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7:1-24 여백을 허락하시는 하나님

by 평화의길벗 posted Jun 10,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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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7:1-24 여백을 허락하시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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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신앙이란, 육체를 혐오하고 극단적 금욕을 통해 자신의 영적 우월함을 증명하려던 거짓된 이원론을 직시하고, 우리에게 허락된 평범한 일상을 하나님의 창조 신비로 긍정하며 향유하는 영적 걸음을 통해, 우리의 남루한 현실조차 가장 거룩한 소명의 자리로 빚어내시는 주님의 광대한 은혜에 온전히 머무는 생명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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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을 재촉하는 이른 비가 대지의 먼지를 고요히 씻어 내리며, 가장 평범하고 눈에 띄지 않던 길가의 여린 풀잎들조차 본연의 맑은 초록빛을 뿜어내는 경이로운 아침입니다. 화려한 종교적 업적이나 눈에 띄는 헌신이 없으면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진 것은 아닐까 하는 짙은 불안감에 시달리고 계신 분들, 그리고 반복되는 지루한 일상의 무게에 짓눌려 신앙의 참된 의미를 애타게 묻고 계신 모든 분의 심령에, 우리의 평범한 삶의 자리로 친히 찾아오시어 넉넉한 은총을 부어주시는 주님의 다사로운 평화가 스며들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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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세상은 늘 남들과 다르게 자신을 구별 짓고, 무언가 특별하고 비범한 성취를 이루어야만 가치 있는 존재가 된다고 다그칩니다. 오늘 우리가 마주한 고린도전서 7장의 풍경은, 그토록 거룩하게 부름받은 교회 공동체가 영적 우월감이라는 덫에 빠져 자신들의 구체적인 일상과 육체를 어떻게 혐오하게 되었는지를, 그리고 사도 바울이 그 거짓된 신앙의 틀을 깨고 어떻게 일상의 자리에 십자가의 은총을 벼락같이 선포하는지를 묵직하게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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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 1절에서 바울은 "너희가 쓴 문제에 대하여 말하면"이라고 운을 뗍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사절단을 통해 바울에게 편지로 구체적인 질문을 던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질문의 밑바탕에는 당시 고린도 사회를 짙게 지배하던 헬라 철학의 이원론이 깔려 있었습니다. 그들은 영은 선한 것이고 육은 악하거나 무가치하다고 믿었습니다. 이 끔찍한 사상은 교회 안에서 두 가지 극단적인 형태로 나타났는데, 하나는 육체로 무슨 짓을 하든 영혼에는 상관없다는 방탕주의였고, 다른 하나는 육체의 본성을 혐오하며 억압하는 금욕주의였습니다. 바울이 직면한 문제는 바로 이 후자였습니다. 교회 안의 어떤 이들은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다고 주장하며, 결혼을 거부하거나 부부 사이의 성적 관계마저 끊어내는 것을 고상한 영성이라고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육체적이고 일상적인 조건을 초월하는 것만이 영적으로 성숙한 증거라 여겼고,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이들을 은근히 무시하는 교만에 빠져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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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바울은 그들의 영적 허영을 단호히 깨뜨립니다. 독신이나 결혼 생활 모두가 영적 서열을 가르는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주신 고유한 은사, 곧 선물임을 선언합니다(7절). 헬라어로 은사는 카리스마(χάρισμα)입니다. 하나님의 은총(χάρις)에서 흘러나오는 것이 은사입니다. 독신의 삶도, 결혼한 삶도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흘러나온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어느 쪽도 더 거룩하거나 더 열등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24절에서 혁명적인 선언을 던집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는 화려한 신비 체험이나 육체를 극단적으로 학대하는 금욕의 산꼭대기가 아닙니다. 