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45:1-15 울음이 터뜨린 강물

by 평화의길벗 posted May 20,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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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45:1-15 울음이 터뜨린 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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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를 은총으로 번역해 내는 것, 그것이 묵상이고 신앙입니다.

참된 신앙이란, 나를 벼랑 끝으로 내몰았던 타인의 폭력(수평적 파괴) 앞에서도 복수의 칼을 내려놓고, ‘말씀을 내 일상의 언어와 환대의 행동으로 번역해 내는(묵상)’ 수고를 통해, 우리의 찢기고 얽힌 삶의 파편조차 기어코 구원의 역사로 엮어내시는 하나님의 광대한 섭리에 온전히 안기는 은혜의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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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내 생의 가장 깊은 절망을 만들어낸 가해자와 다시 마주 섰을 때, 우리는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 수 있을까요? 온 대지가 눈부신 초록의 생명력을 뿜어내는 이 아름다운 날에도, 내면의 깊은 흉터와 응어리진 원망 때문에 차마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해 남몰래 밤잠을 설치시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척박한 현실의 무게에 짓눌려 신앙의 여정에서 짙은 회의를 느끼고 서성이는 모든 분의 심령에, 우리의 아픔을 기어코 희망으로 빚어내시는 하나님의 다사로운 평화가 스며들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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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곁에 서 있던 이집트 신하들을 모두 물리치고, 형제들만 남겨진 그 방에서 그는 마침내 목 놓아 울었습니다. 방성대곡(放聲大哭)이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소리를 놓아 크게 울었다는 뜻입니다. 그 울음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이집트 왕궁에까지 들렸다고 합니다. 20년이 넘는 세월을 가슴 깊이 묻어 두었던 무언가가, 유다의 처절한 대속의 외침을 들으며 마침내 터져 나온 것입니다. 우리는 그 울음 앞에서 잠시 멈추어야 합니다. 그것이 분노의 울음이었는지, 슬픔의 울음이었는지, 아니면 오래 참아온 사랑이 마침내 터져 나온 울음이었는지, 성경은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울음 이후에 요셉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이, 모든 것을 말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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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들은 떨고 있었습니다. 동생이 밝힌 자신의 정체 앞에서, 자신들이 20여 년 전 저질렀던 일이 고스란히 되살아났을 것입니다. 차가운 구덩이에 던졌던 그 형제가, 지금 이집트의 총리 자리에 앉아 자신들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었습니다. 복수의 순간이 왔다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요셉은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그 말은 형들의 죄를 지워버리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요셉은 분명히 "당신들이 나를 팔았다"고 말합니다. 사실을 덮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사실에 갇히지도 않았습니다. 그 상처 너머에서 무언가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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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는 세상은 받은 상처는 반드시 갚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내가 당한 억울함에 상응하는 대가를 받아내야만 비로소 내가 온전해진다고 속삭입니다. 그 목소리는 때로 너무 자연스러워서, 복수를 정의라고 착각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요셉 역시 그 목소리를 들었을 것입니다. 오랜 노예 생활, 보디발의 아내로 인한 억울한 옥살이, 술 맡은 관원장의 망각. 그 긴 세월 동안 그의 마음속에 한 번도 복수의 감정이 스치지 않았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감정의 끝에서 다른 것을 붙들었습니다. 형들의 악행 너머에서 일하고 계신 하나님의 손길을 보는 눈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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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나를 먼저 보내셨다는 요셉의 고백은, 고통의 역사를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다시 읽어낸 결과입니다. 그것은 쉽게 얻어지는 시선이 아닙니다. 