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05:01-17 기대했던 극상품 열매 대신 들포도를 맺은 이들을 향한 전능자의 탄식과 공의의 심판
독점과 방탕의 성읍을 어린 양의 초장으로 정화하시는 여호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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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에도 불구하고 의로운 열매를 맺지 못한 언약 백성을 고발하는 ‘포도원의 노래’와, 당시 유다 사회의 대표적인 두 가지 도덕적 배교(부동산 독점과 감각적 방탕)에 대한 준엄한 화(禍) 선언 및 심판을 다룹니다. 하나님은 땅을 파고 돌을 제하며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고 망대와 술틀까지 갖추어 극진히 포도원을 보살피셨으나, 좋은 포도 대신 악취 나는 들포도가 맺힌 실태를 보시고 울타리를 걷어 거칠어지게 하실 것을 선포하십니다 (1-7절). 이어서 이웃의 생존권을 박탈하는 탐욕적인 대토지 소유자들을 고발하시며 수확이 10분의 1로 급감할 황폐화를 예고하시고 (8-10절), 아침부터 밤까지 독주에 취해 여호와의 행하심에는 무관심한 자들을 스올의 삼킴을 통해 철저히 낮추십니다 (11-14절). 이 사법적 정화를 통해 오만하던 지배층은 굴복당하나, 만군의 여호와는 이 정련을 통해 홀로 의로우시다 높임을 받으시며, 억압받던 어린 양 같은 가난한 의인들은 평화로운 주님의 초장으로 인도될 것임을 선포합니다 (15-1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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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적·시대적 배경 : 주전 8세기 후반 남유다는 아람-북이스라엘 동맹의 위협과 신흥 제국 앗수르의 무자비한 팽창으로 인한 극심한 안보 위기를 겪고 있었습니다. 당시 남유다의 지도자들은 눈앞의 위기 속에서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뢰하기보다 군사적 무기와 이방의 힘을 요새로 삼으려 했습니다. 내적으로는 농민들의 땅을 착취하여 배를 채우는 고위 지배층의 도덕적 타락과 권력의 사유화가 극에 달해 있었습니다.
# 문화·제의적 배경 : 성소 안에서는 무수한 제물과 화려한 정교 의식이 번성했지만, 성소 문을 나서는 순간 일상에서는 이웃을 짓밟고 폭력을 행사하는 이중적인 위선이 고착화되어 있었습니다. 이사야는 포도원을 정성껏 가꾼 농부의 애간장이 타들어 가는 '포도원의 노래'라는 고도의 문화적 연가(戀歌) 형식을 빌려와 백성들을 정서적·영적으로 일깨웁니다.
# 정경적·신학적 배경 : 이사야 5장은 앞선 1-4장의 언약 고발과 회복 비전을 마무리하는 일종의 서론적 종착지이자, 6장에서 선포되는 '예언자 소명과 심판 결정'의 필연적인 사법적 이유를 제공하는 정경적 가교 역할을 합니다. 5장에서 나열되는 기득권층의 불의한 죄상은 6장의 가혹한 진노 신탁이 결코 하나님의 즉흥적인 감정이 아닌, 언약을 파기한 백성들이 마땅히 치러야 할 공의의 대가임을 논증합니다.
