐은 교만의 끝이고, 내려옴은 사랑의 시작입니다. 참고로 신약은 '샛별'이라는 이름을 다른 분께 돌려 드립니다.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벧후 1:19). 새벽별의 진짜 주인은 잠깐 빛나다 사라지는 폭군이 아니라, 지지 않는 빛이신 그리스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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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만은 대개 큰 소리로 오지 않습니다. '내가'라는 말이 하루에 몇 번 나오는지를 세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내가 했고, 내가 옳고,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문장이 늘어날 때 우리는 이미 그 독백을 시작한 것입니다. 목회자에게도, 직분자에게도, 부모에게도 이 유혹은 똑같이 찾아옵니다.
교회는 특히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명분으로 하나님의 자리에 앉는 일이 실제로 벌어지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양심 위에 군림하고, 반대 의견을 신앙 없음으로 몰고, 성장을 위해 사람을 수단으로 쓰는 순간 우리는 북극 집회의 산에 오르고 있는 것입니다. 광양사랑의교회가 붙들 자리는 높은 자리가 아니라 낮은 자리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내려오신 그 길을 따라 낮아지는 것, 그것이 우리가 유일하게 높아지는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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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23절 무덤을 얻지 못한 왕과 멸망의 빗자루
하나님은 역사의 마지막 청소를 친히 하시는 분이며, 사람에게 맡기신 권력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를 끝까지 물으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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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가 다시 지상으로 돌아옵니다. 사람들이 그의 주검을 자세히 살펴보며 말합니다. "이 사람이 땅을 진동시키며 열국을 놀라게 하며 세계를 황무하게 하며 성읍을 파괴하며 그에게 사로잡힌 자들을 집으로 놓아 보내지 아니하던 자가 아니냐"(사 14:16-17). "열방의 모든 왕들은 모두 각각 자기 집에서 영광 중에 자건마는 오직 너는 자기 무덤에서 내쫓겼으니"(사 14:18-19) 밟힌 시체와 같습니다.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네가 네 땅을 망하게 하였고 네 백성을 죽였으므로"(사 14:20). 마지막으로 여호와께서 친히 말씀하십니다. 이름과 남은 자와 아들과 후손을 바벨론에서 끊으시고(22절), "고슴도치의 굴혈과 물 웅덩이가 되게 하고 또 멸망의 빗자루로 청소하리라"(사 14:23)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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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근동에서 왕의 무덤은 그의 통치가 정당했음을 보여주는 마지막 증서였습니다. 그런데 이 왕에게는 무덤이 없습니다. 김필회 교수는 "다른 왕들은 영광 중에 자기 무덤에서 자지만 세상을 두려움과 무력으로 정복하였던 폭군에게는 무덤조차도 허락되지 않는다"고 정리합니다. '가증한 나무 가지'라는 표현은 때로 '사람들이 꺼리는 유산아'로도 번역되며, 저주받은 죽음을 뜻합니다.
20절이 밝히는 이유가 오늘 우리에게 가장 아픈 대목입니다. 자기 땅을 망하게 하고 자기 백성을 죽였기 때문입니다. 김필회 교수는 여기에 한 문장을 답니다. "왕은 제 백성의 운명에 책임을 져야 한다." 권력은 사람을 살리라고 맡겨진 것입니다. 그것으로 사람을 죽인 자에게는 마지막 예우조차 남지 않습니다.
21절의 명령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그들의 조상들의 죄악으로 말미암아'라는 표현은 이 폭군 이전에 이미 여러 명의 폭군이 있었음을 전제합니다. 악은 스스로 확대재생산되며 대를 이어 자랍니다. 본문의 폭군은 그 긴 과정이 정점에 이르렀을 때 세력을 휘두른 인물입니다. 그리고 '성읍들로 세상을 가득하게 하다'는 표현은 정복자들이 점령지에 성읍을 세우고 자기 이름을 붙이던 오래된 관행을 가리킵니다. 자기 이름을 세상에 도배하려는 욕망, 그것이 제국의 본능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하나님께서 이 심판을 누구를 통해 이루시는지 본문이 전혀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명령을 받는 '너희'가 누구인지 본문은 침묵합니다. 심판의 도구는 부차적입니다. 중요한 것은 심판하시는 분이 누구신가입니다. 그리고 22-23절에서 마침내 여호와께서 1인칭으로 나서십니다. "내가 일어나", "내가 또". 그 화려하던 제국이 고슴도치의 굴혈과 물웅덩이가 됩니다. 김필회 교수는 '물웅덩이'라는 표현이 "유브라데와 그 지류들의 범람으로 바벨론이 자주 침수를 경험하기에 의도적으로 선택된 것 같다"고 봅니다. 문명의 젖줄이던 강이 폐허의 늪이 되는 것입니다.
