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9:24-10:13 추락하는 자를 받아내는 은총의 그물망
참된 신앙이란, 세례와 성찬 같은 종교적 체험을 특권화하여 스스로 안전하다고 착각하는 오만한 영적 엘리트주의를 직시하고, 구습에 젖은 우리 마음에 거룩한 파열음을 내는 영적 깨어남을 통해, 선 줄로 생각하다가 속절없이 넘어지는 우리의 연약함 한복판에 기어코 피할 길을 내어주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신 은총에 우리 존재를 온전히 의탁하는 생명 사건입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인생의 트랙 위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며, 때로는 방향을 잃고 허공을 치는 것 같은 무력감에 걸음을 멈추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남들은 다 저만치 앞서 달려가며 영광의 관을 얻는 것 같은데, 나만 홀로 뒤처져 세상의 척박한 모래바람을 온몸으로 맞고 있는 듯하여 남몰래 눈물짓고 계신 분이 있으십니까. 더 완벽한 신앙의 실적을 증명해야만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다는 무거운 강박에 짓눌려 회의하고 계신 모든 분의 심령에, 우리의 넘어짐조차 넉넉한 긍휼로 안아주시는 주님의 다사로운 평화가 스며들기를 빕니다.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세상은 늘 '내가 이만큼 이루었으니 나는 안전하다'는 자기 확신을 생존의 무기로 삼으라고 다그칩니다. 오늘 우리가 마주한 고린도전서 9장 후반부에서 10장 전반부에 이르는 풍경은, 종교적 기득권과 얄팍한 영적 체험을 무기 삼아 스스로 안전하다고 자부하던 고린도 교인들의 오만함을 향해, 사도 바울이 어떻게 벼락같은 경고를 내리며 동시에 십자가의 맹렬한 은총을 선포하는지를 묵직하게 보여줍니다.
바울은 9장 말미에서 달음질하는 운동선수의 비유를 듭니다. 그는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라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바울이 두려워한 것은 단순히 개인적인 구원 탈락만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온 힘을 다해 세우고자 했던 교회 공동체의 구원이라는 궁극적 목표를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거룩한 염려였습니다. 그러나 정작 고린도 교인들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이미 영적인 고지에 다다랐다고 착각하며 경쟁하듯 은사를 과시하고 세상의 방종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들의 헛된 안일함을 깨뜨리기 위해 10장에서 이스라엘 조상들의 광야 여정을 소환합니다. 출애굽 세대는 모두가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았고, 반석이신 그리스도로부터 신령한 성찬을 먹고 마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들의 다수를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라고 바울은 서늘하게 선언합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자신들이 세례를 받고 주의 만찬에 참여하는 기독교인이 되었으니 밖에서 우상 제물 파티에 참석하거나 세속의 부도덕을 즐겨도 영혼은 절대 안전할 것이라는 끔찍한 착각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종교적 의식을 자신들의 안전을 보장하는 부적으로 전락시켰던 것입니다.
이어지는 6절에서 11절에서 바울은 그들의 실패가 우리의 본보기가 되었다고 말하며, 우상 숭배와 음행과 주를 시험함과 원망이라는 네 가지 죄악을 낱낱이 열거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옛날이야기가 아닙니다. 우상과 쾌락을 좇으며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면 끊임없이 원망을 쏟아내는 것은 바로 내 자아를 중심에 두고 세상을 통제하려는 자기 속으로 구부러진 마음의 적나라한 실체입니다. 어느 냉소주의자는 지옥은 한순간도 자기를 잊을 수 없는 곳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과 고린도 교인들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으면서도 철저히 자기 욕망과 권리만을 주장하는 그 끔찍한 자아의 지옥에 갇혀 스스로 파멸의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토록 스스로를 망가뜨리는 백성들을 보시며 깊은 슬픔 속에서 끙끙 앓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바울의 이 모든 매서운 경고는 우리를 절망시키려는 것이 아닙니다. 12절과 13절에서 복음의 가장 눈부신 반전이 일어납니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참된 신앙은 나는 절대로 넘어지지 않을 만큼 굳건하다고 자만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내가 언제든 속절없이 허물어질 수밖에 없는 질그릇 같은 존재임을 정직하게 인정하는 데 있습니다. 놀랍게도 하나님은 우리가 완벽하고 흠결 없이 서 있기를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시험에 넘어지고 비틀거리는 우리의 남루한 바닥 한복판에 기어코 피할 길을 만들어 두시는 분, 그분의 신실하심에 우리 인생의 결론이 달려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얄팍한 종교적 우월감으로 자신을 포장하던 껍데기를 벗어버리고, 나의 연약함을 안고 하나님의 신실하심 속으로 뛰어들기 위해 우리에게 절실히 요청되는 영적 호흡이 바로 참된 묵상입니다. 김영봉 목사는 묵상을 혁명이라고 선언합니다. 구습에 젖은 우리의 일상에 일어나는 거룩한 혁명입니다. 우리는 종종 성경을 읽으면서도 내 입맛에 맞는 구절만 골라내어 나의 세속적 신념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삼곤 합니다. 그러나 참된 묵상이란 타락한 내 양심을 향해 살아있는 말씀이 방망이처럼 두드리고 불처럼 타오르도록 나를 온전히 내어주는 고통스럽고도 찬란한 전복입니다. 묵상을 통해 우리는 내가 이만큼 믿었으니 안전하다는 거짓된 확신을 십자가 아래 산산이 부수고, 오직 내게 피할 길을 열어주시는 분은 십자가의 주님 한 분뿐임을 가슴 저리게 깨닫게 됩니다.
