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09:08-10:04 지속되는 배역에 임할 전능자의 펴신 손과 자멸하는 탐욕의 불길
: 위선적 종교와 불의한 법령을 꺾으시는 야웨의 공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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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9장 8절-10장 4절은 하나님의 거듭된 징계와 경고에도 불구하고 완악한 교만과 사회적 불의를 고집하는 북이스라엘(에브라임과 사마리아 거민)의 총체적 타락과 비참한 몰락 과정을 4개의 대칭적 단락으로 생생하게 폭로하는 예언적 판결문입니다. 하나님은 무너진 성읍 앞에서 자신들의 자원으로 얼마든지 재기할 수 있다고 장담하는 백성들의 완고함을 아람과 블레셋을 들어 심판하십니다. 또한 백성들을 바른 길로 이끌지 않고 파멸의 구렁텅이로 미혹한 종교·정치 지도자들을 단숨에 끊어 버리시며, 형제 지파끼리 아귀다툼을 벌이며 서로를 삼키는 자멸적인 내전과 사회적 해체를 겪게 하십니다. 마지막으로 사회적 약자들을 합법적으로 탈취하기 위해 불의한 법령과 사법 제도를 구조화한 기득권층을 향해 ‘화(禍)’를 선언하시며, 그들이 쌓아 올린 모든 세속적 영화가 다가올 앗수르의 폭풍 같은 전란 속에 아무런 보호막이 되지 못한 채 스올의 수치 아래 주저앉게 될 것임을 천명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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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적·시대적 배경 : 주전 8세기 후반, 북이스라엘은 아람 왕 르신과 동맹을 맺고 남유다를 침공한 ‘시리아-에브라임 전쟁(주전 734-732년)’의 주역이었습니다. 격동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그들은 역사의 주재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온전히 경외하기보다 제국의 힘과 군사력, 정략적 동맹을 신뢰하였습니다. 본문은 제국주의 앗수르의 무자비한 침략으로 나라가 만신창이가 되어가는 비참한 전란의 위기 속에서 선포되었습니다.
# 제의 및 정경적 배경 : 북이스라엘은 벧엘과 단을 중심으로 외견상 성대한 제의적 번영을 누렸으나, 일상의 윤리는 처참하게 파탄 나 있었습니다. 정경적 관점에서 이사야 9:8-10:4은 앞선 5:25-30의 준엄한 심판 사상과 치밀하게 맞물려 있으며, 각 단락마다 반복되는 "그럴지라도 여호와의 진노가 돌아서지 아니하며 그의 손이 여전히 펴져 있으리라"는 후렴구를 통해 인간의 완악함이 자초한 심판의 집요함과 절대적 정당성을 논증하는 수사학적 절정을 이룹니다.
# 인문학적·철학적 배경 : 본문은 죄가 지닌 ‘자기파괴적 속성’과 ‘구조적 불의’의 역학관계를 인문학적으로 진단합니다. 이사야는 탐욕이 제어되지 않을 때 형제 공동체가 서로를 뜯어먹는 야만(Barbarianism) 상태로 귀환함을 고발하며, 권력층이 불의를 합법화하기 위해 어떻게 법과 제도를 왜곡하는지 ‘법철학적 부패’의 본질을 예리하게 간파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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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8-12 징계 속에서도 고집하는 완악한 복구와 자기 확신의 교만
삼위 하나님은 당신의 살아 있는 말씀을 역사 속에서 반드시 사건으로 성취하시며, 심판의 경고 앞에서도 인본주의적 재기만을 모색하는 교만한 지성을 철저히 무너뜨리시는 역사의 주재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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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께서 야곱에게 말씀을 보내시어 이스라엘에 임하게 하셨습니다. 에브라임과 사마리아 주민은 벽돌이 무너졌으나 다듬은 돌로 쌓고 뽕나무가 찍혔으나 백향목으로 대신하리라며 교만하고 완악한 말을 내뱉습니다. 이에 여호와께서 르신의 대적을 일으켜 그들을 치게 하사, 앞의 아람 사람과 뒤의 블레셋 사람이 입을 벌려 이스라엘을 삼키게 하십니다. 그럼에도 진노가 쉬지 않고 손이 펴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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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절의 "말씀을 보내셨다"는 묘사는 구약 예언 신학의 독특하고도 강력한 실재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단순한 인간 예언자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역사 속에 들어가 스스로를 실제화(사건화)시키는 독립적이고 살아 있는 ‘말씀(다바르)’을 보내셨습니다. 히브리적 사상 속에서 하나님의 공의로운 말씀은 결코 허공에 흩어지지 않고, 역사 한복판에서 실제적인 심판의 사건으로 결실을 맺습니다.
