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49:1-15 험악한 세월을 심판하고 구속하시는 족장의 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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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앞둔 야곱은 열두 아들을 불러 모아 "후일에 당할 일"을 예언적 시의 형태로 선포합니다(1-2절). 장자 르우벤은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힌 정욕 때문에 탁월함을 잃고(3-4절), 시므온과 레위는 세겜에서 자행한 잔혹한 폭력 때문에 이스라엘 중에서 흩어질 것이라는 저주에 가까운 책망을 받습니다(5-7절). 반면, 과거의 이기심을 버리고 동생을 위해 자신을 대속물로 내놓았던 넷째 유다는 형제들의 찬송이 되며, 그에게서 영원한 통치자의 규(지휘봉)가 떠나지 않을 것이라는 장엄한 왕권의 축복을 받습니다(8-12절). 이어서 스불론은 해변의 항구로, 잇사갈은 안락함에 안주하여 압제 아래 섬기는 건장한 나귀로 묘사되며 그들의 미래가 예고됩니다(13-1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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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문화적 배경으로는, 고대 근동 사회에서 가부장의 임종 전 축복과 유언은 단순한 덕담이 아니라 후손들의 사회적 지위와 유산의 분배를 결정짓는 법적 구속력을 지닌 선언이었습니다. 특히 "후일에 당할 일"(창 49:1)은 문맥상 이스라엘 지파들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여 겪게 될 미래의 운명을 의미하지만, 구속사적으로는 장차 임할 메시아 시대의 종말론적 비전을 내포합니다.
# 신학적·정경적 배경으로는, 창세기는 가인과 아벨부터 시작하여 끊임없이 장자권(Primogeniture)이 육신적 혈통이 아닌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과 인간의 신앙적 결단에 의해 차남 이하로 역전되는 패턴을 보여줍니다. 본문은 그 장자권 박탈의 이유가 '도덕적 실패(수평적 폭력과 타락)'에 있음을 명백히 밝히며, 이 예언이 결정론적 운명이 아니라 오늘을 의롭게 살아야 할 경고적 의미임을 가르쳐줍니다.
# 본문을 수평적 읽기의 관점에서 보자면, 역기능 가정의 늙은 가부장 야곱이 평생 동안 자식들 사이에서 벌어졌던 수평적 폭력의 실체를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대면하고 고발하는 처절한 심판대입니다. 르우벤의 근친상간, 시므온과 레위의 학살 등 힘을 남용하여 타인을 짓밟은 죄악은 철저히 정죄됩니다. 반면, 유다가 이끌어낸 대속적 희생(substitution)이라는 수평적 화해의 열매는 유다 지파를 구속사의 중심(왕권)으로 끌어올리는 결과를 낳습니다. 인간의 치명적인 죄악을 뚫고 십자가의 대속(유다)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시는 수직적 섭리의 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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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절 통제되지 않은 욕망과 장자권의 상실 : 끓어오르는 물처럼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로 탁월한 기득권을 주시지만, 통제되지 않는 정욕과 거룩함의 상실을 결코 묵과하지 않으시며 거두어 가시는 공의의 재판장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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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이 아들들을 불러 모아 "너희가 후일에 당할 일을 내가 너희에게 이르리라"며 경청을 촉구합니다. 장자 르우벤을 향해 "너는 내 장자요 내 기력(온, און)의 시작이며 위풍이 초등하고 권능이 탁월하다"고 칭찬하지만, 곧이어 "물의 끓음 같았은즉 너는 탁월하지 못하리니 네가 아버지의 침상에 올라 더럽혔음이로다"라고 그의 죄를 엄히 꾸짖으며 장자권 박탈을 선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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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의 임종 유언은 "후일에 당할 일"을 알리는 구속사적 계시입니다. 그 첫 대상은 장자 르우벤입니다. 3절에서 야곱은 르우벤을 향해 "내 기력의 시작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기력'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온(און)'은 힘을 뜻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고통', '불행', '속임'이라는 이중적 어원을 갖습니다. 