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07:01-17 의로우신 재판장 앞에 선 단독자의 고백

by 평화의길벗 posted Jul 06,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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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07:01-17 의로우신 재판장 앞에 선 단독자의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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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7편은 대적들의 억울한 모함과 추격 속에서 시인이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며 하나님의 공의로운 판결을 구하는 개인 탄원시이자 신뢰의 노래입니다. 시인은 먼저 자신을 찢으려는 사나운 대적들에게서 구원해 주시기를 여호와께 호소하며 기도를 시작합니다 (1-2절). 이어서 만약 자신에게 대적들이 참소하는 불의나 배반의 죄가 있다면 원수가 자신의 영광을 진토에 짓밟아도 좋다고 선언하며 엄숙한 결백의 맹세를 드립니다 (3-5절). 시인은 온 천하를 다스리시는 하나님께서 공의의 법정을 여시고 일어나사 자신의 의와 성실함을 판결해 주실 것을 간구하고 (6-8절), 사람의 심장과 폐부를 감찰하시며 회개하지 않는 자를 심판하기 위해 칼과 활을 당겨 예비하시는 하나님의 두려운 위엄을 노래합니다 (9-13절). 마지막으로 악인이 잉태한 독해와 사악한 간계가 결국 자승자박(自繩自縛)의 웅덩이가 되어 스스로를 파멸시킬 것임을 선포한 후 (14-16절), 의로우신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며 감사함으로 시를 맺습니다 (1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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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적 배경 : 본 시편은 표제어에 명시된 "베냐민인 구시의 말에 따라 여호와께 부른 다윗의 식가온"을 역사적 정황으로 삼습니다. '구시'는 성경 다른 곳에 직접 등장하지 않으나, 사울 왕과 같은 지파인 베냐민 사람으로서 다윗을 반역자나 모반자로 모함하여 사울에게 거짓 밀고를 일삼았던 인물로 추정됩니다. 다윗이 사울의 광기 어린 추격을 받으며 억울하게 도망다니던 광야 방랑 시기의 극심한 억울함과 생명의 위협이 이 시의 뼈아픈 배경입니다.

# 문화적 및 문학적 배경 : 표제어에 언급된 '식가온'(Shiggaion)은 히브리어 어원적으로 '길을 잃다', '비틀거리다' 혹은 '황홀경에 빠지다'라는 뜻에서 유래한 음악 용어입니다. 이는 감정의 격정적인 소용돌이와 급격한 리듬의 변화를 동반하는 '격정적인 애가(Lament)'의 문학적 양식을 지시합니다. 또한, 15절에 등장하는 "웅덩이를 깊이 파서 만들었으나 제가 만든 함정에 빠졌도다"라는 구절은 고대 근동에서 사냥꾼들이 거친 맹수를 포획하기 위해 위장해 두던 구덩이와 함정의 묘사에서 기원한 고대 수렵 문화의 선명한 시적 이미지입니다.

# 신학적 및 정경적 배경 : 본 시편은 '하나님의 사법적 공의(Divine Justice)'와 '사람의 속사정을 샅샅이 헤아리시는 전지하심'을 신론적 기초로 삼습니다. 정경적인 관점에서 시편 7편은 시편 1편이 선포한 '의인과 악인의 종말론적 대조'가, 시편 3-6편에 등장하는 부조리한 고난과 거짓 모함의 실제적인 현실 속에서 어떻게 변호되고 성취되는지를 보여주는 최종적이고도 엄위한 변론의 성격을 지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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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절 피난처 : 사자의 이빨 앞에서 날개 그늘로