교수님은 또한 이 말씀의 본질이 "최근 공동체에 닥친 재난과 정세의 이면에 흐르는 하나님의 목적과 의도를 성도들이 명확히 알아내어 영적 대책을 세우라는 뜻"이라고 풀이하십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그 아픈 매를 맞으면서도 오히려 "교만(하나님을 향한 적대적 독립선언이자 완악한 자기주장 의지)"으로 대응했습니다. "벽돌이 무너졌으나 다듬은 돌로 쌓고, 뽕나무가 찍혔으나 백향목으로 대신하겠다"는 그들의 장담은, 창조주의 징계 앞에서도 상하고 통회하는 회개 없이 오직 자신들이 구축한 물질적 자원과 극복 능력으로 얼마든지 재기할 수 있다는 오만한 인본주의적 선언입니다. 이러한 완고한 자기 확신은 결국 아람과 블레셋이라는 외적을 통한 사정없는 진멸의 몽둥이를 부르는 사법적 필연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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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 삶의 이면은 어떻습니까? 세속화의 물결과 윤리적 붕괴, 그리고 사회적 신뢰의 추락이라는 뼈아픈 하나님의 징계적 경고(무너진 벽돌) 앞에서도, 우리는 상하고 통회하는 가슴으로 엎드리기보다 '더 크고 화려한 예배당(다듬은 돌)', '세련된 프로그램과 재정적 시스템(백향목)'을 구축하면 언제든 옛 기득권의 영광을 복구할 수 있다는 교만한 인본주의적 대책에만 골몰해 있지는 않습니까?
진정으로 잘 일어서고 건강하게 회복되려면, 먼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우리의 무능과 무력함을 솔직하게 대면하고 철저히 깨어져 무너져야 합니다. 세상의 번영을 의지하려던 우리의 얄팍한 계산기와 자기주장 의지를 이 시간 십자가 앞에 완전히 내려놓고, 오직 전능하신 주님의 살아 있는 가르침(토라)만을 우리 생과 가정의 유일한 버팀목으로 삼는 철저한 순종을 회복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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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13-17 아첨의 설교로 백성을 미혹하는 눈먼 지도자들의 공멸(共滅)
하나님은 징계를 받으면서도 돌이키지 않는 완악한 세대를 분별하시며, 거짓 평화로 성도들을 영적 방황으로 미혹하는 외식적 인도자들을 가차 없이 끊어 버리시는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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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백성이 자신들을 치시는 여호와께로 돌아오지 않고 만군의 여호와를 찾지 않습니다. 이에 여호와께서 하루 사이에 머리와 꼬리, 종려가지와 갈대를 끊으시는데, 머리는 장로와 존귀한 자요 꼬리는 거짓말을 가르치는 선지자입니다. 백성을 인도하는 자가 그들을 미혹하니 인도를 받는 자들이 멸망을 당하고, 온 백성이 경건치 않아 망령되이 말하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의 장정과 약자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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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아픈 징계가 작동했음에도 북이스라엘은 여호와께로 돌아가는 대신, 다른 세속적 방도를 모색하며 회개를 거부했습니다. 이 공동체적 완악함의 배후에는 영적으로 파탄 난 지도층의 오도(誤導)가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이사야는 공동체의 ‘머리’인 장로와 귀족들을 질타하는 동시에, 거짓 평안을 예언하는 거짓 선지자들을 멸시받는 존재인 ‘꼬리’로 규정하여 폭로합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공의를 선포해야 할 막중한 직임을 망각하고, 기득권층의 입맛에 맞는 영적 면죄부와 아첨의 신탁만을 공급함으로써 백성들의 눈과 귀를 가려 파멸의 길로 미혹(타아, 방황하게 함)하였습니다.
이러한 눈먼 인도자들의 악행은 공동체 전체가 입으로 "망령되이 말하는" 집단적 도덕 불감증과 실천적 무신론을 낳았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미래를 짊어질 장정들을 기뻐하지 않으시고, 심지어 고아와 과부 같은 사회적 약자들마저 신적 긍휼의 범주에서 외면하시는 혹독한 영적 유기(Abandonment)의 형벌을 내리십니다. 이는 율법과 정의의 기초가 무너진 예배 공동체는 그 어떤 종교적 이름이나 직분으로도 진노의 손길을 피해 갈 수 없음을 보여주는 무서운 종말론적 경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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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한국교회의 강단과 중직자들의 영적 실존은 과연 어떠합니까? 우리는 성도들이 삶 속에서 불의와 타협하고 일상의 정의를 저버린 채 살아가고 있음에도, 주일 예배당에 나와 헌금하는 것으로 "복을 받았다"며 안일한 안심을 주는 거짓 평화(꼬리의 설교)에 익숙해져 있지는 않습니까? 죄를 죄로 지적하지 않고, 징계 속에서 여호와의 사인(Sign)을 읽어내지 못하도록 만드는 아첨의 영성은 결국 공동체 전체를 구덩이로 끌고 가는 소경의 길입니다.
