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5:1-5 장막이 된 일상

by 평화의길벗 posted Jul 14,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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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5:1-5 장막이 된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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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신앙이란 입술의 거룩함을 내려놓고 일상의 사귐으로 하나님의 장막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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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중순, 이른 새벽부터 정직하게 울려 퍼지는 매미 소리가 고요한 아침의 적막을 깨뜨리는 계절입니다. 한낮의 이글거리는 뙤약볕을 고스란히 받아내며 푸른 잎사귀들을 더더욱 팽팽하게 길러내는 길가의 나무들을 바라보노라면, 저 보잘것없는 초목들조차 창조주의 섭리 안에서 제 몫의 성실함을 묵묵히 채워가고 있는데, 정작 만물의 영장이라 자부하는 우리의 내면은 왜 이토록 헐벗고 앙상한지 부끄러움이 앞섭니다. 세상의 모진 비바람에 시달리며 과연 내가 서 있는 이 신앙의 터전은 온전한가 남몰래 회의의 눈물을 삼키고 계실 분들, 그리고 팍팍한 삶의 모퉁이에서 참된 안식처를 애타게 찾고 계신 모든 분의 심령에,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과 다사로운 하늘의 숨결이 스며들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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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5편은 단 다섯 구절로 이루어진 짤막한 시이지만, 창조주의 성산에 머무를 자가 지녀야 할 삶의 자취를 칼날처럼 정교하게 담아내고 있습니다. 시인은 아뜩한 떨림 속에서 질문을 던집니다.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시 15:1). 당시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성전은 거대하고 화려한 백향목과 금으로 치장된 장엄한 성채였습니다. 그들은 그 웅장한 성소에 들어가 짐승의 피를 흘려 제사를 바치면 비로소 하나님의 장막에 머물 자격을 획득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시인이 전해주는 대답은 놀랍게도 성전 안의 복잡한 제사 규례나 교리적 선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성산에 오를 자의 척도는 성전 문 바깥, 즉 저 저잣거리의 질편한 일상에서 어떻게 살아가는가에 달려 있었습니다.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실천하며 그의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그의 혀로 남을 허물치 아니하고"(시 15:2-3). 성경은 결코 제의적 종교 행위 자체를 참된 신앙의 전부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참된 예배는 삶이라는 구체적인 텍스트 위에 씌어지는 정성스러운 고백이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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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석의 제자 김흥호 목사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사람은 산을 보다가, 산을 걷다가, 산이 됩니다." 우리가 바라보고 걷는 그 걸음걸이가 결국 우리의 존재를 결정짓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성산에 거한다는 것은 특별한 종교적 특권을 누리는 상태가 아니라, 매일매일 마주하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의 자리에서 창조주를 경외하며 그분의 성품을 닮아가는 거룩한 동행의 여정입니다. 이웃을 비방하지 않고, 해로울지라도 서원한 것을 지키며, 약자에게 이자를 받지 않는 삶(시 15:3-5)은 세상의 똑똑한 지혜와 자본의 질서로는 미련하기 짝이 없는 바보짓처럼 보입니다. 세상은 끝없는 경쟁을 부추기며, 타인을 밟고서라도 더 높은 기둥을 세우라고 다그칩니다. 이 매정한 세속의 물결 속에서 귀를 막고 오직 주님의 순결한 법도를 따라 걷기 위해, 우리에게 무엇보다 절실한 영적 호흡이 바로 성전으로 지어져 가는 사귐으로서의 묵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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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국 교수는 묵상을 가리켜 사귐이라고 명명합니다. 묵상이란 조용한 골방에 앉아 나만의 도덕적 우월감을 충족시킬 경구를 수집하는 사변적 행위가 아닙니다. 