자끄 엘륄은 그리스도인이 세상이 제시하는 선택지들이 때로 선과 악이 아니라 악과 또 다른 악일 수 있음을 직면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 악을 통해서조차 사람을 인도하신다고 했습니다. 요셉의 이야기가 바로 그것입니다. 형들의 악의와 이기심이라는 어두운 실이 하나님의 손 안에서, 온 가족을 살리는 구원의 서사로 엮여 들어갔습니다. 요셉은 그것을 알았고, 그래서 울면서도 용서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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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학자 김현경은 사람이 된다는 것은 사회 안에 자신의 자리를 갖는 것이며, 환대란 타자에게 그 자리를 내어주는 행위라고 말했습니다. 형들은 20여 년 전 요셉의 삶의 자리를 빼앗아 구덩이에 던졌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기근에 허덕이는 형들에게 기름진 고센 땅을 내어줍니다. 자리를 빼앗겼던 사람이 자리를 내어주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 반전의 자리에, 참된 환대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환대가 끊어진 형제들 사이에 다시 관계를 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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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요셉처럼 상처를 이렇게 번역해 낼 수 있을까요. 그것이 묵상입니다. 묵상은 조용한 방에서 성경 구절을 외우고 마음의 평안을 얻는 종교적 습관이 아닙니다. 토레이(R. A. Torrey)는 가장 위대한 성경 번역은 내 삶을 통한 번역이라고 말했습니다. 묵상은 하나님의 말씀을 나의 구체적인 오늘 속에서 살과 피를 가진 언어와 행동으로 번역해 내는 일입니다. 요셉이 자신의 고통스러운 과거를 하나님의 섭리로 번역해 냈듯, 우리 역시 우리를 넘어뜨린 상처와 부조리 앞에서 말씀을 묵상함으로, 그것을 환대와 긍휼의 이야기로 번역해 내야 합니다. 그것은 억지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말씀 앞에 오래 앉아 있어야 합니다. 그 말씀이 내 안의 단단한 것을 조금씩 녹여 갈 때까지, 머물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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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틀 앞에 앉은 직조공의 눈에는 뒤엉킨 실타래밖에 보이지 않는 순간이 있습니다. 억울함이라는 짙고 검은 실, 배신이라는 거친 실, 기다림이라는 색 바랜 실. 그것을 당장 끊어버리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그러나 위대한 직조공이신 하나님은 그 어두운 실 하나도 버리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복수심의 가위를 내려놓고 주님의 손에 삶을 맡길 때, 그 어두운 실들은 찬란한 은총의 실과 교차하며 엮여, 우리가 상상하지 못했던 생명의 무늬를 만들어 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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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지금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해 밤잠을 설치고 계십니까. 아니면 상처 준 이에게 복수의 날을 벼리며 그 분노가 내 안에서 나를 갉아먹고 있지는 않습니까. 요셉의 울음 앞에 잠시 멈추어 앉아 보십시오. 그 울음이 열어낸 강물 속으로 걸어 들어가 보십시오. 상처를 은총으로 번역해 내시는 하나님이, 오늘도 우리 곁에서 그 일을 멈추지 않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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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상처 많고 고단한 신앙 여정은 수많은 색깔의 실로 거대한 그림을 직조해 내는 '태피스트리(Tapestry)'를 짜는 일과 같습니다. 베틀 앞에 앉아 있는 우리의 눈에는 내 인생의 무늬가 온통 뒤엉킨 실타래처럼 보입니다. 특히 억울함과 배신, 뼈아픈 상처라는 짙고 검은 실(형들의 폭력과 요셉의 고난)이 엮여 들어갈 때, 우리는 그 거친 실을 당장 가위로 끊어버리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위대한 직조공이신 하나님은 그 어두운 실조차 결코 헛되이 버리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섣부른 복수심의 가위를 내려놓고 주님의 손길에 우리 삶을 온전히 내어 맡길 때(말씀을 구원의 서사로 번역해 내는 묵상), 마침내 그 어둡고 거친 실들은 밝고 찬란한 은총의 실과 기묘하게 교차하며 엮이어, 우리의 좁은 시야로는 도무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가장 장엄하고 눈부신 용서와 생명의 명작으로 온 세상을 따뜻하게 덮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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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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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에서 보기

https://youtu.be/CwVC2AEC6w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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