우리는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의 가르침을 왜곡하는 영적 기만을 단호히 버려야 합니다. 귀를 즐겁게 하는 달콤한 가짜 안식을 탐하지 말고, 잠든 양심을 세차게 흔들어 깨우는 준엄한 말씀의 책망 앞에 정직하게 노출되어야 합니다. 지도자들부터 상하고 통회하는 회개로 주의 얼굴을 구할 때, 비로소 성도들은 세속적 방황(미혹)을 멈추고 온전한 생명의 길로 곧게 행진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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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18-21 탐욕의 불길이 삼켜버린 지파의 반목과 사회적 아사(餓死)
하나님은 이웃을 향한 자비와 공의를 저버린 채 세속적 소유욕에 사로잡힌 인생들을 그 탐욕이 지닌 파괴적인 소멸의 불길 속에 스스로 자멸하도록 내버려 두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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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행은 불타오르는 것 같아서 가시와 찔레를 삼키며 빽빽한 수풀을 살라 연기가 위로 올라가게 합니다. 여호와의 진노로 인해 이 땅이 불타며 백성은 불타는 섶나무와 같아서 사람이 자기 형제를 아끼지 않습니다. 우편으로 움켜쥐어도 주리고 좌편으로 먹어도 배부르지 못하여 각각 자기 팔의 고기를 먹으며, 므낫세는 에브라임을 에브라임은 므낫세를 삼키고 또 합세하여 유다를 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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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행하는 악행을 무섭게 번져가는 ‘불길’의 이미지로 묘사합니다. 개인의 내면에서 제어되지 않고 타오르는 불의와 탐욕의 불꽃은 처음에는 ‘가시와 찔레’로 대변되는 사회적 약자들의 인권을 태우지만, 멈추지 않고 번져 결국 공동체의 단단한 뼈대인 ‘빽빽한 수풀’ 전체를 사질러 온 국토를 황폐화시킵니다.
이 우상화된 탐욕의 끝은 영적·도덕적 아사(Starvation)입니다. "우편으로 움켜쥐고 좌편으로 먹어도 배부르지 못한다"는 날카로운 고발은,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소유와 쾌락에만 탐닉하는 인간이 직면할 극단적인 실존적 허기증을 뜻합니다. 그들은 이 채워지지 않는 이기적 굶주림을 해결하기 위해 급기야 "자기 팔의 고기"를 뜯어먹듯 한 형제이자 동맹이었던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서로를 물고 뜯고 삼키며, 끝내 남유다마저 정복하기 위해 군사적 칼날을 세우는 극단적인 사회적 붕괴와 공멸의 지옥도를 연출합니다. 여호와와의 언약적 관계를 파괴한 백성들의 최종 종착지는 형제마저 아끼지 않는 철저한 윤리적 야만과 동물적 생존경쟁뿐임을 성경은 폭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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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와 한 몸인 다른 지파들을 짓밟고 삼켜서라도 자신의 굶주린 이익을 채우려 했던 이스라엘의 광포한 모습은, 오늘날 무한 경쟁과 승자독식의 가치관으로 얼룩진 대한민국 사회의 뼈아픈 자화상입니다. 성도들마저 물질적 번영과 개인의 성공(움켜쥐는 욕망)에 취해, 이웃의 고통에는 지독하리만치 무관심한 채 다른 이들을 경쟁의 도구로 삼아 맷돌질하며 섶나무처럼 스스로를 불사르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는 소유의 신화가 주는 가짜 풍요의 마취에서 속히 깨어나야 합니다. 우리는 내 몫을 더 채우기 위해 이웃의 생존권을 갉아먹는 세상의 악한 시스템과 손을 끊어야 합니다. 가정과 일터에서 내 기득권과 고집을 십자가 앞에 기꺼이 태워 소멸시키고, 이웃을 향해 기꺼이 손해와 불편을 감수하며 사랑으로 양보하는 신앙의 자존심을 지켜냅시다. 우리가 탐욕의 불꽃을 끄고 화평을 심는 자가 될 때, 무자비한 분열의 세상 속에 하나님 나라의 샬롬이 따뜻하게 흘러가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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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1-4 약자의 권리를 박탈하는 악법(惡法)의 구조화와 피할 수 없는 수치
하나님은 기득권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불의한 제도와 법령을 고착화하는 지도층의 구조적 죄악을 국문하시며, 세속적 영화를 의지하는 교만을 전란의 수치 아래 철저히 해체하시는 공의의 재판장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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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한 법령을 만들며 불의한 말을 기록하고, 가난한 자를 불공평하게 재판하여 가련한 내 백성의 권리를 박탈하며 과부에게 토색하고 고아의 것을 약탈하는 자들에게 화가 임합니다. 벌하시는 날과 멀리서 오는 폭풍 같은 환난(앗수르) 때에 너희가 어떻게 하려느냐? 누구에게로 도망하며 너희의 영화를 어느 곳에 두겠느냐? 그들은 결국 포로된 자와 죽임당한 자들의 시신 아래 엎드러질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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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브라임 지배층이 저지른 죄악의 최종적이고 가장 파렴치한 형태는 개인의 불법을 넘어 정의를 해하는 불의한 법령(악법)을 제정하여 이를 구조화(Systematization)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대토지 축적과 약탈을 합법화하기 위해 법률가와 사법관의 문장력을 동원해 불의한 법령을 기록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왜곡된 법도를 도구 삼아 법적 지식과 대항할 힘이 없는 고아와 과부, 가난한 자들의 정당한 권리를 완전히 말살하고 토색질을 자행했습니다.
