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14:1-19 타자의 눈물을 닦는 다정한 예언

by 평화의길벗 posted Jun 21,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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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4:1-19 타자의 눈물을 닦는 다정한 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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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신앙이란, 알아들을 수 없는 영적 체험을 과시하여 자신의 우월함을 입증하려는 종교적 허영을 직시하고, 하늘의 신비를 이웃이 알아들을 수 있는 일상의 언어로 빚어내는 성육신적 번역으로서의 묵상을 통해, 소통 불가능한 우리의 남루한 탄식조차 기어코 십자가의 언어로 통역하시어 품어 안으시는 하나님의 다사로운 은혜에 우리 존재를 온전히 의탁하는 생명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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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이 짙푸른 생명력을 뿜어내며 여름의 심연을 향해 깊어지는 2026년 6월 22일입니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일갈한 바 있습니다. 눈의 빛깔을 묘사하는 에스키모인들의 단어가 수십 가지에 이르듯, 우리의 언어가 세밀하고 다정해질 때 비로소 타자의 고통과 창조의 신비를 온전히 담아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쓰는 언어는 종종 이웃과 나를 연결하는 다리가 아니라, 나를 과시하고 남을 찌르는 서늘한 무기가 되곤 합니다. 화려한 말의 성찬 속에서도 참된 소통의 부재로 인해 깊은 고독을 앓고 계신 분들, 내 영적인 훌륭함을 입증해 내야만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다는 팍팍한 강박에 지쳐 진리의 길을 묻고 계신 모든 분의 심령에, 우리의 어눌한 신음조차 다사롭게 알아들으시는 주님의 평화가 깃들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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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세상은 남들이 범접할 수 없는 고상한 지식과 특별한 능력을 뽐내어 자신을 증명하는 것을 미덕이라 부추깁니다. 오늘 우리가 마주한 고린도전서 14장 전반부의 풍경은, 그토록 거룩해야 할 교회 공동체가 신비로운 영적 은사마저 자기 과시의 도구로 전락시켰을 때 어떤 비극이 초래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고린도 교회 안에는 은사를 두고 다투는 지독한 수직적 경쟁이 있었습니다. 신비로운 하늘의 언어인 방언을 유창하게 구사하는 이들은, 알아들을 수 없는 그 황홀경에 심취하여 스스로를 영적 엘리트라 자부했습니다. 반면 그 방언을 알아듣지 못해 소외감을 느끼는 다른 교인들의 마음에는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열두 장부터 열네 장까지 이어지는 은사 문제의 흐름은 바로 이 지독한 영적 계급 경쟁의 상처를 고스란히 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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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이기적인 영적 우월감을 향해 바울은 단호한 교정의 잣대를 들이댑니다. 바울은 결코 방언 자체를 금지하거나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고전 14:4)라고 선언하며, 공동체의 유익이라는 본질적 기준을 제시합니다. 헬라어 '덕을 세운다'는 말, 오이코도메(oikodome)는 '건물을 허물지 않고 바르게 건축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바울은 이렇게 일갈합니다.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고전 14:19). 나 혼자 황홀경에 빠져 내뱉는 일만 마디의 신비로운 언어보다, 곁에서 상처 입고 아파하는 형제의 영혼을 알아듣게 위로하고 살려내는 투박한 다섯 마디의 말이 하나님 나라에서는 훨씬 더 위대하고 고귀한 언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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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나의 영적 우월함을 증명하려는 소음을 멈추고 이웃을 세워주는 다정한 언어로 나아가기 위해 우리에게 절실히 요청되는 영적 호흡이 바로 참된 묵상입니다. 묵상이란 저 높은 하늘의 신비로운 지식을 나 홀로 독점하여 지적 쾌감을 누리는 사변적 유희가 아닙니다. 묵상은 성육신적이고 통전적인 번역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이야말로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번역이었습니다. 