# 인문학적·철학적 배경 : 본문은 물질적 축적(독점)과 감각적 취함(쾌락)이 결합될 때 인간의 정신이 어떻게 마비되는지를 보여주는 실존주의적 분석을 담고 있습니다. 이사야는 쾌락에 탐닉하느라 하나님의 역사적 경영과 이웃의 아픔을 '생각하기 거부하는' 영적 무지(Anti-intellectualism)의 비참한 종말을 인문학적인 필체로 날카롭게 단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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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절 헌신적 사랑을 짓밟은 들포도의 배반과 찢어지는 주님의 심장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에게 모든 수고와 완벽한 사랑을 아낌없이 투자하시고 공의의 열매를 간절히 기다리시며, 배반당할 때 깊이 탄식하고 애통해하시는 신실한 농부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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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는 내가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그의 포도원을 노래합니다. 기름진 산에 땅을 파고 돌을 제하여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고, 망대를 세우고 술틀을 팠으나 좋은 포도가 아닌 들포도를 맺었습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 주민에게 판단을 촉구하시며, 이제 포도원의 울타리를 걷고 담을 허물어 황폐하게 하실 것이라 선언하십니다. 이 포도원은 이스라엘이고 그가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백성인데, 정의를 바라셨으나 도리어 포학이었고 공의를 바라셨으나 도리어 부르짖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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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는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과 수고의 은혜에도 불구하고, 언약 백성이 그것을 무위로 돌려 버렸을 때 창조주가 느끼시는 말할 수 없는 실망과 아픔을 이사야 특유의 세련된 운문으로 노래한 명작입니다. 하나님은 유다 백성을 가리켜 '내가 기뻐하시는 나무'라 부르시며 최적의 가나안 영토에 정성껏 심으셨습니다. 땅을 파고 이교도적 우상의 불순물(돌)을 제하며, 가장 고귀한 혈통의 '극상품 포도나무'(소레크)를 심으신 후, 안전을 위한 망대와 기쁨의 결실을 담을 술틀까지 완벽하게 예비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맺은 것은 먹을 수 없고 악취가 나는 '들포도'(베우쉬람)였습니다. 이 비극적인 가치 전도를 폭로하기 위해 이사야는 7절에서 구약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유명한 음성학적 언어유희(Wordplay)를 구사합니다.
"그들에게 정의(미쉬파트)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미스파흐)이요, 그들에게 공의(체다카)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체아카)이었도다."
발음은 매우 유사하지만 그 실체는 하늘과 땅 차이인 두 단어의 대비를 통해, 하나님이 기대하셨던 의로운 삶의 열매가 도리어 약자들의 눈물 젖은 비명으로 역전되었음을 고발합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이 애끓는 포도원의 아픔은 신약시대에 이르러 요한복음 15장의 참포도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속에서 기독론적으로 성취됩니다. 아버지가 가꾸시는 참포도나무이신 그리스도의 가지에 붙어 있지 않고는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으며, 불의와 탐욕의 열매를 맺는 가지는 결국 농부이신 아버지가 잘라버리실 것이라는 엄중한 하나님 나라 신학의 정수가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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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의 이 찢어지는 가슴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십자가 대속의 보혈과 값없는 칭의의 은혜라는 최고의 ‘극상품’ 복음의 씨앗을 심어주셨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교회가 세상 속에서 맺고 있는 열매는 과연 이웃을 살리는 순전한 '정의(미쉬파트)와 공의(체다카)'의 포도송이입니까, 아니면 세상과 다름없이 이기적인 성공과 번영만을 독식하며 소외된 자들에게 고통의 '부르짖음(체아카)'을 안겨주는 악취 나는 들포도입니까?
예배의 형식적 세련됨과 웅장한 프로그램에 안주하며 스스로 구원받은 자라 안심하는 위선적인 종교 생활에서 속히 돌이켜야 합니다. 일상의 한복판에서, 직장과 비즈니스 현장에서 도덕적 정직함을 회복하고 이웃을 온 정성으로 섬기는 구체적인 상생의 삶을 일구어 낼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케 해 드리는 참포도나무의 신실한 가지로 우뚝 서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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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10절 이웃의 생존권을 삼키는 탐욕의 독점과 임할 빈손의 저주
하나님은 자신의 부를 늘리기 위해 사회적 약자들의 삶의 터전을 빼앗는 탐욕적 독점을 엄히 심판하시고 역사의 정직한 보응을 시행하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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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옥에 가옥을 연하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빈틈이 없도록 하고 이 땅 가운데서 홀로 거주하려 하는 자들은 화가 있을 것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정녕히 허다한 가옥이 황폐할 것이라 선언하십니다. 열흘 갈이 포도원에 겨우 포도주 한 바트가 나고 한 호멜의 종자를 뿌려도 겨우 한 에바가 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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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절 이하는 유다 지배층이 맺은 들포도의 정체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폭로하는 사회적 고발입니다. 이사야가 고발하는 첫 번째 화(禍)는 바로 '대토지 소유화'(Latifundialization)라는 토지의 불의한 축적과 주거 독점 행태입니다. 그들은 가난한 이웃의 가옥과 토지를 무자비하게 수탈하여 가옥에 가옥을 잇고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공동체 안에 가난한 자들이 비집고 들어설 '빈틈'조차 남겨두지 않았습니다. 이는 토지의 궁극적 소유권이 오직 하나님께 있으며, 가난한 형제의 가업을 끝까지 보존해 주어야 한다는 레위기 25장의 토지법(희년 법도)을 정면으로 위반하는 사악한 물질적 배교였습니다.