땀 흘려 일하는 직장, 밥을 짓고 청소를 하는 가정, 아이를 돌보고 배우자와 부대끼며 살아가는 그 평범하고 남루한 일상이야말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가장 거룩한 소명의 자리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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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고백교회 목회자였던 디트리히 본회퍼는 참된 기독교인의 영성을 이렇게 갈파했습니다. "나는 모든 의무와 문제들을 뚫고 나가며 살아가는 것을 세속성이라고 정의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팔에 전적으로 안기고 세상에서 그분의 고통에 참여하는 것은 바로 이런 삶을 통해서다." 세속의 한복판에 주어진 의무와 인간관계의 짐을 회피하지 않고 묵묵히 뚫고 나가는 삶, 바로 그 고단한 부르심의 자리에서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따뜻한 품에 전적으로 안기는 은총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렇듯 나의 현실을 부정하고 특별한 종교적 성취로 나를 뽐내려는 세속적 관성을 끊어내고, 내게 주어진 일상을 긍정하기 위해 절실히 요청되는 영적 호흡이 바로 참된 묵상입니다. 묵상이란 머릿속으로만 신비로운 진리를 그려내는 사변적 행위가 아닙니다. 참된 묵상은 그리스도를 통해 알려진 창조주와 교제하며 그분의 창조를 알아 가고 향유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꾸만 우리의 육체적 조건과 평범한 일상을 초라하게 여기며 그 밖으로 탈출하려 하지만, 묵상은 도리어 멈춰 서서 내 곁에 있는 밥상, 나를 부대끼게 하는 가족, 내가 마주하는 오늘의 노동 속에 깃든 하나님의 거룩한 창조의 손길을 발견하고 기뻐하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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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특별하고 비범한 종교적 체험이나 금욕적 실적을 증명해야만 하나님께 사랑받을 것이라는 무거운 강박에 지쳐 계십니까. 매일 반복되는 밥벌이와 지루한 가사 노동, 변할 것 같지 않은 인간관계 속에서 내 인생은 왜 이리 세속적이고 초라할까 하며 짙은 회의의 늪에 빠져 계신 분이 있습니까. 이제 내 스스로 종교적 완벽주의를 쌓아 올려 영적인 우월감을 획득하려던 그 피곤하고 뾰족한 칼날을 십자가 아래 가만히 내려놓으십시오. 하나님은 육체를 혐오하며 스스로 고상한 척 파당을 짓던 고린도 교인들의 그 오만한 바닥을 아시면서도 그들을 내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말씀이 친히 육신이 되시어 우리의 가장 남루하고 평범한 일상의 한복판으로 들어오신 분이 우리 주님이십니다. 우리의 거룩함은 우리가 얼마나 세상을 초월하여 흠 없이 사느냐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땀 냄새 나고 흠집투성이인 우리의 비루한 일상조차 넉넉히 품어 안으시어, 기어코 내가 너를 부른 이 자리가 가장 거룩한 성소다라고 선언해 주시는 하나님의 그 맹렬하고도 압도적인 자비에 온전히 잇대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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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상처 많고 고단한 신앙 여정은 한 폭의 깊고 웅장한 수묵화의 여백을 받아들이는 과정과 같습니다. 세상의 얄팍한 종교성은 도화지 위에 끝없이 짙고 검은 먹물을 빈틈없이 채워 넣어야만 완벽한 명작이 된다고 우리를 다그칩니다. 그래서 우리는 평범한 일상을 초라하게 여기며, 남들에게 과시할 먹을 갈아내느라 평생을 불안 속에서 소진합니다. 그러나 위대한 화가이신 하나님은 먹물로만 그림을 완성하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아무것도 채워지지 않은 듯 평범하고 심심해 보이는 빈 공간, 바로 우리의 소박하고 남루한 일상의 여백을 가장 중요하고 고귀한 창조의 공간으로 남겨 두십니다. 우리가 먹칠로 스스로를 증명하려던 피곤한 붓질을 멈추고 부르심을 받은 그 자리의 여백에 나를 고요히 내어 맡길 때, 텅 비어 보이던 우리의 평범한 일상은 하나님의 무한한 은총의 숨결로 채워지며 세상 어떤 화려한 색채로도 흉내 낼 수 없는 가장 눈부시고 경이로운 하나님 나라의 명작으로 우리 삶 위에 찬연히 피어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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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비가 내리는 이 유월, 특별한 신앙의 완장으로 남을 깎아내리려는 세상의 피곤한 종교적 허영을 미련 없이 거부하십시오. 그저 내게 주어진 평범한 일상을 하나님의 창조 신비로 긍정하고 향유하는 깊은 묵상의 자리에 머물며, 부르심을 받은 그 삶의 자리에서 곁에 있는 가족과 이웃의 손을 다정하게 잡아주는 따뜻하고 넉넉한 평화의 순례자가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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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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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에서 듣기

https://youtu.be/D8cvir47N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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