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47:13-26 바코드를 지우고 낙관을 되찾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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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신앙이란, 빵을 얻기 위해 자신의 자유와 존엄마저 제국에 헐값으로 팔아넘기는 비정한 생존의 굴레를 직시하고, 우리 정체성이 세상의 통제권 너머에 있음을 확인하는 거룩한 멈춤을 통해, 어떠한 대가도 요구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입히고 먹이시는 하나님의 가없는 은총에 온전히 기대는 생명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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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것에는 보이지 않는 가격표가 붙어 있는 듯합니다. 햇살과 맑은 공기, 대지 위로 솟아오르는 연초록의 잎사귀들은 어떠한 대가도 지불하지 않고 생명의 향연을 누리건만, 유독 우리 인간들만이 내일을 살아내기 위해 오늘 나의 시간과 자유를 세상의 저울 위에 올려놓고 불안한 계산을 거듭하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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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47장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풍경은 서늘합니다. 극한의 기근 앞에서 애굽과 가나안 백성들은 빵 한 조각을 위해 먼저 돈을 내어놓습니다. 돈이 바닥나자 가축을 끌고 옵니다. 그리고 마침내 더 이상 내어놓을 것이 없어진 그들은 요셉 앞에 무릎을 꿇고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몸과 우리 토지를 먹을 것을 주고 사소서. 우리가 토지와 함께 바로의 종이 되리니"(창 47:19). 자유와 존엄, 땅과 몸을 모두 내어주고 단지 살아남으려 했던 그 참담한 협상의 풍경이, 수천 년이 지난 지금 우리의 일상 안에서도 낯설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피라미드 안에서 생존하기 위해 나의 소중한 시간과 양심, 심지어 신앙의 결기마저 세상에 헐값으로 넘기며 자발적 노예가 되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요셉의 탁월함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한 줌의 양식을 빌미로 사람들의 땅과 자유를 영구히 삼켜버린 제국의 완성, 거대한 수평적 예속의 현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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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굴레를 끊어내는 힘은 어디서 옵니까. 그것은 질주를 멈추는 데서 시작됩니다. 참된 묵상이란 마음의 평온을 구하는 한가로운 취미가 아닙니다. 그것은 현실만을 응시하던 눈을 들어 두 세계를 동시에 읽는 행위이며, 무엇보다 우리 정체성이 세상의 통제권 너머에 있음을 확인하는 거룩한 저항입니다. 바로의 창고 앞에 무릎을 꿇은 백성들에게 그 누구도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오직 생존의 언어만을 들었고, 그 언어가 그들의 세계 전부가 되어버렸습니다. 묵상은 그 압도적인 목소리 한가운데서 "너는 내 사랑하는 자녀다"라고 속삭이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행위입니다. 토마스 머튼은 고요함이란 단순히 소리의 부재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깊은 중심으로 내려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중심에서 우리는 비로소 제국이 붙여놓은 가격표 아래 감추어진 본래의 얼굴을 다시 만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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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얼굴이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생존을 미끼로 자유를 빼앗는 제국의 군주가 아니십니다. 우리가 아무것도 내어놓을 수 없는 텅 빈 파산의 자리에 이르렀을 때, 당신의 하나뿐인 아들의 생명을 대가로 내어주시며 우리에게 참된 자유를 거저 주시는 분이십니다. 에리히 프롬이 경고했듯, 존재의 고귀함을 포기하고 소유를 위해 권력의 노예가 되는 것은 인간 실존 최고의 비극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 비극의 한복판에서 울려 퍼지는 전혀 다른 선언입니다. 세상이 우리의 쓸모를 계산하고 가격을 매길 때, 하나님은 이미 우리 영혼 깊은 곳에 당신의 형상이라는 지워지지 않는 낙관을 새겨두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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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고단한 신앙 여정은 몸에 새겨진 상품의 바코드를 지우고 장인의 낙관을 회복하는 과정과 같습니다. 거대한 제국은 우리 영혼에 끝없이 바코드를 찍어대며 효용 가치에 따라 서늘한 가격을 매깁니다. 쓸모가 없어지면 언제든 폐기될 상품이라고 위협합니다. 그러나 창조주 하나님은 우리를 시장의 상품으로 빚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두려움 속에서 스스로의 가격을 증명하려는 헛된 수고를 멈추고 고요히 십자가 앞에 머물 때, 얄팍한 세속의 바코드는 은혜의 보혈로 말끔히 지워지고, 우리는 마침내 제국의 시장에서 거래될 수 없는 가장 눈부시고 고귀한 하늘의 명작으로 다시 태어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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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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