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40:1-23 망각의 감옥에서 묻는 안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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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묵상이란, 세상의 망각이 드리운 감옥 속에서도 타자의 얼굴에서 슬픔을 읽어내고 다가가는 인격적 대화이며, 우리를 끝내 기억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한 자비에 온전히 기대는 은혜의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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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아침, 감옥 안에서 요셉은 두 사람의 얼굴을 바라봅니다.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 바로의 노여움을 사 하룻밤 사이에 권세의 자리에서 끌려 내려온 두 남자의 얼굴에는 깊고 어두운 근심의 그림자가 드리워 있었습니다. 요셉은 그 빛깔을 읽었습니다. 형들의 배신으로 노예가 되고, 억울한 누명으로 감옥에 던져진 그가, 자신의 상처보다 먼저 타인의 근심을 알아챘습니다. "어찌하여 오늘 당신들의 얼굴에 근심 빛이 있나이까"(창 40:7). 이 짧은 물음 하나가 에세이 전체를 여는 문입니다. 인간이 고통의 심연에 빠질 때 가장 먼저 잃어버리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타인의 얼굴을 볼 수 있는 눈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그 눈을 잃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이 본문이 우리에게 던지는 가장 근원적인 질문입니다. 도대체 어떤 힘이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 상처에 함몰되지 않고 타자의 얼굴 앞에 설 수 있게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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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틴 부버는 세계를 두 가지 방식의 관계로 읽었습니다. '나-그것(I-It)'의 세계와 '나-너(I-Thou)'의 세계가 그것입니다. 거대한 제국 애굽은 사람을 철저히 '그것'으로 취급하는 질서 위에 세워졌습니다. 바로에게 쓸모가 있으면 곁에 두고, 노여움을 사면 감옥에 던집니다. 인간이 인격이 아니라 기능으로 환산되는 세계입니다. 요셉 자신도 형들에게 팔린 노예였고, 보디발의 아내에게 도구처럼 이용되다 버려진 존재였습니다. 그 비인격의 폭력을 몸으로 겪어낸 사람이 감옥 안에서도 낯선 두 죄수를 '너'로 대면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친절이 아닙니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타자를 위한 존재(Dasein für andere)야말로 교회와 신앙인의 본질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존재 방식은 자기 보존의 논리를 거스르는 것이기에, 스스로의 힘만으로는 결코 유지될 수 없습니다. 요셉이 그 다정한 시선을 잃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자신의 상처보다 더 크신 분 안에 닻을 내리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상처가 자아를 집어삼키지 못하도록 붙들어주는 손, 그 손을 붙든 사람만이 고통 중에도 이웃의 얼굴을 읽어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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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은 꿈을 해석해 준 뒤 술 맡은 관원장에게 간청합니다. 나를 기억해 달라고, 이 집에서 나를 건져 달라고. 그러나 창세기 40장의 마지막 문장은 인류 역사상 가장 서늘한 문장 가운데 하나입니다.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지 못하고 그를 잊었더라"(창 40:23). 잊혔습니다. 내가 그의 가장 어두운 밤에 곁에 있어 주었고, 그의 꿈에 귀를 기울였으며, 그에게 희망을 건넸는데, 그는 햇빛이 드는 자리로 돌아가자마자 나를 망각했습니다. 자크 엘륄이 진단했듯, 기술과 효용으로 굴러가는 세상은 사람을 수단으로만 다룹니다. 필요할 때는 취하고, 필요가 사라지면 지웁니다. 이 비정한 질서 앞에서 신앙인은 어떻게 환멸에 빠지지 않을 수 있습니까. 함석헌은 씨알 사상을 통해 밟히고 짓밟혀도 결국 생명을 싹틔우는 민중의 힘을 말했지만, 그 힘의 근원은 인간의 내구성이 아니라 그 씨알을 끝내 기억하시는 분께 있었습니다. 요셉이 감옥에서 무너지지 않은 것은 그가 강해서가 아니라, 그를 잊지 않으신 하나님의 기억 안에 그의 존재가 새겨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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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묵상이 무엇인지를 이 본문은 조용히 가르쳐줍니다. 권연경은 묵상을 정의하되, 내가 원하는 위로와 지식을 얻어내기 위해 말씀을 '그것'으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내 앞에 인격으로 서 계신 '너'이신 하나님과 끊임없이 대화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렉시오 디비나의 전통이 가르치는 것도 이것입니다. 본문을 읽되 서두르지 않고, 한 단어가 내 안에서 울릴 때까지 기다리며, 그 울림 앞에 자신을 내어놓는 것. 동방 교회의 헤시카즘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내면의 고요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기다리는 침묵의 영성을 수련으로 삼았습니다. 요셉의 감옥은 바로 그 침묵의 공간이었는지 모릅니다. 세상이 그를 잊은 그 긴 시간 동안, 그는 하나님과의 대화를 이어갔고, 그 대화 안에서 타자의 얼굴을 읽는 눈을 잃지 않았습니다. 묵상은 내면의 독백이 아닙니다. 그것은 말씀이라는 낯선 '너'와 마주 앉아, 내 이기적 자아가 해체되고 이웃을 향한 눈이 열리는 변화의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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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신앙 여정은 두꺼운 책 갈피 사이에 꽂힌 책갈피를 닮았습니다. 세상은 우리를 다 읽고 지나간 페이지로 여기며 책장을 덮어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가장 억울하게 잊혀진 그 페이지 위에 당신의 언약의 손가락을 꽂아 두셨습니다. 사람의 기억이 우리를 배신하는 바로 그 자리에서, 주님의 기억은 시작됩니다. 혹시 지금 누군가에게 잊혀진 감옥 안에 있습니까. 내가 베푼 사랑이 헌신짝처럼 버려진 것 같아 마음 한 귀퉁이가 시린 분이 계십니까. 그 억울함을 세상을 향해 증명하려는 피곤한 갈망을 잠시 내려놓고, 오늘 당신 곁에 서 있는 누군가의 얼굴을 바라보시기를 권합니다. 근심 빛이 있지는 않은지, 아무도 묻지 않는 안부를 건네보시기를 권합니다. 그 다정한 물음 하나가, 망각의 감옥을 은총의 문지방으로 바꾸어 놓을 것입니다. 캄캄한 감옥 바닥까지 찾아오시어 우리를 기억하시는 그분을 믿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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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길벗_라종렬