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13:01-13 은사 경쟁을 잠재우는 십자가의 가장 좋은 길: 영원한 사랑의 본질과 우월성

by 평화의길벗 posted Jun 20,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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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3:01-13 은사 경쟁을 잠재우는 십자가의 가장 좋은 길: 영원한 사랑의 본질과 우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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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영적 은사의 남용과 교만으로 심각한 분열을 겪고 있는 고린도 교회를 향해, 아무리 화려한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하고 위대한 예언적 지식과 산을 옮길 믿음이 있으며, 심지어 내 몸을 불사르는 구제를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그것은 아무런 유익이 없는 헛된 소음에 불과하다고 선언합니다. 이어서 사랑은 추상적인 감정이 아니라 오래 참고 온유하며 교만하거나 무례히 행하지 않는 '구체적인 이타적 행동(십자가의 삶)'임을 정의하며, 고린도 교인들의 이기적인 행태를 정면으로 교정합니다. 마지막으로, 고린도 교인들이 절대시했던 예언, 방언, 지식 등은 종말의 때(주님의 재림)에 폐하여질 부분적이고 한시적인 것이지만, 오직 사랑만이 영원히 남는 가장 위대한 가치임을 천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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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및 문화적 배경 : 1세기 헬라-로마 사회, 특히 고린도에는 황홀경(ecstasy) 상태에서 신과 소통한다고 믿는 이방 신비 종교들이 만연했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일부 성도들은 이러한 이교적 배경을 기독교 신앙에 끌고 들어와, 무아지경에서 하는 '방언'을 천사의 언어이자 영적 성숙의 최고 척도로 여겼습니다. 이들은 현란한 수사학과 지식을 숭상하며, 이러한 은사를 가진 자들이 특권층을 형성하여 그렇지 못한 자들을 무시하는 끔찍한 파벌주의와 우월감에 빠져 있었습니다.

# 신학 및 사상적 배경 : 이진섭 교수님(에스라성경대학원대학교)의 통찰에 따르면, 고린도전서 13장은 고립된 낭만적인 '사랑의 찬가'가 결코 아닙니다. 12장부터 14장 전체는 '은사 경쟁'이라는 단일한 문제를 다루는 거대한 수사학적 문맥입니다. 바울은 12장에서 은사의 다양성과 몸의 연합이라는 '소극적/근본적 처방'을 내리고, 14장에서 방언보다 예언을 사모하라는 '구체적 지침(증상 치료)'을 내놓기에 앞서, 13장 전체를 통해 그 문제의 근원을 도려내는 '적극적 처방(원인 치료)'을 제시합니다. 즉, 고린도 교회의 진짜 문제는 은사 자체가 아니라, 그 은사를 이기적이고 교만하게 사용하는 '사랑의 부재'에 있었습니다. 톰 라이트 역시 13장의 사랑을 단순한 도덕적 의무가 아니라, 장차 임할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와 현재의 삶을 이어주는 궁극적인 다리이자 그리스도인의 '숙명'으로 해석합니다.

# 묵상 포인트 : 하나님은 사랑 그 자체이시며, 성자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으로 그 사랑을 확증하셨고, 성령의 은사들이 자기 과시가 아닌 교회의 덕을 세우는 이타적인 사랑의 도구로만 사용되기를 원하시는 영원하신 주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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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절 사랑이 배제된 모든 은사와 헌신의 무익함

