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4:1-7 속이 빈 바이올린

by 평화의길벗 posted Jul 13,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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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4:1-7 속이 빈 바이올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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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신앙이란 실천적 무신론의 허망함을 참회하고, 하나님의 자비에 삶을 온전히 의탁하는 생명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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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의 열기가 온몸을 휘감아 숨통을 턱턱 막히게 하는 7월의 한복판입니다. 소나기라도 한 차례 시원하게 쏟아져 이 무거운 공기를 씻어내 주기를 갈망하게 되는 계절, 우리 영혼 역시 채워지지 않는 내면의 갈증과 예기치 못한 삶의 부조리 앞에서 뽀얗게 먼지 앉은 채 신음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깊은 응시의 눈길로 마주하는 시편 14편의 풍경은,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듯 흘러가는 비정한 역사의 한복판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그 무정함 속에 갇혀 우는 이들을 향해 뻗어오는 하나님의 애끓는 자비의 손길을 선명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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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단호하고도 서늘한 어조로 노래를 시작합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여기서 '어리석은 자'로 번역된 히브리어 '나발(Naval)'은 지능이 낮거나 이성적 판단이 부족한 사람을 뜻하지 않습니다. 지식의 양은 비약적으로 늘어났고 손에는 우주적 도서관이라 할 만한 스마트폰을 들고 다니지만, 그 지식으로 타인을 짓밟고 자기 주먹만을 신뢰하는 오만한 존재, 초월에 대해 마음을 닫아버린 영적 맹인을 일컫습니다. 그들이 마음에 품은 "하나님이 없다"는 확신은 학문적 무신론의 정교한 논증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부재를 핑계 삼아 내 마음대로 살아도 아무런 탈이 없을 것이라 자위하는 아주 비겁하고도 비루한 실천적 무신론의 선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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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라는 삶의 절대적 좌표를 잃어버릴 때, 인간의 정서는 급격하게 사나워집니다. 시인은 그 실상을 가리켜 "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무지하냐 그들이 떡 먹듯 내 백성을 먹으면서 여호와를 부르지 아니하는도다" 탄식합니다. '백성을 떡 먹듯 먹는다'는 표현이 가슴을 아프게 찌릅니다. 이는 타인을 더 이상 하나님의 형상으로 바라보지 않고, 내 배를 채우고 내 성공을 이루기 위한 소모품으로 전유해 버리는 폭력적인 자본의 문법입니다. 사람이 목적이 아니라 도구가 되어버린 세상, 타인의 눈물과 희생을 디딤돌 삼아 기어코 높은 성채를 지어 올리려 하는 세상이야말로 실천적 무신론이 지어낸 가장 참혹한 지옥의 실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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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성경의 장엄한 반전은 인간이 스스로를 전능자라 여기며 날뛰는 그 허망한 질주 너머에서 시작됩니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여기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살피심은 숨겨진 죄를 찾아내어 벼락을 내리치려는 성난 재판장의 싸늘한 감시가 아닙니다. 그것은 제 힘으로는 빠져나올 수 없는 인생의 깊은 물속에서 신음하는 가녀린 영혼들을 건져내시기 위해, 캄캄한 어둠 속을 등불을 들고 헤매시는 어머니의 애타는 눈동자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온 세상은 이미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었고 선을 행하는 자는 단 하나도 남지 않았습니다. 우리 중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공의의 저울 위에 늠름하게 올라서서 "나는 무죄하다" 자랑할 수 있는 존재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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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바로 그렇기에 복음이 있습니다. 