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44:18-34 희생양 메커니즘을 끊어내는 대속의 십자가: "나를 대신하여 종이 되게 하소서"

by 평화의길벗 posted May 20,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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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44:18-34 희생양 메커니즘을 끊어내는 대속의 십자가: "나를 대신하여 종이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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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냐민의 자루에서 은잔이 발견되어 베냐민만 노예로 남고 나머지는 평안히 돌아가라는 요셉의 잔혹한 선고(44:17) 앞에, 넷째 아들 유다가 요셉에게 가까이 다가가 목숨을 건 변론을 시작합니다(18절). 유다는 지난번 요셉과의 대화 과정을 상세히 회상하며, 아버지가 노년에 얻은 아들을 얼마나 깊이 사랑하는지, 그리고 그 아이의 형은 죽고 그 어머니가 남긴 것은 그 아이뿐임을 정직하게 고백합니다(19-23절). 이어 유다는 베냐민을 데려가야만 한다는 총리의 엄명 앞에 아버지가 토해냈던 절망("내 아내는 두 아들을 낳았으나 하나는 찢겨 죽었고 이 아이마저 재해를 당하면 나는 스올로 내려갈 것이다")을 가감 없이 전달합니다(24-29절). 유다는 "아버지의 생명과 아이의 생명이 서로 하나로 묶여 있거늘" 아이가 없이 돌아가면 아버지가 슬픔 속에 죽게 될 것이라며, 자신이 아버지에게 아이를 담보했던 사실을 밝힙니다(30-32절). 마침내 유다는 "주의 종으로 그 아이를 대신하여 머물러 있어 내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그 아이는 그의 형제들과 함께 올려 보내소서"라며 자신을 대속 제물로 내놓습니다(33-3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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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문화적 배경 : 고대 근동 사회에서 한 사람의 죄값을 다른 사람이 대신 치르는 '대속적 노예형'은 흔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더욱이 절대 권력을 가진 애굽의 총리 앞에서 일개 이방인이 판결을 뒤집어 달라고 나서며 장광설을 늘어놓는 것은 자칫 목숨을 잃을 수 있는 불경죄에 해당했습니다. 유다가 "주께서는 바로와 같으심이니이다"라고 극존칭을 쓰면서도 물러서지 않은 것은 자신의 생명을 온전히 내어던진 결단이었습니다.

# 신학적·인문학적 배경 : 가인은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창 4:9)라며 형제의 책임을 부인했습니다. 이는 인류 역사에 흐르는 수평적 폭력의 기원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본문을 통해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다. 내가 대신 종이 되겠습니다"라고 선언함으로써 가인의 후예들이 만들어온 '희생양 메커니즘(다수의 평안을 위해 약자 하나를 희생시키는 방식)'을 완전히 끊어냅니다. 이는 장차 유다 지파를 통해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Atonement)을 가장 완벽하게 보여주는 구약의 예표입니다.

# 송민원의 '수평적 읽기' 관점 : 본문은 야곱 가정의 지독한 역기능적 현실, 즉 라헬의 소생(요셉, 베냐민)만을 진정한 아들로 취급하는 야곱의 잔인한 '편애'를 유다가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끌어안는 내면의 성숙을 보여줍니다. 과거 이 편애는 형제들의 살기 어린 질투를 낳았으나(요셉을 팖), 이제 유다는 그 불공평한 아버지의 사랑조차 긍휼히 여기며,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아버지의 편애 대상인 동생(베냐민)을 대신하여 기꺼이 십자가를 집어 듭니다. 이것이야말로 율법적 정죄를 넘어선 진정한 화해와 샬롬의 성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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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23절 권력 앞의 직면과 피할 수 없는 진실 : 도망치지 않고 가까이 나아가는 용기

