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8:1-13 지식의 칼날을 거두고 내어준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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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신앙이란, 나만의 알량한 지식과 권리로 이웃을 깎아내리려는 서늘한 폭력성을 직시하고, 내 세계 안으로 연약한 공동체가 들어오도록 기꺼이 빈 공간을 내어주는 거룩한 영적 물러섬을 통해, 자격 없는 우리조차 조건 없이 용납하시어 생명의 길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맹렬한 사랑에 온전히 잇대는 생명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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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인 여름의 한복판으로 들어서는 날입니다. 짙푸른 녹음 사이로 밀려오는 후텁지근한 열기가 우리의 호흡을 가쁘게 만들고, 내 뜻대로 통제되지 않는 불쾌지수가 자칫 이웃을 향한 날 선 예민함으로 번지기 쉬운 계절입니다.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세상은 내게 아는 것이 많고 누릴 권리가 충분하다면, 그것을 남김없이 행사하고 과시하는 것을 지혜이자 능력이라고 다그칩니다. 오늘 우리가 마주한 고린도전서 8장의 풍경은, 이토록 지독한 세속의 자기 과시가 어떻게 거룩해야 할 교회 공동체를 수평적 폭력으로 멍들게 했는지를, 그리고 사도 바울이 그 오만한 지식의 성채를 허물고 어떻게 십자가의 넉넉한 은총을 선포하는지를 묵직하게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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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고린도 시장에서 유통되던 고기들은 대부분 이방 신전에서 제물로 바쳐졌던 것들이었습니다. 교회 안에는 이 고기를 먹는 문제를 두고 두 부류가 충돌했습니다. 지식이 있는 사람들은 "세상에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며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시다"라는 올바른 신학적 진리를 깨닫고 있었기에 거리낌 없이 고기를 먹었습니다. 반면 과거의 관습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약한 교인들은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는 것을 양심의 가책으로 느끼며 괴로워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하늘과 땅의 수직적 계율로만 보지 않고 인간 사이의 수평적 관계로 읽어낼 때, 고린도 교회의 진짜 비극은 우상 제물 그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바른 지식을 가졌노라 자부하던 강한 자들이 자신들의 그 알량한 신학적 옳음을 무기 삼아 양심이 약한 형제들을 업신여기고 실족하게 만든 지독한 수평적 폭력이 문제의 본질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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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을 향해 바울은 벼락같은 선언을 던집니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아무리 올바른 성경적 지식과 권리라 할지라도, 그것이 내 곁의 연약한 이웃을 짓밟고 상처 입히는 칼날이 된다면 그것은 이미 복음이 아니라는 준엄한 꾸짖음입니다. "할 수 있지만 하지 않는 것이 사랑입니다." 바울은 단호하게 결단합니다. "그러므로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 이 선언은 바울 개인의 금욕 결심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신의 자유를 전부 향유할 권리를 가진 자가, 그 권리를 사랑 때문에 기꺼이 내려놓는 거룩한 포기의 선언입니다. 신영복 선생은 "입장의 동일함, 그것은 관계의 최고 형태"라고 갈파했습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윤리적 책무는 높은 곳에서 나의 우월한 지식을 뽐내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신 주님처럼 가장 낮고 연약한 자의 자리로 기꺼이 내려가 그와 입장을 동일하게 맞추는 거룩한 바보가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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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나의 권리와 지식을 과시하려는 오만한 자아를 꺾고 기꺼이 이웃을 위해 나의 자유를 제한하는 사랑의 길로 나아가기 위해 우리에게 절실히 요청되는 영적 호흡이 바로 참된 묵상입니다. 묵상이란 내 지식을 채워 영적 우월감을 획득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박대영 목사는 묵상과 공동체의 관계를 낯설고도 묵직하게 정의합니다. "우리 스스로 자신을 읽기 전에 우리는 공동체에 의해 읽혀야 한다. 그들이 우리 자신을 읽고 영향을 미치도록 공동체를 위한 공간을 우리 안에 마련해야 한다." 세상은 내 주장을 관철하는 것을 긍지로 여기지만, 묵상은 "네가 내 생각대로 행동해야만 널 받아주겠다"는 폭력적 조건을 거두어들이는 일입니다. 도리어 연약하고 상처 입은 타인의 조건이 내 세계 안으로 안전하게 들어올 수 있도록, 기꺼이 내 마음의 빈 공간을 활짝 열어 내어주는 그 고통스럽고도 위대한 자기 비움이 바로 참된 묵상입니다. 내가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비워지는 것, 내가 읽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읽혀지는 것, 그것이 공동체 안에서 살아가는 신앙인의 가장 깊은 영적 자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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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고린도 교인들처럼 내가 가진 직분이나 헌신의 연수, 혹은 성경 지식을 앞세워 나와 다른 이들을 함부로 재단하고 가르치려 들다가 깊은 관계의 단절과 피로감을 겪고 계십니까. 반대로, 세상의 기준이나 교회의 잣대에 미치지 못하는 나의 연약함과 무지함 때문에 자책하며 짙은 소외감의 그늘에 앉아 계신 분이 있습니까. 하나님은 완벽한 신학적 지식으로 무장한 엘리트들만을 구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모든 지혜와 능력을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그 영광스러운 권리를 기꺼이 포기하시고, 우리의 가장 비참하고 무지한 자리까지 내려오시어 십자가의 붉은 피로 우리의 허물을 남김없이 덮어 주셨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가 얼마나 도덕적으로 흠 없고 지적으로 완벽하냐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상처 많고 흔들리는 우리의 남루한 존재조차 당신의 가장 깊은 성소로 품어 안으시어 기어코 거룩한 생명의 백성으로 빚어 내시는 하나님의 그 맹렬하고도 압도적인 은총에 온전히 기대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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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상처 많고 고단한 신앙 여정은 어린아이와 손을 잡고 걷는 아버지의 보폭 맞추기와 같습니다. 건장한 아버지는 자신의 체력과 긴 다리를 뽐내며 얼마든지 빠르고 편하게 목적지를 향해 질주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논리는 그것이 능력이라고 부추깁니다. 그러나 뒤따라오는 보폭 좁은 어린아이를 위해 아버지는 자신이 낼 수 있는 최고의 속도를 기꺼이 포기합니다. 다리에 힘을 빼고 아이의 느린 걸음에 자신의 걸음을 맞춥니다. 아버지의 그 느릿하고 답답해 보이는 걸음은 결코 무능력이나 실패가 아닙니다. 그것은 자신의 권리와 능력을 전부 쏟아붓는 것보다 훨씬 더 위대하고 눈물겨운 사랑의 수고입니다. 우리가 내 지식과 자유를 뽐내려는 헛된 질주를 멈추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곁에 있는 이들의 연약함에 내 영혼의 보폭을 맞출 때, 비로소 그 느리고 서툰 걸음 걸음마다 세상 어떤 화려한 속도전으로도 빚어낼 수 없는 가장 눈부시고 경이로운 생명과 샬롬의 꽃이 만발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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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팍한 지식으로 남을 누르고 내 자유만을 누리려는 세상의 피곤한 질서를 미련 없이 거부하십시오. 그저 내 마음 안에 연약한 이웃이 머물 수 있도록 빈 공간을 내어주는 깊은 묵상의 자리에 엎드리며, 나를 조건 없이 용납하신 그 십자가의 넉넉한 은총에 잇대어 기꺼이 곁에 있는 이들에게 나의 권리를 양보하는 다정하고 따뜻한 평화의 순례자가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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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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