르우벤은 야곱의 힘의 첫 열매였지만, 동시에 야곱 가문의 가장 뼈아픈 고통과 수치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수평적 읽기의 시각에서 르우벤의 죄악은 단순한 성적 일탈이 아닙니다. 창세기 35장에서 르우벤은 아버지의 첩 빌하와 동침했습니다. 이는 가부장의 권위에 대한 정면도전이자, 다른 가족 구성원들의 영혼을 처참히 짓밟은 권력 남용과 수평적 폭력입니다. "물의 끓음 같았은즉(Unstable as water)." 물이 끓어올라 냄비를 넘쳐버리듯, 르우벤은 하나님이 정하신 성(性)과 관계의 거룩한 경계선을 통제하지 못하고 범람해 버렸습니다. 야곱은 40년 전의 이 사건을 덮어두지 않고 심판대 위에 올립니다. 탁월한 육신적 기득권(장자권)을 가졌음에도 도덕적 통제력과 영적 거룩함을 상실한 자는 결국 구속사의 무대에서 "탁월하지 못하게" 됨을 무섭게 고발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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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교회 안팎에서 수많은 영적, 사회적 리더들이 르우벤처럼 무너지는 것을 봅니다. 뛰어난 은사와 배경을 가졌음에도 물이 끓어오르는 것 같은 정욕과 이기심을 통제하지 못해 하루아침에 영적 장자권을 상실하고 교회의 수치가 되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교회에서 어떤 높은 직분이나 세상의 권력을 가졌는지를 보시지 않습니다. 남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 내가 맺고 있는 은밀한 수평적 관계가 거룩한지를 물으십니다. 순간의 쾌락과 정욕을 위해 신앙의 양심을 팔아버린다면, 하나님이 주신 아름다운 영적 기득권은 내 인생의 '고통과 불행(온)'으로 변모할 것입니다. 날마다 성령의 통제 아래 내 안의 끓어오르는 물을 다스리는 거룩한 영성을 지켜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탁월함은 거룩함 위에서만 빛을 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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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7절 폭력의 카르텔과 흩어짐의 심판 : 분노가 세운 바벨탑
하나님은 어떠한 명분으로도 약자를 짓밟고 생명을 살육하는 인간의 잔혹한 폭력을 미워하시며, 분노와 혈기로 세운 인간의 바벨탑을 흩으시는 평화(샬롬)의 왕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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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은 둘째 시므온과 셋째 레위를 하나로 묶어 책망합니다. "그들의 칼은 폭력의 도구로다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지어다... 그들이 그들의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들의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음이로다." 야곱은 그들의 분노와 혈기가 맹렬하고 잔혹하므로 저주를 받을 것이며,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라고 선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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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34장에서 시므온과 레위는 여동생 디나의 강간 사건에 대한 복수를 명분으로, 세겜 성의 남자들이 할례의 고통 중에 있을 때 기습하여 대학살을 자행했습니다. 그들은 여동생의 명예 회복이라는 '정의로운 명분'을 내세웠지만, 실상은 짐승의 발목 힘줄까지 잔인하게 끊어버리는 맹렬한 분노와 혈기에 사로잡힌 살육자들이었습니다. 이 늙은 족장은 죽음 앞에서 그 아들들의 폭력적 카르텔을 철저히 저주하며 자신을 그들의 죄악과 분리합니다. '폭력으로 세력을 규합하려는 자들의 힘을 원천적으로 분쇄하시겠다는 하나님의 공의'가 그 선언 안에 서늘하게 빛납니다. 역설적으로 훗날 레위 지파는 모세 시대의 헌신을 통해 이 '흩어짐의 저주'를 제사장으로서 이스라엘 전역에 흩어져 섬기는 거룩한 흩어짐의 축복으로 승화시키지만, 본문 자체는 잔혹한 폭력에 대한 준엄한 심판입니다. 하나님은 폭력과 분노로 이루어내는 세상의 거짓된 정의를 결코 지지하지 않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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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종종 '정의'와 '거룩한 분노'라는 명분으로 포장하여 타인을 향한 혐오와 폭력, 곧 언어 폭력과 관계적 살인을 정당화하곤 합니다. 가정이나 직장,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나와 뜻이 맞지 않는 사람들을 영적으로, 정서적으로 짓밟으면서 "이것은 디나의 수치를 갚기 위한 하나님의 일이다"라고 착각하지 않습니까? 무자비한 분노와 혈기로 휘두르는 칼은 결코 십자가의 도구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룬 성과가 아니라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이웃과 관계 맺는지를 달아보십니다. 내 안에 타인의 아킬레스건을 끊어버리려는 시므온과 레위의 잔인한 혈기가 있다면, 십자가 앞에 그 분노의 칼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폭력의 연대를 끊고 그리스도의 온유함을 옷 입을 때 참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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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12절 대속의 십자가를 통과한 사자, 유다의 규(Scepter) : 희생이 왕관이 될 때
