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14:01-19 사랑의 통제를 받는 은사 개인의 황홀경을 넘어 교회의 덕을 세우는 ‘깨달은 다섯 마디’

by 평화의길벗 posted Jun 21,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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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4:01-19 사랑의 통제를 받는 은사 

개인의 황홀경을 넘어 교회의 덕을 세우는 ‘깨달은 다섯 마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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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13장의 ‘사랑’의 원리를 토대로, 고린도 교회의 주된 갈등 원인이었던 ‘방언과 예언’의 은사를 비교하며 공적 예배에 대한 구체적인 지침을 내립니다. 방언은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여 자기 개인의 덕을 세우지만, 예언은 사람에게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권면하여 교회의 덕을 세웁니다. 악기나 나팔 소리처럼 분명한 의미가 전달되지 않는 방언은 타인에게 헛된 소음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바울은 공적 예배 시에 타인이 '아멘'으로 화답할 수 없도록 자신의 영적 황홀경에 취해 일만 마디 방언을 하기보다, 형제를 가르치고 교회를 온전히 세우기 위해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라고 권면합니다. 철저히 ‘교회의 덕을 세우는 이타적 사랑’을 은사 활용의 궁극적 기준으로 제시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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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및 문화적 배경 : 1세기 헬라-로마 사회의 이방 신비 종교들은 무아지경(황홀경, ecstasy) 상태에서 신과 소통하며 내뱉는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고도의 영적 상태로 숭상했습니다. 이교도적 배경을 지닌 고린도 교인들은 기독교 신앙 안에서도 이와 유사한 가시적 현상(방언)을 영적 성숙의 최고 척도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방언의 은사를 가진 자들이 특권층을 형성하여 지성적이고 질서 있는 예배를 멸시하고, 방언을 못 하는 자들을 무시하는 영적 우월주의에 빠져 있었습니다.

# 신학 및 사상적 배경 : 고린도전서 12-14장은 '은사 경쟁'이라는 문제를 다루는 거대한 하나의 문맥입니다. 바울은 12장에서 은사의 다양성과 통일성이라는 '소극적/원론적 처방'을 내리고, 13장에서 사랑이라는 '근본적 원인 치료책'을 제시한 후, 이제 14장에서 고린도 교인들이 가장 예민하게 대립하던 방언과 예언의 문제를 직접 다루며 '구체적 증상 치료책'을 내놓습니다. 바울은 열광주의에 빠진 그들의 이원론적 사고를 배격하고, 참된 영성은 지성(마음, nous)을 배제하는 무아지경이 아니라, 오히려 맑은 이성으로 진리를 깨달아 타인을 가르치고 세우는(오이코도메) 성육신적이고 이타적인 사랑의 실천임을 신학적으로 재정립합니다.

# 묵상 포인트 : 하나님은 사랑 안에서 우리에게 성령의 은사를 주시며, 그 은사가 개인의 신비적 과시나 우월감이 아니라, 알아들을 수 있는 진리의 말씀으로 형제를 위로하고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든든히 세워가기를 원하시는 질서와 덕의 주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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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방언과 예언의 대조: 교회의 덕을 세우는 예언