묵상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완전한 타자와 마주 앉아 나의 완고한 자아를 깎아내고, 그분의 뜨거운 사랑의 시선으로 나와 내 곁의 연약한 이웃을 다시 바라보는 관계적 일치입니다. 참된 묵상은 내면에 도사린 날 선 칼과 창을 말씀의 용광로 속에 녹여버리는 거룩한 비움이며, 마침내 내 숨을 잠재우고 타자의 신음에 예민하게 공명하는 사랑의 정성입니다. 이 묵상의 사귐 속에 거할 때, 우리의 몸과 마음은 비로소 하나님이 기쁘게 거하시는 주의 장막으로 지어져 가게 됩니다. 혹시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더 번듯하고 웅장한 가시적인 성채를 지어 올리는 것만이 하나님의 축복이라 믿으며, 정작 무너지고 깨어진 내 일상의 처소 때문에 나는 하나님께 버림받은 존재가 아닐까 깊은 회의와 절망의 그늘에 갇혀 계시지는 않습니까. 더 무결점의 도덕적 행위와 흠 없는 헌신의 실적을 바쳐야만 비로소 주의 성산에 들어갈 자격을 얻을 것이라는 율법의 무거운 멍에에 짓눌려 숨 가빠하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이제 내 힘으로 그럴듯한 의인의 무늬를 짜내어 하나님 앞에 증명하려던 그 피고한 달음질을 십자가 아래 가만히 내려놓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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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찬란한 신비는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툭하면 이웃을 오해하고 비방하며 내 유익을 위해 돌아서는 우리의 그 가련하고 비루한 바닥을 아시면서도 우리를 가차 없이 내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스스로 성전 문 바깥으로 쫓겨나 성문 밖 십자가에서 온몸을 찢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아무 자격 없는 우리를 가만히 들어 올리사 기어코 거룩한 주의 장막 삼아 주셨습니다. 사망을 이기신 주님의 그 넉넉하고 맹렬한 은총이 우리의 연약한 실존을 든든하게 괴어 받치고 계시기에, 우리는 비록 흔들릴지언정 영영 무너지지 않는 하나님 나라의 신령한 성전으로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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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흔들리는 신앙 여정은 한여름 뙤약볕 아래서 묵묵히 서늘하고 넓은 그늘을 만들어 내는 우람한 아름드리 팽나무의 환대와 같습니다. 세상의 얄팍한 지혜는 숲속에서 살아남으려면 한 줌의 햇빛과 양분을 독점하는 이기적이고 날카로운 침엽수가 되어 타인의 영역을 침범해야만 생존할 수 있다고 다그칩니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바짝 긴장한 채 뾰족한 가시를 세우며 버둥거리다 금세 기력을 잃고 메말라가곤 합니다. 그러나 위대한 정원사이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렇게 메마르고 사나운 존재가 되라고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자랑하지도 않지만, 그저 길 한복판에서 제 몸을 낮추어 넉넉한 품을 열어두는 그 소박한 팽나무의 쉼을 가장 귀하게 여기십니다. 우리가 내 잘남을 증명하려던 모든 뾰족한 칼날을 내려놓고 십자가의 반석 곁에 우리 존재를 고요히 안돈시킬 때, 비로소 우리의 상처 많고 남루했던 일상은 세상을 삼키려던 이기적인 어둠을 정화해 내며 이웃의 서러운 눈물을 다사롭게 닦아주는 세상에서 가장 눈부신 하나님 나라의 성소로 다시 태어나게 될 것입니다.팽나무가 사나운 바람에 제 가지를 내어주고 묵묵히 제자리를 지킬 때, 마침내 그 넉넉한 그늘 아래로 날아드는 새와 지친 나그네들이 모여들어 평화의 안식을 누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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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푸른 생명력이 대지를 가득 채우는 이 계절, 나를 증명하기 위해 타인과 경쟁하고 남을 소외시키려는 세상의 매정한 질서를 미련 없이 거절하십시오. 그저 주님의 넉넉한 품 안에 나를 내어 맡기는 사귐의 묵상 자리에 고요히 엎드리며, 나를 조건 없이 안아주신 그 십자가 은혜에 잇대어 내 곁에 있는 슬픈 이웃들의 다정한 고향이 되어주는 눈부신 평화의 순례자가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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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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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에서 보기

https://youtu.be/OBdNRdi_Sz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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