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44:01-17 은잔이 폭로한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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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거벗겨진 허물 앞에서 변명을 멈출 때,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생존의 중력 너머 화해의 하늘로 들어 올리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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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그친 뒤 맑게 갠 하늘은 경이롭지만, 동시에 빗물에 쓸려 내려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맨흙의 바닥은 어쩐지 우리의 감추고 싶은 민낯을 보는 듯해 서늘한 위기감마저 안겨줍니다. 내가 겹겹이 두르고 있던 방어막이 한순간에 씻겨 내려갈 때의 그 당혹스러운 현실 앞에서도, 십자가의 진리를 나침반 삼아 묵묵히 일상을 견뎌내시는 광양사랑의교회 성도 여러분, 그리고 내 안의 모순과 회의감 속에서 길을 찾고 계신 모든 분의 영혼에 우리를 끝내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맹렬한 은총이 스며들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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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냐민의 자루에서 은잔이 쏟아지던 순간을 상상해 봅니다. 아무것도 훔치지 않았다고 확신하며 길을 나섰던 형제들이 청지기의 명령에 멈춰 서고, 각자의 자루를 열어 보입니다. 큰형부터 막내까지 차례로 수색이 진행되는 그 긴 침묵 속에서, 형제들의 심장은 어떤 박자로 뛰었을까요. 그리고 마침내 베냐민의 자루에서 번쩍이는 은잔이 나왔을 때, 형제들이 보인 첫 번째 반응은 변명도 항변도 아니었습니다. 성경은 담담하게 기록합니다. "그들이 옷을 찢고 각기 짐을 나귀에 싣고 성으로 돌아갔습니다." 무언가를 알아버린 사람들의 몸짓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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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장면이 품고 있는 질문은 하나입니다. 그들이 찢은 것은 정말 옷이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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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무언가를 은폐합니다. 오래전에 누군가에게 저질렀던 폭력, 나만 살겠다고 타인을 밀어냈던 비겁한 선택, 정당한 몫을 가로채고도 끝내 사과하지 않았던 침묵. 그것들은 흙 속에 묻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아무 데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형제들이 이십 년 전 요셉을 구덩이에 던지고 상인들에게 팔아넘겼을 때, 그들은 아버지에게 피 묻은 채색 옷을 내밀며 짐승이 잡아먹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날부터 그들은 이중으로 살아야 했습니다. 겉으로 살아가는 삶과, 속에서 곪아가는 삶을 동시에 껴안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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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그 이중성을 미덕으로 포장하기도 합니다. 살아남은 자가 승자라고, 냉정하게 판단한 것이라고, 어쩔 수 없었다고. 그 속삭임은 너무도 그럴듯해서, 우리는 어느 순간 스스로도 그 말을 믿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진실은 몸이 기억합니다. 자루에서 은잔이 나오는 순간, 이십 년 전의 그 장면이 되살아났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종들의 죄악을 찾아내셨다"는 유다의 고백은 절도 혐의에 대한 항복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훨씬 더 오래되고 훨씬 더 무거운 것에 대한 고백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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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철학자 시몬 베유는 인간을 바닥으로 끌어내리는 힘을 '중력'이라 불렀습니다. 탐욕, 두려움, 자기보존의 본능. 그 중력을 이길 유일한 것은 위에서 주어지는 '은총'뿐이라고 그는 말했습니다. 형제들이 베냐민을 그 자리에 두고 혼자 살아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십 년 전처럼. 그런데 그들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모두 함께 돌아갔습니다. 그 돌아섬은 단순한 도덕적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이십 년의 고통과 죄책감을 통과한 뒤에야 비로소 가능해진, 사람이 사람으로 돌아오는 사건이었습니다. 그것을 움직인 것은 그들 안의 어떤 용기가 아니라, 그들 안에서 은밀하게 일하시던 하나님의 기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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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트리히 본회퍼는 묵상을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묵상은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듣는 것입니다. 이 듣기를 통해 의미를 찾는 것입니다." 이 말이 오래 마음에 남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종종 답을 찾으려 합니다. 내 상황에 맞는 구절, 내 결정을 정당화해 줄 말씀, 혹은 내 두려움을 달래줄 위로. 그러나 본회퍼가 말하는 듣기는 그런 종류가 아닙니다. 그것은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본문을 조율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지 않는 말씀 앞에서도 자리를 지키는 인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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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학자 김회권 교수는 묵상을 독수리의 비행에 비유합니다. 독수리는 자기 근육만으로 날지 않습니다. 대지 위로 솟아오르는 열기류를 찾아내고, 그 보이지 않는 공기 기둥에 날개를 맡깁니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그 기류가 독수리를 창공으로 들어 올립니다. 묵상이 그러합니다. 내 허물이 폭로된 부끄러운 자리에서 변명을 멈추고, 하나님의 음성을 인내심 있게 기다릴 때, 내 힘으로는 닿을 수 없었던 화해와 용서의 높이로 우리를 데려가는 은혜의 기류가 작동하기 시작합니다. 형제들이 성으로 돌아간 그 발걸음이 바로 그러한 묵상의 몸짓이었습니다. 더 이상 도망치지 않고, 벌거벗겨진 자신을 그대로 들고 나타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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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오래된 부끄러움을 가지고 계십니까. 누군가에게 저질렀지만 끝내 말하지 못한 것, 기회가 있었지만 외면해 버린 것. 그것이 아직도 자루 깊숙이 숨겨져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은 그 은잔을 찾아내시는 분이지만, 그것이 두려운 심판만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형제들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폭로된 자리가 오히려 화해가 시작된 자리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남루함을 아시면서도 포기하지 않으시는 분, 그 허물조차 당신의 은혜 안으로 끌어안으시는 분 앞에, 이제 조용히 나아가시기를 권합니다. 날갯짓을 멈추고, 그 분의 기류에 몸을 맡기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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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상처 많고 고단한 신앙 여정은 드넓은 바다를 건너는 무거운 새의 '활공(Gliding)과 열기류(Thermal Updraft)'와 같습니다. 새가 거대한 대양(생존의 위기와 죄책감)을 건널 때, 오직 자기 근육의 힘만으로 쉬지 않고 날갯짓을 하려 든다면(내 힘으로 생존하고 죄를 은폐하려는 이기심의 중력) 이내 지쳐 캄캄한 바다로 추락하고 말 것입니다. 바다를 건너는 유일한 방법은 내 힘을 빼고 눈에 보이지 않게 대지 위로 솟아오르는 뜨거운 공기 기둥, 곧 '열기류'를 찾아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끄러운 변명과 허둥대는 날갯짓을 멈추고 십자가 앞에 내 연약함을 고스란히 펼칠 때(사랑으로 듣고 의미를 찾는 묵상의 비상), 비로소 우리를 살려내시는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그 맹렬한 은총의 기류가 찢겨진 우리 영혼을 떠받쳐 올려, 내 힘으로는 도무지 닿을 수 없었던 가장 찬란하고 넉넉한 화해와 생명의 창공으로 우리를 평안하게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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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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