참된 묵상이란, 하나님 나라의 그 높고 깊은 진리를 오늘 내가 발 딛고 살아가는 남루한 일상의 언어로, 그리고 내 곁에서 눈물 흘리는 형제가 알아들을 수 있는 따뜻한 위로의 언어로 실시간 번역해 내는 치열하고도 거룩한 자기 비움입니다. 묵상을 통해 우리는 허공을 치는 신비로운 방언을 멈추고, 십자가의 긍휼을 이웃의 가슴에 가닿도록 번역해 내는 참된 예언자, 곧 하나님의 뜻을 맡아 전하는 자로 새롭게 빚어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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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고린도 교인들처럼 내가 가진 직분이나 신학적 지식, 남다른 영적 체험을 무기 삼아 다른 이들을 은근히 가르치려 들거나 영적인 계급장을 과시하느라 깊은 피로감을 겪고 계십니까? 반대로 내세울 만한 유창한 영적 언어나 능력이 없어서 나는 하나님께 별로 쓸모없는 존재인가 봐, 라며 짙은 소외감과 자괴감에 빠져 계신 분이 있습니까? 더 완벽하고 세련된 헌신의 실적을 증명해야만 주님이 나를 사랑하실 것이라는 율법의 무거운 짐에 짓눌려 계신가요? 이제 내 힘으로 신비로운 영적 경지에 도달하여 내 가치를 입증하려던 그 시끄럽고 피곤한 자아의 마이크를 십자가 아래 가만히 내려놓으십시오. 하나님은 방언과 은사를 자랑하며 이기적인 영적 유희에 빠져 이웃을 소외시키던 고린도 교인들의 그 치사하고 얕은 바닥을 다 아시면서도 그들을 가차 없이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소통 불가능한 죄의 단절 속에 갇혀 있던 우리를 살려내시기 위해, 창조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하늘의 영광스러운 언어를 버리시고 우리의 가장 비참하고 비루한 고통의 방언 속으로 성육신하여 내려오셨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가 얼마나 유창하게 하나님을 찬양하고 내 영성을 완벽하게 증명해 내느냐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기도가 막혀 알아들을 수 없는 신음밖에 내뱉지 못하는 우리의 그 남루한 탄식조차, 성령 친히 하나님의 언어로 통역하시어(롬 8:26) 기어코 우리를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품어 안으시는 주님의 그 맹렬하고도 압도적인 은총에 온전히 기대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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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상처 많고 고단한 신앙 여정은 울고 있는 갓난아기를 품에 안고 부르는 어머니의 자장가, 곧 아가말과 같습니다. 세상의 얄팍한 지혜는 그 어머니가 아무리 세계 최고의 학위를 가진 석학이라 할지라도, 아기 앞에서도 자신의 우월함을 증명하기 위해 알아들을 수 없는 고상한 학술 용어를 늘어놓아야 능력을 인정받는다고 부추깁니다. 하지만 그것은 아기에게 그저 불안하고 시끄러운 소음일 뿐입니다. 진정으로 위대한 어머니는 아기의 울음 앞에서 자신의 모든 화려한 지식과 권위를 기꺼이 내려놓습니다. 그리고 기꺼이 가장 어눌하고 투박해 보이는 아가말로 아이와 눈을 맞추며 부드러운 자장가를 속삭여 줍니다. 세상의 눈에는 그 자장가가 학술 논문보다 미련하고 수준 낮아 보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불안에 떨던 생명을 평안히 잠들게 하고 살려내는 진짜 능력은 알아들을 수 없는 지식의 방언이 아니라, 기꺼이 자신을 낮추어 눈높이를 맞춘 그 자장가의 사랑에 있습니다. 우리가 내 영성을 뽐내려던 헛된 소음을 멈추고 십자가의 낮아짐을 선택할 때, 우리의 투박하고 서툰 다섯 마디의 섬김은 상처 입은 세상을 가장 다사롭고 경이롭게 살려내는 하나님의 영원한 자장가로 온 세상에 찬연히 울려 퍼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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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음이 한층 짙어가는 이 아름다운 여름날, 알아들을 수 없는 자기 증명의 언어로 타인 위에 군림하려는 세상의 매정한 질서를 미련 없이 거절하십시오. 그저 하나님의 마음을 내 일상의 언어로 번역해 내는 성육신의 묵상 자리에 고요히 엎드리며, 내 어눌함조차 품어주신 그 십자가의 넉넉한 은총 안에서 곁에 있는 연약한 이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다정한 다섯 마디의 평화의 순례자가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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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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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로 듣기

https://youtu.be/xyb4r_2fJV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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