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15:12-19 허무의 장막을 뚫고 솟는 빛, 죽음을 품어 안은 생명의 환대

by 평화의길벗 posted Jun 25,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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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5:12-19 허무의 장막을 뚫고 솟는 빛, 죽음을 품어 안은 생명의 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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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신앙이란, 눈에 보이는 현실의 한계와 이성적 판단에만 갇혀 육체의 부활을 부인하던 헬라 철학의 헛된 지혜를 직시하고, 절망적인 현실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향해 우리 영혼의 창을 활짝 열어두는 종말론적 소망의 묵상을 통해, 죽음으로 끝나버릴 것 같은 우리의 가장 비참한 일상조차 기어코 부활의 눈부신 영광으로 역전시키시는 하나님의 압도적인 은총에 온전히 잇대는 생명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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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가 시작되어 온 세상이 축축하고 무거운 비구름 아래 갇힌 듯한 어느 여름날입니다. 끝없이 쏟아지는 장대비처럼 인생의 모진 고난 앞에서 "결국 우리 삶은 죽음으로 끝나는 허무한 것 아닐까" 탄식하며 남몰래 눈물짓고 계신 분들, 그리고 이 땅의 유한한 삶이 전부인 줄 알고 끝없는 경쟁 속에서 지쳐 영원한 생명의 이유를 찾고 계신 모든 분들에게,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고 찬연한 아침을 여신 부활의 주님이 건네시는 깊은 위로와 샬롬이 가득하시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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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세상은 늘 눈에 보이고 과학적으로 증명되는 것만이 진리라고 말하며, 보이지 않는 영원한 세계를 향한 소망을 어리석다 조롱합니다. 오늘 우리가 마주한 고린도전서 15장 12절에서 19절의 풍경은, 그토록 거룩한 은사를 자랑하던 고린도 교인들이 헬라 철학의 이원론에 물들어 어떻게 기독교 신앙의 심장인 육체의 부활을 부인하게 되었는지를, 그리고 사도 바울이 그들의 헛된 주장을 향해 어떻게 벼락같은 귀류법의 변증을 펼치며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선포하는지를 묵직하게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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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고린도 교회 안에는 영혼은 선하지만 육체는 무가치하고 악하다고 여기는 헬라 철학의 이원론이 깊이 스며들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영적인 부활은 받아들였을지 모르나, 썩어질 육체가 다시 살아난다는 죽은 자의 부활은 터무니없는 일이라며 부인했습니다. 부활의 현재성만 강조한 나머지 미래의 궁극적인 육체의 부활을 지워버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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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해 바울은 귀류적 변증이라는 날카로운 논리를 꺼내 듭니다. 그들의 주장을 일단 가정한 후, 그것이 얼마나 참담한 모순을 낳는지를 적나라하게 폭로합니다.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예수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을 것이요, 우리가 전하는 복음도 헛것이며, 너희의 믿음도 헛것이 되고 맙니다. 나아가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잠든 선배들도 다 멸망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이 참담한 가정을 하나의 비통한 탄식으로 요약합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하는 그 절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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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그렇지 않습니까. 만약 죽음 너머의 영원한 생명이 없고 이 땅의 삶이 전부라면,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희생하며 이웃을 위해 고난받는 그리스도인의 삶만큼 어리석고 불쌍한 인생이 어디 있겠습니까. 일제강점기의 캄캄한 절망 속에서도 꽁꽁 얼어붙은 개구리를 보며 기어코 다가올 부활의 봄을 노래했던 김교신 선생의 그 눈물겨운 소망도, 죽음으로 모든 것이 무로 돌아간다면 한낱 허무한 몽상으로 끝날 것입니다. 바울의 이 절규는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신앙은 세상을 이길 어떤 동력도 갖지 못한 채, 그저 이 땅에서 마음의 위안이나 얻으려는 얄팍한 종교적 장식물로 전락하고 만다는 뼈아픈 경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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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바울은 결코 허무주의에 머물지 않습니다. 이 모든 절망적인 가정을 산산이 깨뜨리고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라고 장엄하게 선포하기 위해, 부활이 없는 삶의 참담함을 먼저 철저하게 직시하게 한 것입니다. 