하나님은 흠 많은 죄인이라도 십자가의 대속적 헌신과 형제애를 실천할 때, 그를 사자처럼 일으켜 세우사 구속사를 이끌어갈 영적 리더로 빚어내시는 은혜와 구원의 주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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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위 세 아들의 장자권이 모두 박탈된 후, 넷째 유다에게 압도적인 축복이 쏟아집니다.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아버지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야곱은 유다를 '사자 새끼'에 비유하며 누구도 그를 범할 수 없으리라 말합니다. 하이라이트는 10절입니다. "규(Scepter, 왕의 지휘봉)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유다의 포도나무와 옷은 풍성한 포도주로 씻기게 될 영광을 묘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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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평적 읽기의 관점, 그리고 창세기 전체의 서사에서 가장 장엄한 역전이 일어나는 순간입니다. 르우벤, 시므온, 레위가 도덕적 파탄과 폭력성으로 인해 장자권을 상실했다면, 왜 하필 유다입니까? 창세기 37장에서 유다는 동생 요셉을 은 20세겔에 팔자고 제안했던 인신매매의 주동자였습니다. 그러나 긴 험악한 세월을 거치며 그는 철저히 깨어졌고, 창세기 44장에서 막내 베냐민을 살리기 위해 권력자 앞에서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내놓는 위대한 대속자(Substitute)로 변화되었습니다. 수평적 폭력을 행사하던 가해자 유다가 타인을 위해 자신의 기득권과 생명을 내어놓는 수평적 화해의 성취자로 거듭났을 때, 하나님은 그를 구속사의 영적 장자로 선택하십니다. "규(Scepter)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이것은 다윗 왕조를 거쳐 궁극적으로 사탄의 머리를 깨뜨리실 '유다 지파의 사자(계 5:5)'이신 평화의 왕, 예수 그리스도(실로)의 도래를 가리키는 강력한 메시아적 예언입니다. 십자가, 곧 대속의 헌신을 짊어진 자만이 영원한 통치권(규)을 이어받는다는 하나님 나라의 패러독스가 유다의 삶을 통해 완성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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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자본주의는 르우벤처럼 스펙과 기득권이 탁월하거나, 시므온과 레위처럼 무자비하게 경쟁자를 제거하는 자들에게 리더의 지팡이를 쥐여줍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리더십은 다릅니다. 하나님은 과거의 치명적인 실패에도 불구하고, 위기에 처한 이웃과 형제를 살리기 위해 기꺼이 자신이 희생양이 되어 십자가를 짊어지는 자에게 영적 통치권을 위임하십니다. 가정의 위기나 교회의 갈등 속에서 "내가 손해 보더라도 저 사람을 살리겠습니다"라며 기꺼이 내 어깨를 내어줄 때, 비로소 형제들의 찬송을 받고 공동체를 화해로 이끄는 진정한 영적 사자로 세워질 것입니다. 이기적 욕망을 버리고 십자가의 대속적 사랑을 실천하는 자리에 여러분의 이름을 올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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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15절 안락함을 위해 자유를 판 노예 : 웅크린 나귀의 비극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이 세상의 안락함에 취해 영적 야성을 잃고 세상의 노예로 전락하는 것을 경계하시며, 거룩한 나그네의 길을 걷기 원하시는 소망의 주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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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은 열 번째 아들 스불론에 대해 "해변에 거주하리니 배 매는 해변이라 그의 경계가 시돈까지리로다"라고 짧게 예언합니다. 