성령 하나님은 우리가 화려한 영적 현상과 종교적 업적에 취해 교만해지는 것을 경계하시며, 오직 영혼을 향한 사랑을 동기로 삼을 때에만 우리의 섬김을 가치 있게 받으시는 진리의 영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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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시끄러운 구리와 꽹과리가 된다고 말합니다. 또한 예언하는 능력, 모든 비밀과 지식을 아는 통찰, 산을 옮길 만한 절대적인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자기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며, 전 재산으로 구제하고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는 극한의 희생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런 유익이 없다고 선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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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단락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가장 열광하고 자랑했던 영적 스펙들을 극단적인 조건절("~할지라도")을 통해 하나씩 무너뜨립니다. '천사의 말'은 헬라적 이원론과 과실현된 종말론에 빠져 스스로를 이미 천사적 존재로 여겼던 그들의 영적 교만을 찌르는 표현입니다. 또한 '소리 나는 구리와 꽹과리'는 당시 디오니소스나 키벨레 이방 신전 제의에서 광란 상태를 유도하기 위해 두드리던 타악기 소리로, 사랑 없는 방언은 이방 종교의 소음과 다를 바 없다는 치명적인 모욕입니다. 바울은 은사 경쟁을 벌이는 그들에게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다"를 넘어 "내가 아무것도 아니다(I am nothing)"라고 선언합니다. 산을 옮길 기적의 믿음을 갖고 전 재산을 구제하며 심지어 순교적 희생(몸을 불사름)을 할지라도, 그 동기가 '형제에 대한 십자가의 사랑'이 아니라 나의 종교적 영웅심이나 자기 과시(명예욕)라면, 하나님 앞에서는 완전한 파산(Zero) 상태라는 뼈아픈 통찰입니다. 주님은 화려한 사역의 크기 이전에, 그 사역을 움직이는 내면의 엔진이 '영혼을 향한 긍휼'인지를 준엄하게 물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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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한국 교회는 외형적인 스펙과 종교적 열심주의에 깊이 중독되어 있습니다. 예배당의 크기, 모이는 교인 수, 화려한 찬양팀의 연주, 심지어 치유나 예언 같은 신비적 현상이 나타나면 그것이 곧 성령 충만이고 성공인 줄 착각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이 모든 것이 '사랑' 없이 진행된다면 허공을 치는 소음이요 헛된 종교 놀음에 불과함을 경고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주일학교 교사로, 찬양대원으로, 목자로 몸이 부서져라 헌신하면서도 왜 상처를 받고 공동체에 갈등을 일으킵니까? 내 안의 숨은 동기가 영혼을 살리려는 사랑이 아니라, 남들에게 인정받으려는 자기 과시와 의(義)이기 때문입니다. "이 헌신 속에 사랑이 빠져있다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라는 절망적인 자기 인식이 필요합니다. 교회 내의 모든 사역과 은사 활용을 일시 중단해서라도, 내 마음의 동기가 십자가의 사랑에 단단히 결속되어 있는지를 날마다 점검하는 철저한 영적 구조조정이 일어나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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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7절 은사를 발휘하는 참된 방식 : 십자가 사랑의 본질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참고 견디심으로 사랑의 본질을 보여주셨고, 우리가 지식과 은사를 무기로 타인을 찌르는 대신, 오래 참음과 온유함으로 형제를 덮어주는 참된 사랑을 실천하기를 요구하시는 구원자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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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사랑을 의인화하여 15개의 동사로 묘사합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며, 시기, 자랑, 교만, 무례함, 자기 유익 구함, 성냄, 악한 것을 생각하는 일(부정적 8가지)을 하지 않습니다. 대신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진리와 함께 기뻐하며, 모든 것을 참고, 믿고, 바라고, 견디는 것(긍정적 7가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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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섭 교수님과 여러 신학자들의 통찰에 따르면, 이 4-7절은 보편적인 사랑의 철학적 정의가 아니라, 철저하게 '고린도 교회의 일그러진 현실을 비추는 거울'이자 일침입니다. 바울이 나열한 8개의 부정어("~하지 아니하며")는 정확히 고린도 교인들이 은사를 빙자해 저지르고 있던 행태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방언과 지식을 무기로 다른 파당을 '시기'하고 '자랑'하며 '교만'했습니다. 예언을 한답시고 다른 사람에게 '무례히 행하고', 남의 양심은 짓밟은 채 '자기의 유익'만 구했으며(고전 10:24), 법정 소송까지 가며 '성내고 악한 것'을 갚아주려 했습니다. 따라서 바울이 말하는 사랑은 달콤한 감정이 아니라, '은사를 통제하고 발휘하는 십자가의 행동 강령'입니다. '오래 참음(마크로뒤메오)'과 '모든 것을 견딤'은 하나님이 죄인인 우리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신 십자가의 성품입니다. 예언과 지식이 상대방의 허물을 들추어내는 날카로운 칼이 되지 않으려면 반드시 '온유함'의 덮개가 필요합니다. 은사가 아무리 대단해도 이 15가지의 십자가 행동 강령(사랑)을 통과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공동체를 파괴하는 흉기에 불과합니다. 사랑은 내 권리를 십자가에 못 박고 이웃의 성숙을 기꺼이 기다려주는 적극적인 의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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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한국 사회는 극단적인 정치적, 이념적 양극화와 혐오의 시대에 접어들었습니다. 나와 생각이 다르면 분노하고 무례히 행하며, 상대의 악한 점을 집요하게 들추어내어 파멸시키는 것을 정의라고 착각합니다. 슬프게도 교회 안에도 이러한 세속적 투쟁 방식이 들어와, 이른바 '진리를 수호한다'는 명분으로 서로에게 무례하고 잔인하게 칼을 휘두릅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다툼이 일어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지식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사랑으로 서로의 허물을 '덮어주지(스테고)' 않기 때문입니다. 내게 어떤 영적 통찰이나 행정적 능력이 있더라도, 상대방의 연약함을 보았을 때 그것을 폭로하고 자랑하기보다 묵묵히 덮어주고 그가 변화될 것을 끝까지 '믿고 바라주며' 기다리는 바보가 되어야 합니다. 직장에서 억울한 일을 당할 때 복수할 권리를 내려놓고 기꺼이 손해를 감수하는 것, 가정에서 부족한 배우자와 자녀를 향해 화를 내기보다 오래 참아주는 십자가의 수동성을 실천할 때, 우리는 비로소 세상을 변혁시키는 그리스도의 진짜 은사를 발휘하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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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13절 부분적인 은사의 한계와 사랑의 영속성(우월성)

