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15:20-34 부활의 첫 열매와 종말의 완성 : ‘날마다 죽는’ 십자가의 삶으로 증명하는 부활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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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부활을 부정하는 자들의 모순을 폭로한 데 이어, 마침내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첫 열매’가 되셨다는 역사적 진리를 장엄하게 선포합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생명을 얻게 될 것이라는 ‘대표성의 원리’를 밝힙니다. 이어서 바울은 부활의 종말론적 시간표(그리스도, 강림하실 때 그에게 속한 자, 그리고 만물을 하나님께 바치는 마지막 때)를 제시하며, 최종적으로 사망이 멸망하고 하나님이 ‘만유의 주재’가 되실 우주적 비전을 천명합니다. 나아가 바울은 자신이 날마다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헌신하는 것은 부활이 없이는 불가능한 미친 짓임을 밝히며(현실적 변증), 고린도 교인들을 향해 세속적이고 쾌락적인 악한 동무들에게서 떠나 영적 잠에서 깨어 의를 행할 것을 강력히 촉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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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문화 및 철학적 배경 : 1세기 고린도를 지배하던 헬라 철학(플라톤주의 이원론)은 육체를 영혼의 감옥으로 보았습니다. 따라서 육체의 부활은 그들에게 혐오스럽고 조롱거리였습니다. 이들은 영혼만의 불멸을 믿었고, 이로 인해 육체로는 마음껏 쾌락을 즐기며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는 에피쿠로스 학파의 쾌락주의적 방종에 쉽게 동화되었습니다.
# 신학 및 사상적 배경 : 고린도전서는 영적인 교만과 윤리적 타락에 빠진 교회를 향한 ‘목회 백서’입니다. 당시 고린도 교인들 중 일부는 자신들이 이미 성령 안에서 모든 영적 축복을 다 받았다고 여기는 ‘과도한(실현된) 종말론’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그들은 장차 올 ‘몸의 부활’을 불필요한 것으로 여기고 부정했습니다. 바울은 15:12-19에서 귀류적 변증을 통해 부활 부정이 가져올 참상을 경고한 뒤, 본문 20-28절에서는 아담과 그리스도의 연대성 및 우주적 회복을 다루는 ‘사상적(신학적) 변증’을, 29-34절에서는 자신들의 고난과 윤리적 삶을 증거로 삼는 ‘현실적(경험적) 변증’을 전개하며 부활 신앙을 확증합니다. 바울의 부활 신학은 톰 라이트가 지적하듯, 단순히 영혼이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질서가 새롭게 회복되는 ‘새 창조’의 우주적 완성을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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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절 첫 열매 되신 그리스도와 아담-그리스도의 연대성
예수님은 죄와 사망의 법에 묶인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친히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로 부활하사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이끄시는 부활과 생명의 본체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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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라고 선언합니다. 사망이 한 사람(아담)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그리스도)으로 말미암는다고 밝히며,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 확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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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헬라 이원론에 오염된 교회를 향해 기독교 신앙의 가장 확고한 토대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사 ‘첫 열매(아파르케)’가 되셨습니다. 구약의 추수 규례에서 첫 열매는 그 이후에 맺힐 모든 열매의 품질과 수확을 보증하는 징표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부활은 단회적인 기적이 아니라, 그분께 속한 모든 성도의 육체적 부활을 우주적으로 보증하는 사건입니다. 바울은 이를 ‘대표성(연대성)의 원리’로 논증합니다. 첫 번째 아담은 불순종으로 온 인류에게 사망의 독을 퍼뜨렸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는 완전한 순종과 부활로 새 창조의 인류에게 영원한 생명을 수혈하십니다. 이 거대한 구속사의 틀 속에서, 고린도 교회를 향한 바울의 애타는 마음은 곧 주님의 마음입니다. 