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41:1-24 잊힌 알뿌리가 기억되는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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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오만이 무너지는 자리에서, 하나님은 가장 깊이 잊힌 자를 끌어올려 세상을 살리시는 자비의 저자이심을 우리는 묵상을 통해 비로소 읽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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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는 나일 강가에 서 있었다. 아름답고 살진 일곱 암소가 물속에서 올라와 갈밭에서 한가롭게 풀을 뜯는다. 그 풍경은 유장하고 충만하다. 나일의 풍요가 땅 위에 넘치는 듯, 제국은 영원할 것만 같다. 그러나 꿈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흉하고 파리한 일곱 암소가 강에서 올라오더니, 그 살진 암소들을 기어코 삼켜버린다. 충실하게 무성했던 일곱 이삭도 가늘고 마른 이삭에게 집어삼켜진다. 바로는 아침에 깨어 번민했다. 애굽의 모든 현인과 점술가를 불렀지만, 아무도 그 꿈을 해석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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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들은 침묵했을까. 그들은 분명 학식이 있었고, 꿈을 해석하는 기예를 갈고닦은 자들이었다. 그러나 제국의 언어로 훈련된 눈은 제국이 스스로 무너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처음부터 거부한다. 월터 브루그만이 예언자적 상상력에서 통찰했듯, 권력은 언제나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는 오만한 의식 위에 서 있다. 그 의식의 언어로는, 살진 것이 파리한 것에게 삼켜진다는 꿈의 서늘한 진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 애굽의 풍요는 나일강의 범람을 통제하고 수많은 사람의 노동을 착취하여 쌓아 올린 것이었다. 꿈속의 살진 암소는 바로 그 탐욕스러운 축적이었고, 그것을 삼킨 파리한 암소는 그 견고해 보이던 체제가 내부로부터 무너지는 파국의 징조였다. 제국의 지식인들은 그것을 읽을 눈이 없었다. 아니, 읽지 않으려 했다. 진실을 직면하는 일은 자신이 딛고 선 땅이 허물어지는 공포를 감당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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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공포의 순간에 잊혔던 이름 하나가 불려 나왔다. 술 맡은 관원장이 "내가 오늘 내 죄를 기억하나이다"라며 2년 전 감옥에서 만난 히브리 청년을 떠올렸다. 요셉이었다. 그는 형들에게 팔려 노예가 되었고,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던져졌다. 관원장이 풀려나던 날 요셉이 청했던 한 가지, 나를 기억해 달라는 그 간곡한 부탁은 차갑게 묵살되었다. 자끄 엘륄은 인간이 끊임없이 안전한 장소를 찾아 헤맨다고 했지만, 요셉에게는 안전한 장소 자체가 허락되지 않았다. 그는 세상이 잉여라고 선고한 자, 기억에서 지워진 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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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하나님은 그를 잊지 않으셨다. 인간의 기억이 철저히 파산한 자리에서, 하나님의 기억은 작동하고 있었다. 본회퍼가 세상이 버린 자들을 위해 존재하는 교회를 이야기했을 때, 그는 이 역설을 꿰뚫고 있었다. 세상의 힘이 붕괴의 공포에 떨 때, 하나님은 가장 낮은 곳에서 오랫동안 웅크리고 있던 사람을 불러올려 제국의 심장부로 보내신다. 요셉은 수염을 깎고 옷을 갈아입고 바로 앞에 섰다. 그의 해석의 능력은 제국의 현인들이 갈고닦은 기예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구덩이와 감옥 속에서 하나님과 깊이 씨름하며 빚어진 영혼의 눈에서 왔다. 고난이 그에게 제국이 가르쳐줄 수 없는 언어를 가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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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를 읽으며 우리는 무엇을 보는가. 함석헌의 씨알 사상은 역사의 주체가 권력자가 아니라 흙에 묻힌 씨알이라고 가르쳤다. 그 씨알은 짓밟히고 망각되지만, 그것이 죽지 않는 한 역사는 끝나지 않는다. 참된 묵상이란 바로 이 시선을 배우는 시간이다. 박대영은 묵상이란 저자이신 하나님의 시선으로 삶과 세상을 읽는 일이라 했다. 애굽의 현인들은 권력의 시선, 탐욕의 논리로 꿈을 해석하려 했기에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렉시오 디비나의 전통에서 말씀을 씹고 되새기는 것은 단순히 지식을 쌓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익숙하게 세상을 읽어온 방식, 나의 안전과 이익을 중심으로 돌아가던 그 읽기 방식을 내려놓고, 하나님이 보시는 방향으로 천천히 눈을 돌리는 연습이다. 헤시카즘의 고요함도 같은 자리를 가리킨다. 소음을 멈추고 내면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그 음성에 귀를 여는 것, 그 음성은 종종 망각된 자들의 이름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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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캄한 겨울 땅속에 묻힌 알뿌리를 생각해본다. 제국의 겨울은 그것이 끝났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알뿌리는 세상의 소음이 아니라, 다가오는 봄을 향해 운행하시는 그 시선에 조용히 자신을 맞추고 있다. 우리도 그런 시간이 필요하다. 더 많은 살진 암소를 움켜쥐어야 안전하다는 불안에서 잠시 손을 놓고, 구덩이와 감옥 속에서도 끝내 요셉을 기억하셨던 그 하나님의 시선 안에 자신을 가만히 내려놓는 시간 말이다. 그 침묵의 자리에서, 잊혔다 여겼던 우리의 남루한 일상이 사실은 하나님의 오래된 기억 속에 단 한 순간도 지워진 적 없었음을 조용히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 발견이 우리를 세상을 향해 넉넉하게 열린 사람으로 빚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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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길벗_라종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