하나님은 세상의 유혹과 절대 권력 앞에서도 진실을 향해 한 걸음 더 가까이 나아가는 자에게 구원의 지혜를 베푸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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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은 "너희는 평안히(샬롬) 돌아가라"며 베냐민만 노예로 남기는 선고를 내립니다. 그 선고 앞에서 유다는 두려움으로 뒤로 물러서는 대신 요셉에게 '가까이 가서(와이가쉬 일라우)' 변론을 시작합니다. 그는 총리 앞에서 자신들의 가족사, 곧 아버지의 지독한 편애와 라헬 소생만을 진정한 아들로 여기는 상처 입은 가정의 진실을 낱낱이 꺼내어 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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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가쉬 일라우'라는 히브리어 표현은 단순한 물리적 이동이 아닙니다. 구약에서 이 동사(나가쉬)는 종종 생명을 건 결단의 순간, 제사장이 하나님의 임재 앞에 나아가는 거룩한 접근을 묘사할 때 사용됩니다. 유다는 바로와 같은 절대 권력자의 코앞으로 나아가는 이 한 걸음이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는 행위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불경죄로 처형될 수 있는 상황에서 그 한 걸음을 내딛었다는 것은, 이미 유다의 내면에 죽음의 두려움을 이긴 무언가가 자리 잡고 있었음을 뜻합니다. 그것은 바로 '아우에 대한 책임'과 '아버지에 대한 긍휼'이었습니다.

요셉이 제안한 거짓 샬롬은 달콤했습니다. "베냐민 하나만 버리면 나머지 열 명은 산다." 이것이 세상이 늘 제시하는 해법입니다. 가장 약한 자 하나를 제물로 던지고 나머지는 제 살 길을 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그 달콤하고 합리적인 유혹을 단칼에 거절하고 진실의 한복판으로 걸어 들어갑니다. "그의 형은 죽고 그의 어머니가 남긴 것은 그뿐이므로 그의 아버지가 그를 사랑하나이다"(20절). 이 고백은 야곱 가정에 억눌려 있던 뼈아픈 진실, 곧 편애의 역사를 있는 그대로 시인한 것입니다. 과거에는 이 진실이 너무 고통스러워 동생을 구덩이에 던지고 아버지를 속이는 방식으로 회피했지만, 이제 유다는 그 거짓의 장막을 스스로 찢고 고통스러운 진실 앞에 정직하게 섭니다. 부끄러운 진실을 은폐하는 자에게는 화해가 없습니다. 진실을 향해 '가까이 나아가는' 자에게만 하나님이 여시는 문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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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의 가정과 공동체에 위기가 닥칠 때, 우리는 어느 방향으로 걸어갑니까? "나만 아니면 돼"라는 생각으로 가장 연약한 지체를 희생양으로 남겨두고 도망친 적은 없었습니까? 직면하기 껄끄러운 진실을 종교적 언어로 덮어두고 거짓 평안을 누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유다처럼 두렵더라도 진실을 향해 가까이 나아가십시오. 그 한 걸음이 비록 내 치부를 드러내고 나의 과거를 부끄럽게 할지라도, 성령 하나님은 바로 그 자리에서 막혔던 화해의 문을 열어 주십니다.

하나님은 도망치는 자가 아니라 가까이 나아가는 자에게 구원의 지혜를 주십니다. 거짓 샬롬을 거절하고, 진실을 향해 한 걸음 더 내딛는 것이 대속의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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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29절 편애의 상처를 끌어안는 성숙함 : 상처 입힌 자의 연약함마저 긍휼로 품어내다

