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41:37-57 므낫세의 강을 건너 에브라임의 들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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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을 복수의 연료로 삼지 않고 하나님의 손에 내어 맡길 때, 우리의 상처 입은 과거는 마침내 굶주린 이웃을 먹여 살리는 은혜의 양식으로 빚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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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이 두 아들의 이름을 짓는 장면을 천천히 들여다봅니다. 흉년이 오기 전, 총리의 자리에 오른 그가 각 성읍에 곡식 창고를 세우고 있을 그 무렵, 그의 품에는 갓 태어난 두 아이가 있었습니다. 장남의 이름은 므낫세, "하나님이 내 모든 고난을 잊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차남의 이름은 에브라임, "하나님이 내가 수고한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이름을 짓는 행위는 단순한 명명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를 결정하는 일입니다. 형들의 손에 팔려 구덩이에 던져지고, 이방 땅의 감옥에서 오랜 세월을 보낸 사람이, 그 모든 과거를 향해 어떤 이름을 붙이느냐에 따라 그의 남은 삶이 달라집니다. 요셉은 자신의 아들에게 이름을 붙이면서, 사실은 자신의 상처에 이름을 붙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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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자주 고통을 동력으로 삼는 삶을 목격합니다. 나를 짓밟은 사람 위에 서고야 말겠다는 결의, 다시는 지지 않겠다는 맹세가 어떤 사람을 높은 곳까지 밀어 올리기도 합니다. 세상은 그것을 종종 강함이라 부릅니다. 그러나 그렇게 쌓아 올린 자리에 도착했을 때, 그 사람의 손에 쥐어진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는 압니다. 기억입니다. 사라지지 않는, 뜨거운 기억입니다. 요셉이 총리의 자리에 오른 순간, 형들을 향한 복수는 얼마든지 가능했습니다. 그에게는 그럴 힘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므낫세라는 이름을 택했습니다. 잊어버렸다는 것, 정확히는 복수심의 독기가 하나님의 은총 안에서 힘을 잃었다는 선언입니다. 이 '잊음'은 망각이 아닙니다. 치유입니다. 상처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상처가 더 이상 나를 지배하지 못하게 된 자유입니다. 수직적 성공이 아니라 수평적 화해, 군림이 아니라 먹여 살림을 향한 결단이 므낫세라는 이름 안에 고요히 담겨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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므낫세를 건넌 자리에 에브라임이 있습니다. 요셉이 쌓아 올린 창고는 자신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풍년의 시간 동안 거두어들인 곡식을 각 성읍에 나누어 쌓아두었고, 흉년이 들었을 때 그 창고는 애굽 백성만이 아니라 "각국 백성"에게 열렸습니다. 피라미드로 상징되는 애굽 제국의 질서는 소수의 권력자를 위해 다수를 착취하는 폭력적 구조였습니다. 요셉은 그 구조 안에서 이인자의 자리를 얻었지만, 그 권력을 같은 방식으로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억압의 시스템을 환대의 창고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이것이 에브라임입니다. 번성이란 내 안의 것이 불어나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내 안에서 흘러나온 것이 굶주린 이웃의 입술을 적실 때, 비로소 번성이라는 이름을 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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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리까지 오기 위해 요셉에게 필요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구약학자 엘렌 데이비스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비법이 있다면 그것은 "책장을 천천히 넘기는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묵상이란 바로 그 일입니다. 상처의 페이지 앞에서 책장 넘기기를 멈추고, 그 고통을 통과하시는 하나님의 숨결이 내 존재 안으로 스며들기를 기다리는 시간입니다. 우리는 흔히 묵상을 고요한 시간을 내어 말씀을 읽고 무언가를 깨닫는 일로 여깁니다. 그러나 더 깊은 의미에서 묵상은, 내가 당한 억울함과 분노의 언어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언어를 받아들이는 항복의 연습입니다. 박대영 목사는 참된 창조는 존재의 창조가 아니라 가치의 창조이고 의미의 창조라고 했습니다. 빛과 생명과 샬롬을 창조하는 것, 그것이 묵상이 빚어내는 열매입니다. 묵상하는 사람은 내 고통의 의미를 새로 읽어내고, 그 읽어낸 의미 안에서 이웃을 향한 창고의 문을 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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짓이겨진 포도가 포도주가 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박완서 선생이 학창 시절 선생님께 들었다는 그 말처럼,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진 포도알이 향기로운 술이 되려면, 발효의 어둠 속에서 시간이 흘러야 합니다. 요셉의 구덩이가, 요셉의 감옥이 바로 그 어둠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으깨어진 시간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은총의 항아리에 담아 섭리의 시간으로 덮으셨고, 마침내 그것을 온 세상의 흉년을 견디게 하는 생명의 양식으로 내놓으셨습니다. 혹 지금 구덩이 안에 계십니까. 아니면 억울하게 당한 과거가 아직도 짙은 분노로 남아 있습니까. 내 창고만을 채워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두려움에 지쳐 계십니까. 그 모든 무게를 지금 당장 해결하려 하지 않아도 됩니다. 다만 천천히 책장을 넘기듯, 오늘 하루 말씀 앞에 조용히 앉아 계십시오. 므낫세를 지나 에브라임으로 가는 길은 그렇게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상처를 쓸모없는 것으로 두지 않으십니다. 기어코 그것을 누군가의 굶주림을 채우는 가장 깊은 양식으로 빚어내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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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길벗_라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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