세속 철학에 속아 부활의 소망을 잃어버리고 다시 아담의 본성(교만과 정욕)으로 돌아가려는 영적 자녀들을 향해, "너희의 참된 정체성은 썩어질 아담이 아니라 영광스럽게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피를 토하듯 일깨우는 영적 아비의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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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한국 교회의 많은 성도들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실제 삶의 가치관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아니라 ‘타락한 아담’에게 연대되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어떻게든 이 땅에서 더 많이 움켜쥐고, 더 높아지며, 육신의 안일함만을 추구하는 세속주의에 깊이 병들어 있습니다. 나의 실존은 지금 ‘아담 안’에 있습니까, 아니면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까? 내 인생의 끝은 한 줌의 흙과 절망적인 죽음이 아니라, 첫 열매 되신 예수님과 동일한 영광스러운 부활임을 확신하십니까? 이 부활의 연대성을 진정으로 믿는다면, 세상의 헛된 스펙과 자본주의적 탐욕에 짓눌려 살지 마십시오. 죽음을 두려워하여 세상과 타협하는 비굴함을 벗어던지고, 내 안에 흐르는 부활의 생명력을 의지하여 당당하고 거룩한 새 인류의 삶을 살아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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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28절 종말론적 시간표와 만유의 주재이신 하나님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 우주의 모든 악한 원수와 사망의 권세를 진멸하시고, 마침내 ‘만유 안에서 만유가 되사’ 온 우주를 영원한 생명과 평강으로 통치하시는 만군의 여호와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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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부활의 순서를 제시합니다. 첫째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은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 그 후에는 마지막(끝)입니다. 그때 그리스도께서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치실 것입니다.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입니다. 마침내 만물을 그 발아래 두실 때에는 아들 자신도 만물을 복종하게 하신 이(하나님)에게 복종하게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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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단락은 바울의 ‘사상적(신학적) 변증’의 정점이며, 기독교 종말론의 가장 웅장한 청사진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자신들이 이미 완전한 구원에 도달했다고 착각했습니다(과도한 종말론). 이에 바울은 명확한 '순서(타그마)'와 시간표를 제시하여 그들의 교만을 바로잡습니다. 부활은 이미 시작되었으나, 그 완성은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강림, 파루시아)에 이루어집니다. 24절 이하에서 그리스도의 통치 목적은 분명해집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든 영적, 구조적 악의 세력(통치와 권세)을 철저히 진멸하는 것이며, 그 최후의 원수는 바로 인간을 옭아매던 ‘사망’입니다. 28절의 "아들 자신도 복종하게 된다"는 표현은 아들 예수님이 열등하다는 존재론적 종속이 아닙니다. 이는 구속사의 완성을 위해 성자께서 성부께 나라를 온전히 봉헌하시는 구원사적 질서의 극치입니다. 그 최종 목적은 "하나님이 만유의 주(All in All)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입니다. 파편화되고 분열된 고린도 교회를 향해, 바울은 온 우주가 마침내 성부 하나님의 완전한 주권 아래 하나로 통일되는 이 압도적인 비전을 제시함으로써, 그들의 얄팍한 영적 교만을 깨뜨리고 참된 평강으로 초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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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자본주의와 정치적 양극화 속에 살아가는 한국 교회는, 구원을 단지 ‘죽어서 내 영혼이 천국 가는 개인적 위안’ 정도로 축소시켜 버렸습니다. 역사와 우주를 새롭게 하시고 만유를 통치하시는 거대한 하나님의 비전을 상실한 채, 교회 안에서조차 작은 이념의 차이나 권력 다툼으로 서로를 정죄하기에 바쁩니다.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의 구원은 그렇게 시시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내 삶과 역사 속에서 사망과 악의 권세를 멸하며 일하고 계십니다. 