하나님은 우리가 받은 억울한 상처와 편애의 고통에 매몰되어 타인을 미워하기보다, 도리어 우리에게 상처 준 자의 연약함까지 끌어안는 성숙의 자리로 우리를 부르시는 치유자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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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는 아버지 야곱의 말을 총리에게 가감 없이 전합니다. "내 아내가 내게 두 아들을 낳았으나 하나는 내게서 나갔으므로 내가 말하기를 틀림없이 찢겨 죽었다 하고 내가 지금까지 그를 보지 못하거니와 너희가 이 아이도 내게서 데려가다가 재해가 그 몸에 미치면 나의 흰머리를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게 하리라 하니이다." 유다는 그 말을 분노 없이 담담하게 총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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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의 이 고백은 사실 그 자리에 서 있던 열 명의 아들들을 향한 언어폭력이었습니다. "내 진정한 아내는 라헬뿐이고, 진정한 아들은 요셉과 베냐민뿐"이라는 이 편애의 선언은 레아와 여종들의 소생인 열 형제에게 "너희는 내 진짜 자식이 아니다"라는 선고와 다름없었습니다. 그 말을 들었을 형제들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20년 전의 유다였다면 이 말은 살기 어린 질투의 불꽃을 일으켰을 것입니다. 요셉을 팔게 만든 것도 결국 이 편애가 누적된 폭발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유다는 다릅니다. 그는 아버지의 그 모욕적인 말을 분노 없이 담담하게 총리 앞에 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히브리어 동사 '아하브(사랑하다)'의 쓰임을 보면, 야곱이 베냐민을 사랑한다(아하브)는 표현은 이전에 요셉을 향해 쓰였던 바로 그 표현입니다(창 37:3). 유다는 그 동일한 편애의 언어가 다시 반복되고 있음을 알면서도 아버지의 그 깊은 트라우마, 곧 라헬을 잃고 요셉을 잃었다고 믿는 상실의 고통을 바라봅니다. 상처받은 자로서 억울함에 매몰되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잃은 늙은 아버지의 그 나약하고 처절한 인간적 연약함을 긍휼히 여기며 끌어안는 내면의 변화가 유다 안에서 완성된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 은혜의 열매입니다. 율법은 "저 사람이 잘못했다"고 정죄하지만, 은혜는 "저 사람도 오죽하면 저럴까"라고 품어냅니다. 상처 입힌 자의 연약함마저 보듬어내는 이 성숙함은 인간의 의지로 닦아내는 도덕이 아닙니다. 오직 내가 먼저 값없이 용납받았다는 복음의 경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은혜의 강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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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가정 안에는 부모의 편애, 형제간의 비교, 공동체 안의 불공평한 대우로 인해 생긴 깊은 상처들이 있습니다. 그 상처가 진짜임을 압니다. 억울함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억울함에 갇혀 평생 상처 준 자를 원망하며 마음의 지옥을 사는 것이 우리의 부르심은 아닙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경험한 자는 유다처럼 변화됩니다. 나를 아프게 했던 이들의 노골적인 연약함마저도 "오죽하면 저러셨을까"라는 그리스도의 긍휼로 품어내는 성숙함으로 나아가십시오. 그 자리에서 비로소 오랫동안 묶여 있던 상처의 사슬이 끊어지고 진정한 자유가 찾아옵니다.

십자가의 은혜는 내가 받은 상처보다 크고, 나를 아프게 한 자의 연약함마저 품어낼 만큼 깊습니다. 편애의 고통에 갇혀 분노로 살아가는 대신, 그리스도의 긍휼로 상처 준 자를 끌어안는 성숙함이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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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32절 생명이 결탁된 언약적 공동체의 발견 : 형제의 죽음이 곧 나의 죽음이다

하나님은 나 홀로의 평안을 추구하는 이기주의를 깨뜨리시고, 형제의 고통이 곧 내 고통이며 형제의 생명이 곧 내 생명임을 깨달아 생명으로 깊이 결탁된 언약 공동체를 이루게 하시는 생명의 주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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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는 총리에게 결론을 향한 호소를 이어갑니다. "아버지의 생명과 아이의 생명이 서로 하나로 묶여 있거늘(bound up in the lad's life) 아버지가 아이의 없음을 보면 죽으리니... 종들이 아버지의 흰머리를 슬픔 가운데 스올로 내려가게 함이니이다." 그는 아버지에게 아이를 담보(보증)했음을 밝히며, 아이 없이는 자신이 아버지 앞에 돌아갈 수 없다고 고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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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생명과 아이의 생명이 하나로 묶여 있거늘." 히브리어 원문은 '나프쇼 케슈라 베나프쇼', 곧 "그의 영혼(네페쉬)이 아이의 영혼에 단단히 매여 있다"는 뜻입니다. '케슈라(묶여 있다)'는 동사는 언약의 밧줄처럼 단단하게 결박된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것은 단순한 감정적 애착을 넘어, 두 생명이 영적으로 하나의 운명 안에 묶여 있다는 언약적 고백입니다.

과거의 형제들은 철저히 파편화된 개인들이었습니다. 요셉이 구덩이 속에서 살려달라고 울부짖을 때, 아버지가 피 묻은 채색옷을 안고 통곡할 때에도 그들은 그 옆에서 태연히 밥을 먹었습니다(창 37:25). 타인의 고통은 자신의 고통이 아니었습니다. 형제는 이익이 되면 동맹이 되고, 방해가 되면 제거하는 대상에 불과했습니다. 이것이 가인 이래로 인류 역사에 반복되어온 수평적 파탄의 본질입니다.