하나님은 고립무원의 위기 속에서 신음하는 백성이 안전하게 숨을 수 있는 유일하고 완벽한 피난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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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를 쫓는 모든 자에게서 나를 구하여 건지소서"라고 간절히 부르짖습니다. 그는 만약 자기를 건져낼 자가 없다면, 대적들이 굶주린 사자처럼 자신을 찢고 물어뜯어 갈기갈기 헤쳐 놓을까 두렵다고 솔직하게 토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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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 여호와를 부르며 뱉는 첫마디는 "내가 주께 피하오니"(히, 브카 하시티)라는 신뢰의 고백입니다. '피하다'(하사)는 단순히 공간을 이동하는 물리적 대피를 넘어섭니다. 이 단어는 자신의 생명과 영혼의 주권을 하나님의 언약적 날개 그늘 아래 완전히 양도하고 숨기는 실존적 투항을 의미합니다. 다윗을 추격하는 대적들의 잔인함은 2절에서 '사자'라는 맹수의 이미지로 시각화됩니다. 사자는 먹잇감의 뼈를 으스러뜨리고 살을 찢는 잔혹한 포식자입니다. "건져낼 자가 없으면"이라는 고백은 자신을 지탱해 줄 그 어떤 인간적 보호막도 조력자도 완전히 사라진 완벽한 고립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이 철저한 사면초가의 현실 속에서 다윗이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는 가시적인 무기가 아닌 비가시적인 하나님의 언약적 임재뿐이었습니다. 이 '사자'의 심상은 신약에서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 마귀의 영적 권세(벧전 5:8)와 결합되며, 동시에 십자가 위에서 사방의 악한 세력들에게 포위당한 채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부르짖으셨으나 온전히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의탁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철저한 고독과 고난을 예표합니다. 인생의 가장 비참한 순간은 인간의 힘이 고갈되었을 때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한 피난의 의지를 상실했을 때입니다. 모든 조력자가 사라진 어둠은, 역설적으로 하나님만을 온전한 피난처로 경험할 수 있는 은혜의 시작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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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 삶의 한복판에서 부당한 처사와 오해, 원치 않는 고통이 몰려올 때, 우리는 먼저 어떤 문을 두드리고 있습니까? 사자 같은 환경에 위축되어 인간적 연줄을 동원하기 전에, 성도가 취해야 할 최우선의 반응은 모든 염려와 조바심을 그치고 기도의 골방으로 들어가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라고 은혜의 보좌를 붙잡는 것입니다. 삶의 위기 속에서 인간적인 처세술을 내려놓고 주님을 우리 인생의 '견고한 반석'으로 세워 올리는 눈물의 기도가 우리 안에, 우리 가정 안에 심겨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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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5절 결백 : 진토에 뒹굴어도 좋다는 영혼의 맹세

하나님은 세상의 기만과 조롱 속에서도 성도의 숨겨진 성결함과 정직을 입증해 주시는 양심의 보증인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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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하나님 앞에서 엄숙하게 자신을 돌아봅니다. 만약 자신이 불의를 행하였거나 손에 죄악이 있거나, 화친한 자를 악으로 갚았거나 대적에게서 무고히 빼앗은 일이 있다면 원수가 자신의 영혼을 뒤쫓아 잡아 생명을 땅에 짓밟고 자신의 영광을 진토에 떨어뜨려도 좋다는 결백의 맹세를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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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절은 고대 법정에서 피고인이 자신의 무죄를 강력하게 주장하기 위해 신전 앞에서 행하던 '무죄 서약(Oath of Clearance)', 곧 조건부 저주 맹세의 형식을 차용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베냐민인 구시가 씌운 사악한 프레임 — 사울 왕을 향한 배반자, 반역자라는 참소 — 에 맞서 자신의 결백을 단호하게 펼칩니다. '손에 죄악이 있다'는 것은 타인을 해치기 위해 쥔 부정한 칼이나 불의한 뇌물의 흔적을 뜻하며, '화친한 자를 악으로 갚는 것'은 고대 서아시아 문화권에서 언약의 신실함을 깨뜨리는 가장 야비한 범죄로 취급받았습니다. 만약 자신이 그런 가증한 일을 저질렀다면, 자신의 생명이 짓밟히고 왕으로서의 영적 명예와 정체성을 상징하는 '영광'(히, 카보드)이 더러운 흙먼지와 함께 뒹굴어도 좋다고 고백합니다. 이는 자신의 일평생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진실하게 살아왔는지를 보여주는 엄숙하고도 처절한 배수의 진입니다. 이 처절한 서약은 고난의 극한 속에서 욥이 고백했던 동의적 고백 — "만일 내 걸음이 길에서 치우쳤거나 내 마음이 내 눈을 따랐거나 내 손에 더러운 것이 묻었다면 내가 심은 것을 타인이 먹기를 바라며"(욥 31:7-8) — 와 깊이 맞닿아 있습니다. 또한 바울이 공회 앞에서 "형제들아 오늘날까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행 23:1)고 고백했던 거룩한 자부심의 선조 격입니다. 성도가 세상의 불의한 공격 앞에서도 당당히 고개를 들 수 있는 유일한 비결은 자신의 의를 자랑하는 교만이 아닙니다. 평소 하나님의 말씀의 법도 아래서 양심을 지켜온 '정직한 삶의 궤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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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나는 묻습니다. "정말 내 손에 더러운 죄악이 묻어 있지는 않은가?" "내가 겉으로는 거룩한 척하면서 뒤로는 누군가를 음해하거나 악으로 갚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가 세상의 유혹을 뿌리치고 매일 정직과 성결의 삶을 정돈해 나갈 때, 하나님은 침묵하지 않으시고 친히 우리의 억울한 누명을 씻어주시는 가장 신실한 변호사가 되어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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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8절 법정 : 우주의 재판장이여, 보좌에 앉으소서