오늘 내가 직장과 세상에서 직면하는 불의한 권력, 구조적 악,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경제적 착취 앞에서도 결코 절망하거나 냉소하지 마십시오. 최후의 원수인 사망마저 깨뜨리실 그리스도의 최종 승리가 보장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만물 안에서 만물이 되실 하나님의 우주적 샬롬을 바라보며, 오늘 내게 주어진 삶의 영역에서 화해와 공의를 심는 하나님 나라의 동역자로 헌신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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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32절 부활 신앙이 낳은 현실적 변증 : 나는 날마다 죽노라
성령 하나님은 이 세상의 헛된 쾌락과 성공에 안주하려는 우리의 본성을 쳐서 복종시키사, 영원한 부활의 영광을 바라보며 기꺼이 십자가의 고난과 희생을 감내하는 참된 제자의 길로 인도하시는 능력의 영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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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부활이 없다면 어찌하여 우리가 때마다 위험을 무릅쓰겠느냐고 반문합니다. 그는 고린도 교인들에 대한 자랑을 두고 단언하건대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합니다. 바울이 에베소에서 맹수와 더불어 싸운 것이 인간적인 동기(부활이 없는 삶)에서였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부활이 없다면 차라리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는 것이 낫다고 역설적으로 탄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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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웅장한 신학적 변증에서 지극히 개인적이고 실존적인 ‘현실적(경험적) 변증’으로 논조를 바꿉니다. 바울의 삶은 상상을 초월하는 박해와 생명의 위협으로 점철되어 있었습니다. 에베소에서 ‘맹수와 더불어 싸웠다’는 것은 원형 경기장에서의 실제 짐승이든, 맹수와 같이 악랄한 적대자들의 핍박이든, 목숨을 건 참혹한 사투를 의미합니다. 바울은 묻습니다.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도대체 내가 왜 이 미친 짓(위험을 무릅쓰는 것)을 하겠느냐?" 이생이 전부라면, 육신의 고통을 자초하는 기독교인은 우주에서 가장 멍청하고 불쌍한 자입니다. 차라리 에피쿠로스 학파의 쾌락주의자들처럼 "내일 죽을 테니 오늘 마음껏 먹고 마시자"고 하는 것이 백번 지혜로운 일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확신에 차서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선언합니다. 이 위대한 고백은 부활이 역사적이고 절대적인 사실이기에,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받는 삶이야말로 가장 남는 장사요 영광스러운 특권임을 증명하는 눈물겨운 목회적 사랑의 웅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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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믿고 복 받으라"는 번영 신학에 찌든 한국 교회는 어느새 십자가의 고난을 철저히 기피하게 되었습니다. 교회에 다니면서도 삶의 목적은 불신자들과 완벽하게 동일합니다. 좋은 아파트, 안정된 노후, 자녀의 세속적 성공을 위해 "먹고 마시자"는 식의 타락한 쾌락주의에 함몰되어 있습니다. 우리 삶에는 바울과 같은 ‘복음을 위한 위험’도, ‘날마다 죽는 자아 부인’도 사라졌습니다. 오늘 여러분의 삶에 예수 때문에 받는 손해가 있습니까? 복음적 가치를 지키기 위해 편안함을 포기하고 위험을 무릅쓴 흔적이 있습니까? 만약 부활이 내일 당장 거짓으로 판명되어도 여러분의 삶이 별로 억울할 것이 없다면, 우리는 이미 십자가의 길을 버리고 세상의 넓은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얄팍한 기복신앙을 쓰레기통에 던져버리십시오. 영원한 부활의 상급이 확실하기에, 직장과 가정에서 기꺼이 남을 위해 희생하고, 내 유익을 포기하며, ‘날마다 내 정욕과 이기심을 죽이는’ 거룩한 바보로 살아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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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3-34절 부활 신앙의 윤리적 결단 : 깨어 의를 행하라