성령 하나님은 은사를 통해 교회를 세우기를 원하시며, 개인의 신비로운 체험을 넘어 형제를 알아들을 수 있는 말씀으로 세워주고 위로하며 권면하는 자들을 더 귀하게 여기시는 사랑의 영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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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 명합니다. 방언은 알아듣는 자가 없이 영으로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여 자기의 덕을 세우는 것이지만, 예언은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위로하므로 교회의 덕을 세운다고 대조합니다. 방언을 통역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지 못한다면, 예언하는 자가 훨씬 낫다고 결론 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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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14장의 시작을 "사랑을 추구하며(Pursue love)"라는 말로 13장의 핵심 원리와 직결시킵니다. 사랑이라는 절대적인 레일 위에서만 은사(신령한 것들)를 사모하라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파벌을 조장했던 방언의 은사에 대해 바울은 그것을 금지하지는 않으나(자기의 덕을 세움), 공적인 예배 공동체 안에서는 철저히 그 한계를 긋습니다. 바울이 예언을 방언보다 월등히 선호하는 단 하나의 절대적인 기준은 바로 ‘교회의 덕을 세움(오이코도메, oikodome)’입니다. 성경에서 예언은 단순히 미래의 일을 점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백성들에게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대언하여 그들의 신앙을 세워주고(건축하고) 위로하는 설교와 가르침에 가깝습니다. 방언은 나를 수직적으로 세우지만, 예언은 수평적으로 내 곁의 형제를 세워줍니다. 이진섭 교수님이 지적하듯, 12장 31절의 "더욱 큰 은사"는 막연한 능력이 아니라 14장에서 명시하는 "교회에 더 유익이 되는 예언의 은사"를 가리키며, 그 밑바탕에는 오직 형제를 살리려는 십자가의 이타적 사랑이 깔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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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한국 교회에도 성령의 은사나 능력을 개인적인 신비 체험, 기도원에 올라가 몇 시간씩 부르짖는 방언 기도, 혹은 신통한 은사로만 국한하여 이해하려는 그릇된 열광주의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과의 깊은 개인적 교제는 중요합니다. 그러나 내가 큐티를 깊이 하고, 방언으로 유창하게 기도하는 영적인 사람이라 할지라도,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이 곁에 있는 상처받은 형제에게 따뜻한 위로와 권면이 되지 못하고 도리어 무례하고 교만하게 상처를 준다면 그것은 아무 유익이 없는 종교적 허영입니다. 우리 교회 성도들은 내 영성의 크기를 기도의 시간이나 신비한 체험으로 증명하려 하지 마십시오. 내 입술의 언어가 내 가정의 자녀를 말씀으로 든든히 세워주고(덕을 세움), 직장에서 지쳐있는 동료들에게 복음의 위로를 전해주며, 교회의 연약한 지체들을 믿음으로 권면하는 가장 위대하고 성경적인 '예언'의 통로로 쓰임 받게 해달라고 사모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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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13절 명확한 소통의 필요성: 악기와 나팔의 비유

예수님은 성육신을 통해 인간이 알아들을 수 있는 가장 명확한 진리의 말씀으로 이 땅에 오셨으며, 우리 역시 생명을 살리는 복음의 메시지를 이웃이 이해할 수 있도록 명확히 전하기를 원하시는 진리의 주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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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자신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나아가서 방언으로만 말하고 계시나 지식, 예언이나 가르침으로 말하지 않으면 아무 유익이 없다고 합니다. 생명 없는 악기인 피리나 거문고가 음의 분별을 내지 못하거나, 나팔이 분명하지 않은 소리를 내면 누가 전투를 준비하겠느냐고 반문합니다. 이와 같이 혀로써 알아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않으면 허공에 다 말하는 것이니,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하라고 권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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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헬라 세계에 익숙한 악기와 군대의 나팔 비유를 들어 방언 지상주의자들의 논리를 깨뜨립니다. 전시 상황에서 나팔수의 나팔 소리는 병사들의 생사를 가르는 절대적인 신호입니다. 그러나 나팔수가 제멋대로 알 수 없는 소리를 분다면 군대는 전멸하고 말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교회 공동체 안에서의 영적 발언은 성도들의 영적 생사를 가르는 생명의 나침반이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고린도 교인들의 통역 없는 방언은 그저 허공에 치는 소리에 불과했습니다. 바울은 신앙의 신비주의가 흔히 범하기 쉬운 ‘지성(이성)의 마비’를 통렬히 책망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맹목적이거나 비이성적인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타인이 알아들을 수 있는(intelligible) 명확한 언어, 곧 지식과 가르침(logos)으로 소통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바울은 네가 진정으로 영적인 사람이라면 개인의 카타르시스를 즐기는 방언에 취해 있지 말고, 형제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통역하기를 구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라며 이기심을 책망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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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교회 안에서 불신자나 새가족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우리만의 영적 은어(Jargon)’와 종교적 관행들로 우리끼리만의 성을 쌓고 있지는 않습니까? 세상은 삶의 무게와 죽음의 고통 앞에 서서 생명의 나팔 소리를 기다리고 있는데, 한국 교회는 그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자기 과시적인 언어, 배타적이고 공격적인 언어로 허공에다 소리치는 집단으로 전락해 버린 것은 아닌지 뼈저리게 반성해야 합니다. 교회의 모든 부서와 모임은 철저히 ‘이타적인 소통’을 연습해야 합니다. 내가 쓰는 용어, 우리의 여러 소그룹 모임의 나눔이 오늘 처음 교회에 발을 디딘 상처 입은 영혼도 충분히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는 따뜻하고 상식적인 언어입니까? 복음의 진리는 결코 타협할 수 없지만, 그것을 담아내는 그릇은 이웃이 알아듣기 쉽고 친절하게 소통될 수 있어야 합니다. 허공을 치는 종교적 허세를 버리고, 진정으로 형제를 낫게 하는 복음의 명확한 나팔수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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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17절 영과 마음의 조화: ‘아멘’으로 화답하는 예배