하나님은 불의한 세력을 꺾으시고, 오직 언약 백성의 정당함과 의로움을 판결해 주시는 거룩한 재판장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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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맹렬한 기백으로 하나님께 소송을 올립니다. "여호와여 진노로 일어나사 내 대적들의 노를 막으시며 나를 위하여 깨소서 주께서 심판을 명령하셨나이다"라고 선언하며, 만민이 하나님의 재판석을 두르게 하시고 여호와께서는 높은 보좌의 자리에 정좌해 주실 것을 간구합니다. 그는 "여호와여 나의 의와 내게 있는 성실함을 따라 나를 심판하소서"라고 당당히 청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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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여 일어나소서"(히, 쿠마 야훼)라는 외침은 출애굽 광야 시절 법궤가 출발할 때 대적들을 흩으시기를 바라며 제사장들이 선포하던 성전(聖戰)의 역사적 관용구입니다. 시인은 한 발짝 더 나아가 하나님이 온 세상의 최고 재판장으로서 보좌에 정정당당하게 앉으시는 '우주적 법정(Divine Assembly)'의 개정을 장엄하게 묘사합니다. "높은 자리에 돌아오소서"라는 간구는 세상의 불의와 폭력이 마치 하나님보다 높은 곳에서 왕 노릇 하려는 오만한 판세 속에서, 여호와께서 본래의 최고 사법적 통치 권세를 취하사 사필귀정의 역사를 바로잡아 달라는 간절한 탄원입니다. 8절에서 "나의 의(히, 체덱)와 내게 있는 성실함(히, 톰)을 따라 나를 심판하소서"라는 요청은 자신이 완벽한 무결점의 의인이라는 오만한 선언이 아닙니다. 이는 구시가 씌운 반역과 불의의 고소 사건에 있어서만큼은 자신이 추호의 거짓 없이 신실했으며 성실했음을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판단 척도에 따라 명백하게 가려달라는 정당한 사법적 청원입니다. 이 엄위한 공의의 간구는 세상 법정에서 불의한 종교 지도자들과 빌라도의 재판에 의해 '죄인'으로 정죄받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의 가장 의로우신 아들이심을 천하 만국 앞에 단번에 입증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승리(행 13:33)와 깊이 맞닿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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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참기 힘든 배신이나 억울한 모함을 당할 때, 즉시 우리 손에 복수의 칼을 쥐고 맞상대하려는 조급함을 완전히 그쳐야 합니다. 모든 공의로운 재판의 종결권과 보응은 오직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손에 속해 있습니다. 사사로운 보복을 그치고 묵묵히 주님의 법정을 앙망하며 "나를 위하여 깨소서"라고 엎드리는 겸손이, 결국 사탄의 고발을 깨뜨리고 우리를 진정한 승리자로 이끄는 유일한 십자가의 비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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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13절 감찰 : 심장과 폐부를 꿰뚫어 보시는 엄위한 심판주