기독교의 위대한 신비는 우리가 도덕적으로 무결점의 상태에 도달했기 때문에 주님이 우리를 용납하시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툭하면 죄인의 길을 기웃거리며 실천적 무신론자의 삶으로 도망쳐 숨어버리는 우리의 비루하고 가녀린 연약함 한복판에 찾아오셔서, 십자가의 붉은 피로 우리의 허물을 남김없이 덮어 안아주시는 맹렬한 은총에 있습니다. 우리가 가던 길을 가만히 멈춰 서서 내 존재의 무력함을 정직하게 인정하며 울 때, 비로소 우리의 깨어지고 부서진 마음의 틈새로 하나님의 다사로운 숨결이 단비처럼 흘러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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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눈에 보이는 물질의 위세에 눌려 영원을 지워버리려는 세상의 인력을 거스르고, 나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눈빛과 마주하기 위해 우리에게 절실히 요청되는 영적 호흡이 바로 참된 묵상입니다. 참된 묵상이란 율법 조문을 암송하며 종교적 우월감을 뽐내는 지적 유희가 아닙니다. 묵상은 나만을 우주의 중심에 놓으려던 얄팍한 탐욕을 거절하고, 보이지 않는 하늘을 향해 내 영혼의 안테나를 정교하게 세워 하나님의 진심과 내 인격의 주파수를 맞추는 거룩한 공명의 사건입니다. 우리가 고요히 말씀의 처소 앞에 엎드려 마음의 소음을 끄고 하나님의 세밀한 숨결에 주파수를 조율할 때, 비로소 세상이 당연하게 여기던 약육강식의 문법에 온몸으로 "아니오"라고 저항하며, 곁에 있는 가난한 이웃의 신음소리에 예민하게 반응하여 기어이 그들의 피난처가 되어주는 성스러운 반역자로 우리는 변화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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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더 많이 소유하고 더 편리한 성공의 자리에 오르는 것만이 축복이라 여기며, 내 뜻대로 풀리지 않는 처지 때문에 하나님은 과연 살아 계신가 회의하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이제 내 인생의 키를 쥐고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려던 그 피곤하고 날카로운 움켜쥠을 십자가 아래 가만히 내려놓으십시오. 하나님은 어리석은 자들의 남루하고 옹졸한 바닥을 다 아시면서도 우리를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두려움의 한복판에 찾아오셔서 "여호와는 그의 피난처가 되시도다" 선언하시며 헐벗은 우리의 온 존재를 품어 안아주셨습니다. 우리의 구원과 존엄함은 우리가 세상에서 얼마나 높은 기둥을 세우느냐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툭하면 넘어지고 의심하며 어긋난 길로 도망치는 우리의 가녀린 실존조차 너는 여전히 내 품에 안긴 사랑하는 자녀란다 불러주시는 하나님의 그 다함 없는 자비에 온전히 잇대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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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상처 많고 고단한 신앙 여정은 숲속의 고요함 속에서 위대한 악기 장인의 손에 조율되기를 기다리는 속이 빈 바이올린의 안식과 같습니다. 세상의 얄팍한 지혜는 바이올린에게 얼마나 요란한 소리를 낼 수 있는지 온 힘을 다해 스스로 줄을 팽팽하게 조여 네 강함을 증명하라고 다그칩니다. 그러나 스스로 소리를 내려 줄을 과도하게 조이는 악기는 거친 금속음만을 내지르다 결국 줄이 툭 끊어지고 몸통이 부서지는 비극을 맞이할 뿐입니다. 악기는 스스로 소리를 만들어내지 않습니다. 위대한 연주자이신 하나님은 아무런 자체 소리가 없는 속이 텅 빈 바이올린, 곧 우리의 비워진 자아와 약함을 가만히 들어 올리십니다. 그리고 주님의 십자가 사랑이라는 거룩한 소리쇠를 팅 하고 울리십니다. 우리가 스스로를 증명하려던 모든 헛된 소란을 멈추고 주님이 울리시는 그 맑고 거룩한 소리쇠의 진동에 우리 영혼의 줄을 고요히 내어 맡길 때, 비로소 한낱 나무 상자에 불과했던 우리의 남루한 일상은 이 차갑고 거친 세상 한복판에서 하나님의 다사로운 평화와 생명의 숨결을 가장 장엄하게 연주해 내는 하늘의 아름다운 악기로 경이롭게 다시 태어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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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지키기 위해 타인을 도구로 삼으라는 세상의 매정한 질서를 미련 없이 거절하십시오. 그저 내 마음을 하나님의 순결한 성품에 조율하는 깊은 공명의 묵상 자리에 고요히 엎드리며, 나를 조건 없이 안아주신 그 은혜에 의지해 곁에 있는 지치고 슬픈 이웃의 자리를 따뜻하게 지켜주는 찬란한 평화의 순례자가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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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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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로 보기

https://youtu.be/pcFow4yKM-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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