김필회 교수님의 탁월한 통찰에 따르면, "힘을 가진 자들이 노골적으로 약자를 괴롭히고 착취하여 쌓아 올린 불의한 사회 구조의 영화를 감히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포장하여 감사해서는 결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이 위선적인 입법자들을 향해 "화 있을진저(호이, 애곡의 소리)"를 선포하시며, 그들이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의지하던 물질적 ‘영화’가 ‘멀리서 폭풍우(쇼아)처럼 들이닥칠 앗수르의 칼날’ 앞에서 아무런 보호막이 되지 못함을 폭로하십니다. 하나님의 펴신 심판의 손길 앞에서, 교만을 떨던 그들은 살기 위해 포로들의 발바닥 아래 비굴하게 구푸리거나 비참한 전란의 시체 더미 아래 깔리는 참혹한 수치와 멸망을 당하게 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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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가 목도하는 자본 문명의 이면에는 이사야가 고발한 법적·구조적 불의가 가득합니다. 거대 자본과 기득권층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 연약한 노동자의 안전을 뒤로하고 서민들의 생존권을 외면하는 불의한 악법들이 입법이라는 이름으로 버젓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슬프게도 기독교 중직자들과 성도들이 이러한 불의한 사법적·경제적 약탈 구조 속에서 얻은 소득과 자산 증식을 두고 "하나님의 형통케 하시는 은혜"라고 감사 헌금을 드리며 간증하는 가증한 위선이 넘쳐납니다.
우리는 이 뼈아픈 경고 앞에 스스로를 준엄하게 대면해야 합니다. 직장과 사업 현장에서 타인의 정당한 몫을 박탈하여 내 지위를 넓히려는 구조적 불의에 편승하지 마십시오. 주일에만 교양 있는 예배자로 가면을 쓰지 말고, 세상 속에서 고아와 과부 같은 시대적 소외자들의 아픔을 진심으로 상고하며, 가난한 이들을 변호하고 돕는 일에 기꺼이 우리의 물질과 시간의 소유를 나누는 실질적인 공의를 세워가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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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역사의 정직한 보좌에 앉으사 온 땅의 행한 대로
선악 간에 보응하시는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
무너진 벽돌의 징계 앞에서도 상하고 통회하기는커녕
다듬은 돌과 백향목의 인본주의적 복구만을 내세우며
스스로의 완악한 힘과 자원을 자랑했던
우리의 지독한 영적 교만을 이 시간 눈물로 회개하오니 긍휼히 여겨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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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들의 삶을 하나님의 공의로 곧게 인도하기보다,
탐욕을 자극하고 기복을 합리화하는 거짓 선지자의 아첨에 취해
백성들을 미혹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던
우리의 눈먼 위선을 주님의 십자가 보혈로 깨끗하게 씻어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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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을 삼켜서라도 내 몫을 움켜쥐려던 탐욕의 불길에
스스로를 태우는 자멸적 어리석음에서 우리를 건져 주시고,
세상의 불의한 구조와 편법의 법망을 이용하여
약한 자들의 인권과 생존권을 짓밟고 쌓아 올린 가짜 영화를
더 이상 하나님의 축복이라 거짓되이 자랑하지 않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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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옵건대, 우리 가족들은 다가올 심판의 폭풍우 앞에서
아무 쓸모없이 흩어질 세상 제국의 헛된 보장을 구걸하지 않게 하옵소서.
오직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만을 우리 삶의 유일한 대로이자 깃발로 삼아,
가난한 이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무너진 가치를 보수해 내는
하나님의 거룩하고 신실한 그루터기로 우뚝 서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영원한 참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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