하나님은 사람의 심장과 폐부를 투시하시며, 회개하지 않는 자를 징벌하기 위해 공의의 무기를 장전하시는 엄위하신 심판주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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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악인의 악을 끊고 의인을 세워 달라고 기도합니다. 의로우신 하나님은 사람의 심장과 폐부를 감찰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방패는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의로운 재판장이시며 매일 분노하시는 공의로운 분이십니다. 사람이 만약 회개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은 그 칼을 날카롭게 가시고, 활을 이미 당겨 정조준하여 예비하셨으며, 죽일 기계와 불화살을 빈틈없이 준비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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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겉으로 드러나는 외식과 그럴듯한 포장만을 보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심장'(히, 레바보트 - 인간의 지정의와 모든 생각의 원천)과 '폐부'(히, 켈라요트 - 가장 깊은 내면의 도덕적 양심과 정서의 자리)를 세밀하게 감찰(히, 바한 - 금속의 순도를 도가니에서 감별하듯 집중해서 파헤침)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불의에 대해 무감각하지 않으시고 '매일 분노하시는' 거룩한 성품을 지니셨습니다. 12-13절의 칼을 푸르게 가시고 활을 당기시며 '죽일 기계'와 '불화살'을 예비하시는 하나님의 묘사는 충격적이고 무서운 전사(Warrior)의 심상입니다. 이는 악인의 죄악이 결코 방임되거나 간과되지 않으며, 회개하지 않는 자를 향해 하나님의 사법적 진벌이 실시간으로 장전되고 조준되어 발사 직전의 위급한 상황에 처해 있음을 긴박한 필치로 경고하는 문학적 극대화입니다. 이 준엄한 심판의 무장은 요한계시록에서 입에서 예리한 검이 나와 만국을 치시는 심판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계 19:15)과 연결되며,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놓였다"고 선포한 세례 요한의 종말론적 경고와도 일치합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죄를 방조하는 연약함이 아닙니다. 죄인이 회개하여 돌아올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시는 눈물겨운 오래 참음입니다. 그러나 그 인내의 한계선을 끝내 넘어서고 회개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의 화살이 눈 깜짝할 사이에 정수리를 관통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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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사람들의 눈과 도덕적 지탄만을 두려워할 뿐, 우리의 내면 깊은 폐부 - 감추어진 생각, 음란함, 탐욕, 미움 - 를 투시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불꽃 같은 안목 앞에는 무감각하게 살 때가 많습니다. "이 정도면 남들도 다 그렇게 사는데"라는 교만한 변명을 당장 그쳐야 합니다. 매일 아침 말씀의 정교한 거울 앞에 우리의 속사정을 정직하게 비추어보고, 숨겨진 미움과 부정직을 십자가 앞에 자복하며 참회하는 거룩한 영적 단장을 실행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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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16절 역설 : 악인이 판 웅덩이에 악인이 빠지다