혹시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고린도 교인들처럼 내가 가진 직분이나 종교적 체험, 예배의 횟수를 훈장처럼 여기며 타인을 은근히 정죄하거나 스스로 영적인 엘리트라는 헛된 교만에 빠져 계시지는 않습니까. 반대로, 끊임없이 넘어지고 실패하는 내 모습 때문에 나 같은 자는 멸망받아 마땅하다며 짙은 자괴감의 늪에서 숨죽여 울고 계신 분이 있습니까. 이제 내 힘으로 구원의 자격을 입증하려던 그 피곤하고 서늘한 자기 확신의 무기를 십자가 아래 가만히 내려놓으십시오.
하나님은 특권 의식에 빠져 우상과 타협하며 방종하던 고린도 교인들의 그 치사하고 옹졸한 바닥을 아시면서도 그들을 가차 없이 내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선 줄로 착각하다가 비참하게 엎어진 그 실패의 자리마다 찾아오시어,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라는 가장 안전하고도 눈부신 피할 길을 내어주시는 분이 우리 주님이십니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가 얼마나 도덕적으로 넘어지지 않고 잘 버티느냐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툭하면 원망하고 유혹에 쓰러지는 우리의 이 비루한 일상조차 무한한 자비로 덮어 안으시어, 기어코 십자가의 붉은 피로 우리의 피할 길을 직조해 내시는 하나님의 그 맹렬하고도 압도적인 긍휼에 온전히 기대어 있습니다.
우리의 상처 많고 위태로운 신앙 여정은 높은 허공을 가로지르는 공중그네 곡예사와 그 아래 펼쳐진 그물망의 관계와 같습니다. 세상의 얄팍한 지혜와 영적 교만은 우리에게 너는 훈련된 곡예사이니 절대로 바닥으로 떨어지지 않을 완벽한 비행을 할 수 있다고 속삭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선 줄로 착각한 채 교만하게 허공을 날다가 결국 유혹의 바람에 휩쓸려 속절없이 추락하곤 합니다. 그러나 위대한 서커스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우리가 한 번의 실수도 없이 완벽하게 날아오를 것이라 기대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곤두박질치는 바로 그 허공의 밑바닥 가장 낮은 곳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끝없이 넓고 탄력 있는 은총의 안전그물을 이미 든든하게 매달아 두셨습니다. 우리가 내 비행 기술을 뽐내려던 헛된 교만을 멈추고 십자가의 그물망 위로 내 연약함을 정직하게 던져 넣을 때, 우리는 떨어져 죽는 대신 그 자비의 그물망에 부드럽게 감싸 안겨 다시 하늘을 향해 힘차게 튕겨 오르는 경이롭고도찬연한 생명의 비행을 영원토록 이어가게 될 것입니다.
초록의 생명력이 절정을 향해 치닫는 이 눈부신 계절, 얄팍한 경험으로 나를 증명하려던 세상의 오만한 질서를 미련 없이 거부하십시오. 그저 말씀이 내 영혼을 부수고 새롭게 빚어내시는 거룩한 혁명의 묵상 자리에 엎드리며, 언제나 피할 길을 내어주시는 그 신실하신 은총에 기대어 이웃과 함께 다정하게 손잡고 걸어가는 아름다운 평화의 순례자가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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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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