하나님은 개인의 감정에만 도취된 독백의 제사가 아니라, 온 회중이 영과 마음을 다해 진리를 깨닫고 한마음으로 ‘아멘’으로 화답하는 질서 있고 영광스러운 예배를 받으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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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은 기도하지만 나의 마음(이성)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알지 못하는 처지에 있는 자들(초신자나 불신자)이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해 그 감사에 ‘아멘’ 할 수 없고, 나는 감사를 잘했을지라도 다른 사람은 덕 세움을 받지 못한다고 경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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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당시 헬라 신비 종교처럼 지성(nous, 이성, 마음)을 억압하고 영적 흥분만을 추구하는 이교도적 영성을 기독교 예배에서 단호히 몰아냅니다. 바울 신학에서 참된 영성은 지성(마음)의 파괴가 아니라, 성령 안에서 새롭게 된 지성을 통한 하나님과의 온전한 교제입니다(롬 12:2). 영으로만 기도하고 마음(이해력)이 동반되지 않으면, 그것은 전인격적인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더 치명적인 문제는 예배의 ‘공동체성 파괴’입니다. 16절의 "알지 못하는 처지에 있는 자(이디오테스, idiotes)"는 아직 기독교 신앙의 지식이 부족한 초신자나 외부 구도자를 가리킵니다. 누군가 강단에서 혹은 대표 기도를 할 때, 자기 혼자만의 영적 황홀경에 빠져 알 수 없는 방언으로 멋지게 기도를 올렸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의 감사는 훌륭했을지 모르나, 정작 밑에서 그 기도를 듣고 동참해야 할 초신자들은 무슨 뜻인지 몰라 "아멘(진실로 그러합니다)"이라며 신앙의 연대를 이룰 수 없게 됩니다. 공적 예배는 개인 리사이틀(recital)이 아닙니다. 예배의 숭고함은 나 혼자 은혜받는 데 있지 않고, 가장 연약한 지체까지 진리에 동의하여 "아멘!"으로 함께 화답하도록 배려하는 십자가의 사랑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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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교인들은 예배를 소비재처럼 여깁니다. 찬양팀의 음악이 화려하고 목회자의 설교가 내 감정을 터치하여 "오늘 나 은혜받았어"라고 느끼면 그것으로 좋은 예배를 드렸다고 착각합니다. 철저히 자기중심적인 관점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묻습니다. "너의 그 은혜받음이 곁에 있는 초신자가 '아멘' 하도록 돕고 있는가?" 교회에서 대표 기도를 맡거나 직분을 감당하는 분들은 명심해야 합니다. 기도를 길고 유창하게, 어려운 신학적 용어를 섞어가며 하는 것은 자기의 덕(과시)을 세우는 것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가장 은혜로운 기도와 찬양은, 내 옆에 앉은 가장 연약한 성도와 처음 나온 새가족조차도 고개를 끄덕이며 진심으로 "아멘!" 할 수 있도록 돕는 정직하고 명확한 마음의 기도입니다. 나의 종교적 열심이 누군가를 소외시키는 장벽이 되지 않도록, 철저히 공동체를 배려하는 성숙한 예배자로 서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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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19절 바울의 결단 : 일만 마디 방언보다 깨달은 다섯 마디 말