그러나 이제 유다는 그 파편화의 장벽을 완전히 허물었습니다. "베냐민이 노예로 끌려가면 베냐민 하나만 죽는 것이 아니다. 베냐민의 고통은 아버지의 심장을 멎게 할 것이고, 아버지를 스올로 밀어 넣는 죄의 짐을 우리 형제들이 평생 짊어지게 될 것이다." 이것이 언약 공동체의 본질입니다. 한 지체가 아프면 온몸이 아프고(고전 12:26), 한 지체의 죽음이 공동체 전체의 죽음으로 이어진다는 이 생명의 유기적 연대성을 유다가 깨달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이 그로 하여금 자신을 영원한 '아라브(담보, 보증인)'로 내걸게 만들었습니다. 담보는 상대가 약속을 이행하지 못할 때 자신의 목숨으로 그 빚을 갚겠다는 생명을 건 언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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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는 파편화된 개인주의의 시대를 살아갑니다. 내게 이익이 되지 않으면 가차없이 잘라내는 각자도생의 시대, 교회 안에서조차 연약한 지체가 고통받을 때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며 무관심하게 선을 그을 때가 없었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생명으로 묶인 언약 공동체입니다. 교회학교 한 아이가 방황할 때, 구역의 지체가 질병과 경제적 위기 앞에 무너져갈 때, 그것을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하지 마십시오. "저 사람의 죽음이 곧 나의 죽음입니다"라고 고백하며 내가 담보가 되겠다고 나서는 거룩한 연대의 영성이 이 시대 세상을 살릴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는 한 지체의 고통이 곧 모든 지체의 고통인 생명의 공동체입니다. 각자도생의 이기주의를 버리고, 형제의 생명을 위해 내가 담보가 되겠다는 언약적 결단이 세상이 줄 수 없는 화해와 샬롬을 만들어 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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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3-34절 폭력의 고리를 끊는 대속(Substitution)의 십자가 : "나를 대신하여 종이 되게 하소서"

하나님은 약자를 희생양 삼아 얻어내는 세상의 값싼 평화를 거부하고, 내가 형제를 대신하여 십자가의 짐을 질 때 비로소 진정한 구원과 화해를 이루어 내시는 구속의 주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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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유다는 자신의 생명을 던지는 최후의 청원을 올립니다. "이제 주의 종으로 그 아이를 대신하여 머물러 있어 내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그 아이는 그의 형제들과 함께 올려 보내소서 그 아이가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내가 어찌 내 아버지에게로 올라갈 수 있으리이까 두렵건대 재해가 내 아버지에게 미침을 보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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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전체 서사, 아니 구약 성경 전체를 통틀어 가장 눈부신 클라이맥스가 여기 있습니다. 유다는 "나를 대신하여(히브리어: 타하트) 종이 되게 하시고 아이를 보내주소서"라고 선언합니다. '타하트'는 단순한 교환이 아니라 누군가의 자리에 내가 들어가는 완전한 대체(Substitution)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성경 신학에서 대속의 언어입니다.

20년 전 창세기 37장에서 유다는 "우리가 우리 아우를 죽이고 그의 피를 덮어둔들 무엇이 유익할까 그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자"라고 제안했습니다. 인간의 생명을 은 20세겔의 자본으로 환산했던 그 차가운 계산, 가장 약한 자를 희생양으로 던져 자신들의 이익과 안전을 확보하려 했던 그 폭력의 주동자가 바로 유다였습니다. 희생양 메커니즘의 화신이었던 자입니다.

그런데 지금 유다는 그 폭력의 고리를 정확히 반대 방향에서 끊어냅니다. 약자를 희생양으로 내모는 대신, 자신이 기꺼이 희생양의 자리로 걸어 들어갑니다. 팔았던 자가 이제 대신 팔립니다. 생명을 자본으로 계산했던 자가 이제 자신의 생명을 자본 없이 내어줍니다. 이것이 대속입니다. 가인이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며 형제에 대한 책임을 부인했을 때 시작된 인류의 수평적 폭력이, 유다가 "내가 아우를 대신하여 종이 되겠습니다"라고 선언하는 순간 역전됩니다. 죄의 반복을 끊어내는 이 반전의 순간이야말로,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수직적 섭리가 인간의 가장 추악한 수평적 파탄을 뚫고 마침내 이루어낸 구속사의 열매입니다.