이러한 부동산 독점과 이기적 탐욕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로운 보응은 철저한 '생산성의 저주'와 '가옥의 황폐화'입니다. 아무리 크고 아름다운 대저택을 독점하여 소유할지라도 하나님이 그곳의 호흡을 끊으시면 거주할 자가 없어 황무하게 될 것입니다. 소들이 열흘 동안이나 갈아야 할 만큼 거대한 영토의 '열흘 갈이 포도원'에서 겨우 포도주 한 바트(약 22리터)의 미미한 소출만 얻게 하시고, 한 호멜(약 220리터)의 엄청난 종자를 뿌려도 겨우 10분의 1에 불과한 한 에바(약 22리터)만을 수확하게 하실 것입니다.
인간의 힘과 편법으로 소유의 요새를 견고히 쌓아 올리려 하지만, 생명의 공급자이신 하나님의 손길이 거두어지는 순간 모든 경제적 자원은 10분의 1의 기근과 허무라는 철저한 마이너스 경제로 전락하게 됨을 폭로합니다. 이는 신약에서 자기를 위해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과 이웃에 대해서는 지독하리만치 인색했던 ‘어리석은 부자’를 향해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신 예수님의 경고와 완벽하게 조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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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 사회의 청년들을 좌절시키고 양극화의 깊은 골을 만드는 가장 치명적인 불의는 바로 '부동산 투기와 자산의 과도한 독점'입니다. 이 각박한 투기 열풍 속에 그리스도인들마저 편승하여 다주택을 소유하고 세입자를 억압하면서도, 그 불의한 자산 증식을 "하나님의 물질적 축복"으로 간증하는 가증한 영적 세태가 만연해 있습니다. 이는 약자들의 빈틈을 주지 않고 홀로 거주하려 했던 유다 고관들의 범죄와 하등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세상의 독점적 이기주의 시스템과 철저히 선을 그어야 합니다. 직장과 사업터에서 하청업체의 몫을 떼먹거나 노동자의 정당한 임금을 수탈하여 내 집 평수를 늘리려는 탐심의 고리를 끊어내십시오. 하나님이 불어 버리시면 한순간에 잿더미가 될 세상의 주택과 예금통장을 인생의 절대 보장으로 삼는 비굴한 우상 숭배를 버리고, 가난한 이웃과 주거의 평등을 나누며 물질의 공공성을 실천하는 하나님 나라의 의로운 분배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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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17절 생각하기를 거부한 쾌락의 파멸과 억압받던 어린 양의 회복
하나님은 삶의 목적을 잃고 쾌락에 빠진 세력을 스올의 입으로 심판하시고, 억압당하던 약한 자들을 정결한 당신의 초장으로 인도하시는 공의의 구원자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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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독주를 따르며 밤이 깊도록 포도주에 취하는 자들에게 화가 있습니다. 그들의 연회에는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피리와 포도주를 갖추었어도 여호와의 행하심을 관심치 않으며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스올이 입을 크게 벌려 그들의 영광과 떠드는 자를 삼킬 것이요 인류는 굴복당할 것입니다. 오직 여호와는 정의로우시므로 높임을 받으실 것이며, 그때에는 어린 양들이 자기 초장에 있는 것 같이 풀을 먹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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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가 폭로하는 또 다른 들포도의 실체는 지도자들의 무절제한 방탕과 영적 불경건입니다. 그들은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포도주와 독주를 탐하며 매일 화려한 음악이 흐르는 연회를 베풉니다. 그러나 그들의 가장 치명적인 영적 암세포는 바로 "생각하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연회에는 세련된 악기와 최고급 술이 넘쳐났지만, 역사를 경영하시는 여호와의 심장 소리와 이웃의 찢어지는 비명에는 철저히 귀를 막고 눈을 감아버렸습니다.