하나님은 사악한 음모를 흘려버리지 않으시고, 악인이 파놓은 덫에 악인이 스스로 걸려 넘어지게 하시는 부메랑의 주관자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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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악인의 파멸의 역설을 웅변합니다. 악인은 죄악을 해산하며 잔해를 임신하여 궤휼을 낳았습니다. 그가 웅덩이를 깊고 정교하게 파서 만들었으나, 정작 자신이 만든 깊은 함정에 빠져 버렸습니다. 그가 도모한 사악한 잔해는 자기 머리로 고스란히 돌아가고 그 거친 포학은 자기 정수리에 내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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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은 악인의 음모와 파멸을 세 가지의 천재적인 비유적 메타포로 해부하여 설명합니다. 첫째는 '잉태와 출산'의 생물학적 메타포입니다. 악인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사악한 독해와 잔해를 쉬지 않고 잉태하여 길러오다, 결국 시간의 한계에 이르러 파멸의 거짓(궤휼)을 출산하고야 마는 본질적인 악의 노예입니다. 둘째는 '웅덩이와 함정'의 수렵적 메타포입니다. 사냥꾼이 귀한 맹수를 잡아채려고 낙엽과 흙으로 교묘하게 위장하여 깊이 파놓은 바로 그 함정에, 정작 자신의 발이 미끄러져 추락하고 마는 사필귀정의 심판입니다. 셋째는 '머리와 정수리'의 중력적 메타포입니다. 타인을 짓밟고 파멸시키기 위해 하늘을 향해 높이 던진 무거운 돌이 우주적 공의의 중력에 의해 고스란히 자신의 정수리 위로 수직 낙하하여 내리는 처참한 자업자득입니다. 이 역설적 귀결은 하나님께서 불의한 자들의 세력을 수동적으로 방관하시는 것이 아니라, 악인들이 맹신하는 그들의 잔머리와 오만한 가치가 스스로를 파멸하게 만드는 동인이 되게 역사하신다는 고도의 사법적 주권을 웅변합니다. 이 역설적인 반전은 신실한 유대인 모르드개를 매달기 위해 자기 집 앞마당에 오십 규빗이나 되는 거대한 나무를 세웠으나 결국 자신이 그 나무에 매달려 참혹한 종말을 맞이한 하만의 역사적 반전(에 7:10)에서 구현됩니다. 악인의 칼과 화살이 도리어 자기들의 양심과 심장을 찌르고 스스로를 파멸시킬 것임을 선언한 시편 37:15의 교훈과도 일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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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을 넘어뜨리기 위해 우리가 파놓은 올무와 거짓의 음모는 결국 하나님의 공의의 거울을 통해 우리 자신의 삶을 파탄 내는 무서운 불화살로 되돌아올 것입니다. 우리는 묻습니다. 나는 지금 누군가를 향한 웅덩이를 파고 있지는 않습니까? 다른 이들의 연약함을 감싸주고 세워주는 정직과 배려의 삶이, 결국 우리 인생을 하나님의 품 안에서 가장 안전하고 복되게 만드는 진짜 지혜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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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절 찬양 : 환난속에서 터지는 선제적 감사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환난 중에도 결국 공의를 성취하사 백성의 마음에 선제적이고 종영된 감사를 회복시키시는 왕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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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도의 비장함과 고통스러운 뼈의 떨림으로 흔들리던 다윗의 노래는 단 한 절, "내가 여호와의 의를 따라 감사함이여 지극히 높으신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리로다"라는 웅장하고 가슴 벅찬 선포로 마감됩니다. 폭풍 같은 탄원의 노래가 대합창의 찬양으로 승화되어 끝을 맺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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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여호와의 의'는 추상적 도덕 규범이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언약 백성에게 약속하신 돌보심과 보호의 도리를 어떠한 상황에서도 신실하게 이행하여 구원을 베풀어 주시는 신의 성실성입니다. 시인은 여전히 사울 군대의 삼엄한 포위망 속에 갇혀 있고, 구시의 거짓 모함이 해결되지 않은 거친 광야의 미완의 현실 속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시인의 안목은 이미 지상의 협곡을 넘어 온 천하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지극히 높으신 여호와'(히, 여호와 엘욘)라고 호칭하며 영원무궁한 찬양을 송축합니다. 이 감사는 상황이 풀려서 드리는 사후적 조건부 감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신 성품을 알기에 고난 한가운데서 이미 승리를 선포하는 '선제적 감사'이자 '종말론적 안식'의 절정입니다. 이 선제적 찬양은 억울하게 온몸이 채찍에 맞아 찢기고 깊은 감옥에 갇혔음에도 밤중에 하나님을 향해 영광의 찬송을 불렀던 바울과 실라의 기적적인 찬양(행 16:25)의 영적 원형이며, 장차 이 세상의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시고 악의 세력을 소멸하사 온전한 공의의 승리를 선포하실 메시아의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승전가와 깊이 공명합니다. 하나님의 의는 반드시 성취됩니다. 그 성취를 먼저 믿음으로 바라보며 입술에 찬양을 올려드리는 자가, 어둠 속에서도 빛을 발하는 참된 예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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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인생이 비록 가뭄과 시련의 혹독한 계절을 통과하고 있을지라도, 눈앞의 환경에 마음을 빼앗겨 불평하는 영적 게으름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하나님은 변함없이 우리의 삶을 붙들고 계시는 '의로우신 분'이십니다. 매일의 삶과 가정 예배의 자리에서 눈에 보이는 상황의 유무가 아닌, 나를 위해 영원한 승리를 차려주실 하나님의 공평하신 '이름'만을 신뢰하며 먼저 기쁘게 감사 찬송을 올려드리는 믿음의 습관을 세워야 합니다. 우리의 감사 찬송은 절망의 벼랑 끝에서도 어둠을 흩어버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불러오는 가장 강력한 무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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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공의로운 재판장이시며, 우리의 영원한 반석이신 여호와 하나님,