이어서 아홉 번째 아들 잇사갈을 묘사합니다. "잇사갈은 양의 우리 사이에 꿇어앉은 건장한 나귀로다 그는 쉴 곳을 보고 좋게 여기며 토지를 보고 아름답게 여기고 어깨를 내려 짐을 메고 압제 아래에서 섬기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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잇사갈은 "양의 우리 사이에 꿇어앉은(웅크린) 건장한 나귀"로 비유됩니다. 나귀는 고대 근동에서 짐을 나르는 데 쓰이는 힘센 동물이지만, 이 나귀는 일어서서 역동적으로 걷지 않고 편안한 우리 사이에 주저앉아 있습니다. 15절은 그가 안락한 안식처(쉴 곳)와 아름다운 토지를 보고 거기에 마음을 빼앗겼기 때문이라고 고발합니다. 가나안 땅의 가장 비옥한 이스르엘 평야를 분배받게 될 잇사갈 지파의 미래를 암시하는 것인데, 그들은 그 땅의 안락함과 물질적 풍요에 취해 가나안 족속과 싸우는 영적 전투를 포기합니다. 그 결과 잇사갈은 평안을 유지하기 위해 이방인의 압제에 순응하며, 자기 어깨를 내어주고 자발적인 노예로 전락하고 맙니다. 하나님이 주신 자유와 언약적 사명보다, 눈앞의 안락한 토지를 우상화할 때 언약 백성이 어떻게 세상의 압제 아래 비참한 노예로 종속되는지를 보여주는 무서운 경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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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떻습니까? 잇사갈처럼 하나님이 주신 건장한 은사와 능력을 가졌음에도, 세상의 비옥한 토지, 곧 안정된 직장, 편안한 노후에 마음을 빼앗겨 진리의 선한 싸움을 포기하고 웅크려 주저앉아 있지는 않습니까? 더 많은 부와 안락함을 지키기 위해, 불의한 세상의 시스템과 타협하며 자발적으로 자본주의의 노예로 전락하고 있지 않은지 정직하게 돌아보아야 합니다. 편안한 소파와 화려한 집이 우리의 영원한 본향이 아닙니다. 세상이 주는 달콤한 안락함을 얻기 위해 하나님 자녀로서의 영적 야성과 자유를 팔아넘기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마십시오. 쉴 곳이 아무리 아름다워 보여도, 진리와 공의를 잃어버린 채 세상의 짐을 지고 압제 아래 헐떡이는 잇사갈의 길에서 돌이켜, 십자가를 짊어지고 당당히 일어서서 걷는 거룩한 야성의 신앙을 회복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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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우리의 험악한 세월과 은밀한 죄악을 낱낱이 달아보시며,
진실한 통회와 대속의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 나라를 빚어내시는 공의롭고 은혜로우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 죽음을 앞둔 야곱의 엄숙한 유언 앞에 우리를 세우셔서 감사합니다.
장자권이라는 빛나는 기득권을 가졌으면서도
끓어오르는 육신의 정욕을 제어하지 못해
모든 영광을 잃어버린 르우벤의 비극을 거울삼습니다.
주님, 우리가 겉으로는 직분과 경건의 모양을 갖추었으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수평적 관계를 파괴하고
욕망에 굴복하는 위선자가 되지 않게 하옵소서.
성령의 통제하심으로 날마다 내 안의 끓어오르는 물을 다스리게 하시고,
거룩함의 경계선 안에서 참된 탁월함을 누리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시므온과 레위처럼 정의라는 이름으로 포장하여
타인을 향해 무자비한 혐오와 폭력의 칼을 휘둘렀던
우리의 분노와 혈기를 십자가의 피로 씻어 주옵소서.
내 이기심으로 남을 해치는 폭력의 바벨탑이 철저히 무너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분노를 명분 삼아 이웃의 아킬레스건을 끊으려 했던
우리의 냉혹한 심판자의 자리에서 내려오게 하시고,
그 자리에 그리스도의 온유함이 채워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과거 인신매매의 주동자였던 유다가
자신의 생명을 형제의 담보로 내놓는 십자가의 대속을 실천했을 때
영원한 통치권(규)이 주어졌음을 봅니다.
우리 공동체가 타인의 축복을 시기하거나 남을 희생양 삼는 악독을 버리게 하옵소서.
기꺼이 약자를 위해 내 어깨를 내어주는 유다의 길,
곧 우리를 위해 자기 몸을 버리신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영적 장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세상의 안락한 토지와 쉴 곳에 눈이 멀어 영적 야성과 자유를 포기하고
세상의 노예로 웅크려 살았던 잇사갈의 나태함에서 우리를 건져 주시옵소서.
눈앞의 편안함보다 하나님의 언약을 더 사모하며,
세상의 압제에 타협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향해 당당히 걸어가는
깨어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를 위해 친히 대속의 희생제물이 되사 만국의 통치자가 되신
유다 지파의 사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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