허무의 바닥을 끝까지 밟아본 사람만이 그 바닥을 박차고 오를 수 있습니다. 바울의 논리는 절망을 파고드는 것이 아니라 절망을 통과하는 길을 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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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죽음이 끝이라고 말하는 세상의 허무주의를 단호히 끊어내고, 영원한 생명의 빛 속으로 우리를 던져 넣기 위해 절실히 요청되는 거룩한 호흡이 바로 참된 묵상입니다. 묵상은 그저 성경 지식을 머리에 채워 넣는 정적인 독서가 아닙니다. 참된 묵상이란, 죽음과 절망이라는 눈앞의 닫힌 현실에 갇히지 않고 종말론적 소망을 품은 채 하나님의 영원한 세계로 우리 영혼의 창을 활짝 열어두는 치열한 영적 도약입니다. 세상은 이 땅에서 얼마나 많은 것을 소유하고 즐겼느냐로 인생의 성패를 평가하지만, 말씀을 깊이 묵상할 때 우리는 이 썩어질 세상의 형체가 전부가 아님을 가슴 깊이 깨닫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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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이 땅에서 남들보다 더 큰 복을 받고 더 번듯한 성공을 쟁취하는 것만을 유일한 소망으로 삼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예기치 않은 질병과 가난, 사랑하는 이와의 사별 앞에서 내 인생은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고 마는구나 하며 짙은 절망의 어둠 속에 홀로 웅크려 계신 분이 있습니까. 이제 이 땅의 삶만이 전부라고 속삭이는 그 서늘하고 피곤한 허무주의의 속임수를 십자가 아래 가만히 내려놓으십시오. 하나님은 사망의 그늘 한복판에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어, 십자가의 참혹한 죽음을 뚫고 기어코 부활의 찬연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심으로 우리의 가장 든든한 보증이 되어 주셨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이 땅에서 얼마나 대단한 업적을 남기고 흠 없이 살아남느냐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상처 입고 늙어가며 결국 한 줌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의 이 비루한 육신조차 너른 품으로 안으시어, 기어코 썩지 아니할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부활의 생명으로 다시 입혀 주시는 하나님의 그 맹렬하고도 압도적인 은혜에 온전히 잇대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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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상처 많고 고단한 신앙 여정은 캄캄한 암실에서 한 장의 경이로운 사진을 완성해 내는 인화(Photographic Developing)의 과정과 같습니다. 세상의 얄팍한 지혜는 인화액에 담긴 인화지의 그 시커멓고 형체를 알 수 없는 어둠만을 바라보며, 이것이 끝이다, 이 쓸모없는 종이 쪼가리에 무슨 소망이 있겠느냐며 비웃습니다. 만일 그 어둠이 전부라면 우리는 참으로 불쌍한 자일 것입니다. 그러나 위대한 사진가이신 하나님은 그 캄캄한 암실의 시간을 절망으로 끝내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아무 희망도 보이지 않던 우리의 그 새카만 절망과 죽음의 시간 위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강력한 생명의 빛을 투과시키십니다. 우리가 눈앞의 어둠에 굴복하려는 헛된 두려움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빛에 우리 존재를 온전히 내어 맡길 때, 비로소 죽음으로 끝날 것 같았던 우리의 그 비루하고 남루한 일상은, 세상 어떤 화려한 색채로도 흉내 낼 수 없는 가장 눈부시고 찬연한 하나님 나라의 명작으로 우리 삶 위에 피어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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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을 통해 우리는 허무한 무덤 앞에서도 기어코 부활의 아침을 열어내시는 주님의 생명에 접속되며, 비로소 가장 불쌍한 자가 아니라 세상을 살려내는 가장 당당하고 눈부신 승리자로 우뚝 서게 됩니다. 그 암실의 어둠 속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단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빛이 우리를 찾아오실 때까지 그 자리를 지키는 것, 그 빛에 우리 존재를 온전히 내어 맡기는 것입니다. 장맛비가 대지의 묵은 때를 고요히 씻어 내리는 이 여름, 눈에 보이는 성취만이 전부라며 이 땅의 썩어질 것에 영혼을 묶어두려는 세상의 매정한 질서를 미련 없이 거절하십시오. 절망 너머의 영원을 바라보는 종말론적 소망의 묵상 자리에 엎드리며, 나를 죽음에서 건져내신 그 부활의 넉넉한 은총 안에서 곁에 있는 슬픈 이들의 손을 다정하게 잡아 생명의 빛으로 이끄는 찬란한 평화의 순례자가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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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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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로 보기

https://youtu.be/iDFxBH0cX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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