성령 하나님은 우리가 화려하고 압도적인 종교적 은사보다, 비록 투박할지라도 이웃을 십자가의 진리로 든든히 세워내는 명확하고 진실한 복음의 언어(다섯 마디)를 가장 큰 능력으로 여기게 하시는 참된 지혜의 영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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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자신이 고린도 교회의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많이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자신이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낫다고 폭탄선언을 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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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단락은 고린도 교회의 영적 우월주의에 쐐기를 박는 바울의 압도적인 십자가 결단입니다. 바울은 방언의 은사 자체를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개인의 기도 생활에서 방언을 유용하게 사용하며 감사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뼈 때리는 반전은 "그러나 교회에서는(알라 엔 에클레시아, alla en ekklesia)"이라는 전제에 있습니다. 개인적인 공간과 공적인 교회의 공간은 그 목적이 완전히 다릅니다. 고린도의 영적 엘리트들은 교회 안에서 자신의 우월함을 뽐내기 위해 무아지경의 '일만 마디 방언'을 쏟아냈습니다. 10,000이라는 숫자는 헬라어로 가장 큰 숫자를 상징하는 무한대의 개념입니다. 반면 바울은 "남을 가르치기(카테케오) 위하여 깨달은 마음(이성)으로 하는 '다섯 마디 말'"을 선택합니다. 나의 영적 위대함을 증명하는 엄청난 분량의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보다, 형제를 진리로 이끌어 세우는 짧고 투박하지만 명확한 복음의 가르침(예언)이 우주적으로 훨씬 더 숭고하고 가치 있다는 선언입니다. 내 권리와 내 은사의 과시를 십자가에 못 박고, 형제의 유익을 위해 스스로 바보가 되는 십자가의 자기 비움(Kenosis)이 공적 예배 은사 활용의 궁극적 정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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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는 "일만 마디"를 사랑하는 물량주의에 빠져 있습니다. 누구의 기도가 더 긴가, 누가 성경을 더 많이 읽었나, 누가 교회에서 더 많은 사역 타이틀(직분)을 가졌는가로 은연중에 자신의 신앙을 과시하고 타인을 판단합니다. 하지만 그 일만 마디의 화려한 스펙 속에, 정작 영혼을 살려내는 '깨달은 마음'과 '이타적 사랑'이 없다면 하나님 보시기에는 그저 소음일 뿐입니다. 성도 여러분, 나의 알량한 영적 지식과 화려한 교회 봉사 이력을 내세우기 전에 스스로에게 질문하십시오. 나는 이기적인 일만 마디 방언을 외치는 자입니까, 아니면 형제를 진심으로 사랑하여 생명을 살리는 깨달은 다섯 마디 말을 건네는 자입니까? 주일학교 교사로서 방대한 신학적 지식을 쏟아내기보다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십자가의 사랑을 전하는 진실한 한마디가 그들의 영혼을 구원합니다. 직장 동료에게 종교적인 언어로 정죄하기보다, 그들의 삶의 무게를 이해하고 격려하는 상식적이고 따뜻한 그리스도인의 언어(다섯 마디)를 실천할 때, 우리 공동체는 비로소 세상을 살리는 참된 생명력을 회복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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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진리와 질서의 하나님, 

교회의 머리 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은사의 수여자이신 성령님, 

삼위일체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지혜를 찬양합니다. 

오늘 고린도 교회를 향한 사도 바울의 불을 토하는 권면 앞에서, 

내가 가진 영적 지식과 신앙의 연수를 훈장처럼 여기며, 

타인을 이해하고 배려하기보다는 나를 드러내기에 급급했던 

육신적인 교만을 처절하게 회개합니다. 

방언의 은사에 취해 형제의 무지와 상처를 외면했던 

고린도 교인들의 이기적인 모습이, 

혹여나 교회 안에서 우리만의 언어로 세상을 소외시키고 

이웃을 판단했던 나의 일그러진 영적 자화상이 아닌지 

돌아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님, 우리 교회 예배가 나 혼자 감정에 취해 

허공을 치는 예배가 되지 않게 하옵소서. 

나의 기도와 찬양과 섬김이 가장 연약한 형제의 입술에서 

"아멘!"이라는 기쁨의 화답을 이끌어내는, 

십자가의 이타적 사랑으로 충만한 예배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신비한 경험과 남에게 보이기 위한 허영심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하시고, 

참된 사랑의 통제를 받는 은사를 발휘하게 하옵소서. 

나를 자랑하는 일만 마디의 헛된 말보다,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고 가르치는 

‘깨달은 마음의 다섯 마디’를 가장 큰 능력으로 사모하며 실천하는 

거룩한 공동체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를 위해 이해할 수 있는 십자가의 말씀으로 오셔서 생명을 내어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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