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16:13-24 허영의 껍질을 벗고 맞닿은 맨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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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신앙이란, 힘과 지식을 뽐내며 타인을 제압하려던 세속적 우월감을 거부하고, 경쟁과 배제를 부추기는 제국의 논리에 온몸으로 아니오를 선언하는 치열한 영적 씨름을 통해, 자격 없고 상처 입은 우리조차 거룩한 입맞춤으로 끌어안으시어 기어코 십자가의 사랑으로 묶어 내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다사로운 은총에 우리 존재를 온전히 의탁하는 생명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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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6월 30일. 한 해의 절반을 쉼 없이 달려와 반환점에 선 오늘, 묵상의 시간은 우리의 메마르고 분주했던 일상 위로 고요한 멈춤의 시간을 선사합니다. 비바람에 이리저리 꺾이면서도 묵묵히 제자리를 지켜내는 길가의 나무들처럼, 끝을 알 수 없는 삶의 무게를 견뎌내느라 남몰래 눈물짓고 계실 성도 여러분, 그리고 내 안의 연약함 때문에 짙은 회의감에 사로잡혀 진리의 길을 묻고 계신 모든 분의 심령에, 우리의 어긋난 일상조차 넉넉한 품으로 안아주시는 주님의 다사로운 평화가 스며들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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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세상은 끝없는 경쟁 속에서 타인을 누르고 나의 강함을 증명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고 다그칩니다. 오늘 우리가 마주한 고린도전서 16장 후반부의 풍경은, 그토록 잘남을 과시하며 서로를 할퀴었던 고린도 교회를 향해 사도 바울이 어떻게 가장 연약해 보이는 사랑을 궁극의 무기로 제시하며, 십자가의 넉넉한 은총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지를 묵직하게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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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는 문제투성이 교회에 주는 바울의 목회적 답안지와 같습니다. 분쟁, 음행, 소송, 우상 제물, 은사 남용 등 얽히고설킨 수많은 갈등에 대해 치열한 신학적 논증을 펼쳐온 바울은, 이 기나긴 편지의 결론부에서 매우 간결하고도 폭발적인 권면을 쏟아냅니다.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라,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고전 16:13-14). 당시 헬라 문화권에서 강건함이란 남을 힘과 지식으로 제압하는 우월성을 뜻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 역시 영적 지식과 신비한 은사를 훈장처럼 내세우며 자신의 강함을 입증하려 핏대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교회의 파편적인 문제들을 하나하나 땜질하는 데 그치지 않고, 통전적인 본질로 그들을 이끕니다. 그들의 얄팍한 세속적 강함을 완전히 전복시키는 것입니다. 참된 강함은 내 권리를 주장하고 타인 위에 군림하는 데 있지 않고, 기꺼이 나를 비워 연약한 이웃의 짐을 짊어지는 사랑에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이야말로 모든 파벌과 교만을 무너뜨리는 십자가의 궁극적인 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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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사상가 자끄 엘륄은 세상의 획일적인 질서와 타협하지 않는 삶을 가리켜 진정한 의미의 세속성 극복이라고 보았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시대의 이기적인 흐름에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미움과 배제로 굴러가는 제국의 질서에 온몸으로 저항하는 일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세상의 폭력적인 방식을 교회 안으로 끌고 들어와 싸울 때, 바울은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는 벼락같은 지침을 던졌습니다. 사랑은 결코 나약하고 감상적인 감정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기주의로 굳어진 세상을 향한 가장 맹렬하고 위대한 영적 투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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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차가운 세상의 질서를 거스르고 기어코 십자가의 사랑을 선택하기 위해 우리에게 절실히 요청되는 거룩한 호흡이 바로 참된 묵상입니다. 묵상은 저항입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너의 유익을 먼저 챙겨라, 남을 밟고 강해져야 살아남는다고 속삭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고요히 말씀 앞에 엎드릴 때, 묵상은 우리 내면을 좀먹는 그 서늘한 세속의 지시들을 단호히 거절합니다. 참된 묵상은 나만을 위하려는 얄팍한 본성에 브레이크를 걸고, 주님의 마음을 내 영혼에 새기어 세상의 적대감을 다정한 사랑으로 돌파해 내는 치열한 생명의 저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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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고린도 교인들처럼 험한 세상에서 나를 지켜내기 위해 억척스럽게 내 몫을 챙기고 타인과 경쟁하다가 깊은 피로감에 지쳐 계시지는 않습니까? 혹은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는 엄위한 말씀 앞에서, 툭하면 이기적으로 변하는 나의 옹졸한 바닥을 보며 나는 도무지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인가 봐, 라고 짙은 자괴감에 짓눌려 계신 분이 있습니까? 이제 내 힘으로 그럴듯한 신앙의 성취를 빚어내어 능력을 입증하려던 그 피곤하고 뾰족한 무기를 십자가 아래 가만히 내려놓으십시오. 바울은 이 준엄한 편지의 맨 마지막에 가슴 저리는 맺음말을 남깁니다. "나의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무리와 함께 할지어다"(고전 16:24). 바울을 그토록 공격하고 오해하며 분열을 일삼았던 고린도 교인들이었건만, 바울은 그들을 향해 가차 없는 정죄의 칼날을 휘두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거룩한 입맞춤을 명하며, 십자가의 사랑으로 그들의 허물을 남김없이 덮어 안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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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바로 우리를 대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가 얼마나 도덕적으로 흠 없이 사랑을 실천해 내느냐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툭하면 상처 입히고 어긋나는 우리의 그 비루하고 남루한 일상조차 넓은 품으로 안으시어, 기어코 당신의 찢기신 살과 보혈로 우리의 죄를 씻어 내시고 다사로운 생명의 공동체로 묶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 압도적이고도 다함 없는 은총에 온전히 기대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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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상처 많고 고단한 신앙 여정은 서로 다른 두 나무가 맞닿아 마침내 하나의 몸을 이루는 연리지(連理枝)의 경이로운 생명 현상과 같습니다. 세상의 얄팍한 지혜는 숲속에서 살아남으려면 곁에 있는 나무를 억누르고 나 혼자만 햇빛을 독차지하는 강자가 되어야 한다고 윽박지릅니다. 그러나 위대한 창조주이신 하나님은 숲의 나무들에게 전혀 다른 생명의 신비를 가르치십니다. 거센 비바람 속에서 두 나무가 끊임없이 부딪치고 상처를 입어 마침내 각자의 단단한 껍질이 벗겨질 때, 비로소 두 나무의 맨살이 맞닿아 서로의 양분을 나누는 하나의 생명으로 이어집니다. 우리가 내 잘남을 증명하려 딱딱한 껍질을 세우던 헛된 고집을 멈추고 십자가의 바람 앞에 나를 온전히 내어 맡길 때, 우리의 그 아픈 상처와 어긋남은 오히려 연약한 이웃을 품어 안고 생명을 공급하는 세상에서 가장 찬연하고 눈부신 하나님 나라의 연리지로 경이롭게 피어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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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대지의 묵은 때를 씻어 내리는 이 6월의 끝자락에, 타인을 꺾고 일어서라는 세상의 매정한 논리를 미련 없이 거절하십시오. 그저 내 안의 이기심에 맞서 싸우는 저항의 묵상 자리에 고요히 엎드리며, 자격 없는 나를 환대의 입맞춤으로 안아주신 그 넉넉한 은총 안에서 곁에 있는 지친 이들의 손을 다정하게 잡아 일으키는 찬란한 평화의 순례자가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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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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