인간이 쾌락과 중독에 빠지는 이면에는 하나님의 통치와 역사적 책임을 회피하려는 비겁한 영적 도피가 숨어 있습니다. 이처럼 여호와 경외의 지성을 잃어버리고 오만하게 떠드는 자들을 향해 하나님은 무시무시한 사법적 판결을 내리십니다. 죽은 자들의 지하 세계이자 탐욕의 입인 스올(쉐올)이 무한히 입을 크게 벌려, 이 땅에서 자랑스럽게 자고하던 귀인들과 방탕하게 떠들던 자들을 흔적도 없이 삼켜버리게 하실 것입니다.
이 우주적 굴복의 날에, 스스로 존귀하다 여기던 힘 있는 장정들은 땅바닥에 구부러질 것이지만, 오직 만군의 여호와는 공의(체다카)와 정의(미쉬파트)를 행하심으로써 홀로 거룩하다 높임을 받으실 것입니다. 여기서의 공의와 정의는 기득권을 낮추시는 엄중한 징계와 정화의 칼날로 작동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찾아오는 은혜의 반전이 있습니다. 강포한 지배자들이 삼켜지고 비어버린 그 정화된 땅 위에, 무력하여 평상시에 철저히 착취당하고 굶주렸던 '어린 양들(케바심)'이 들어와 마치 자기 초장에 있는 것처럼 평화롭고 풍성하게 생명의 풀을 먹으며 복락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는 기득권 중심의 세상을 뒤엎으시고 심령이 가난하고 의에 주린 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안식을 유업으로 주시겠다는 복음의 강력한 종말론적 선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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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현대인들을 지배하는 가장 큰 영적 질병은 바로 '지성의 마비'와 '생각하기를 거부하는 안일함'입니다. 성도들마저 골치 아픈 교회의 사회적 책임이나 이웃의 눈물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려 하지 않고, 그저 주일에 세련되고 자극적인 연주와 감정적인 위로만을 주는 종교적 연회(예배)만을 소비하려 합니다. 이러한 생각 없는 종교적 감상주의는 실상 삶의 불의를 은폐하는 도구일 뿐입니다.
믿음의 세대들은 감각적인 쾌락과 세속적 유행의 취함에서 속히 깨어나, 역사의 한복판에서 공의를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지성적으로 벌벌 떨며 직면해야 합니다. 일터와 사회에서 내 안의 탐욕의 불티를 십자가 앞에 꺼뜨리십시오. 교회가 세상의 거대한 자본과 권력의 힘을 부러워하거나 모방하려 했던 교만함을 회개할 때, 하나님은 스올의 입을 벌려 그 거짓된 영광을 삼키실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짓밟히고 상처받은 소외된 '어린 양들'의 따뜻한 초장이 되어 주어야 합니다. 연약한 이들의 인권을 변호하고, 그들의 아픔을 실질적으로 돌보는 참된 샬롬의 공동체를 가꾸어 갈 때, 우리 교회는 황폐해진 이 시대 속에 여호와의 살아 계심을 찬란하게 증명해 보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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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우리의 참포도나무가 되시며 역사의 정직한 보좌에 앉아 다스리시는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십자가 복음과 하늘의 신령한 은혜라는
최고의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어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일상의 자리에서 정의와 공의의 열매 대신
이기적인 탐욕과 도덕적 부패라는 들포도를 맺어
주의 심장을 아프시게 해 드렸던
우리의 배은망덕함을 눈물로 회개하오니 긍휼히 여겨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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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이웃의 삶의 자리를 빼앗아가며 더 많이 소유하기 위해
가옥에 가옥을 연하고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이 땅에 나 홀로 평안을 누리려 했던 지독한 탐욕의 죄악을
주님의 보혈로 깨끗하게 씻어 정결케 하여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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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주와 쾌락에 취해 주의 일하심을 망각하고,
이웃의 고통에 대해 생각하기를 거부했던 우리의 영적 나태함과 교만을
스올의 심판대 앞에 완전히 깨뜨려 굴복시켜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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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옵건대, 우리 교회가
세상의 화려한 힘과 요새를 부러워하는 우매함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이 땅에 상처받고 억압당하던 가난한 이웃들이 기꺼이 찾아와
안식을 누리는 따뜻하고 안전한 주님의 참된 초장이 되게 하옵소서.
오직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만을 우리 삶의 유일한 보배와 깃발로 삼아 전진하는
신실한 남은 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를 죄의 흑암에서 건져내사 의의 빛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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