오늘 이 시간, 우리를 삼키려 날뛰는 사자 같은 대적들의 

사나운 위협과 거짓으로 모함하는 세상의 소음 속에서도, 

우리의 심령이 흔들리지 않고 오직 유일한 피난처이자 생명의 소망이 되시는 

주님의 거룩한 날개 그늘 아래로 온전히 피하게 하옵소서. 

모든 조력자가 사라진 것 같은 고립의 어둠 속에서도, 

그 어둠이 오히려 하나님만을 온전한 피난처로 경험하는 

은혜의 시작점임을 믿는 믿음을 더하여 주옵소서.

만약 우리 삶에 타인을 해하려던 사사로운 꾀나 

손에 묻은 더러운 죄악이 있다면 십자가의 보혈로 정결케 씻어주시고, 

오직 하나님 보시기에 떳떳하고 정직한 양심의 길을 

끝까지 고수할 수 있도록 우리의 온 존재를 성결한 말씀으로 빚어 주시옵소서.

이 땅의 굽어진 법정과 세상의 불의한 공모에 낙심하지 않게 하시고, 

마침내 온 우주의 법정을 여시고 우뚝 서사 우리의 의와 성실함을 

있는 그대로 판결해 주실 공의로운 재판장이신 하나님만을 온전히 앙망하게 하옵소서. 

사사로운 보복의 칼을 내려놓고 주님의 법정을 바라보는 겸손 안에서, 

우리로 하여금 진정한 승리자의 자리에 서게 하여 주옵소서.

사람의 겉모습이 아닌 심장과 폐부를 감찰하시며 

불의에 타협치 않고 심판을 예비하시는 하나님의 두려운 위엄을 날마다 경외하게 하시고, 

매일 아침 말씀의 거울 앞에 우리의 속사정을 정직하게 비추어보며 

숨겨진 미움과 부정직을 십자가 앞에 자복하는 거룩한 단장의 삶을 살게 하옵소서.

남을 무너뜨리려 파놓은 함정이 결국 자신의 정수리에 내리는 역설적 공의를 신뢰함으로, 

우리로 하여금 어떤 부조리한 현실 앞에서도 

영적인 고요함과 평안을 누리게 하옵소서. 

아직 환난의 터널이 다 지나지 않았을지라도, 

결국 신실하게 언약을 완수하실 주님의 의를 미리 바라보며 

매일의 삶과 가정, 일터에서 지극히 높으신 이름을 향해 

영광과 안식의 찬송을 높여 올리는 참된 예배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를 온전히 보전하사 최후 승리를 선물하실 

살아계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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