그리고 그 위로 장엄하게 포개어지는 그림자가 있습니다. 유다 지파의 사자로 오셔서 죄인인 우리를 '대신하여(타하트)' 십자가에서 스스로 희생양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야말로 유다가 이 본문에서 예표한 영원한 대속자(Goel)이십니다. 그 십자가 대속의 사랑만이 인류의 모든 상처와 폭력과 원수 됨을 근원에서부터 치유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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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끊임없이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삼아 문제를 해결하려 합니다. 직장에서는 실적이 떨어지면 약한 자에게 책임을 뒤집어씌우고, 공동체 안에서는 갈등이 생기면 특정 사람을 몰아붙여 그 사람이 떠나면 평화가 온다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정반대의 길을 제시합니다. 진정한 샬롬은 남을 짓밟고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 사람을 대신하여 책임을 뒤집어쓰고 종이 될 때 완성됩니다. 가정 안에서, 직장에서, 교회 공동체 안에서 갈등이 일어날 때 책임을 전가하려는 비겁한 유혹과 싸우십시오. 십자가의 복음을 아는 우리는 "저 사람이 문제입니다!"라고 손가락질하는 자가 아니라, "저 사람을 살려 주시고, 부족한 나를 대신 종이 되게 하소서"라고 엎드리는 자입니다. 이 철저한 낮아짐과 대속의 결단이 있는 곳에, 요셉의 오열이 터지고 하늘의 화해가 임하는 놀라운 부활의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십자가의 대속은 교리가 아니라 삶입니다. "나를 대신하여 종이 되게 하소서"라는 유다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될 때, 세상이 만들어내는 희생양의 폭력은 끊어지고 진정한 화해와 샬롬이 이 땅에 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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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우리의 이기적인 계산과 굳은 양심을 산산이 부수어, 

기어이 생명을 살리는 대속의 자리로 이끄시는 은혜롭고 공의로우신 하나님 아버지.

과거에는 자신의 유익과 평안을 위해 동생을 팔아넘겼던 유다가, 

"나를 대신하여 종이 되게 하소서"라며 목숨을 던져 베냐민을 살려내는 

위대한 대속자로 변화된 이 기적 같은 현장 앞에 

저희의 부끄러운 영혼을 비추어 봅니다. 

주님, 저희는 위기와 두려움이 닥칠 때마다 

내 알량한 기득권과 평안을 지키기 위해, 

연약한 지체들을 탓하고 희생양 삼으려 했던 

이기적이고 악독한 가인의 후예들이었음을 

십자가 앞에 회개하오니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상처받은 마음을 핑계로 다른 이를 찌르며 살았던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의 형은 죽고 그만 남았다"는 아버지의 그 지독하고 모욕적인 편애조차도 

긍휼로 끌어안았던 유다의 성숙함이 오늘 우리의 것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 광양사랑의교회 공동체 안에 서로의 연약함과 억울한 상처를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으로 용납하며, 

내 생명이 형제의 생명과 치밀하게 묶여 있는 운명 공동체임을 

깊이 깨닫는 영적 각성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비겁하게 타협하려는 세상의 거짓된 샬롬을 단호히 걷어차게 하옵소서. 

책임을 전가하는 손가락질을 멈추고, 

"내가 지키는 자입니다. 나를 대신 종이 되게 하소서!"라며 

기꺼이 가정과 교회의 십자가를 짊어지는 

예수의 사람, 참된 대속의 삶을 살아가게 하옵소서. 

우리의 희생과 낮아짐을 통하여 막혔던 담이 허물어지고 

죽었던 영혼이 살아나는 하늘의 화해를 이 땅에 빚어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영원한 담보가 되시어 십자가에서 친히 당신의 생명을 내어주심으로 

우리를 영벌에서 건져 내신 유일한 대속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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