하나님은 잘못된 사상과 세속의 문화에 취해 영적 잠에 빠진 우리를 말씀으로 일깨우사, 죄의 습관을 끊어내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무장된 거룩하고 의로운 백성으로 빚어가시는 진리와 거룩의 주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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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강력하게 경고합니다.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그리고 고린도 교회 안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며 준엄하게 책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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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신학은 필연적으로 치열한 윤리적 결단으로 이어집니다. 바울은 당대의 격언("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힌다")을 인용하며, 부활을 부정하는 거짓 교사들과 쾌락주의적 헬라 문화에 동화된 자들을 ‘악한 동무’로 규정합니다. 부활을 부정하면 내세의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고, 이는 곧 윤리적 붕괴와 성적 타락, 이기심으로 직결됩니다. 바울은 34절에서 "깨어(에크넵사테)"라고 명령합니다. 이 단어는 ‘술 취함에서 정신을 차리고 깨어나다’는 뜻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세속 철학과 거짓된 영적 교만의 술에 깊이 취해 비틀거리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는 현재 명령형을 통해, 지금 당장 지속적인 죄의 습관에서 돌이킬 것을 촉구합니다. 나아가 그들이 영적으로 가장 탁월하다고 자부했으나, 실상은 부활의 주재이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무지한 자)"임을 폭로하며 그들의 수치를 일깨웁니다. 이는 정죄가 목적이 아니라, 치명적인 영적 수면에서 자녀들을 흔들어 깨워 생명의 길로 돌이키게 하려는 영적 아비의 절박한 호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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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한국 교회 성도들의 도덕적 실패와 이기주의, 그리고 교회의 신뢰도 추락은 본질적으로 ‘부활 신앙의 상실’에서 기인합니다. 우리는 주일에는 예배하지만, 주중에는 맘몬주의와 세속적 쾌락이라는 ‘악한 동무들(세상의 가치관, 미디어, 불의한 관계)’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며 우리의 선한 양심을 더럽히고 있습니다.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지금 나를 둘러싸고 있는 '악한 동무'는 무엇입니까? 내 영혼을 취하게 만들고 부활의 소망을 희미하게 만드는 스마트폰의 쾌락, 세속적인 주식과 부동산의 탐욕, 남을 비방하고 수군거리는 관계의 사슬에서 단호히 끊어내야 합니다. "깨어 의를 행하십시오!" 영적인 영면(술 취함)에서 깨어나십시오. 하나님을 안다고 입술로만 떠들지 말고, 내가 맺는 정직한 경제활동, 순결한 부부 관계, 이웃을 향한 희생적 사랑을 통해 내가 진짜 부활의 하나님을 아는 백성임을 세상 앞에 증명해 내는 거룩한 결단이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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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죽음을 이기시고 영광스러운 부활의 첫 열매가 되사
우리의 영원한 생명이 되신 삼위일체 하나님!
오늘 사도 바울의 피 끓는 부활의 선포 앞에서,
입술로는 부활을 믿는다 하면서도 실제 삶에서는
아담의 썩어질 본성에 얽매여 이 세상의 쾌락과 성공만이 전부인 양,
영적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살아왔던
우리의 세속적이고 천박한 믿음을 철저히 회개합니다.
주님, 우리 교회 모든 성도들의 심령 깊은 곳에
십자가와 부활의 웅장한 신앙을 새롭게 회복시켜 주시옵소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든 권세와 사망마저 깨뜨리시고,
마침내 ‘만물 안에서 만물’이 되시는
그 장엄한 하나님의 우주적 통치와 종말의 시간표를
우리의 유일한 비전으로 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이 땅에서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억울함을 당하고 손해를 보더라도,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백했던 바울처럼
기꺼이 내 자아와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는
참된 제자의 길을 걷게 하옵소서.
우리의 선한 행실을 더럽히는 세속의 악한 동무들과
쾌락의 유혹에서 단호히 돌아서게 하시고,
영적 잠에서 깨어나 날마다 의를 행하며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을 삶으로 증명하는
거룩한 부활의 증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완전한 소망이요 영원한 생명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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