'멸망의 빗자루'라는 이미지도 인상적입니다. 하나님은 벼락이 아니라 빗자루를 드십니다. 요란하지 않게, 그러나 남김없이 쓸어내십니다. 세례 요한이 오실 이를 소개하며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마 3:12)라고 한 것과 같은 그림입니다. 하나님의 정리는 조용하고 철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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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씀 앞에서 우리는 각자에게 맡겨진 작은 권력을 점검하게 됩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교회에서 우리는 누구나 어느 정도의 권력을 쥐고 있습니다. 그 권력으로 사람이 살아나고 있는지 죽어 가고 있는지가 마지막 질문입니다. 부모의 권위가 자녀를 세우고 있는지 짓누르고 있는지, 직분의 권위가 성도를 섬기고 있는지 부리고 있는지 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름에 대해 생각합니다. 폭군은 성읍마다 자기 이름을 붙였지만 결국 이름이 끊어졌고, 아무 힘 없는 백성의 하나님은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사 43:1)고 하십니다. 세상에 이름을 남기려 애쓰기보다 하나님의 손바닥에 새겨진 이름으로 사는 것이 복입니다. 광양사랑의교회가 교회의 이름을 내는 일보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일에 더 힘쓰는 공동체이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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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어머니의 태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으로 우리를 품으시는 하나님,
무너진 자리에서 우리를 다시 택하신 그 은혜를 오늘 기억합니다.
한 번 넘어졌다고 끝난 것이 아님을,
우리를 향한 주님의 '다시'가 아직 유효함을 믿게 하옵소서.
우리 교회가 넘어진 이들이 다시 서는 자리가 되게 하시고,
나그네 된 이들에게 문턱 낮은 집이 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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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제자의 몽둥이를 꺾으시고 온 땅에 쉼을 돌려주시는 하나님,
사람만이 아니라 나무와 땅과 강까지 함께 숨 쉬게 하시는
주님의 넓은 구원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옵소서.
쉼 없이 몰아세우는 시대 한복판에서
주님이 주시는 참된 안식을 누리게 하시고,
그 안식을 우리 곁의 지친 이웃과도 나누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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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너머까지 다스리시는 하나님,
비파 소리로 채우던 영화가 마지막에 무엇으로 덮이는지를 보았습니다.
헛된 것에 마음을 쏟느라 정작 남을 것을 잃지 않게 하시고,
오늘 우리가 쌓는 것이 사랑인지 욕심인지 분별하게 하옵소서.
지금 눌려 지내는 이들에게는
그 힘이 영원하지 않다는 소망을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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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낮아져 우리에게 내려오신 주 예수 그리스도여,
'내가'라는 말로 채워지는 우리의 독백을 부끄러워하게 하옵소서.
높아지려다 떨어지는 길이 아니라
낮아져서 살리는 길을 걷게 하시고,
잠깐 빛나다 사라지는 새벽별이 아니라
지지 않는 빛이신 주님만 바라보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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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마지막을 친히 정리하시는 하나님,
우리에게 맡기신 작은 권력이 사람을 살리는 데 쓰이게 하옵소서.
가정에서, 일터에서, 교회에서
우리의 자리가 누군가를 짓누르는 자리가 되지 않게 하시고,
세상에 이름을 내려 애쓰기보다
주님이 불러 주시는 이름으로 사는 기쁨을 알게 하옵소서.
이 모든 말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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