하나님은 장차 도래할 완전한 하나님 나라를 우리에게 약속하시며, 이 땅에서 부분적인 지식과 은사에 집착하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리고, 영원히 지속될 사랑의 삶으로 성숙해가기를 원하시는 통치자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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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예언도, 방언도, 지식도 다 폐하고 그칠 것이나 사랑은 영원히 떨어지지 않는다고 대조합니다. 우리가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고 예언하지만,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이 모든 부분적인 것이 폐하여질 것입니다. 이를 어린아이와 장성한 사람의 차이, 그리고 구리 거울로 희미하게 보는 것과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보는 것의 차이로 설명합니다. 결론적으로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 제일은 사랑이라고 선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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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단락은 고린도 교회의 가장 심각한 신학적 오류였던 '과실현된 종말론'을 교정하는 거대한 종말론적 선언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자신들이 받은 방언이나 지식이 최종적이고 '온전한(텔레이온)' 구원의 완성태라고 착각하여 교만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이 자랑하는 모든 화려한 은사들은 사실 임시적이고 한시적인 '부분(에크 메루스)'에 불과하다고 일축합니다. 10절의 "온전한 것(토 텔레이온)이 올 때"는 단순히 성경 정경의 완성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재림(Parousia)으로 완성될 완전한 종말의 때를 가리킵니다. 주님이 다시 오시면, 하나님의 뜻을 희미하게 전하던 예언이나 방언 같은 '표지판(은사)'들은 목적지에 도달했기에 더 이상 필요가 없어 '폐기'됩니다. 바울은 은사에 집착하는 그들을 '어린아이(네피오스)'에 비유하며, 당시 고린도의 특산물이던 '청동 거울'의 희미함을 통해 현재 우리 영적 지식의 철저한 한계를 지적합니다. 반면, "사랑은 떨어지지(핍토, 소멸하지) 않습니다". 톰 라이트의 통찰처럼, 사랑은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장차 올 새로운 창조 세계를 앞당겨 맛보는 그리스도인의 '숙명'이자 '다리'입니다. 천국에 가면 믿음은 실상으로, 소망은 성취로 전환되겠지만, 하나님 자체이신 '사랑'은 그 나라의 본질이기에 영원히 남습니다. 그러므로 가장 큰 은사요 길은 당장 눈에 보이는 화려한 은사가 아니라, 영원까지 이어질 십자가의 사랑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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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들은 영원하지 않은 것들에 목숨을 겁니다. 세상 사람들은 돈과 권력을, 교인들은 교회 내의 직분과 칭찬, 심지어 영적 우월감을 위해 치열하게 경쟁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 우리가 쌓아 올린 모든 신학적 지식, 교회의 거대한 건축물, 유튜브 조회 수, 심지어 목사나 장로라는 직분마저도 다 안개처럼 폐기될 '어린아이의 장난감'에 불과합니다. 우리 교회 성도들은 내 신앙의 현주소를 정직하게 진단해야 합니다. 나는 여전히 기적과 응답, 종교적 황홀경만을 구하는 어린아이의 수준에 머물러 있습니까, 아니면 그것들을 초월하여 이웃을 위해 나를 십자가에 내어주는 장성한 어른의 사랑으로 나아가고 있습니까? 인생의 마지막 날, 하나님 앞에서 우리에게 남는 것은 '내가 얼마나 많은 사역을 했느냐'가 아니라 '내가 얼마나 예수의 마음으로 이웃을 사랑했느냐'뿐입니다. 썩어질 세상의 성공과 파당을 짓는 편협한 진영 논리에서 빠져나와, 영원히 남을 사랑을 오늘 나의 가정과 일터에서 묵묵히 실천하는 종말론적 신앙인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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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영원한 사랑의 본체이시며 만물을 다스리시는 삼위일체 하나님, 

오늘 바울의 피 끓는 사랑의 찬가 앞에서, 

십자가의 은혜를 값싼 종교적 스펙으로 전락시키고,

내 알량한 성경 지식과 은사로 형제들을 무시하며 판단했던 

저희의 교만과 어리석음을 처절하게 회개합니다. 

주님, 고린도 교회처럼 우리 교회와 한국 교회 안에도 

사랑이 빠진 요란한 소음만이 가득합니다. 

아무리 위대한 사역을 하고 몸을 불사르는 헌신을 할지라도, 

내 마음속에 형제를 향한 오래 참음과 온유함이 없다면 

하나님 앞에 아무것도 아님을 두렵게 깨닫게 하옵소서. 

이제는 나의 유익을 구하고 무례히 행하며 시기하던 

어린아이의 일을 벗어버리게 하옵소서.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모든 것을 참으시고 견디신 

예수님의 그 마음을 품고, 

나와 생각이 다르고 연약한 지체들을 기꺼이 덮어주고 기다려주는

'참된 십자가의 사랑'을 우리의 일상과 일터에서 살아내게 하옵소서. 

장차 주님이 오시는 날, 세상의 화려한 지식과 은사들은 다 폐하여지나 

오직 우리가 나눈 사랑만이 영원히 남음을 기억하게 하옵소서. 

잠시 있다 사라질 허상에 목숨을 걸지 않게 하시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본질인 이 믿음, 소망, 사랑을 굳게 붙들고 

오늘 하루도 묵묵히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는 

참된 성숙한 신앙인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가장 완전한 사랑이자 소망이 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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